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15화 (15/36)

15.

회색의 거대한 공간속에서 바닥에 어마어마하게 번져나간 푸른 핏물속에 검푸른 머리카락의 아시리안은 마치 잠겨있는 것처럼 엎어져있었다. 아시리안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나엘은 하얀 손가락으로 푸르스름하고 창백한 뺨을 쓰다듬었다.

"아시리안. 당신이 무시했던 그 벌레같은 인간들이 당신을 이꼴로 만들어놓았군요.. 궁금한데요.. 당신이 상처받은건...당신의 오만한 자존심이 다쳐서일까, 아니면... 그 인간을 지켜주지 못했기때문일까..."

아시리안에게 덤비려면 천년은 빠르다는 그의 말처럼 나엘과 아시리안의 힘은 비교자체가 될수없다. 실제로 아시리안이 아닌 자신이 저주받은 신관놈들이 마족을 구속시키려 만든 속박주술에 사로잡혔다면 아마 빠져나오는것 자체가 힘들었을거였다. 아시리안역시 하찮은 인간들이 파논 함정에 걸려 거미줄에 묶인 나비처럼 결국 이렇게 다치지 않았는가..

“...당신이 인간따위에게 마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리안....그래서 이렇게 된거예요.”

이세상의 주인인척 하는건 그들이 결코 자만하거나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인간들은 나약한대신 살아남을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각자 욕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힘을 합칠수 있을 정도로 교활하다는것을 나엘은 알고있었다..

"...아시리안.. 왜 항상 당신은 원해서는 안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꿈을 보고 싶으셨다면 같은 존재에게서 찾았으면 좋았잖아요. 서로 같은 곳을 보고.. 같은 것을 원하고.. 이해할수 있게.."

나엘은 슬픈 눈동자로 아시리안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핏물은 머지않아 다시 재생할것이고 그가 알고있는 아시리안은 틀림없이 다시 아나이스를 닮은 그 인간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다시 돌아가겠지.. 그로인해 어떤 상처를 입더라도......그러니....어쩌면 이것은 기회...당신에게도..나에게도...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어...

"쓸데없는 기억은 그만...잊으십시요.. 당신에게 필요없는 기억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속삭이듯 말하며 나엘이 아시리안에게로 점차 몸을 숙이더니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프란이 서둘러 나가고 얼마 지나지않아 끼이익- 감옥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프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속에서 누가 오는지 짐작하고 있었던 터인지 이제 아무래도 좋다라고 생각해서인지 감옥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펠릭스형님을 보는데도 정말 신기할만큼 아무렇지가 않았다.

하지만 내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펠릭스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얼굴을 보려는듯 턱아래로 손을 넣어오는 손을 넣어오자 나도 모르게 그 손에서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

“....아르휜”

나직하게 한숨쉬듯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몸이 굳는다.

“아직..나를 원망하는 거냐?”

원망이라고...? ........원망....이라고...............? 닫았던 감정의 물결이 출렁거린다. 아니, 아니야. 당신을 향한 감정은 결코 [원망] 따위가 아니야..

“언젠간 너도 내 결정을 이해하게 될거다.”

아시리안이 죽었어.. 당신 때문에 아시리안이 죽었어....그러니까...........

“용서...못해..........절대로..........용서....안해...”

세운 무릎을 양팔로 감싸안은채 중얼거리자 한순간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킨 펠렉스에게서 분노의 일갈이 터져나왔다.

“이 한심한 놈 같으니!!! 아직도,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그따위 소리나 하고있는거냐!!!”

억센 손아귀가 내양어깨를 아플만큼 움켜쥐어 몸을 보호하듯 웅크리고 있던 자세에서 억지로 풀어냈다.

“바보같은 자식..이건 널 위해서였어, 널 위해서였단 말이다!!!!!”

“..거짓말... ”

내가 고개를 숙인채 중얼거리자 격정에 사로잡혀 흥분했던 펠릭스형님이 멈칫, 하는게 느껴졌다.

“뭐?”

“...나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면서..내 핑계 대지마..요...”

“뭐..뭐라고?”

아시리안이 죽었어.. 당신 때문에 죽었어. 나 때문에 죽었어....그런데 그게 날 위해서였다고 말하는거야. 지금?

“아시리안이 사악해서가 아니야. 당신들은 두려웠던 거야. 아시리안의 힘이 무서웠던거야.”

“대,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냐.”

“하...그런데 이제와서 나때문이었다고? 내가 아시리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관심도 없었으면서.. 아시리안이 나 때문에 어떤일을 했는지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었으면서..나를, 나를 이용해서 비겁하게 함정이나 치고 아시리안을 공격한게 이제와서 나때문이라고? ”

“그만, 닥쳐라. 아르휜!!”

위협적인 경고하듯이 펠릭스가 낮게 소리쳤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참을 수가 없었다. 아파서.. 가슴이 터질것처럼 아파서 ... 그리고 화가 나서... 이렇게까지 자기 입장들만 말하는 펠릭스형님에게 화가 나서... 바보같은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내 절망과 상처, 심장이 찢어지는것같은 아픔 때문에 나는 제정신이 아닌채로 펠릭스형님을 노려보았다.

“당신의 그 비열한 이기심을 나때문이란 말로 포장하지 말란 말이야!!!!!”

울부짖으며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자 그가 분노한채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닥쳐!!!!!!!!!”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휘청,고개가 돌아간다. 그 바람에 벽에 기댄체 앉아있던 몸이 중심을 잃고 따귀를 맞은 쪽으로 휘청여서 한손으로 바닥을 탁, 집어내렸다. 얼얼한 통증을 호소하는 뺨을 나머지 손으로 감싸안고 울부짖음을 토하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데 내얼굴에 향해있던 펠릭스형님이 별안간 이상하다는듯 물었다.

“.. 그 반지는 뭐지?..”

어느새 펠릭스형님의 시선은 뺨을 감싼 손에 끼어진 반지에 향해 있었다. 흠칫, 하고 반지를 끼고 있는 손을 서둘러 감추려는 내게서 뭔가 눈치챈듯 펠릭스형님의 손이 먼저 내손목을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사.상관없잖아!!!”

손을 빼내려고 하며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내말은 들은채도 안하고 펠릭스형님은 마법어와 이상한 문양이 섞여있는 황금반지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있었다.

"...........이건..이 반지는... 아르휜..설마.. 마족이.. 그 마족이 준것이냐?"

그렇다고 하면 빼앗길것 같아 대답을 생각하지 못하고 손을 다시 가져가려고 하자 대답을 듣지 않아도 표정에서 알아챈듯 손목을 부서트릴듯 쥐어 반항을 저지하며 강제로 반지를 빼어내려 했다.

“하,그렇군. 역시 그랬었어. 이 반지 때문에..”

“아,안돼, 싫어!!”

빼앗기지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데 내반항쯤은 우스울정도로 쉽게 저지당했다.

"너는..너는 조종당하고 있는거다. 이따위 것때문에 그 사악한 마족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뿐이야"

"아..안돼.!!!!!!!!!!!"

그러나 펠릭스형님이 강제로 잡고있는 내손에서 아무리 힘줘서 빼어내려해도 반지가 빼어지진 않았다. 나는 처음에 아시리안이 이것을 억지로 끼라고 강요하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맞아..구속의 반지.. 라고 했어.. 억지로 빼려 했어도 아마 빠지지 않았겠구나.. 아시리안.......이 사기꾼.... 하지만 다행이야.. 아시리안이 준 반지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빼낼수없게 마법이 걸려있나.....그렇다면 어쩔수 없지. 사악한 물건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버릴수밖에"

..............뭐?.................뭐라고??

나는 내손을 억지로 돌바닥에 잡아붙이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가 뭘하려는지 몰라서 멍하게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자른다고? 당신동생.......아르휜의...손가락을...........??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는 모습과 그것을 치켜올리는 것을 보면서도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거지..라고 현실이 인지가 되지 않는다. 그저 멍하게 보는 나를 일그러진 눈으로 노려보며 붉은 머리카락들로 얼굴을 반쯤 가린 펠릭스형님이 뭔가를 억누른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를,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아르휜!!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이일을 후회하지 않을거다. 절대로!!!!!"

절대로, 라는 말이 끝나는것과 함께 콰직- 하는 소리가 들리고 피가 사방으로 튄다. 손가락이 잘려지는 순간,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단지 멍한 시선으로 내손을, 정확히 말하면 반지가 끼워진채 단검밖으로 잘려져있는 손가락을 나는 그저 바라보고있었다.

도대체.. 무슨일이 있는거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지금 이사람이 뭘 한거지?... 아르휜에게 무슨짓을 한거지?

피가 줄줄 솟아나는 마디에 반으로 자른 흰손수건으로 지혈하려는지 꽉 묶어주고 나머지 남아있는 손수건자락으로 마치 더러운 것을 집듯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집어올리는 모습을 현실이 아닌 몽롱한 꿈속을 거니는 것처럼 인지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인형처럼 널브러져 앉아있는 나를 펠릭스형님이 일그러진 눈으로 바라보고있는것도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을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가 멈칫, 멈추고 주먹을 꽉 움켜쥐고 돌아서서 나갈때까지도 .. 나는 내게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도저히 납득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천천히...내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져내리기 시작했다.

"키............크...........크흐.........하............하하하하하...............아하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들리고 난지 한참 지나서야 내가 웃고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비죽비죽 솟아나는 웃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아르휜의 모습은 항상 누군가의 뒷모습을 쫒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해선 안되는 것을 사랑하는 자신을 용서할수 없어서 자기자신을 스스로 망가뜨려갔다. 혼담이 오가는 에리카와 펠릭스의 모습을 훔쳐보던 아르휜의 고통스런 상처까지도 밀려온다. 에리카에게 접근하는 모습.. 펠릭스에게 차가운 말을 들을때마다 비웃고있는 가슴으로 상처받고..상처받았던.. 모습이...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 마치 아르휜이 나인것처럼..세세하게 느껴졌다.

이봐요, 아르휜.. 저렇게 잔인한 사람을 좋아했던건가요.. 당신은.. 자신이 믿는것, 믿고싶어하는것만 바라보며 그것을 위해서는 동생의 손가락도 단호하게 자를수 있는 그런 무섭고 잔인한 사람을 그렇게 애가 타게 좋아했어요?

잘려진 손가락에서 흰천을 적시고 흥건하게 피가 베어나오는데도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비참하고 처참한 꼬락서니를 하고서도.. 입밖으로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멈출수가 없다.

불쌍한 사람같으니.. 가여운 사람같으니.. 당신, 나와 닮았어.. 쌍둥이처럼 닮아있잖아..우리는.

사랑이 죄가 되냐고? 사랑은 죄가 될수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겐 죄가 되기도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잉태하고 있던 내가 나에게서 사랑을 원하지 않았던 가족들을 사랑하는건 죄....

아르휜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친형을 사랑하는게 죄........

그리고 우리는 똑같이 그 사랑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짓밟혔다...

그러니...이 끔찍한 고통속에서 울고 있는건 누군때문인지.. 웃고있는건 누구로 인해서인지.. 알수가 없다...알수가...없다..

끊임없이 길게 이어진 복도.. 얼마만큼 걸어가야 끝이 보일지 알수없는 긴복도를 끊임없이 걷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앞만 보고 걸어갈 것이다. 뒤따위 돌아볼 여력이 없다.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던 펠릭스는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은 느낌에 그제야 걸음을 멈칫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냐."

"글쎄.. 기분이 궁금해서. 동생을 직접 감옥에 쳐넣고 그 꼴을 보고온 소감은?"

심드렁하게 묻는 프란시스 하워드의 얼굴을 피곤이 가라앉은 차디찬 시선으로 무감각하게 바라보며 펠릭스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너에게 말해줄 의무가 내게 있던가?"

"뭐, 당신의 소감따위 나완 상관없지. 하지만..알고있어? 당신이 그녀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프란은 존댓말을 집어치우고 반말로 하고 있었지만 그것에 신경쓰지 않고 펠릭스는 귀찮은 어조를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물론 알고있..."

"아니, 당신은 몰라.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옳은 일을 했다,라고 어쩔수 없었다,라고 생각하지? 당신이 파괴하고 없애버린것은 기억을 잃은 그녀석이 마음을 주던 마족 정도가 아냐. 그녀석에게 의지할수 있는 단하나의 유일한 것이었지..."

단하나의 유일한 것.......그런가, 그래서 너는 그런 얼굴을 했던건가.. 그러나 알고있었다해도 나는 결국 이렇게 할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르휜.... 왜 하필이면 그자였던가, 왜 하필이면 마족따위에게 마음을 준거냐.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프란이 심드렁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른사람의 손도 아니고 당신의 손으로 직접 파괴해줘서.. 고.마.워. 어쨌든 나로서도 그는 아르옆에서 떼어내기 어려운 성가신 자였거든. 당신이 미움받는 자리를 자청해서 맡아줬으니 나는 상처받은 아르를 위로하고 빈가슴에 비집고 들어가려 노력하는 멋진 역을 맡아주지. 이거.. 당신에게 왠지 미안한걸?"

얄밉게 이죽거리는 푸른 머리카락의 프란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펠릭스가 짜증이 묻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시한 헛소리 지껄이는게 끝났으면 자리를 비켜라. 프란시스 하워드"

"예에~ 그러죠."

없는 모자를 벗어 인사하듯 시늉을 하는 프란시스의 옆을 펠릭스가 싸늘하게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펠릭스가 걸음을 몇걸음 걷기도 전에 프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등을 보이는걸 봐주는건 지금뿐이다. 펠릭스 폰 레오포드!!"

펠릭스의 뒷모습을 보지않은채인 프란은 평소의 유들한 여유는 집어치우고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른탓에 잔뜩 일그러지고 사나워진 얼굴로 평소의 이죽거리는 목소리대신 차가운 살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다시 한마디 한마디 피를 토해내듯이 내뱉었다.

"언젠간 네놈이 쓴 그 가면을 벗겨주지. 그때문에 아르가 울게되도.. 네놈을 죽여버릴테다. 반드시"

“할수있다면 얼마든지.”

여전히 등을 보인채 간단히 대꾸하고 걸어가는 펠릭스를 사납게 노려보며 프란은 펠릭스의 한쪽손에 쥐어진 피묻은 천을 바라보며 분노를 억누르느라 가늘게 떨리는 주먹을 더 콰직 움켜쥐었다.

저 자식이...아르를..저 빌어먹을 개자식이.. 무슨짓을..!!

기억을 잃기전의 아르휜이 당신을 어떤 눈으로 봤는지 알고 있었어? 기억을 잃고나서도 아르가 당신을 항상 슬픈 눈으로 쫒아본다는걸 알고 있었어?.......아픈 몸을 끌고 여기까지 힘들게 .. 무슨 마음을 먹고 온건지 ..짐작할수 있어? .........

왜 당신이어야만 했냐. 펠릭스 폰 레오포드, 왜 당신이 직접 그녀석의 심장을 찌른거냐!!! 찌른걸로도 모자라 갈기갈기 찢어버렸구나..가증스러운 미친새끼...용서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 아르가 당신을 용서해도 내가 당신을 용서못해, 절대로!!

펠릭스의 흐트러짐없는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이까지 으득 깨물며 서둘러 어딘가를 향해 몸을 돌리던 프란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마음을 의지하던 단하나의 존재를 잃어버린 녀석에게.. 사랑하는 친형에게 손가락을 잘린 녀석에게.. 도대체 어떤 위로를 해줄수가 있다는거냐. 프란시스 하워드..

..자신없다. 절망한 녀석을,망가진 녀석을, 부서진 녀석을.. 어떤 얼굴로 봐야 좋을지.. 어떤 말을 건네면 좋을지 지금은 알수가 없었다. 지금은...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며 펠릭스는 아르휜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슬픈듯이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내리던 시선.. 식사를 제대로 하지않아서 평민음식은 목먹겠냐고 호통치자 변명하지 않고 난처하게 이리저리 굴리던 눈동자..프란시스하워드에게 엎혀 들어와 잠을 자면서 울고있던 모습... 그리고 그 마족, 그자와 함께 있을때는 이상하게 안심한듯이 편안해하던 모습... 감옥안에서 울부짖듯이 바라보던 얼굴.. 손가락이 잘려지는 손간에는 원망도 미움도 비명소리 없이 그저 멍하게 바라보던 슬픈 눈동자...

내가........내가 너를 아프게 한것은 나의 이기심이냐. 아르휜..

너를 살리고 싶다고, 그래서 악역을 자청하는 거라고 다짐한것은 나자신의 치졸한 질투에 대한 변명인거냐. 아르휜..... 아니, 아니다. 나는 이게 옳은거라고 확신하고있다. 이게 옳다고.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순간.. 마족을, 그 마족따위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말에 눈앞이 하얗게 될만큼 분노했던건......... 분명.........질투......치졸하고........우스운.........질투...

계단을 올라오던 누군가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는듯이 계단을 내려가는 펠릭스의 팔을 뭔가가 잡아챘다.

"펠릭스?"

"......아...........야나카황자님"

황금빛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남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펠릭스의 굳은 어깨아래의 한손에 피가 흥건히 묻은 흰천을 보고 야나카황자가 고개를 갸웃 했다.

"....그게 뭐지?"

지금까지 손안에 그게 쥐어져있는지도 몰랐다는듯 잠시 자기손을 내려다본 펠릭스는 곧 그것을 야나카황자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펼친 흰손수건안에 들어있는건 방금 잘라낸듯한 ...반지가 끼어진 하얀 손가락..

"제동생 아르휜을 조종한 사악한 마족의 반지입니다. 그걸로 이제 아르휜은.."

표정없이 딱딱하게 말을 이으려는 펠릭스의 얼굴을 이상한듯이 바라보며 황금빛 눈동자가 기묘하게.. 마치 곤란한 무언가를 보듯이 슬며시 웃었다. 비웃는게 아니고 즐거운듯도 아니고.. 정말 곤란한 무언가를 보는듯한 ... 시선.........

"펠릭스...지나치게 자신을 몰아세우는군. 자네는 마물들 수십마리를 단칼에 베어버릴정도로 강한 검사일지는 몰라도 자기동생의 손가락을 스스로 자를 정도로 야박해보이지는 않다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이제 완전히 아르휜과 마족의 연결고리는 끊어졌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제 귀여운 아르휜을 그 너저분한 감옥에서 빼내는 일만 남은건가?”

“........”

야나카황자의 말엔 아무 대답없이 펠릭스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야나카황자의 시선이 뒷모습에 이어지는걸 눈치채지 못할정도로 지금 펠릭스는 흔들리고 있었다... 끈적한 피가 묻어있는 한쪽손엔 이제 아무것도 쥐어져있지 않은데도 지나칠만큼 무겁다.. 앞으로 어떤 끔찍한 고통이 다가와도 이보다 더 심하진 않으리라. 더 고통스러운건 아르휜을 위해서였다. 레오포드가를 위해서였다. 라고 자신에게조차 단언할수 없는 추악한 진실의 어두운 그림자...

에리카의 음모로부터 지키기위해서였다고, 마족과 스스로 손잡은게 아니라는걸 증명해 가문과 동시에 아르휜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확신하고 있었건만 감옥안에서 아르휜에게 [거짓말]이라고 몰아세워진 순간 스스로에게 감춰두었던 감당할수 없는 진실은 한순간에 펠릭스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용서할수 없었던 것이다. . 아르휜이 다른 사람의 옆에서 그렇게 행복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것을, 용서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질투로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었던거다.. 마족을 사랑한다는 아르휜을 잔혹하게 벌주고 짓밟고 싶어서....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던 거다. 펠릭스는 일그러진 얼굴을 아르휜의 피가 묻어있는 손으로 천천히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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