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공간을 장식하는 아기자기한 장식품들이 없어 삭막해보이는 커다랗고 넓은 홀, 회색 대리석으로 이뤄진 바닥에서 층층히 높이 솟아있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보이는 거대한 침대는 바닥까지 한참 흘러내리는 길고 붉은 시트로 덮여있다. 침대안에는 창백한 안색의 누군가가 보일듯말듯 얕은 호흡을 내뱉으며 잠들어있고 아시리안은 침대의 한쪽에 걸터앉아 인간, 아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상처는 아물었고 목에 나있던 검푸른 멍까지 없애버렸지만 여전히 아파보이는 안색에 아직도 조바심이 난다.
상처를 치유했어도 그렇게 피를 흘렸으니 정신을 차릴때까지는 조금.. 그래, 조금 더 기다려야 될지도 모르겠지만 굳게 감겨진 눈이 아시리안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건방지게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입술이 창백하게 질려 얕은 숨을 내뱉는게 아시리안의 차가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 초조하게 만드는건, 불안하게 만드는건 조금만 늦었더라도.. 라는 생각때문일지도...
다크엘프가 묘사한 생김새만으로도 아르의 목을 조른 놈이 어떤 놈인지는 쉽게 알아챌수 있었다. 빌어먹을 나엘놈따위가, 감히 잔재주를 부려?!! 왜 죽이려고 했는지 이유를 물어본뒤에, 아니.. 이유따위 들을 필요도 없지. 재생할수 없도록 소멸시켜버리겠다, 미친 카레인놈과 함께!!! .. 라고 분노해서 공간이동을 하려다 멈칫, 한것은 어떤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장이 파열될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서두르지 않았다면 영원히 잃어버렸겠지.. 이 인간을 이렇게 품에 안고있지 못하겠지, 하찮은 와이번 따위가 사랑해마지 않는 몸을 갈기갈기 찢어 내장을 물어뜯고 심장을 파먹었을테니..
이마에 가닥가닥 늘어져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올리고 드러난 이마에 새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처음의 조심스런 입맞춤이 어느새 허기진 짐승의 그것처럼 변해 울기 좋아하는 두눈에, 코에, 건방진 말을 해대는 입술에, 관자놀이에, 양뺨에.. .. 정신없이 키스를 하고 있는걸 알았지만 멈추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와이번의 발톱에 꿰뚫려있던 그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그때처럼 멎어버릴것 같다.
......이미 늦어버린건가. 라고 한순간 생각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얼어버릴것 같다.
그때 느낀 불안함을 복수라도 하듯이 온얼굴에 키스의 비를 내리고도 모자라 턱, 목을 내려가 시트를 끌어내리고 쇄골에까지 입술을 묻은 아시리안은 얼굴을 들지않은채 아르의 검은 머리카락쪽으로 손을 뻗어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듯 천천히 천천히 쓰다듬었다.
“빨리 일어나라. 아르. 하고싶은게 많으니까 말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보고싶은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쪽일지도 모른다고 아시리안은 생각하고 있었다. 끌어내린 시트를 다시 끌어올려 드러나있는 어깨를 덮어주려던 아시리안의 눈에 시트밖으로 빠져나온 한쪽 팔이 보였다. 하얀 팔을 잡아올려 시트안으로 집어넣으려다가 그때 숲속에서 나무를 같이 짚어내리고 마주잡아오던 걸 생각하고 손을 슬며시 잡았다.
하얀 손에 네 개밖에 없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시리안은 누군가 잘라낸것처럼 상처로 남아있는 새끼손가락부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들어있는 아르의 얼굴을 이상하다는듯이 바라보았다..
-그 반지는 너를 내게 구속시키는 약속의 반지, 그 반지를 끼면 보내주겠다-
머릿속에 한순간 확연히 떠오르는 말, 그러나 그 말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없이 다른 기억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저 벌레가 꽤 시끄럽게 구는군. 혀를 잘라버릴까-
-...그러지 않는게 좋겠어. 저렇게 말하는걸 좋아하는데 말까지 못하게 되면 너무 불쌍해지잖아-
이건.... 기억의 한조각, 숲을 내려가며 벌레놈들이 지저분한 혓바닥으로 괴롭히는걸 참고있는게 화가 나서 내뱉은 말에 어린애가 장난치는 것처럼 대꾸하며 슬쩍 웃음을 짓는 모습이 스쳐지나가고..
-멍청한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그래, 난 입만 산 유령이야. 잘 아네. 그러니까, ..앞으로 그..그런 나쁜 짓은 하지마-
-...나쁜 짓?-
-그,그래. 나,나쁜짓!!-
호숫가에 나란히 앉아서 얼굴이 온통 붉어진채 어쩔줄 몰라하는 붉은 머리카락의 아르를 놀리며 웃고있는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이 기억은.......?!
-너저분한 까만 머리카락에.. 비쩍 말라서 봐줄데라곤 하나도 없고-
-뭐..뭐야?!! 원래 내모습이 어디가 어때서!!!-
-멍청이따위에게 시집오라던 그 눈낮은 날벌레는 뭐지?-
-자기집에서 같이 살자고 살살 꼬시던 벌레는?-
-늙은 벌레는 또 뭐냐. 영감주제에 음흉하던데...-
.........이 기억들은.......!!!!!!!
-틀리긴 뭐가 틀려!!! 아무나 다 좋다고 하는 바보놈 주제에!!!!!!!-
-.....아시리안은 아무나가 아니잖아...-
-....퍽 고마운 말이군. 아무나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진짜 나를... 알고있는건 아시리안 뿐인걸, 하은준으로 내 존재를 인정해준것도 아시리안 뿐이고... 옆에 없을때는 정말 많이 보고 싶었고... 내가 사라지면 다시 못보게 되는게 슬플만큼..........좋아한다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에 사로잡혀... 아시리안은 손안에 잡혀있던 손이 꼼지락거리는걸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눈치를 채고 손을,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침대에 묻혀있던 창백한 얼굴의 존재가 그토록 보고싶던 붉은 눈을 뜬채 왜 자신이 여기에 누워있는건지..하는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리안...?”
오래 누워있어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미친듯이 스며드는 기억의 틈바구니에서 무언가 중요한게 떠올랐다.
-돌아가,돌아가, 돌아가란 말이야!!! 반지가 있으면 나를 찾을수가 있잖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아시리안쪽으로 다시 돌아온 시선이 설명을 요구하듯 바라보았지만 아시리안은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 .........구속의 반지는 한번 끼면 빼낼수 없다. 반지의 주인이 해방시켜주기 전에 반지를 손에서 빼낼 방법은 .... 손가락을 자르는 수밖에는. ...
아시리안은 손안에 들어온 손을, 반지가 끼워져있던 손가락이 뭉텅, 잘라지고 흉한 상처만 남은 손을, 흔들리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어째서.... ... 어째서...
뭔가 이상한건지 상체를 일으키려고하는 아르의 모습을 의식하면서도 아시리안의 머릿속을 맴돌고있는건 다른 인간들의 손에 잡힌채 울부짖고 있는 아르의 모습이었다. 기다릴테니까..라고 울부짖는 모습이었다.
“......아시리안.....?”
반쯤 상체를 일으키고 이상한듯이 물어오는 아르의 몸을 아시리안의 떨리는 손이 천천히 품에 끌어안았다.
"....저.....아시리안...?"
죽을뻔 하다 겨우 살아난것은 자기쪽일텐데 무슨일이 있나보다라고 생각하는지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안긴 녀석이 품속에서 눈치보듯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시리안.....왜그래..?”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말이 나오지가 않아서, 아니, 어떻게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마음을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아시리안은 품에 안은 존재를 꽉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등에 와닿는 돌벽의 차가움은 얇은 옷감 한장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차디차고 서늘한 추위는 온몸을 으슬하게 휘감고있었다. 실상 몸에 느껴지는 오슬한 한기보다는 벽에 고정된 족쇄에 양팔이 묶여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뻣뻣하게 굳어가는 전신의 무기력함이 오히려 더 문제였다. 온몸이 추욱 늘어져 내릴것같은 좋지않은 기분을 외면하며 펠릭스는 아득한 어둠속에 가두어둔 붉은 눈동자를 천천히 떴다.
비참하게 묶여있으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에 그다지 관심없는듯 지독하게 무표정한 얼굴에서 붉은 눈동자만이 잠시 흔들렸다. 전쟁터에서 쓰러지기전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기억하기 싫은 뭔가를 떠올린듯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지금 상황은 별로 좋지않다. 최악의 패를 꺼내들 제1황자의 어리석음을 예측하지 못한것은 아니지만.... 시기가 생각보다 빨랐다. 게다가 직접 로트레아성을 공격해오는 어리석은 짓을 할줄은 몰랐다... .. 그래, 때로는 어리석음이 모든 예상을 뒤집어버리기도 하지.
마물들과의 끈질기고 지독한 생존혈투가 어찌될지 알수없는 판에 권력과 야망에 눈이먼 인간의 추악한 욕심이 부른 피비린내가 역하게 올라오는것 같아 펠릭스는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어리석은 놈같으니...'
보나스왕자는 로크레아성을 공격하는 황당한 바보짓으로 에오포니아의 황권을 자진 포기한거나 마찬가지.
지금쯤 자기발등을 찍은 줄 모르는 멍청이는 희희낙락하고 있는 중이겠지.
그렇군...야나카. 그는 기다린것이다. 보나스왕자가 얼마나 멍청한 인간인지 스스로 증명하기를. 그래, 이걸로 에오포니아는 피를 흘리겠지만 그는 원하는것을 가질것이다. 황제에 오르게 될테니까.
펠릭스는 피곤이 밀려드는 고개를 뒤로 젖혀 뒷머리를 눅눅한 이끼가 사방에 껴있고 오래된 피딱지가 여기저기 엉겨붙어 지저분한 돌벽에 기대었다. 왼쪽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축축하고 진득한 핏물이 끊어질듯 말듯 떨어져내리고 통증과 오한때문에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가 않았다. 몽롱한 정신속으로 다시 전쟁터의 아비규환속 얼핏 보인것도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인간의 핏물이 진득하게 적셔진 검날을 들고 적군을 베어넘길때 보았던 붉은 머리카락의 아련한 잔상...
펠릭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자조와도 같은 웃음은 보일듯 말듯 지어졌다가 이내 생명의 불꽃을 잃어버린 촛불처럼 꺼져갔다.
한순간 보였던 붉은 머리카락의 환영에 펠릭스는 바로 앞의 적군도 잊어버린채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추는 실수를 했고 지금의 꼴은 그 실수에 대한 대가인 셈이었다. 물론 뒤늦게 날아오는 창을 쳐내려했지만 간신히 방향만을 틀었을뿐 고스란히 왼쪽어깨을 내준채 말위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굴러야만 했던거다.
살을 찢는 고통속에 정신을 잃기전 다시 아득하기만 한 시선을 들어 그쪽을 향했을때 붉은 머리카락의 환영은 보이지 않았다. 푸른 창공아래에는 온통 피비린내에 절은 붉은 공기만이 허공을 떠돌뿐..
...환영이 아니었던들 뭘 할수 있었겠는가...
실제 아르휜이 눈앞에 나타났다면 무슨 말을 할수 있었겠는가.
차갑고 어두운 감옥에 가두어 놓고 짐승에게 하듯 폭행하고..종내엔 손가락까지 잘라내버린게 널 위해서였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다고?
... 질투로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었던거라고?
너를 잔혹하게 벌주고 짓밟고 싶어서....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던 거라고?
“크크큭....하......하하...하하하.......하하..”
눅눅한 어둠속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간헐적으로 자학적인 웃음을 내뱉는 펠릭스의 어깨가 자잘하게 흔들리다가 곧 흔들림을 멈추고 떨리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아니...후회하지 않는다..나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걸 알기때문에..
그러니, 도망칠수 있는데까지 도망쳐. 달아날 수 있을때까지 달아나봐.
그래도 나는 너를 잡을거다. 나를 보는것을 원하지 않아도 너를 쫒을거다.
어리석은 너에게 내가 옳았음을, 납득시키고야 말테니..
단지..나는 잊혀지지 않을 뿐이다..나를 바라보던 너의 지독히 슬픈 눈동자가..
단지....지워지지가 않을 뿐이다.. 너를 두고 나오면서 등뒤에서 메아리쳐 들려오던 공허한 웃음소리가...
오슬오슬한 한기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에 절은채 끊이지않는 생각의 미로를 헤매던 펠릭스는 문득 생각을 멈추고 눈을 떳다. 돌벽을 밟고 걸어오는 몇개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오고 있다는것은 반갑지않은 불청객이 다가오고 있다는것을 의미했다.
어리석게 전쟁도중에 흔들렸고 사로잡힌 포로신세가 되버리긴 했지만 자신은 엄연히 에오포니아국 레오포드가의 후계자. 어차피 죽이지 않았다고해도 저들의 요구사항은 둘중의 하나일것이다. 변심, 그게 아니면 죽음.
여러개의 발자국이 문앞에서 멈추고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미처 듣지않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들어오는듯 끼이익, 쇠문이 열렸다.
굳게 닫혀진 쇠문이 열리는것과 펠릭스가 날카로운 시선을 그쪽에 던진것은 거의 동시였다. 들어오려던 사내는 펠릭스의 차고 무감각한 시선에 흠칫, 멈춰섰다가 이내 상황을 생각했던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낭패감이나 긴장감을 보이지 않고 무심히 시선을 부딪친채인 펠릭스를 바라보는 사내는 애써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듯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웃음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거, 대접히 너무 소홀해서 죄송합니다. 펠릭스 폰 레오포드.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쟁중이라 포로에 대한 예우를 하기가 힘든 형편이니..흠,흠.. 저의 무례를 용서하시길"
포로와 예우 운운하며 은근슬쩍 비꼬는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펠릭스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너를 알고있다. 윈프레드남작가의 둘째던가?"
부상을 당한채 차가운 감옥에 오래동안 방치되어 있어서인지 펠릭스의 목소리는 다소 힘이 없었지만 무표정한 펠릭스를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이 보일듯말듯 꿈틀거렸다. 그러나 곧 유리한 쪽은 자신이라는것을 자각했는지 입에 한가득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이런이런,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워낙 고고하고 잘난분이라 저같은 것을 기억해주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말이죠. 따로 저의 소개를 할 필요가 없으니 뭐..다행이긴 합니다만."
확연한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펠릭스의 입꼬리가 웃는듯이 올라가자 그것을 본 윈프레드가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보나스왕자는 사람을 잘 택하였군. 가장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끼리끼리라는 말은 괜히 있는게 아니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긴 했으나 스산한 어둠과 침묵이 가라앉은 사방이 꽉막힌 감옥의 좁은 공간안에선 펠릭스의 냉정한 말은 분명하고 차분하게 들려왔고 윈프레드의 화를 돋구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윈프레드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에오포니아에서 레오포드가의 펠릭스 폰 레오포드를 모르는 사람들은 흔치 않았다.
그리고 펠릭스를 아는 사람들은 두가지 분류로 나뉜다.
펠릭스의 고지식함과 곧은 성품을 맘에 들어하는 자와 펠릭스의 뻣뻣함과 오만함을 잘난척한다고 깍아내리려는자. 유감스럽게도 지금 윈프레드는 그 후자에 속했다.
같은 에오포니아의 귀족신분임에도 펠릭스와 신분이나 외모나 학식이나 검술이나 모든것에서 비교조차 될수 없었던 윈프레드다. 동경이나 부러움따위를 가질만큼 순수한 성격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을지 모를 윈프레드는 자신의 손으로 유명한 펠릭스를 사로잡은 사실에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비참하고 처참하게 묶여있으면서도 당당한 오만함을 잃지않는 건방지고 재수없는 놈때문에 많이 반감되어있었고 오히려 짜증이 치솟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마땅해 이맛살을 구기면서도 윈프레드는 입가에 다시 미소를 실룩거렸다.
펠릭스 폰 레오포드가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고 해도 이제 끝이다. 자신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귀족이라해도 신분이 낮아 좀처럼 야욕을 만족시킬수 없었던 불만은 보나스왕자가 왕위에 오르기만 하면 충분히 채워지고도 남을터. 그리고 그때가 되면 레오포드가의 펠릭스따윈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하긴.. 지금 이자리에서 없애버릴수도 있겠지만 그냥 죽이기엔 아까운 인물이지, 당신은.
"이거, 아직 상황파악이 안되시나? 너무 대접이 정중했던 모양이지?"
윈프레드의 반들거리는 시선이 보란듯이 야릇하게 빛을 내며 사냥꾼에게 잡힌 참새처럼 사로잡힌 펠릭스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잔혹한 눈빛은 마치 어떻게 요리해야 좋을까를 고민하는듯 가학적인 즐거움이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의 시선은 동요를 보이지않고 시종일관 무표정하기만 해서 윈프레드의 눈빛이 다시 찌푸려졌다. 어차피 살려둘 생각도 없었지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앞에 두고도 저렇듯 도도한척 침착하게 구는 놈을 보자니 배알이 뒤틀리고 온갖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보나스왕자가 황제가 될것 같나?"
얼음같은 펠릭스의 질문에 윈프레드가 때는 이때다, 라는듯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두고보면 알일이지. 하긴, 네놈은 위대한 보나스왕자님이 황제가 되시는걸 보지도 못하겠군. 크큭..오늘 여기서 죽을테니까"
포로로서의 이용가치에 대해선 추호도 생각하지않고 오직 죽이는것만을 염두에 둔것같은 윈프레드의 말에 펠릭스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멍청하긴, 보나스왕자는 황제에 오르지 못한다."
"..뭐? 허풍치지마, 곧 죽을 놈이, 아직 잘난척이냐?"
"황제가 되고 싶었다면 결코 먼저 칼을 뽑아선 안되었다"
낮은 어조로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말에 윈프레드의 표정이 구겨졌다. 언뜻 이해가 안가는 말이긴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 뜻을 되묻기가 짜증스러워서 윈프레드는 표정을 구긴채로 소리쳤다.
"곧 죽을 놈이, 끝까지 잘난척을 하고 싶다, 이거냐?"
짜증으로 일그러진 윈프레드의 눈빛이 한순간 반짝이고 벽쪽에 묶여있는 펠릭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왼쪽어깨가 피로 흠뻑 젖어들만큼 상처를 입어 양손이 묶여있지 않아도 어차피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펠릭스를 보는 윈프레드의 눈빛이 음침하게 번들거렸다.
"너같은 놈을 잘알아. 자기가 잘난줄 알아서 너같은 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지. 흐흐흐..어디 그 자존심이 무너졌을때도 이렇게 당당한지 볼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핏물이 질척거리는 얇은 옷가지가 찌이이익- 불편한 비명을 지르며 허리춤까지 찢겨졌다. 드러난 상반신은 한쪽 어깨가 피로 젖어있긴 하지만 아니, 오히려 붉은 핏자국때문에 더 하얗게 보이는 피부는 난공불락이라는 허명이 아깝지않을만큼 아름다웠다.
눈앞의 펠릭스 폰 레오포드는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지만 흔치않은 붉은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얼굴로 은밀히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다고 소문난 존재였다. 인기야 많지만 그 도도한 심사와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성격, 무시못할 카리스마탓에 감히 누구도 침범할 생각도 못할 그림의 빵이 지금 윈프레드의 손아귀에 떨어진 셈이었다.
꿀떡 삼킬 빵치고는 꽤나 대단하긴 하지만...어차피 보나스왕자는 황제가 될거고 이놈은 야나카왕자쪽에 붙었으니 무슨 짓을 한들 죄가 될수는 없을터. 윈프레드는 웃음이 새어나오는 입가를 실룩거렸다.
'확실히 죽이긴 아깝지. 그냥 죽이기엔 말이야. 크크크'
윈프레드의 손이 적당히 근육이 잡혀있는 평평한 가슴을 여자의 젖가슴을 만지듯 만지작거리다가 젖꼭지를 거침없이 희롱했다. 손가락으로 비틀듯이 잡아당기는 고문과도 같은 애무에 반응을 보일법도 한데 한마디 신음도 없고 표정의 변화도 없는게 인형을 가지고 노는것같기도 했지만 그 대단한 자존심도 어차피 거기까지다.
남자를 가지고 노는것도 여자를 따먹는것 만큼이나 유쾌하다는것을 윈프레드는 알고있었다. 에오포니아의 뒷골목 창녀의 거리엔 색다른 것을 즐기는 손님들을 위해 미소년들도 구비되어 있었고 윈프레드도 몇번 가본적이 있었다. 부유한 귀족들중에는 은밀하게 남자정부를 비싸게 사서 요긴하게 써먹는 호색한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부유하고 재산이 많을지라도 천하의 펠릭스를 가져보진 못했으리라.
뜨거운 신음을 배고픈 짐승처럼 토해내며 가학적인 욕정에 두눈이 뒤집혀 자제심을 잃은 두손이 피투성이인 상반신에서 피에 젖는것도 아랑곳하지않고 아무배려없이 주물거렸다. 들개처럼 헐떡거리는 윈프레드를 노려보는 펠릭스의 시선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더러운 손을 댄게 괴롭히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지저분한 욕정때문이었는지 이제 짐승같은 본성을 드러낸채 허겁지겁 달려드는 윈프레드를 펠릭스는 아무 표정없이 노려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굳게 다문 입속의 가지런한 이는 분노와 치욕을 참느라 무서울정도로 꽉 맞물려있었다.
그러나 괴롭히기 위해서였든 욕정때문이든 이런걸로 펠릭스가 무너질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윈프레드의 완벽한 오산이었다. 사로잡힌걸 알았을때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둔 펠릭스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런 멍청이같은 놈에게 포로가 된것은 스스로 치명적인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윈프레드든 어느 누구든 펠릭스를 무너지게 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 한사람만은........그때 이후로 끊임없이 펠릭스를 뒤흔들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환영이 몽롱한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걸 느끼며 펠릭스는 눈을 감았다.
.....................................아르휜.
허리춤에 걸려있던 옷가지가 거칠고 급한 손놀림에 벗겨져내리는것을 느끼면서도 펠릭스의 정신은 꿈결처럼 아득한 어딘가를 헤매고 몸에선 점차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아련한 꿈속에서조차 붉은 머리카락의 환영은 등을 돌린채였다. 아르휜의 환영이 천천히 몸을 돌리는 순간 펠릭스는 그 환영이 돌아서는걸 미처 마주 대하지 못한채 도망치듯이 눈을 떳다. 식은땀이 흠뻑 젖어 축축한 얼굴로 눈을 뜬 펠릭스의 귓가에 허억,허억, 하는 거친 호흡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열이 차오른 머릿속으로 윈프레드를 떠올린 펠릭스는 차게 웃었다.
그리고 짐승같은 손이 하반신을 유린하기위해 다가오는 찰나 끼이이익- 굳게 닫혀있던 쇠문이 열렸다. 윈프레드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돌아보지조차 않았지만 펠릭스는 시선만 들면 마주볼수 있는 위치라 감옥문이 열린것도 새로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도 선명하게 볼수 있었다.
단지, 저사람이 왜 여기에?..라는 의문이 들었다가 이내 흐린 시야만큼 흐린 정신을 곧게 유지하려 애쓴 끝에 펠릭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치 놀라는 모습을 즐기려는듯 연한 웃음을 머금은채 감옥안에 들어온 사람은 이자리에 있는게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정신못차리고 있는 짐승한마리에게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인지 부러 쇠문을 쾅,소리가 울릴만큼 크게 닫는 남자의 황금빛 눈동자는 문을 닫으면서도 펠릭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뭐..뭐.......뭐야!!! 드, 들어오지 말라니까!! 어느놈잇!!!!"
문이 닫히는 쾅, 소리에 짜증을 내며 돌아서던 윈프레드는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만큼의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바지춤을 줏어올리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멍청하게 서있었다.
재미있다는듯이 빙글거리는 시선으로 윈프레드를 응시하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남자는 바로 야나카왕자였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어떻게 감옥안에까지 들어올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않아서 커헉..소리를 낸뒤부터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윈프레드를 보며 야나카왕자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쯪쯔... 겨우 피라미 한마리가 여기 숨어있었던가. 찾아온김에 기왕이면 보나스였다면 좋았을것을"
야나카왕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는지 윈프레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은 입을 다물고 있을때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어...떻게....어떻게....여기에....."
공포에 질려 속에서 쥐어짜는듯한 윈프레드의 신음섞인 질문에 야나카황자가 마치 제대로 된 질문이라는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의있게 대꾸했다.
"그러게 기껏 놀이에 장단 좀 맞춰줬기로 남이 애지중지하는 보석은 훔쳐가는게 아니지."
"후..훔치다니...무..무엇을..."
환한 미소속에 느껴지는 불길한 무언가에 흠칫, 놀라며 윈프레드가 더듬거리자 야나카황자의 시선이 윈프레드 건너 펠릭스쪽을 향했다. 웃고는 있지만 곤란한듯 난감한듯 흉폭한 무언가를 억누르는듯도 싶은 황금빛 눈동자가 펠릭스의 창백한 얼굴과 핏물에 반쯤 젖은 벌거벗은 상체, 그리고 벗겨진 하반신을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흐음..게다가 아까워서 손도 못댄걸 먼저 손까지 대고..쥐새끼주제에 제법이란 말이야"
가벼운 웃음에 가벼운 말투였지만 윈프레드는 드래곤을 만난 오크처럼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펠릭스를 향한 야나카왕자의 부드러운 시선과는 별도로 입가에 지은 웃음은 메마르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움짝달싹 못하고 있던 윈프레드쪽으로 빛한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수초후 워낙 번개처럼 소리없는 움직임이어서 미처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느끼지도 못한듯 두려움에 떠는 모습 그대로 윈프레드의 전신이 반으로 참혹하게 쪼개졌다. 인간을 잔인하게 반조각낸 검날에서 흐르는 검붉은 핏물을 닦지도 않은채 야나카왕자가 펠릭스에게 다가왔다.
"흐음..내가 별로 반가운것 같지 않군?"
반갑지 않다라... 사실 지저분한 상황에서 구해진것은 같지만 곤란한 사람에게 빚을 진것 같아 펠릭스의 심사가 편치않은것은 사실이다.
"이래뵈도 서둘러서 그대를 구해내려고 애썼는데 말이지.."
방금 잔혹한 살해를 한것 같지 않게 야나카왕자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풀어주지 않을 겁니까?"
점점 사그러드는 촛불처럼 힘없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펠릭스가 말하자 야나카왕자가 의미를 알수없는 말을 던졌다.
"영원히 묶어두고는 싶지만........ 확실히 이런 모습은 조금 곤란하군"
...참기 힘드니까..란 말을 생략하며 야나카왕자가 펠릭스를 풀어준것은 무릎근처까지 내려져있던 바지를 끌어올려준 다음이었다. 묶여있던 두손이 풀리지마자 기력이 다한듯 쏟아져내리는 신형을 품에 받아 안으며 야나카왕자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것도 의심스러울만큼 몸의 온도가 싸늘하다. 창에 찔린후 변변히 치료받지 못한 왼쪽 어깨의 상처에선 아직도 피가 나고 있었다. 보통 사람같으면 기절하고도 남을 고통을 견디며 부러 정신을 놓지 않고 그 치욕을 참아낸것은 어지간히 독한 사람으로서도 힘들 일. 게다가 펠릭스처럼 자존심 강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아니..어쩌면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였던가...손을 대기 망설이는듯한 손이 붉은 머리카락근처까지 와서도 망설이듯 헤매이다가 가만히 쓰다듬었다.
"............빚을 졌다고 생각하겠지. 펠릭스?. 이걸로 빚은 없는 걸로 치자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야나카왕자의 상체가 기절한 펠릭스에게로 천천히 굽어지고 입술이 겹쳐졌다.
여기는 ...아시리안이 처음에 나를 강제로 끌고와서 아나이스라고 우기고 억지로 반지를 끼게 만든 아시리안의 공간.. 왜 여기에 있는걸까. 프란은? 이리타는? 케드릭은? 데런은? 시오니는?.. 아참.. 시오니는 다른 곳으로 갔지.. 마족을 찾아서간 시오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시오니는 자신만의 의지로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간것이다. 그건 다른 사람이 어설픈 소견으로 섣불리 판단할수 있는게 아니다.
기억의 맨앞에 있는건 와이번의 발톱에 꿰인채 바라본 푸른 하늘이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건지.... 아시리안이 아무말도 해주지 않아서 나는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수밖에 없었다. 조금 이상한 얼굴로 나를 한참동안이나 품에 안았던 아시리안은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사라져버린것이다.
별로 좋지 못한 추억이지만 아련하게 기억속에 남아있는 아시리안의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 가까이서 보면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있지만 심플한 벽.. 촘촘히 나있는 긴 계단의 아래로 보이는 거대한 회색바닥엔 둥근 문양이 그려져있다.
누워있기만 하니까 답답해서 일어서려던 나는 아차, 싶어서 주위을 두리번거렸다. 깨어났을때부터 속옷도 안걸친 알몸이어서 혹시 입으라고 가져다논 옷이 있을까봐 였지만 이윽고 한숨을 길게 내쉴수밖에 없었다.
뭐야.. 홀딱 벗겨놨으면 입을 옷이라도 가져다놓는게 예의라고 봐. 아시리안.. 이 변태.
할수없이 자주색 시트를 끌어당겨 몸에 둘렀지만 워낙 커서 바닥을 한참 밑돌았다. 뭐..어쩔수없지.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싶어 촘촘히 나있는 계단아래로 걸음을 내딛었다. 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긴 시트가 계단을 걸쳐서 그림자처럼 스르륵 따라 내려왔다.
크로멜성에 있을때 아시리안이 함께 가자고 살살 꼬시던 곳에 .. 내의지는 아니었지만 지금에야 발을 들여논게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 거절하지 않았다면, 함께 가겠다고 말했으면, 다른거 생각안하고 내가 원하는것만 바라는것만 생각했다면... 지금쯤 많은게 틀려졌을지도 모르겠어.. .. .....
....아시리안은 마족이라는거 안들켰을테고...
계단을 한걸음 내딛는다.
....펠릭스형은 내게 가혹한 짓을 안했을테고...
다시 한걸음 내딛는다.
.........아시리안은 상처입지 않았을테고..
또다시 한걸음..
......지금처럼 기억을 잃지 않았을테니까.
걸음을 멈추고 나는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계단에 쭈그리고 앉은채 몸을 감싼 시트사이로 삐죽이 삐져나온 맨발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머릿속에선 잠시 끊어졌던 생각들이 줄다리기를 하듯 이어지고 있었다.
그걸로 좋았을까...........아니, 이것으로 좋은건가.. 모든 것을 버리고 ....
프란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리타, 데런, 케드릭등은 어찌 되었는지... 신경쓰지말고...
로트레아성이 공격당했다고 했는데.. 펠릭스형은 어찌되었는지... 모두 지워버리고...
차고 냉담하기만 했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고.. 나를 노려보는 은호형의 얼굴도 떠오르고 .. 장난치기 좋아하는 친구들의 모습들도 아련하게 떠오르고....
아르휜의 기억속에서 늘 정면으로 바라본적조차 없는 냉혹한 레오포드공작님과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던 관심없는 냉담한 새어머니와 동생 유테르의 모습.. ... 그리고......크로멜성에서 처음 눈을 떳을때 피로 물든 붕대를 어깨에 두르고 나를 찾아왔던 펠릭스형의 창백한 얼굴도 스치듯 지나간다. ...
오크떼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나를 힘껏 안아오던 프란도, 어쩌면 나와 만난게 우연이 아니었을지 모를 이리타도, 마지막 페르산맥을 향해 위태롭게 걸어가던 시오니의 뒷모습도.. 어쩌면 나와는 악연일지도 모르는데 보호자처럼 나를 돌봐주려고 하던 케드릭의 모습도...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반면 어딘가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오는 구석이 있는 데런도....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을 천천히 멈추었다.
...할수 없었을거야. 아시리안..
내존재를 부정당하고 비정하고 잔혹하게 내쳤다해도.. 너에게 도망칠수는 없었을거야. 아시리안. 이제 .. 그걸 알겠어. 이제야.... 그걸 알겠어..
살아간다는건... .. 슬프고, 아프고, 참혹해도.... 포기할수 있는게 아니라는걸.
사람들과의 관계라는건... 내가 끊어버리고 싶다고 해서... 끊어질수 있는게 아니라는걸.
한참동안이나 발끝을 내려다보며 앉아있는데 문득 내 발아래의 계단에 서있는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 아시리안이 온건가.. 해서 쭈그려앉은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을때 상대쪽은 반대로 천천히 몸을 굽히고 있었다. 눈에 익은 검푸른 머리카락..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없는 깊은 다크블루의 시선이 말끄러미 쳐다보자 다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시리안..?”
대답없이 손을 뻗어 뺨을 감싸온다. 따듯해.. 그 손에 기대듯 눈을 감아내리자 몸을 감싸고 있던 무언가가 스르륵 흘러내려갔다. 아.. 눈을 반짝 뜨고 벗겨져 내려가는 자주색 시트를 서둘러 손에 움켜쥐었지만 이미 반은 벗겨져 허리아래만 간신히 걸쳐져있는 상태.
이런거 처음도 아니지만 부끄러움에 가슴속이 간질간질 떨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가 필사적으로 움켜쥔 시트자락에 그다지 미련없어 보이는 아시리안이 조금전까지 내가 만지작거리던 발을 손으로 들어올렸다.
“.....아시리안......?.. 뭐.........아,. 하지마!!”
왜 남의 발을.. 하던 의문도 잠시, 발등에 입을 맞추자 깜짝 놀라서 발을 빼내려했지만 손안에 잡힌 발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발등에 한 입맞춤은 점점 발끝으로 내려가 발가락을 입안에 문다. 매끄러운 혀로 감싸고 발가락 사이사이를 핥아내리자 수치심과는 별도로 몸안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 , 왜.. 지저분한 발을..
“...하..하지마.. 그...그런...짓....!!”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봤자 별로 설득력도 없어보이고.. 아시리안의 손에 잡혀 이짓저짓 당하는 발에는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은채여서 반항도, 저항도 무의미했다. 발을 조금 잡아당기고 복숭아뼈를 매끄러운 혀로 핥아가고 있을때 아시리안에게 잡혀 허공에 들린 발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종아리부분까지 꼼꼼히 애무당하고 무릎안쪽의 연한 살을 지나 허벅지로 아시리안의 입술이 올라오자 견딜수없는 뜨거움에 등이 활처럼 휘며 입밖으론 학,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뷰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이 간신히 움켜쥐고있는 시트자락을 놓칠새라 꽉 움켜쥐고었지만 한쪽다리가 잡힌채로 들려있어 그다지 소용없다는것도 의식하지 못한채 허벅지안쪽까지 붉은 꽃잎같은 도장을 찍어오는 애무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뭐..뭐하려는.....!! ..
조금만 더 올라오면 아시리안의 입술은 애가타서 슬슬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욕망까지 뜨거운 입안에 담을 것같아서.... 겁에 질려 등뒤의 계단에 떨리는 손을 집어내리고 한계단 도망치듯 올라가자 그제야 다리에서 뜨거운 입술을 뗀 아시리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쳐다보기만 할뿐..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수없는 무표정한 시선에 사로잡혀버린듯 꼼짝도 못하다가 다리를 잡아내리는 손에 움찔,놀라서 이번엔 정말 도망치려 몸을 뒤틀었지만 아시리안에게 잡혀있는 발 때문에 상체가 먼저 허물어져내렸다. 다시 허벅지안쪽에 찍어내려오는 뜨거운 입맞춤에 이젠 정말이지 저항할 기력을 잃어버린채 몸을 바들바들 떠는데 안쪽, 그 안쪽을 쪼아오는 키스는 이내 부푼 욕망에까지 다다르고만다.
할짝.. ... 반쯤 비틀린 허리가 움찔, 위로 튕겨오른다.
“.......아.....!!”
할짝.. ... 델것처럼 뜨거운 혀가 맛보듯이 슬쩍 슬쩍 핥아올때마다 창피함이 높아지는만큼..그 창피함에 비할바 못될 쾌감이 애가 탈 정도로 달아오르고.. 몸에 와닿는 감각은 분명 사실인데 도무지 상황파악이 안되서 붉어진 눈으로 아시리안쪽을 돌아보자 몸에 와닿는 쾌감보다 더 지독하게 야한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아아.......아시리안이... 그 대단한 자존심은 어쩌고....아시리안.. .......내 발을 핥은걸로도 모자라서 ...
막 내 분신을 입에 물려던걸 다리를 오므려 피했다. 오므린 다리사이를 바라보던 아시리안이 다시 내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나는 내 말이 진심이기를 알아주길 바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그런거.. 해주지 않아도 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없는 무표정한 다크블루의 시선이 조금 흔들리더니 아시리안이 감정을 알수없을만큼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내가...... 원한다.”
“...!!!”
“....내가 너의 전부를 원한다....”
무언가 절실한걸 구하는것처럼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아시리안의 무표정한 시선을 바라보며 흔들리는건 나였다. 왜 창피하게 그런걸 하고 싶어하는거야.. 라고 내심 생각했지만...허락을 구하는것처럼.. 더 이상 만지지도 키스해오지도 않은채 나를 쳐다보는 시선에 묘하게 가슴이 아파와서 나는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살짝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좋아..라고, 원하는걸 해도 좋다...라고..
몸에서 흘러내린 자주색 시트가 깔린 계단위에 등을 눕힌채 까마득히 높은 회색천장을 바라보는사이 양다리가 넓게 벌려진다. 아시리안의 검은 머릿결이 다리사이를 간질이고 드러난 욕망이 뜨거운 무언가에 삼켜지는걸 깨달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지만 눈앞이 핑글, 돌정도로 짜릿한 쾌감에 허리가 움찔, 허공으로 튕겨오른다.
“.........아...아시리안.......!!......하아앗..!!!!”
뜨거움에 삼켜져 그보다 더 뜨겁게 타고있는 욕망이 걷잡을수없이 팔딱거린다. 처음에 창피해서 거부했던 것도 잊을 정도로 아시리안이 주는 쾌락에 몰두해서 나는 어느덧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쾌락의 물결에 떠밀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릴것만 같아서 허우적거리는 두 손으로 양다리사이에 있는 아시리안의 단단한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하.....윽..!!............아...하........으.......아...아시리..............으응.........앗..!!”
미칠것같은 쾌감에 허리를 움찔거리며 연신 신음을 내뱉던 나는 더는 견딜수 없을 것같아 아시리안이 물러나 주기를 바랬다.
“...아시리안...이제........그만....나.........나올...”
어깨를 잡고있는 손으로 조금 흔들어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허리를 꽉 안아와 더 깊숙이 겹쳐진채로 나는 하악, 하는 비명과 같은 신음과 함께 등을 활처럼 휘었다. 머리가 어질, 해지는 사정의 여운에 숨을 몰아쉬다가 앗, 하고 놀라버렸다. 눈을 반짝 뜨고 서둘러 아시리안을 바라보자 아시리안은 내가 토해논 액체를 남김없이 삼키고 있었다.
“뭐..뭐하는거야. 얼른 뱉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말하는 나를 또다시 그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으로 보며 입가에 묻은걸 혀로 핥는 모습에 나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맛있군.”
맛있다고? 그딴게 뭐가!! 발끈 하려다가 멈칫,하고 나는 아시리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그래....아시리안... 좀 이상해... 이상하다고. 너.
“.........저기...아시리안..?”
무슨 일 있는건가... 조금 살피듯이 바라보자 아시리안이 피식, 웃는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태연한 웃음에 심장이 덜컥,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 있는거야.. 라고. .. 그렇지만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지 못하는 사이 계단에 늘어져있는 자주빛 시트를 끌어다 내몸에 둘러준다.
“....침대로 가지.”
“아......그..그래....”
침대.. 라는 말이 꽤 야한 뉘앙스를 풍겨서 아시리안의 이상한 기류는 흘려버리고 그만 허둥지둥 일어서려던 나는 뭔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되는건가 싶어졌다. 어? 하는 찰나 자주빛시트로 싸인 내 몸을 아시리안이 계집아이 들어올리듯 안아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낯간지러운 짓을 하는 아시리안이 아닌데... 발가락을 핥은 것도 그렇고.. 이상하게 말이 없는것도 그렇고..여러 가지로 이상했지만 이런 자세로 안겨있으려니까 곤란할 정도로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이런거 절대 편하지 않아, 라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참고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아시리안을 올려다보았지만 내 기분따윈 지금의 액션과 크게 상관이 없는듯, 마족이니까 몸무게따위 크게 상관없을런지 몰라도..그리 가벼운 몸도 아닐텐데.... 아시리안은 나를 안은채 나는것처럼 가벼운 발짓으로 층층이 올라가야할 높은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오르고 있었다.
자주빛 시트에 감싸인채 침대속에 파묻히듯 내려졌을때 나는 이상한 무언가의 정체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머리가 놓여진 베개옆에 한쪽손으로 중심을 잡듯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채 아시리안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아시리안이 좀 이상하다..라고 생각했지만.. 변한건 아시리안의 눈.. 아니,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리잔을 다루듯이 조심스러운 손으로 뺨을 쓰다듬으며 안절부절 할수 없게 만드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물론 그전에 아무렇게나 막 취급했다는건 아니지만.. 틀려, ...
무표정한 장벽이 가로막혀있는것처럼 생각을 읽을 수가 없는 아시리안의 눈빛...
저... 시선......깊은 다크블루속에 출렁이는 형언할수 없는..설명할수 없는..감정의 파도들..
심장이 걷잡을수 없이 파동친다. 이상한 기분이다. 내것이면서 내것같지 않은.. ....
통제를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아시리안의 시선아래서 나는 걷잡을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거야..
왜 그런 시선으로 봐? .. 내가 불쌍해?.. 내가 가엾어?
.....아시리안....네 사랑에 거지같이 구걸하는 내가 한심한거야?..
.........그렇게 보지마, 보지마!!.. 보지마!!!!!!!!!!!!!!!!!!!!!!!
말로 나오지 않는 격한 감정은 금방이라도 입밖으로 튕겨져 나올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채 쏟아져나올것 같은 무언가를 막으려 이를 악문걸로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얼굴까지 양손바닥으로 가리자 머리맡에 베개를 살짝 누르고 있던 손이 점점 힘을 더해가며 아시리안이 내쪽으로 상체를 굽혀오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등에 아시리안의 입술이 천천히 와닿는다.
“손치워”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저항하듯 얼굴을 가린채 고개를 흔든다.
싫어.싫어.싫어. 분명 엉망일테니까.
눈물, 콧물 범벅인...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싫어. 싫어!!
“하은준”
머리위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손으로 여전히 가려진 얼굴에서 눈이 번쩍 떠졌다.
충격을 통제하지 못하는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덜덜 떨려온다.
아,아니야,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마. 죽은 녀석 따위의 이름으로 부르지마..
“아르휜”
틀려, 아르휜은 없어, 없어, 없어!! 말을 해야하는데 벌려진 입밖으로 나오는건 말못하는 사람이 앓는 소리를 내는것같은 신음과도 같은 소리만이 나온다. 걷잡을수없이 파동치던 심장이 어느순간 움직임을 멈춘채 목구멍으로 대신 빠져나오려는지 ... 토해내버리고 싶을 만큼 목안이 꽉 차온다. 숨을 쉴 수 없을만큼 꽉 막혀오던게 입밖으로 터지는 순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아시리안에게 잡혀 올라가고 다른 한손역시 잡혀올라간다.
“아르”
무표정하게 내리깐 시선안에 뭐라고 표현할수 없을만큼 수많은 감정을 담은채 마침내 터져버린 눈물을 참아내지 못하고 끄윽..거리며 울음을 토해내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보지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가슴아픈 시선으로.. 안타까운 시선으로.. 울것같은 시선으로... 나를 보지마.
이제와서 미안해라고 해도.. 절대로 용서안해줄거야. 죽어도 용서안해줄거야.. .
머릿속의 비명과도 같은 울부짖음과 달리 조급한 내 팔은 머리위의 아시리안에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뻗어가고 있었다.
목에 매달리듯이 손을 교차시켜 감싸고 아시리안을 내게 끌어내리고 흐느낌이 새어나오는 얼굴을 내려오는 어깨에 묻고 떨리는 손으로 행여 놓쳐버릴까 매달린 팔에 힘을 주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시리안...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지마, 나도 그런말 안할거야. 안할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