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종장
뚜르르르, 건조한 신호가 울린다. 길게 이어졌지만 그뿐이었다. 간절기 밤공기에 손끝이 곱아들도록 이람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달칵,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 후에 흘러나오는 안내 멘트를 끝까지 들은 후에야 통화를 종료했다.
“…….”
핸드폰 끝을 윗입술에 대었다가 혀로 볼 안쪽을 꾹 눌렀다. 그런 성실맨이 갑자기 연락도 없이 늦는 게 이상하지도 않냐, 사고라도 났으면 어쩌려고. 김세나가 내게 적셔놓은 한 방울 걱정이 곧 먹구름으로 뭉칠 기미가 보였다.
아, 이런 감각 싫은데. 입술을 잘근대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신호가 끝없이 이어질 뿐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는다.
“뭔데, 진짜.”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벽 시간 깊은 골목, 택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콜택시를 부르고 후들대는 손으로 문자를 찍었다.
[어디야? 무슨 일 있어?]
그러자 점이 모여 선이 된 글자 하나하나에서 물비린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발밑이 질퍽거린다. 이 걱정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
기억을 더듬어 도착한 동네는 인적 하나 없이 고요했다. 가로등도 띄엄띄엄 서 있어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낮에 한 번 와봤을 뿐이라 기억조차 불분명하다. 처음 온 곳인 양 낯선 골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며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이람호는 소식이 없었다.
어찌어찌 도장을 찾아낸 것은 편의점 불빛 덕분이었다. 분명 편의점을 등지고 이 방향이었지, 더듬더듬 걸어 도착한 건물은 기억에 남은 것보다 훨씬 검고 초라하게 보였다.
“…….”
더듬어 찾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이 시간까지 도장에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또다시 막막해졌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보았다. 음성사서함으로 세 번째 넘어가니 아무리 나라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아침이 떠오른다. 차고 어둡던 새벽, 운동복 차림으로 돌아서 있던 뒷모습. 골목은 바람에 나뭇잎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고 내 발소리는 이람호의 귀에 분명하게 닿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를 찾아왔으면서 나를 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먼저 다가가 말 걸어주기를 바라서.
그래서 널 찾아왔어, 이번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짤막한 참회의 말이 발아래 깔리고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도장 건물 꼭대기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눈에 스친 탓이었다.
분명 피쉬였다. 형광등 불빛에 섞여 한 조각 흘러나왔을 뿐이지만 알 수 있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고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무작정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알 길이 없었다.
비상계단을 끝까지 오르자 가정집 현관문이 있었다. 저린 무릎을 짚은 채 한참 숨을 고르고 나서야 조금 제정신이 돌아왔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여기가 설령 이람호의 집이라 한들 이람호 혼자 사는 곳도 아닐 텐데 이 시간에 이렇게 갑자기….
이제라도 돌아갈까,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이람호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 여기가 이람호의 집이 맞다면 아버지도 함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했을 테고. 그러니까 혼자 사는 것도 아닌 이람호가 연락도 없이 잠수를 탔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라든가, 한 번 자고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든가, 사귈수록 내가 제 성에 차지 않았다든가, 당장 떠올릴 수 있고 갖다 붙일 수 있는 이유만도 무궁무진하지만.
“아니, 그럼 더더욱 쳐들어가야지.”
에라 모르겠다, 벨을 눌렀다. 찌르르륵, 새 소리가 좁은 계단으로 유난히 크게 울린다. 당연하게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고민하다 한 번 더 눌렀다. 찌르르륵. 그제야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투박하게 묻는 목소리에 잠기운이 가득 묻어 있다. 이람호의 아버지였다. 아이고, 미운털 단단히 박히겠구만. 마음을 굳게 먹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 안녕하세요. 저…, 람호 친구입니다.”
그러자 철컥, 잠금쇠를 푸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이람호의 아버지는 러닝셔츠와 체육복 바지 차림이었다. 깊은 주름이 팬 얼굴에 불쾌함과 짜증과 황당함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지금 몇 시인 줄이나 알아?”
“죄송합니다. 저, 람호 안에 있나요?”
“뭔데? 우리 애가 돈이라도 꿨나?”
“아뇨, 그건 아닌데 람호가 연락도 없이 출근을 안 해서…. 혹시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돼서요.”
“출근?”
남자의 한쪽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아, 세상에. 완전 이람호랑 똑같아. 터지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밤에 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는데….”
말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표정이 시퍼렇게 굳었다. 자칫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얼른 어깨를 움츠리고 소심하게 덧붙였다.
“모…, 모르셨나요?”
“…일단 들어와.”
퉁명스레 내뱉은 그가 손짓했다. 망설이다 머뭇머뭇 따라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집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작은 거실에 주방과 방 두 개짜리 구조였다. 전체적으로 좁지만 물건이 적고 깔끔해서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 람호는….”
“그 방에 있어. 들어가봐.”
“…아.”
“저기.”
그가 가리킨 방향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큰 맘 먹고 문고리를 돌리려는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연락 못 한 거야. 핸드폰 울릴 때마다 내가 꺼버렸거든.”
“어…, 네?”
“애가 어젯밤부터 비실비실하더라니 오늘 저녁때부터 영 맥을 못 추길래 좀 자라고 그냥 뒀어. 감기몸살 같아.”
염치없게도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네…, 감사합니다.”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하고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어딘지 차고 침착한 향이 났다. 겨울나무의 냄새였다.
“…자?”
블라인드 틈으로 가로등 불빛이 조금씩 스민다. 덕분에 침대에 모로 누운 이람호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깊이 잠든 어깨가 일정하게 오르내린다. 가만히 선 채 귀를 기울여보니 숨소리에 조금씩 협착음이 섞여 있었다.
“…….”
물범 랜드에서의 일이 머리를 스친다. 머리가 어지럽도록 풍겨대는 이상한 비린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건 코가 막혀 있어서였나. 살금살금 다가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매트리스는 그 주인의 어깨만큼이나 단단했고 덕분에 이람호의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집에 올 때 어땠더라. 셔틀버스에서 손을 잡아볼 걸 그랬다. 드러난 뺨에 조심스레 손등을 대 보았다가 얼른 떼어냈다. 델 것처럼 뜨거웠다. 맞닿은 살이 내게 뜨겁다면 이람호에게는 차가울 것이다. 아파서 자는 사람을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음….”
그러나 늦은 모양이었다. 다 갈라지고 쉬어버린 목소리가 낮게 새어 나와 가슴이 철렁했다. 슬그머니 들여다보니 이람호가 고개를 조금 들어 나를 보고 있었다.
“뭐야….”
맥 빠지는 첫마디에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조금 내밀었다. 뭐긴 뭐냐, 니 사장이지.
“꿈인가….”
곧이어 흘러나온 말이 조금 귀여웠기에 용서해주기로 했다. 이왕 깨버린 거 열이나 식혀주자. 작정하고 두 손으로 이람호의 얼굴을 감쌌다. 가지런한 눈썹이 움찔 흔들리고 이람호가 조금 더 분명한 시선을 마주쳐왔다.
“…뭐야, 진짜 심태경이네.”
“어, 진짜 심태경인데.”
“어떻게 들어왔어…? 몇 시지….”
느릿느릿 내뱉은 그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재빨리 어깨를 잡아 저지하고 몸으로 눌렀다. 이람호는 힘없이 밀려 쓰러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야, 왜 그러는데.”
“더 자. 오늘 출근 안 해도 돼.”
“응…?”
“야, 너는 이렇게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어제도 좀 멍해 있더만 그때부터 상태 안 좋았던 거야?”
따지듯 묻자 눈만 몇 번 깜빡이더니 그런가, 한다. 그런가, 는 무슨.
“모르겠어. 감기 걸려본 거 너무 오랜만이라 감기가 어떤 건지도 까먹고 있었네….”
“말이 되냐? 마지막으로 앓아본 게 언젠데?”
“어…, 초등학교…, 5학년쯤…?”
이번엔 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단하시다, 그래. 꿍얼대며 잘생긴 얼굴의 관자놀이부터 턱 아래까지를 착착 짚었다. 내 손이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돌토돌하게 걸려드는 저항감에 어쩐지 목 아래가 간질거렸다.
“몇 시야? 잠깐만 쉬다가 나가려고 했는데….”
“신경 쓰지 말라니까. 어차피 텄어. 수도관 터져서 오늘 영업 못 해.”
“수도관? 갑자기 왜….”
설치한 이래 단 한 번도 말썽 피운 적 없이 제 할 일을 잘 해주었던 수도관을 여러 번 팔아먹는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어쨌든 이람호를 쉬게 하는 게 급했으므로 어쩔 수 없지만.
“근데 너…. 정말 우리 집 어떻게 알고 왔어?”
열이 절절 끓는 와중에도 궁금한 건 그냥 넘길 수가 없는 모양이다. 기어코 묻는 말에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말이지, 나는 옛날부터 굉장히 특이한 걸 보는 능력이 있었는데 말야, 너를 찾아왔더니 이 집의 창밖으로 푸른 피쉬 조각이 아른거리는 바람에….
“참고로 이거 꿈이야.”
감추고 싶은 마음, 고백하고 싶은 마음. 시험하고 싶은 마음과 믿고 싶은 마음. 상반되는 충동이 서로 부대끼고 있을 때도 나는 인생의 지침을 따른다. 무조건 농담을 타서. 반반으로.
“사람마다 고유의 아우라 같은 게 있어. 내 눈엔 옛날부터 그게 보였고.”
“…….”
“밖에서 올려다보는데 이 집에서 니 아우라가 흘러나오고 있길래, 여기 사는구나 했어.”
자, 농담 끝. 이제 자라. 가칠한 뺨을 토닥였다. 이람호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피쉬라는 거?”
이번엔 내가 꿈을 꾸나 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눈을 마주쳤다. 가지런한 입술에 걸린 옅은 미소가 사랑스러웠다.
“김세준…, 아니…. 김세나가 말해줬어.”
“…술 마시면서?”
“자기 피쉬는 뭐라더라…, 코…, 무슨 핑크색이라고.”
“…….”
“네가 그렇게 말해줬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았다면서….”
꿈이야, 꿈. 이람호의 피부 아래에서 들끓던 열이 내 손톱 밑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희게 질려 있던 손끝에 붉은 생기가 돈다.
“그 말…, 옛날에는 정말로 안 믿었는데, 태경아.”
“응.”
“지금은 믿어,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 많았잖아.”
평온한 말에 위안이 깃든다.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 모든 시간을 꿈이라고 얼버무릴 때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면 거기서 끝날 잠시 잠깐의 환상.
“얘기를 해줘….”
“…뭘?”
“아무거나, 조금 더. 네가 말하고 싶은 거….”
피쉬는 왜 나를 떠났을까. 왜 나를 버리고 가버렸을까. 떠올리자 서러워진다. 아직도 내 곁에 머물렀다면 지금 이 순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람호의 곁으로 떠도는 아름다운 색을.
“장도리 들고 나 죽이러 왔던 새끼 기억해?”
묻자 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하지, 나 아니었으면 너 큰일 날 뻔했잖아….”
제가 내뱉고도 우스운지 낮게 웃는다. 감은 눈에 맺힌 땀방울이 창에 스민 가로등 불빛을 담고 반짝였다. 이럴 때마다 나는 자꾸만 십 년 전의 이람호를 떠올리게 되었다. 깊고 푸른 빛깔을 달고 운동장을 달려가던 작은 점. 그것은 아마도 무리를 이끌고 서식지를 옮기는 고래의 움직임과 닮아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식은 블랙이었어. 블랙이 뭐냐면…. 달고 다니는 피쉬가 시커먼 색을 띠는 놈들이야. 단순히 색깔의 문제는 아냐. 시궁창에서 갓 건져 올린 물처럼 찐득하게 움직여. 그럴 리가 없는데도 악취가 나는 것 같지….”
나는 이람호가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지금의 그가 진짜 이람호인 건 아닐까. 어쩌면 십 년 전에도 이람호는 이런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송진으로 바닷물을 굳힌 것마냥 단단하고 깊고 푸른 알맹이가 그의 본질이었을 것이다. 그 위로 덧입혀져 있던 것은, 그래, 파도다. 바람이 부는 대로 쓸려오고 쓸려나가는 연약한 파도.
바람은 이제 불지 않는다.
“저번에 너희 학원 근처에서 본 세 놈도 블랙이야. 셋 다였어. 블랙 트리오라니, 그런 건 처음 봐서 엄청 쫄았어.”
“항상 그런 게 선명하게 보여?”
“…아…. 사실 요즘은 거의 안 보여. 예전에…, 박정우가 편의점에서 돈 훔쳤다고 니가 경찰서 갔던 적 있었잖아. 그날 갑자기 사라졌어. 지금은 어쩌다 한 번씩…, 드문드문 나타나.”
이람호가 눈을 떴다. 열에 들떠 축축해진 눈동자가 느릿하게 내 얼굴을 훑는다.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났던 거야?”
무심하게 정곡을 찌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깨를 으쓱이고 이람호의 어깨로 턱을 괴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인지 몰랐어.”
“…….”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건…, 그토록 두려운 일이었는데.”
“…….”
“그걸 몰라서, 남들이 다 약한 거고 나는 아니라고만 생각했었어.”
누구를 만나든, 어떤 대화를 하든 내게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저 그의 곁을 떠도는 피쉬가 일러주는 말을 들으면 그만이었다. 나의 친구는 참으로 친절하고도 진실해서 단 한 번도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내 생은 시작부터 얼마나 비열했던가.
“지금은 어때?”
이람호가 물었다.
“아직도 무서워?”
내가 널 무섭게 해? 그것은 아마도 이람호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꿰뚫어본 것이다. 내가 겁먹고 도망갔던 것을. 그리하여 묻는다. 아직도 무서울 게 남아 있느냐고.
“그럼, 무섭지.”
“얼마나?”
“바다 한복판에서 노를 잃어버린 기분이야.”
“…….”
“한밤중에 고속도로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고.”
“…….”
“현금 달랑 이만 원 들고 종로에서 일산까지 택시 타는 기분이지.”
마지막은 백프로 농담이었지만 이람호는 웃지 않았다. 대신 제 어깨에 달라붙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깨도 손도 가까워진 숨결까지 뜨거웠다.
“그럼 나를 다시 만나려고…. 큰 맘 먹었던 거겠네.”
“말이라고. 내 일생일대의 결심이었어.”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티셔츠가 온통 축축했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씩 쓸어 넘겨주었다. 아파서 약해진 이람호가 새삼스레 반갑다. 이토록 고요하게 갑자기 주저앉은 것이 간 떨리긴 해도.
“다음부턴 예고 좀 하고 아파라. 무슨 사람이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다가 하루아침에 앓아누워버리냐.”
“그냥…, 잠깐 그러다 말 줄 알았지.”
“누구 맘대로? 니 맘대로?”
“자꾸 그러지 마. 니가 그렇게 쪼아대니까….”
뜨거운 손이 허리를 감싸온다. 마주친 눈이 싱글 웃고 있었다.
“바다 한복판에 혼자 남겨진 것 같네.”
“…….”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열이 너무 끓어서 뇌가 녹은 게 틀림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내 이마를 맞대어 보았다. 여전히 델 것처럼 뜨겁다.
“너 약은 먹었어? 병원 가보는 게 낫지 않을까?”
“안 그래도 날 밝으면 가려고 했어….”
“해열제는? 종합감기약이라도….”
“먹었어. 다 먹고 잤어.”
이람호가 뭐라 웅얼거릴 때마다 목덜미로 더운 숨이 훅훅 끼쳤다. 속눈썹이 떨리는 모양을 뺨으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있잖아.”
말을 꺼낸 것은 나였지만 얽힌 시선에 맺힌 욕망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나 감기 옮아도 상관없는데.”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손이 허리를 감아왔다. 당연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입술이 닿을 듯 애매한 거리에서 멈춰 선 숨에 속삭이는 말이 담겼다.
“아버지가 갑자기 내 방에 들이닥치는 일은 잘 없지만…. 이 집 방음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거든.”
“……아.”
맞다. 여기 이람호네 집이고 아버지도 함께 계시지. 잠깐이나마 완벽하게 까먹은 것이 어이가 없어 그만 웃음이 터졌다. 딱딱한 어깨 위로 엎어져 등을 떨며 소리 죽여 웃고 있자니 이람호도 조금씩 키득거렸다. 어른의 눈과 감을 피해 장난질을 도모하다니, 이게 대체 얼마만에 느껴보는 설렘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꿈꾸는 김에 나도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뭘? 이 아닌 응, 이 나오는 걸 보니 정말 이게 꿈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
“우리 고3 때 있잖아…. 너 국대 선발전 나갔던 다음 날에.”
“…….”
“그날 아침에…, 너 혹시 우리 동네 찾아왔었어?”
이람호가 슬며시 눈을 떴다. 어떻게 알았어?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계속 몰랐던 척할걸. 십 년이 지난 나의 외면이 이제 와 이람호를 상처 입힐까 걱정되었다.
“…어, 그랬지….”
다행히 이람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두 눈에 떠오른 것은 그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뿐이다.
“내가 일부러 보고도 못 본 척했던 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응.”
“왜…, 왔던 거야? 나 보러?”
당시 이람호와 말 한 마디라도 나누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람호에게는 그 흔한 미니홈피 하나 없었고, 메일주소나 전화번호는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이람호에게 있어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게 말 한 마디라도 듣기 위해서는 나를 만나는 수밖에 없었겠지.
“응, 너 만나러.”
“…왜?”
“그냥 갑자기 니가 보고 싶더라. 근데…, 생각해보니 너네 집을 모르잖아.”
“…….”
“뭐 그거야 물어물어 찾으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그 상황에 너한테 빌붙으러 간 것도 좀 아닌 거 같았고….”
“빌붙는다고?”
물으며 아예 이람호의 옆자리에 모로 누웠다. 이람호도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사실은 그 얘기가 한 번 더 듣고 싶었어.”
“……?”
“나한테서 좋은 색이 보인다는 얘기.”
“…….”
“그런데….”
열에 들뜬 눈이 스르르 감긴다. 그게 어쩐지 아쉬워서 괜히 손을 옴작거렸다. 피쉬를 잃은 지금, 내게는 하나라도 더 많은 신호가 필요하다.
“그냥 갑자기 다 한심하더라고….”
“뭐가?”
“내가…, 시합에 지고서 빌빌대면서 너한테 찾아가는 내 자신이.”
“…….”
“그 상황에서 너를 만난다고 해봤자, 날 좋아하는 너한테 입에 발린 말 듣고 박살 난 자존심 조각조각 기워놓는 꼴밖에 안 될 텐데…. 그러면 안 될 것 같더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유다. 그보다 놀라운 건 이람호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속을 다 보여줬다는 점이었다. 이런 대답은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다. 그저 내 착각이었다고 말해주길 마음 한구석에서 기대했다. 그런 걸 기대하는 나 자신에게 또한 놀랐다.
“그러면 만약에 그때….”
지나간 일에 ‘만약’을 붙여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멈추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다. 이를테면 지금이 충분히 충만할 때. 과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건 지금보다 좋을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
“내가 너한테 말을 걸었으면….”
“…….”
“네 마음이 좀 나았을까?”
이람호에 대한 말들은 너무 많았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에 섞여 내 안으로 쓸려 들어올 만큼. 십 년을 잊지 못한 것은 그 탓일 것이다. 뱃속에 새겨진 말들은 세월의 침식 앞에서도 자유로웠다.
“애들이 얘기하는 거 들은 적 있어. 대학 파벌 같은 거 때문에…, 원래 네가 이겼어야 맞는 시합인데 그렇게 된 거라고.”
“헛소리야. 핑계지.”
대답은 단호하고 덤덤했다. 순간 말을 잃고 바라보는데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판정 기준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내가 잘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어. 하지만 단순히 상대보다 기량이 떨어져서 자꾸 동작이 커졌던 거야. 결과 자체는 공정했고 어떤 의문도 가진 적 없어.”
“…….”
“그냥 하는 말 아니고 진짜야. 정말로 나는 거기까지였어. 그걸 알았으니까 대학도 안 간 거야.”
어릴 때부터 촉망받던 선수, 열일곱에 전국체전에서 우승한 실력자. 그때 나는 이람호가 전세계에서 태권도를 제일 잘하는 줄 알았다. 이람호라고 달랐을 것 같지 않다. 무엇도 제 눈썹보다 위에 둬본 적 없었을 십 대가 나이 앞자리가 바뀌기 직전 깨달은 현실은 어떤 색이었을까.
“그건 마치….”
“…마치?”
“내가 알고 보니 친자식이 아니었다는 느낌이지.”
꿈에 젖은 효과인가, 이람호는 대단히 나처럼 말하게 되었다.
“친자식은 어디 다른 데에 따로 있었던 거야.”
“…….”
“그런 느낌이었어. 선택받은 게 내가 아니라는 건….”
아, 그렇지. 이람호는 이미 겪었던 일이다. 빚을 감당하지 못한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그 뒤를 따라 어머니도 나가고, 원래라면 그들에게 보호받아야 했을 할머니가 당신보다 더 약한 이람호를 떠안은 채 울분을 토해내면서 그를 키웠다.
그에게 피쉬가 나를 떠났을 때의 심정을 말해볼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위로가 될 것 같지도 않았고, 어차피 그가 나보다 더 잘 아는 마음일 것 같아서.
“람호야.”
그러자 더는 할 말이 없어졌기에.
“우리 여행 갈래?”
뜬금없는 소망이 오래 연습했던 말인 양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 * *
“…그래서 어디 가는데?”
김세나가 질렸다는 듯 물었다. 그러게, 어디 가지. 나는 탁상달력을 깨작대다 말고 우는소리를 했다.
“어차피 오래는 못 가…. 토요일 아침에 가서 월요일 아침에 오는 그 정도나 가능할 것 같은데.”
“이람호 스케줄 맞추느라? 근데 너 가게는 어쩌고?”
“니가 있잖아.”
“누구?”
“너, 나의 십년지기, 이 세상에서 샤넬을 가장 잘 소화하고 엄마 뱃속에서부터 버킨백을 들고나온 것 같은 여자, 고급스럽고 청초하고 아름다우며 새초롬한 내 친구, 우주미녀 김세…,”
“탁상달력 입으로 먹어볼래?”
얼른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잘못했습니다. 고개를 꾸벅이자 김세나가 팔짱을 끼며 흥, 코웃음을 쳤다.
“언제는 내가 가게 봐준다고 해도 됐다 관둬라 하지 마라 하더니 애인이랑 여행갈 생각하니까 대뜸 떠맡기는 거 보게?”
“그러게, 사람이 그렇게 되네.”
“점점?”
“대신 약속한다. 언젠가 니가 애인이랑 놀아나느라 나한테 떠넘길 일이 생긴다면 뭐든 사흘 치 들어줄게.”
새끼손가락을 자신 있게 들어 보였다. 김세나의 얼굴에 짧은 의구심이 스쳐 지났다. 뭐든? 묻는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로 뭐든.
“오케이, 딜. 그래서 어디 갈 건데?”
손가락을 걸고 손바닥도 마주쳤다. 나는 그제야 음, 하며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게, 어딜 가지? 거의 1박 2일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서 적당한 여행지를 모르겠네.”
“그 정도면 여행이라기도 민망하지 않나?”
“바다 보고 싶은데.”
“바다?”
김세나가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예쁜 눈썹을 치켜세웠다.
“웬 바다? 뭐 인천 이런 데 가게? 인천 좋네, 제물포 가서 대하나 실컷 먹구 와라.”
“아니, 서해 말고. 동해나 남해로. 좀 잔잔한 바다를 보고 싶어.”
“그럼 동해네. 주말 꼴랑 쓰는데 남해까지 어떻게 가냐.”
김세나가 자신 있게 내뱉었다. 그렇구나, 주말 꼴랑 쓰려면 동해에 가야 하는구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이내 김세나가 아니다, 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차라리 부산이나 여수 쪽으로 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 기차 타고.”
“그래?”
“서울에서 차 끌고 정동진 가나 KTX 타고 남쪽 가나 걸리는 시간은 비슷해. 다만 기차 타고 가면 이동할 때 피곤한 게 없잖아. 무턱대고 차 끌고 여행 갔다가 운전하는 쪽이 일찍 지치는 바람에 싸우는 애들 적지 않다?”
참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물론 이람호가 두세 시간 운전에 지칠 사람 같지는 않지만, 부담을 덜어줄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여수 가본 적 없어.”
“이참에 가봐. 여수 좋아. 날씨 좋을 때 배 타고 섬 들어가면 엄청 새파란 바다도 볼 수 있어.”
“호오….”
여행을 별로 다녀보지 못했다. 특히 특정한 상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여행은 난생처음이었다. 충동적으로 잡은 계획이지만 어쩐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뭐 준비해야 하지? 기차편 잡고 숙소 잡고 그러면 되나?”
“너 혼자 준비 다 하는 거야? 이람호는?”
“내가 알아서 하라던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
“왜? 걔는 여행 가기 싫대?”
되묻는 말에 그만 멍해졌다. 그 말이 왜 그렇게 되지? 눈을 끔벅이다 열에 들떠 말대답만 간신히 뱉어놓던 이람호를 떠올렸다. 우리 여행 갈래? 그러자.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어디든. 여행 가면 뭐 하고 싶어? 네가 하고 싶은 거.
“…….”
날 너무 사랑해서 예스맨이 된 줄 알았더니 여행이 별론가?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고민에 빠진 나를 보고 김세나가 얼른 손뼉을 쳤다.
“아, 됐어. 생각하지 마. 멋대로 하라 했으니까 멋대로 하면 되지.”
“…응? 어어.”
“다 니 위주로 짜버려. 니가 먹고 싶은 거 먹고, 니가 가고 싶은 데 가고.”
오케이? 하며 제 핸드폰을 꺼내 든 김세나가 날짜와 출발 시간을 입력하더니 일사천리로 기차표를 예약해주었다.
“좋아, 토요일 아침 8시 30분 여수행 KTX, 특실 둘이다.”
“어? 특실?”
“뭐 어떠냐? 처음으로 둘이 가는 여행인데. 이람호 그 덩치에 좌석 좁으면 이코노미 증후군 걸릴 수 있다? 한두 시간 가는 것도 아닌데.”
그것도…, 그런가? 나는 정말이지 아는 게 없다. 생각해보면 매사에 그랬다. 김세나가 돌봐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대로 살았다.
그렇구나. 새삼스레 깨닫는다. 나는 아마도 그렇게 나를 살뜰히 살펴주던 김세나와 곧 이별하게 될 것이다. 내게 이람호가 생겼고, 김세나에게도 새로운 생활이 찾아올 테니까.
“…세나 님.”
“뭐.”
“마지막까지 효도할게요.”
“뭐래냐?”
그것은 대단히 슬프고, 씁쓸하고, 막막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예감이었다.
“오늘 아예 짐을 싸서 가게로 와. 일 끝나고 아침 먹고 같이 용산역으로 가면 되잖아.”
김세나가 권유한 일정 그대로를 줄줄이 읊는 동안 아무 데도 딴지 걸지 않고 듣고만 있던 이람호가 처음으로 응, 그래, 알았어 외의 다른 말을 꺼냈다.
[아냐, 일단 퇴근할 테니 아침에 다시 만나자]
“뭐하러? 괜히 왔다갔다하느라 힘들 텐데.”
[그냥 좀…, 그럴 일이 있어]
“…어, 그래, 그럼.”
어안이 벙벙해져 전화를 끊었다. 내 비장의 리큐르를 두 병째 거덜 낸 김세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아니…, 오늘 아예 짐 싸서 오랬더니 뭐 일이 있다고 일단 퇴근했다가 아침에 다시 보자는데.”
“그래?”
나는 쩝, 입맛을 다시며 미리 챙겨온 캐리어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내 캐리어는 아니고 김세나가 빌려준 물건이다. 대단히 비싼 브랜드의 모노그램이 촘촘히 박힌 가방을 보고 있자니 또 덜컥 겁이 났다.
“…나 그냥 이제라도 어디 가서 캐리어 하나 사 올까봐.”
“뭐, 왜 또.”
“내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거 끌고 다니다간 강도가 날 노릴 것 같고….”
“야, 됐어, 괜찮아. 뭐 그런 걸로 쫄아? 그건 그렇게 비싼 라인도 아냐.”
김세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천만 원대의 옷가지를 두르고 다니는 그녀의 눈에 나는 찌질이 쫄보로 보이겠지만 살면서 십만 원보다 비싼 가방을 내 돈 주고 사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손이 닿을 때마다 가방이 닳을까 무서웠다.
“너한테 뭘 빌려달라고 한 내가 잘못이지….”
“아이고, 그냥 쓰라고요. 내 집에 똑같은 거 무늬별로 두 개 더 있어.”
뒷말은 못 들은 척 투덜거리며 캐리어를 열고 집에서 챙겨온 옷가지를 대충 쑤셔 넣었다. 어차피 2박 여행이고 챙길 것도 많지 않은데 캐리어는 오버였을까. 어디 마트 가서 배낭 같은 거나 살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조심조심 가방을 닫았다.
“또 주의사항 없나요, 세나 님. 여행도 할 줄 모르는 이 중생을 도와주세요.”
“오냐, 잘 들어라. 여행지에서 커플이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다.”
“넵.”
“첫째, 싸우지 말 것. 둘째, 싸우지 말 것. 셋째, 싸우지 말 것.”
“…….”
“좀 빡치는 일 있어도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잘 풀고 넘어가. 여행지에서 빡치는 일 대부분은 집에 와서 생각해보면 별로 화날 일도 아냐. 오케이?”
“넵, 뼈에 새기고 가겠슴다.”
존경의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김세나가 흥, 하며 콧김을 뿜고는 뒤늦게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아니다. 빡치면 성질은 내. 니가 성질내면 이람호가 맞추겠지. 그래야 맞지.”
“응…?”
“왜 니가 참아야 돼? 웃긴다. 참지 마.”
방금 제가 한 말을 두고 화를 벌컥 내는 모양이 귀여워서 픽 웃음이 샜다. 이것도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해서인가, 하나하나 애틋하다.
“잘 다녀와.”
김세나가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 * *
이람호는 약속 시간인 8시가 다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김세나가 예매해준 기차표를 찾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시계를 다시 봤을 땐 8시 15분을 지나고 있었다. 조금 초조해진다. 연락 없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발을 탁탁 굴렀다.
혹시 자나? 전화 좀 해봐야 하나? 액정화면에 엄지를 두드리며 고민하는데 김세나의 말이 머리를 스쳐 간다. 걔 여행 가기 싫대? 이어 불길한 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 바람맞는 거 아냐?
“…….”
내가 잠수 탄 적 있다고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한다든가? 만약 그런 거라면…, 용서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죄가 컸지, 그럼. 그 정도 염치는 있다고.
하지만 고가의 기차표가 손에 있고,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도 있는 만큼 재촉은 한 번쯤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연락처를 불러내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이람호의 이름이 크게 떠오르고 핸드폰이 크게 진동했다.
“어, 깜짝이야.”
떨어뜨릴 뻔한 핸드폰을 고쳐 쥐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디야?]
‘어’와 ‘디’ 사이에 거친 호흡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세상에, 이람호가 숨을 헐떡이고 있다. 사람을 둘러메고 전력질주를 해도 멀쩡하던 체력돼지가.
“여, 여기? 나 여기 대합실인데….”
[역이, 헉, 너무 커서, 어디가 어딘…]
“도착했어? 야, 야. 뛰지 마, 안 늦었어. 지금 뭐 보이는데?”
[편의점…, 이랑, 국수집…]
“어딘지 알겠다.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캐리어를 들고 뛰었다. 거의 입구 쪽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달리다보니 편의점 앞에 핸드폰을 들고 망연히 서 있는 이람호가 보였다.
“람호야.”
소리 높여 부르며 손을 흔들자 반짝 고개를 든다. 동아줄이라도 잡은 양 안도한 얼굴이었다.
“시간은?”
“시간 괜찮아. 지금 가서 타면 적당해.”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쉰다. 관자놀이에 온통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이람호는 어른이 된 이래 처음이었다. 소매를 늘려 잡고 이마를 툭툭 찍어주자 영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한다.
“뭐하느라 늦었어, 늦잠 잤어?”
“…아니, 그냥 좀….”
점점 수상하네. 이람호가 눈을 피한 김에 마음껏 이리저리 살폈다. 색 밝은 니트에 블랙진에 트렌치코트, 완벽한 나들이 패션을 갖춰놓고 웬 등산 가방 같은 걸 메고 있다.
“가방 이게 뭐야, 다른 거 없었어? 아버지 거야?”
“…니 가방도 만만치 않은데.”
“야, 내 가방이 뭐. 이거 완전 비싼 거거든.”
“그래 보인다, 척 봐도 김세나 씨 거네.”
그렇다, 명품 브랜드라고는 알파벳 단위에서부터 관심이 없을 듯한 이람호도 이 무늬가 명품 로고라는 사실은 아는 것이다. 왠지 머쓱해서 등 뒤로 감추는데 쑥 뻗어온 손이 캐리어 손잡이를 채갔다.
“내려가자, 30분 기차라며.”
“…응?”
지금 내 캐리어 대신 끌어주겠다는 거? 어안이 벙벙해서 보다가 뒤늦게 따라나섰다. 훤칠하니 큰 키에 펄럭이는 트렌치코트 자락, 모노그램 캐리어가 한 몸인 듯 잘 어울렸다. 물론 저 등딱지 같은 가방이 거슬리지만….
“표는?”
플랫폼으로 향하는 문 앞에 멈춰 선 이람호가 물었다.
“표?”
“표 내야 타는 거 아냐?”
“…….”
하도 태연하게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지갑을 뒤져 표를 꺼낼 뻔했다. 얼른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그를 앞서 걸었다.
“나 진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
“마지막으로 기차 타본 게 언제야, 너.”
그 말에 이람호가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위로 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는 그대로 말이 없다. 왠지 좀 놀려보고 싶은 마음에 흐, 웃고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람호야,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뭔데.”
“우리 무임승차다.”
그러자 나를 따라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이람호의 얼굴이 퍼렇게 굳었다. 당장에라도 내 멱살을 잡고 어떻게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느냐 따질 것 같았다.
“야, 방법이 다 있어. 인터넷으로 예매 페이지 보면 마지막까지 비어 있는 좌석이 있잖아. 그런 데 가서 앉아 가면 돼.”
“…아니…, 그런 건 좀….”
“괜찮아, 괜찮아. 나만 믿고 따라와.”
좌석 번호를 외워둬서 다행이었다. 플랫폼에 내려서자 얼마 후에 기차가 들어왔다. 곁눈질로 칸 번호를 확인하고 올라타는 동안 이람호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태경아.”
좌석을 찾자마자 얼른 창가 자리에 드러눕다시피 앉았다. 그때까지도 묵묵히 쫓아오던 이람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역시 이거 좀 아닌 것 같은데, 이제라도 표 끊고….”
“저 죄송한데요.”
그때 핸드폰을 쥐고 두리번거리던 여자 하나가 내게 불쑥 물었다.
“거기 제 좌석 같아서요.”
이람호의 표정이 좀 더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터질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고 여자에게 대답했다.
“좌석 몇 번이신데요?”
“여기요.”
여자는 대답 대신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는 동안 이람호는 당장이라도 기차 밖으로 튀어 나갈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만할 때가 됐나, 마음을 접고 지갑을 꺼냈다. 내가 인쇄한 표를 꺼내자 이람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좌석 번호는 같은 거 맞는데, 여기 2호 차예요.”
“네? 어머….”
여자의 핸드폰 화면과 비교해 알려주자 그녀가 한 손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3호차시니까 한 칸 뒤로 가시면 돼요.”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여자가 멀어져가고, 나는 태연히 이람호 몫의 좌석을 툭툭 두드렸다.
“뭐해? 안 앉고.”
이람호가 서슬 퍼런 기세로 내 손에서 표를 채갔다. 뚫어져라 한참을 쳐다보고 나서야 긴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는다. 아이고, 즐거워라.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은근 옆구리를 찔렀다.
“화났어?”
“…….”
“난 간이 너무 작아서 무임승차 같은 거 못해. 해봤자 다 걸려.”
“…이상한 장난을 치냐.”
“너 귀여워서 그랬지.”
그러자 또 한숨이었다. 땅 꺼진다. 허공에서 흐트러뜨리는 시늉을 하자 드디어 시선이 내게로 왔다.
“그러게 왜 늦었는데? 나는 니가 나 바람맞히고 잠수타려는 줄 알았다.”
“그냥 좀….”
“어제부터 뭐 이렇게 그냥이 많고 좀이 많아? 바람 피우냐?”
다다다 쏘아댄 것은 못내 미안한 마음도 들어서였다. 그걸 또 말한다고 믿다니, 정말로 기차 한 번 못 타보고 살았다는 소리 아닌가.
…혹은 이람호가 생각하는 내 인간성에 약간 문제가 있든가.
“그리고, 아무렴 그런 짓을 하겠어?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어? 너 내가 쫌생이같이 기차 무임승차나 하는 인간이어도…,”
“상관없어.”
“어?”
“상관없다고.”
“…어, 그, 그래….”
으흠, 헛기침을 하고 창가로 눈을 돌렸다.
“근데 정말로 기차 얼마 만에 타보는 거야?”
가볍게 화제를 돌려보려 했을 뿐인데 이람호는 또 지고한 고민에 빠지셨다.
“아, 그럼 당장 떠오르는 게 언제야? 기차 탔던 기억.”
“글쎄…, 세 살?”
“…뭐요?”
“그쯤에 탔었대. 기억은 안 나.”
말을 말자. 의자를 뒤로 쭉 젖히고 신발에서 뒤꿈치를 빼냈다. 이람호는 여전히 정자세로 앉은 채 모든 게 신기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뭐라도 물어봐줘야 할 것 같았다.
“세 살 땐 왜 탔는데?”
“추석인지 설인지 외가에 갈 때였대. 우리 외가가 부산이거든.”
여행 후보지 중 하나였던 건 둘째 치고 그러고 보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빚쟁이를 피해 집을 나가고, 어머니가 그 뒤를 따라 나가고…. 아버지는 돌아왔지만.
“어머니랑은 연락 안 하고 살아?”
“응.”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한다. 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실 부산으로 갈까 생각도 했었는데 큰일 날 뻔했네.”
그러자 이람호가 픽 웃었다.
“서울사람 티 낸다, 또. 부산이 무슨 운동장만 한 줄 알아? 여행 좀 간다고 딱 마주치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니가 부산 안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좋고 싫고 할 게 뭐 있어. 기억도 안 나. 그때 말고는 가본 적도 없고.”
출차를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문이 닫혔다. 이어 열차가 부드럽게 레일 위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역을 곁눈질하다 다시 물었다.
“그럼 다음엔 부산 가볼래?”
“그래.”
이람호가 선선히 답했다. 아무래도 김세나 말대로 여행 자체가 싫다거나 한 건 아닌 것 같다. 속으로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정말 만약에…. 부산에 갔는데 어머니 딱 마주치면 어떻게 할 거야?”
굳이 더 캐려고 한 건 아니고 그 점이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누군가가 사는 도시에 갈 때는 막연히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 어쩐지 길 한복판에서 마주칠 것만 같은 예감.
“글쎄…, 못 알아보지 않을까?”
이람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손뼉을 딱 칠 뻔했다. 그러게, 그럴 수 있지.
“못 본 지 20년이 다 돼 가는데…. 얼굴 기억도 안 나. 엄마도 내 얼굴 기억 못 할걸?”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왜?”
“지금도 포털에 니 이름 검색하면 너 사진 나와. 고등학교 때 인터뷰한 영상이나 대회 사진.”
이람호가 아차, 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불행히도 이름이 하도 특이해놔서 다른 기사에 묻히지도 않는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음, 말끝을 길게 늘이더니 그랬다.
“별수 없지 뭐. 안 찾아봤기를 바라야지.”
“흠….”
“그리고 고등학교 때 사진을 봤다고 해서 지금 딱 알아보긴 어렵지 않을까.”
그건 확신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내 기억 속 잠들어 있던 이람호를 생생하게 깨워내, 눈앞의 이람호와 정확히 일치시킬 수 있었으니까.
벌써 한참 전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지독히도 추웠던 겨울, 발밑이 온통 빙판이라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걸어야 했던 어두운 골목길.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나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세월을 건너뛰어 나타난 내 모든 사랑과 수치의 현신 때문에.
“못 알아봤으면 싶어. 이제 와 만난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흠…….”
“한 번은 할머니가 너 이제 엄마랑 살라면서 나를 데리고 버스터미널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
“터미널에 가서 공중전화로 엄마랑 통화하더니 그냥 집으로 다시 왔었어.”
기차는 아직 서울에 머물러 있다. 창밖으로는 변함없이 서울에서의 일상을 지속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지난다. 오늘부터 우리가 지낼 멀고도 가까운 땅이 꿈속인 양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어떻게든 엄마한테 나 보내려 했고, 엄마는 죽어도 못 맡겠다고 한 거 아닐까.”
“…….”
“할머니가 전화에 대고 벌써 버스 태웠다, 이미 보냈다 했던 거 기억나거든.”
이람호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가끔 그게 궁금하긴 해.”
“…….”
“엄마는 부산 버스 터미널에 나가봤을까, 안 나가봤을까?”
나는 그런 건 궁금하지 않다. 그저 그녀가 자신이 낳은 혈육을 버거워하고 도망치고 싶어 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람호를 찾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더더욱.
이람호가 혼자일수록 좋다. 그에게 기대는 사람이 누구도 없는 세상을 원한다. 십 년 전부터 단 한 번도 변치 않은 마음이었다.
“근데 도착역이 여수 엑스포야?”
그때까지 기차표를 손에 쥐고 있던 이람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 급하게 말을 돌린 기색은 아니다. 정말로 그게 궁금했다는 얼굴이었다.
“엑스포…, 그건가? 꿈돌이…? 너 가본 적 있어?”
기차 타는 법도 모르는 서울 촌사람 이람호는 당연히 엑스포도 모른다. 이때 자신 있게 치고 나가 줄줄이 설명해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나 역시 이람호와 지식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도 꿈돌이밖에 몰라. 애초에 엑스포가 뭐하는 건지도…. 티비에서 사람 미어터지는 거 봤던 기억은 있는데.”
“그러게, 나도 뉴스에서 볼 때마다 궁금했어. 저기에 대체 뭐 있길래 다들 몰려가는 거지.”
옛날 같으면 앉아서 궁금해만 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이용할 수 있는 문명의 이기가 있다. 내가 핸드폰을 꺼내자 이람호가 어깨를 붙여왔다. 포털 페이지를 열고 ‘엑스포’를 치니 온갖 기사와 블로그 후기가 쏟아져 나왔다.
“어…, 수족관이다.”
“수족관 보려고 세 시간씩 줄을 선다고?”
“그리고…, 이건 뭐지, 아프리카 전통 농업기구…?”
두서없이 뜨는 사진들은 우리를 점점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수족관은 그렇다 치고, 아프리카 전통 농업기구를 보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선다니.
“박람회…, 같은 거라는데? 세계 각국에서 대표로 참석한 사람들이 자기네 문화상품 전시하고, 뭐 팔기도 하고…. 그런 건가봐…?”
“바자회야?”
신랄한 한 줄 요약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이람호는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겠다는 듯 제가 궁금한 것만 마저 뱉어놓았다.
“그래서 그게 지금도 하는 거야?”
“아닐걸? 한 번 개최하면 끝이래.”
“근데 왜 역 이름이 아직도 엑스포역이야?”
“…그러게.”
물론 나도 웃을 처지는 아니다. 아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니까. 머리를 긁적이는 나를 보며 이람호가 영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너도 나 비웃을 처지는 아니네.”
굳이 짚고 넘어가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참 아는 게 없다. 딛고 선 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벅차서 다른 것은 그다지 해보지를 못했다.
둘이서 함께 하는 기차 여행도 당연히 서로에게 처음이었지만, 혼자 망상했던 알콩달콩한 여정은 서울을 다 벗어나기도 전에 이람호와 내가 곯아떨어지면서 물 건너 사라졌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종착역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입가에 묻은 침을 닦고 나보다 더 숙면에 빠져 있는 이람호를 깨웠다.
“일어나, 다 왔대.”
“…응?”
퍼뜩 눈을 뜬 이람호가 방송을 들으며 현실 파악을 마치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기차여행으로 하길 잘했다 싶었다. 옛말에 천하장사도 눈꺼풀은 못 들어 올린댔지, 밤을 새우고 아침부터 여행길에 오르는 것은 이람호에게도 고된 여정인 것이다.
“아…, 푹 잤다. 개운하네.”
“그러게.”
녀석이 맞장구를 치며 기지개를 쭉 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부석부석한 얼굴이 영 피곤해 보인다.
“일단 점심 먹자. 너 아침도 안 먹었지?”
역사는 썰렁했다. 날씨도 왠지 쌀쌀하다. 어깨를 움츠려 목을 파묻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보자…, 게장 먹을래?”
“…게장?”
핸드폰에 넣어온 맛집 리스트를 보며 묻자 이람호가 느릿하게 두 눈을 깜박였다.
“게장 별로야?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인데.”
“숙소에 짐부터 놓고 다시 나오는 게 낫지 않겠어?”
“그게 숙소가 좀 멀거든. 식당은 택시 타고 십 분, 숙소는 이십 분.”
선착장과 가까운 숙소를 잡느라 그렇게 됐다는 설명까지 덧붙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린다. 택시를 잡고 식당 이름을 대자 기사 아저씨가 고개를 저었다.
“여행 왔어요? 게장 먹으러 가려구?”
“네.”
“그럼 여기 말고 내가 내려주는 데로 가. 여기 데려다주면 손님들이 다 욕하고 나와요.”
그러더니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차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뭐라 말하려다 그냥 이람호와 눈이 마주치고 헛웃음만 지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다.
택시기사가 내려준 곳은 내가 알아본 식당의 건너편 작은 가게였다. 손님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건너편과 달리 테이블 하나 차 있지 않았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미심쩍은 마음을 굳이 감추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둘?”
주방에서 나타난 무뚝뚝한 주인이 짧게 물었다. 예에…, 위축된 채 대답하자 앉으라는 말도 없이 안쪽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한참 눈치만 보다가 적당히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냥 저기로 갈 걸 그랬나?”
창밖을 가리키며 묻자 이람호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점심 먹자고 저 줄을 기다려.”
“하긴 그래….”
“비슷한 재료 사다가 비슷하게 요리할 텐데 맛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난다고. 여기가 나아.”
그 관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패셔니스타이자 미식가인 김세나에게 이끌려 온갖 좋다는 식당에 다 다녀봤지만 어떤 요리를 먹었을 때 투자한 시간과 금전을 온전히 보답 받는다고 느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근데 너 오늘 정말 왜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그냥….”
“그냥?”
“…그냥 좀….”
또 애매한 반응이 나온다. 재촉하거나 말 돌리지 않고 기다려보았다. 이람호는 곤란한 화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갈 요령은 없는 놈이다. 조용히, 끈질기게 지켜보고 있자니 마침내 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깐만.”
그리고는 메고 온 등딱지를 연다. 척 봐도 묵직해 보이더라니 내려놓을 때의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돌이라도 짊어지고 왔나. 호기심에 기웃거리는데 그가 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데?”
심지어 그냥 상자도 아니다. 반짝거리는 포장지에 싸여 리본까지 달고 있다. 그러니까 이거,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모로 보나 가로 보나…, 선물이지?
“나 주는 거야?”
“그럼 파는 거겠냐.”
“왜? 뭔데? 나 생일이야?”
“그냥 기념…, 선물 같은 거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기념? 무슨 기념? 여행 기념?”
“…….”
“우리의 첫 여행 기념? 이 아름답고 말랑말랑한 추억을 기념하기 위한 선물?”
“…아, 쫌.”
인상 쓰는 얼굴을 보고도 웃음만 나왔다. 세상에, 살다살다 이람호한테 선물을 다 받아보네. 당장 포장지를 뜯고 싶은 마음 반, 좀 더 놀리고 싶은 마음 반이라 입이 어느 방향으로도 열리지 않고 근질근질했다.
“뭐냐, 뭔데? 열어봐도 돼? 크기를 보아하니 반지는 아닌데.”
“…반지 받고 싶어?”
“반지는 내가 해줄게, 까짓거. 와, 뭔지 몰라도 기분 좋네.”
실실 웃으며 조심조심 포장을 뜯었다. 이람호는 짐짓 시선을 피한 채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어.”
포장지를 다 벗겨냈을 때 드러난 것은 카메라 박스였다. 양손에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미러리스 카메라라고 쓰여 있었다. 여행 선물이 디지털카메라라니, 너무나 일차원적인 것이 과연 이람호다웠다.
“너 이거 때문에 늦은 거야?”
열어보려던 손을 멈추고 최초의 의문을 기억해냈다. 이람호가 머쓱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 초에 주문했는데 어제까지도 배송이 안 와서…. 연락해보니까 영업소에서 누락됐다길래 오늘 아침에 직접 가서 찾아왔어.”
“헐….”
뭐하러 그랬어, 선물이야 나중에 주면 되지.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얼굴을 떠올리고 괜히 내가 다 미안해졌다.
“어떡하냐…, 난 뭐 준비한 거 없는데.”
“됐어, 그냥 내가 혼자 한 거니까.”
“몸으로 갚을까?”
“그래.”
거리낌 없이 나오는 대답에 소리 내 웃었다. 박스에서 꺼낸 카메라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고 흰색에 클래식한 모양이었다. 곰곰이 내려다보다 문득, 내 인생에서 내 카메라를 가져본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디카 갖고 싶었는데, 그땐 돈이 없어서 못 샀고 나중엔 핸드폰 카메라가 너무 좋아서 살 필요가 없었네.”
“…그랬어?”
“응, 너 도촬하고 싶었거든.”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이람호는 잠시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뭘…, 해?”
“도촬.”
카메라를 들고 찍는 시늉을 해 보였다. 렌즈 덮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참나, 픽 웃은 이람호가 내 손에서 카메라를 가져갔다.
“네 사진 가진 게 없었잖아. 그때 왜…, 엄마 애인한테 필름카메라 빌려서 찍었던 거 빼고.”
당시 엄마가 사귀던 아저씨는 엄마보다 열 살이 어렸고, 오래된 카메라 전파상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어색한 사이에 어렵게 졸라서 얻어낸 카메라를 학교에 가져갔을 때 김세나는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며 신나게 포즈를 취했다. 그런 김세나에게 이람호를 끌고 올 테니 사진을 좀 찍어 달라 했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마뜩잖은 얼굴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주던 김세나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게 억지로 끌려와 카메라 앞에 서 놓고 끝내 거절하지는 않았던 이람호도.
누구도 내게 다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난 내가 그 필름 평생 안 잃어버릴 줄 알았는데…, 살다보니까 어느 샌가 없어졌더라.”
“…….”
“사진도…, 그래서 네가 나한테 두고 갔던 핸드폰에서 그 사진 보고 엄청 놀랐어. 난 잃어버린 걸 너는 갖고 있어서.”
“그거밖에 없었어.”
이람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뭐가? 뒤늦게 수저를 꺼내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좋은 기억.”
“…….”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을 때, 마음에 걸리는 거 아무것도 없이 그냥 즐거운 기억.”
“…….”
“그 사진에 찍힌 그 순간뿐이야.”
이람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떠올려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날은 어떤 날이었지…. 늦겨울이었다. 열여덟의. 몰아치던 한파가 한풀 꺾이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제보다 가벼워졌던 그런 날. 전날 엄마 애인이 가게에 가져온 필름카메라를 구경하다 하루만 빌려달라고 졸라서 얻어낸 아침. 가방에 넣어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이람호를 찾아다녔다. 학교 복도를 물들이는 햇살과 지나는 아이들에게 매달린 각기각색의 피쉬, 하지만 찾아낼 수 있었다. 열여덟의 나는 누군가 나를 지구 밖으로 날려 보낸다 해도 지구에서 이람호가 있는 위치를 단번에 알아냈을 것이다.
- 사진 찍자!
언제나처럼 체육복 차림으로 어슬렁 돌아다니던 이람호를 붙들고 다짜고짜 말했다. 이람호는 뭔 사진, 무슨 개소리야, 됐어, 안 해, 등등 온갖 거절의 말을 구시렁거리면서도 내가 끄는 대로 복도를 헤엄쳐 와주었다.
어쩌면 우리가 딛는 자리마다 물결이 일었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무지개가 물결마다 매달려 발자국 대신 새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람호도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어리고 서투르고 그리하여 아름다웠던 시간이 선명한 색채로 이람호의 어딘가에 새겨졌던 걸까.
“…….”
그렇다면 나는 너무나.
“…너 울어?”
이람호가 다급하게 물었다. 목소리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고개를 젓고 재빨리 휴지를 뽑아 코를 풀었다.
“아, 나 꽃가루 알레르긴가봐.”
“뭐라는 건지….”
“게장 안 나오나? 우리 주문 혹시 안 들어간 거 아닐까?”
괜히 딴청 부리느라 돌아보자마자 주방에서 주인이 커다란 접시를 들고 나왔다. 과장 없이 상을 가득 채울 만큼 큰 접시에 커다란 게가 우글우글 쌓여 있었다.
“…이게 2인분이에요?”
도저히 둘이서 다 먹을 수 있을 양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빙을 끝내고 쿨하게 돌아서는 주인을 향해 묻자 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남자 둘이서 뭔 2인분만 먹어? 4인분은 먹어야지.”
“…네? 아니, 저희 2인분만 시키려고 했는데.”
“농담이우. 그냥 곱빼기로 담은 거니까 배 터지게들 먹고 가셔.”
…그래서 2인분 가격을 받겠다는 걸까, 곱빼기 가격을 받겠다는 걸까, 4인분 가격을 받겠다는 걸까…. 애매한 화법에 이람호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주인이 발길을 돌려 총총 돌아왔다.
“혹시 총각들 페이스북 같은 거 해요? 그런데 사진 잘 찍어서 올려주면 서비스도 더 줄게.”
“예? 게를…, 이거보다 더 주신다고요?”
“사람 많이 오는 커뮤니티 같은 데도 좋고, 부탁 좀 합시다?”
쿨한 건지 장삿속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슬쩍 웃고 카메라를 켰다.
“첫 사진이 간장게장인 것도 나쁘지 않은데.”
이람호도 동의한다는 듯이 웃었다.
결과적으로 게는 모조리 해치웠다. 뿐인가, 볶음밥까지 알차게 비벼 먹었다. 어디서 그런 식욕이 나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문제는 상을 깨끗하게 비우고 일어서면서부터였다.
“…나, 앞으로 평생 게장 안 먹어도 될 거 같아….”
물 한 방울만 더 들어가도 역류할 듯했다. 딱 2인분 가격만 찍힌 계산을 치르고 비틀대며 나오니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주었던 택시기사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때요, 내 말이 맞지?”
그가 너무나 상쾌하게 미소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또 속절없이 그의 택시에 올라타야 했다.
“서울서 왔어요? 친구끼리?”
“네, 뭐….”
“게스트하우스 좋지, 낭만이 있잖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 어디 여행 가도 삐까번쩍한 호텔 같은 데 들어가서 새침하게 잠만 자고 나오고 그러는데 여행은 그런 게 아니지, 모르는 사람 만나서 술도 마시고 그러면서….”
“…네? 게스트하우스 가면 모르는 사람이랑 술 마시나요?”
듣다가 의아해져 얼른 물었다. 택시기사가 나를 돌아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럼, 게스트하우스가 다 그런 거지. 뭔 줄 알았어?”
“아뇨…, 그냥 2인실 있고 위치가 좋길래 예약한 건데.”
이런 건 들은 적이 없는 정보다. 김세나는 왜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내가 혼자 끙끙대는 사이 이람호는 말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숙소마다 다르대. 저녁에 파티하는 데도 있고 아닌 데도 있고.”
“어? 아…, 그래?”
“파티한다고 해도 참석할지 말지는 자유롭게 결정하면 된대.”
그러면서 이람호가 포털의 QNA 게시글을 보여주었다. 딱 나처럼 멍청한 인간이 <낯을 많이 가리는데,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 꼭 모르는 사람이랑 술 마셔야 하나요?>라고 적어놓은 글이 있었다.
“그래도 한 번 해봐요. 재밌을 거야. 그게 다 여행지에서의 재미지, 뭐.”
“예에….”
저희는 호모 커플이고 바라는 것은 여행의 새로운 즐거움이 아니라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라는 것을 생전 처음 만난 택시기사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그쯤에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택시는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한적한 도로를 여유롭게 달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찌르르륵, 새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날씨 좋네.”
이람호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반대쪽으로 눈을 돌렸다. 동시에 멀리 바다가 보였다.
“어.”
바다는 비현실적으로 새파란 색이었다. 맑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짙은 빛으로 내리깔려 있었다. 손을 넣으면 푸른색이 묻을 듯했다.
“배 있다, 배.”
서울 촌놈들에게는 바다에 배가 떠 있는 풍경도 새롭고 신기했다. 이람호도 슬금슬금 엉덩이를 밀어 내 쪽으로 붙었다.
“요트네? 완전 요트가 있어.”
“아, 그거 조오기 앞에 호텔 보이죠. 그 호텔 사장 요트예요.”
택시기사가 친절한 주석을 덧붙여 주었다. 새파란 바다에 하얀 돛을 올린 모양이 그림 같았다.
“저런 배는 엄청 비싸죠?”
“비싸지, 그럼. 웬만한 집 한 채만큼 비싸죠.”
듣고만 있던 이람호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저게? 하듯이. 나는 기다렸다는 듯 놈의 옆구리를 찔러 잘난 척을 했다.
“너 요트 타본 적 있어? 저게 바다에 떠다니는 리무진 같은 거야.”
“타본 것처럼 말한다?”
“…김세나가 그랬어.”
물론 가진 소스가 없어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람호가 픽 웃고 아예 내 어깨로 턱을 얹었다. 순간 앞자리의 타인이 신경 쓰였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이곳은 우리의 터전에서 한참이나 먼 곳이고, 날이 지나면 잊히고 스쳐갈 인연일 뿐이다.
“다 왔어요. 저기예요.”
차를 멈춘 택시기사가 2층 건물을 가리켰다. 언뜻 보면 주택 같지만 영업용 간판을 걸고 있었다.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언덕의 고즈넉한 빨간 벽돌 건물이 나는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아.”
택시비를 계산하고 내리자마자 머릿속에 불이 번뜩할 정도로.
“업종 이걸로 바꿔볼까?”
“…뭐?”
“어떻게 생각해? 게스트 하우스.”
“게스트 하우스가 뭔지도 몰랐던 게 말은 잘하네.”
신랄하게 내 꿈을 짓밟은 이람호가 내 캐리어를 아예 옆구리에 끼다시피 들고 앞장섰다. 아, 왜애, 하며 쫓아가다 말고 멈칫했다. 고르지 못한 비포장도로에서 김세나의 명품 캐리어를 지켜준 듬직한 뒷모습이 감동적이었다.
“2인실 예약하신 거 맞죠?”
숙소 주인은 젊은 여자였다. 많이 쳐봐야 서른 남짓 되었을 듯했다. 사업적으로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꾹 참고 체크인을 마쳤다.
“오늘 금오도 들어가실 거예요? 한 시 전에는 배 타셔야 구경 다 하고 나오실 텐데.”
“아…, 그래요?”
“가실 거면 서둘러서 다녀오세요. 내일은 비 올 수도 있댔거든요.”
친절한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람호를 보았다. 어쩔래? 물론 의견을 구해봤자 내가 끄는 대로 끌려왔을 뿐인 이람호에겐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여행이란 게 이런 거야?”
캐리어를 들고 3층 계단을 오르며 이람호가 물었다.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멍하니 돌아보자 두 눈을 착하게 깜빡인다.
“멀리 와서 숙소 잡고, 근처 구경 다니고, 그런 건가?”
“…그렇…, 지?”
“그런 거면….”
“…….”
“좋네.”
순간 졸아들었던 마음이 금방 눅진하게 풀어졌다. 씩 웃은 이람호가 제일 안쪽 방을 열었다.
“오.”
낡았지만 깨끗하고 좋은 방이었다. 무엇보다 바다 방향으로 커다란 창이 나 있어 마음에 들었다. 짐을 내려놓고 이곳저곳 살펴보던 이람호가 창을 활짝 열었다. 청량한 바닷바람이 방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막상 도착하니 바다 가까이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리어를 눕혀놓고 운동화를 꺼냈다. 주저앉아 신발부터 갈아 신고 있으니 제 짐을 정리하던 이람호가 물었다.
“신발은 왜?”
“편하게 돌아다니게. 산책 코스라고 돼 있긴 한데 좀 빡셀 것 같더라고.”
“흠….”
고민하던 이람호도 등딱지에서 운동화를 꺼냈다. 챙겨오라는 거 알차게 다 챙겨온 모양이 기특하고 귀여웠다.
“빨리 가자, 배가 30분 뒤에 있대. 가서 표 사고 줄 서고 하려면 지금 나가야 돼.”
“배….”
“그래, 너 배도 처음이지?”
물론 나도 처음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치미를 뚝 떼고 앞장섰다. 로퍼를 벗고 새로 신은 운동화는 안 신은 듯 가벼웠다.
“사람 되게 많네, 역은 그렇게 썰렁하더니.”
선착장에 도착해 표를 사자마자 이람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배 앞은 단체관광객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등산복 일체를 갖춰 입은 중년의 여행객들이 벌써부터 술잔을 기울이며 잔뜩 들떠 있는 것이 보였다.
“잘 봐둬, 너와 나의 미래의 모습이야.”
“…진심이야?”
“그럼, 저 나이 되면 패키지로 다녀야지. 그때도 나한테 일정이고 계획이고 다 미뤄버리고 무임승차하겠다는 거야? 난 싫어. 나이 먹으면 가이드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편한 관광할 거야.”
“아니, 내 말은…. 너 저 나이까지 나랑 있을 거냐고.”
지극히 당연한 의문에 멈칫했다. …그러게. 새삼스레 상상해 보았다. 마흔의 우리, 쉰의 우리. 까마득히 먼 미래 같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벌써 서른에 달라붙어 있으니까.
“왜? 너는 싫냐? 가라, 그래. 싫다는 사람 안 잡는다.”
“누가 싫댔어?”
“뭔데, 그럼.”
“감동적이라서 한 소리지.”
말은 잘해, 말은…. 혀를 끌끌 차고 배에 올라탔다. 종일 햇빛을 받은 갑판에서 더운 공기가 훅 올라왔다.
“근데 람호야.”
“뭐.”
“나랑 있다가…. 정 힘들면 도망가도 돼.”
그늘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안쪽 공기가 더 답답할 것 같아 갑판에 있기로 했다. 가만히 서 있으면 곧 바닷바람이 불어와 금방 시원해졌다. 어슬렁어슬렁 나를 따라오던 이람호가 흉터 있는 쪽 눈썹을 또 까딱 치켜세웠다.
“뭐, 누구처럼 잠수 타라고?”
“그래, 내가 한 번은 봐준다.”
“…….”
“사실 니가 오늘 아침에 안 오고 튀어도 봐주려고 했어.”
혹은 차라리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진 만큼의 무게를 이람호에게도 빚으로 지워놓고 싶었다. 받은 것 이상을 상대의 손에 쥐여 놓지 않으면 못내 불안해진다. 내가 가진 것이 없는 탓에.
“서울 가면 반지 사줄게.”
이람호의 팔을 잡아끌며 씩 웃었다. 놈은 벌레 씹은 얼굴로 내게서 한 발 멀어졌다.
“됐거든…. 그러라고 준 선물 아니야.”
“왜, 나랑 반지 맞추기 싫어?”
“넌 왜 말끝마다 이상한 소리를 해? 사사건건 니가 싫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맞는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자꾸 웃음만 나왔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나 눈부시고 평화로운 나날은.
“그럼 하나 해줄게, 끼고 다녀. 그래야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지.”
“만일의 사태가 뭔데….”
“너랑 결혼할 뻔했던 공장장 딸이 다시 찾아온다거나.”
“그건 이미 지나갔는데.”
뭐가 어째? 나도 모르게 손을 놓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야? 그 여자가 왔었다고?”
“지난달인가….”
“뭐? 진심? 너 그거 이제 얘기하는 거야?”
“물어본 적 없잖아.”
“내가 뭘 어떻게 알고 물어봐!”
황당한 나머지 웃음이 터졌다. 이람호는 쩝, 하며 목덜미를 긁더니 별것도 아니란 듯 중얼거렸다.
“그냥 잠깐 얘기하고 갔어.”
“뭘? 무슨 얘기를 했는데?”
“결혼한다고.”
“…누가? 니가?”
“뭐래, 그 사람 말야. 선 본 남자랑 결혼한다고 그 얘기하러 왔었어.”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가 없어 입만 떡 벌어졌다. 아니, 지금 장난치나. 아픈 머리를 짚고 이람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복기해 보았다.
“아니, 그 여자…. 니가 할머니 모셔야 한다니까 그럼 결혼 못한다고 헤어진 거 아니었어?”
“헤어지고 자시고 사귀었던 적도 없어. 결혼 전제로 만나볼까, 하다가 조건 따져보고 파투난 거지.”
“그래, 그게 다인데 뭘 결혼 소식까지 알려주러 와?”
“그러고 싶었나보지.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잖아.”
답답한 나머지 멱살이라도 쥐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럴 리가 있냐. 결혼을 앞둔 여자가 옛날에 썸 탔던 남자한테 결혼소식을 일부러, 그것도 직접 알려주러 온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 새끼는 정녕 입력이 안 되는 건가. 누가 봐도 그건….
“…….”
입만 벙긋대다 그만두었다. 말해봤자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고, 이해한다 해봤자 내 기분만 더 더러워진다. 어휴, 어휴. 가슴을 치며 돌아서자 이람호가 슬그머니 옆으로 붙어 섰다.
“기분 상했어?”
딱밤 한 대만 때려주면 소원이 없겠네.
“말을 말자…. 모르는 걸로 치자고. 난 아무것도 못 들었다.”
“거봐.”
“뭘 또.”
“그러게 지나간 사람 얘기는 꺼내봤자 기분만 더러운 거라니까. 다 이해할 일인 척 쿨한 척은 있는 대로 하더니 니 일 되니까 똑같지?”
“…….”
“앞으로는 내 앞에서 입조심해.”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는데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너 설마 지금 복수한 거야? 아니, 내가 뭘 또 그렇게 옛 사람 타령해댔다고.”
“타령이든 트로트든 뻥긋도 하지 마.”
“예…, 알아모십지요….”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이람호가 흥, 하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야…. 근데 이거 어째 좀…. 기분이 그런데…. 이상하게 훈계당한 느낌이네….”
“애들 교육할 때 제일 효과적인 게 역지사지라는 거지.”
“애들? 애들이라 그랬냐, 지금?”
기어코 딱밤 한 대 때려줄 셈으로 팔을 뻗었다. 손쉽게 피한 이람호가 몸을 홱 돌리더니 펜스를 쥐고 1층 갑판으로 훅 뛰어 내렸다. 저런 미친, 나도 모르게 펜스를 쥐었다가 얼른 놓았다. 나는 저런 곡예 같은 거 부릴 줄 모르지….
“총각! 총각 지금 뭐하는 거야!”
그때 선장실에서 모자를 쓴 아저씨가 부리나케 튀어 나왔다.
“배에서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해! 위험한 거 몰라?”
“…죄송합니다.”
이람호가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나는 펜스를 쥐고 주저앉은 채 온몸을 들썩이며 끅끅대고 웃었다. 아, 통쾌하다, 정의 구현. 난처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이람호에게 혀를 내밀어 보이고 마저 웃었다. 십 년을 놀릴 건수다. 김세나한테 꼭 말해줘야지.
* * *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우리를 당황시킨 것은 서로를 밀쳐내며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는 아저씨들이었다. 알고 보니 산책로 입구까지 셔틀버스 한 대가 아주 느리게 운행하는 게 전부라고 했다. 차를 싣고 온 사람들은 금방 떠났지만 중년의 파워에 밀려 버스에 탈 엄두도 내지 못한 우리는 한참을 덩그러니 남아 있어야 했다.
“렌트해올 걸 그랬나?”
이람호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고민하다 우선 걸어보기로 했다. 애매하게 멀긴 해도 걷지 못할 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저거 봐, 바다 엄청 새파랗다.”
해안선을 가리키며 이람호에게 말했다. 새파란 물감을 있는 대로 쏟아 부은 것처럼 선명한 색이었다. 햇빛을 머금은 파도가 희게 반짝였다.
“괜히들 여기까지 오는 건 아닌가보네, 끝내준다.”
이람호가 기탄없이 감탄하자 괜히 내가 다 뿌듯해졌다. 해는 높이 떴지만 크게 덥지 않아 다행이었다. 먼 하늘을 보며 감상을 곱씹는데 눈앞으로 뭔가 왔다갔다했다. 초점을 맞추고 보니 이람호의 손이다.
“잡고 갈래?”
내 귀를 의심한 것도 잠시, 잽싸게 앞뒤를 훑어보았다. 가끔 오가는 차가 있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선 못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이람호는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내 손을 낚아채 쥐었다. 딱딱한 손바닥에 그만 정신이 다 혼미해진다. 그 손에 이끌려가며 나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민들레 씨라도 삼킨 것 같았다. 명치부터 아랫배까지가 간질간질하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살짝 앞서가는 이람호를 찍었다. 셔터 소리가 났을 텐데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얼굴까지 마주하기는 쑥스러운 듯했다.
“람호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노크하듯 끌어당기고 나서야 돌아보는 얼굴을 찍었다. 찰칵. 놀랍게도 이람호는 아주 조용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밤의 바다처럼.
* * *
코스는 예상보다 훨씬 험난했다. 우리는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중간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깎아지른 기암절벽에 부딪치는 파란 바다는 절경이었지만 밤을 새우고 여수까지 와서 배 터지게 게장을 먹고 곧바로 트래킹까지 하는 일정은 나를 완벽하게 소진시켰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느라 지쳐버린 나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가면서도 이람호는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넌 안 힘들어?”
“아직까진 할 만해.”
척 듣기에도 겸손한 말이었다. 아무리 봐도 앞으로 48시간 정도는 끄떡없이 산을 오를 모습이다. 헐떡이며 쫓아가다 말고 결국 또 중간 지점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우리 대체 몇 시간을 걸은 거야…? 원래 여행 코스라는 게 이렇게 빡센가…?”
“입구까지 오는 게 오래 걸려서 그렇지, 코스 들어온 지는 한 시간밖에 안 됐어.”
그렇다, 실수였다. 그놈의 셔틀버스에 어떻게든 낑겨 탔어야 하는데. 미리 챙겨온 물을 바닥까지 비우는데 매점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학생들, 숙소 여기다 잡았어?”
“네? 아뇨.”
“배 타고 나가야 해? 그럼 지금 빨리 내려가야 될 텐데.”
“…네?”
“나가는 배 금방 끊겨요. 다섯 시면 마지막이야.”
멍하니 시간을 확인했다. 네 시 이십 분을 지나고 있었다. 이람호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두 시간이 걸렸는데, 사십 분 내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와, 이거 완전 드라마네. 완전 그 시추에이션이네. 섬에 들어왔는데 배가 끊겨버렸네….”
“뛰어 내려가서 택시 부르면 갈 수 있긴 할 텐데.”
“너한테나 가능하지, 나는 이 길 뛰어서 못 내려간다.”
험한 오르막길을 곁눈질하며 툴툴거렸다. 맙소사, 배가 끊겨서 섬에 갇힌다니, 하지만 우리는 배만 타고 나가면 미리 돈 내고 잡아놓은 숙소가 있다고요. 이 상황은 그냥 돈과 시간을 날리는 뻘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묵을 거면 나한테 연락해요. 조 아래에 민박 있어.”
매점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민박 전화번호가 적힌 성냥갑까지 쥐여 주었다. 그것을 쥐고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허허실실 웃다가 이람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뛸까?”
“관둬, 민박이 낫지.”
“…….”
“실수했네, 내렸을 때 돌아가는 표를 바로 살걸. 당연히 저녁까지 있겠거니 했어.”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시무룩해진다. 책임감을 느낀 탓이었다. 어째 여기까지 잘 왔다 싶었더니만 이렇게 결정적인 사고를 칠 줄이야.
“…미안.”
“뭐가?”
“시간표 제대로 확인 안 해서…. 사실 나도 배 타고 섬 같은 데 들어온 건 처음이라.”
덧붙이는 말이 변명처럼 느껴져 더 창피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걸 보고 픽 웃은 이람호가 한 손을 내 어깨에 얹었다.
“그게 뭐 미안할 일이야. 둘 다 확인 못 한 건 마찬가진데.”
“…그래도….”
“방부터 잡자. 이왕 이렇게 된 거 방 잡고 놀지 뭐. 풍경도 좋고 나쁠 거 없네.”
뭐라 답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게스트 하우스 숙박비와 놓고 온 명품 캐리어가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방법이 없다. 하늘은 빌어먹게도 맑고, 이람호는 바보처럼 태평한 얼굴이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모양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비수기인데도 빈 숙소가 거의 없었다. 들어간 펜션과 모텔마다 퇴짜를 맞고 나서야 우리는 순순히 매점 아저씨에게 받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받은 중년의 남자는 억양 강한 목소리로 껄껄 웃더니 마침 제일 큰 방 하나가 남았다고 했다.
“큰 방까진 필요 없는데요…. 두 명이라서.”
[비싸게 안 받으니까 걱정 말고 일단 와요]
그러면서 죽어도 방값은 알려주지 않는다. 노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별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언덕을 내려가는 내내 하늘 색깔이 변해가고 있었다. 푸른 듯 보랏빛에 보랏빛인 듯 자줏빛이었다.
“…너 그거 알아?”
수평선에 맞춰 끝나는 스펙트럼을 보고 있다가 문득 물었다.
“나라마다 무지개색을 세는 방법이 다르대.”
“어떻게?”
“우리나라는 일곱 가지 색이라고 하잖아. 근데 다른 데서는 다섯 가지라고도 하고, 세 가지라고도 하고…. 더 많게 세는 나라도 있다고 했던 것 같고.”
“그래? 신기하네.”
무덤덤한 대답이 예전 같으면 참 영혼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안다. 이람호는 본래가 이런 녀석이라는 것을.
“색을 구분하는 눈이 얼마나 좋은가에 따라 달라지는 건가? 나라별로 그 분야에 능숙한 인간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인간도 있었다는 거네.”
그거 봐, 이렇게 제대로 듣고 있잖아. 나는 씩 웃고 걷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좀 불공평한 얘기 같지 않아?”
묻자 이람호도 걸음을 늦췄다. 뭐가?
“맨 처음 무지개를 발견한 사람이 누구였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 대대로 인식할 수 있는 무지개의 색이 제한되는 거잖아.”
“많은 게 꼭 좋은 건 아니지 않을까? 적어도 애들은 색이 최대한 적은 걸 좋아할 거야. 미술 숙제로 무지개 그릴 때마다 선을 여덟 개나 그을 필요는 없도록.”
오, 과연 베테랑 태권도 사범님의 말씀.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관점에 짧은 박수를 보냈다.
“사실 이것도 김세나가 해줬던 얘기야. 김세나는 무지개색을 한 스무 개로 나눌 수 있대.”
“그러고 보니 화가였지.”
이람호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하긴, 오죽할까 싶었다. 나도 아직 김세나가 화가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미술에 대해서는 개뿔 모르지만, 이 나라에서 그림을 배워 ‘화가’가 된다는 게 얼마나 좁고도 험난한 길인지는 안다. 미대를 나오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은데 그림을 팔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개중 한 줌도 되지 않는다고 들었으니까.
김세나는 이제 곧 얼굴을 드러내고 인터뷰에 응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는 고상하고 품격 있는 언어들을 입고 가장 적나라한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괜찮겠어? 내가 묻자 김세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모르겠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그래서 괜찮을 거란 낙관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비관도 없어.
- 나는 내 그림에 내가 입혀지는 걸 원하지 않았어. 타인이 보는 내 모습이 곧 내 그림을 침범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김세나가 자신의 예술관을 내게 풀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가식이나 위선 앞에 두드러기를 일으킬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그런 내게 제 속의 추상적인 부분을 풀어놓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십 년을 못했던 일을 이제야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멀어졌다는 신호일까?
- 그 생각이 바뀐 건 아니야. 다만…. 여태까지처럼 쥐 죽은 듯 숨어 살 정도로 중요하지 않을 뿐이야.
이람호가 내게서 빼앗아간 것들을 생각한다. 아니, 빼앗은 게 아니지. 이람호는 단 한 번도 내가 가진 것을 욕심낸 적이 없으니, 그저 내 손에서 놓아버리게 한 것들이라 해야 맞다. 놓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붙들고 가려 한들 나를 힐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끔 너랑 있으면…….”
곧 노을이 지겠지.
“내가 너무 바보 같을 때가 있어.”
이람호가 아예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단정한 이마에 구름이 물든다.
“네가 내 옆에 없을 때뿐이었어.”
“…….”
“아무것도 겁나지 않았던 때는.”
세상이 우스웠지. 오만한 지루함으로 모든 날을 견뎌내던 때가 있었다.
“나는….”
이람호가 말끝을 조금 길게 늘였다.
“내가 점점 퇴보하는 것 같아.”
사이가 길었던 것은 거창한 언어를 찾아오기 위함이었던 듯했다. 응? 나는 내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얼마 전에 니 얘기 듣고 떠올랐는데, 그래……. 너 찾아갔던 적이 있었지. 열아홉 때도.”
“…….”
“그래도 그땐 그냥 돌아왔었어. 왜냐하면…….”
이람호의 시선이 점점 먼 곳으로 간다. 그제야 나는, 그가 꺼내놓지 않았던 말들을 읽었다.
“아마 열아홉 살의 나는, 올겨울의 나보다 나은 사람이었을 테니까.”
“…….”
“염치를 알았던 거지.”
그것은 진실일 것이다. 초라한 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누군가에게 기대려 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특히.
“근데 뭐….”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위로 대신 솔직한 속내를 꺼내놓기로 했다.
“완벽한 인간은 애초에 연애를 못 하잖아.”
그러나 꺼내놓고도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연애라니. 다행히 이람호는 나를 비웃는 대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겨놓기 시작했다.
“태경아.”
“…어.”
“태경아.”
“아, 왜.”
“바다 보고 갈까?”
“…….”
“금방 노을 질 것 같은데.”
하늘은 어느새 반 이상이 보랏빛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 잡은 그대로 바다를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 * *
“남해에서도 일몰이 보이는구나.”
반숙처럼 흐물흐물 녹아드는 해를 보며 멍청한 소리를 했다. 다행히 나만큼 아는 게 없는 이람호는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는 듯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서해에서만 보이는 줄 알았어.”
“너는 참 상식이 없다….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괜찮지 않나? 상식 없는 인간들끼리 잘 살면 되는 거지.”
산다, 살아간다. 미래에도 쭈욱. 나는 문득 마흔, 쉰이 된 이람호를 상상해 보았다. 마흔의 이람호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쉰이 되면 등산복 일체를 갖춰 입고 목소리가 커질지도 모른다. 이람호가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니 좀 귀여울 것 같았다.
“해가 너무 멀리서 지니까 보이는 건가? 신기하네. 그냥 남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저게 서쪽이라는 게.”
“그러게…….”
이렇게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너 비행기도 못 타봤지?”
해본 적 없는 일들을 일일이 새로 겪고 신기해하면서.
“제주도 가봤다니까. 그새 까먹었냐.”
“아, 아, 맞다. 제주도.”
함께 나이 먹고 늙어가게 될까.
“다음엔 나랑 가자. 나 저번에 갔을 때 홍합탕만 한가득 먹고 바로 서울 날아왔었네.”
“그래.”
그건 상상으로도 너무 행복한 미래다. 그런 걸 정말 내가 가져도 될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태경아.”
신발 아래로 느껴지는 모래 알갱이가 거칠다. 파도가 칠 때마다 싸늘한 공기가 밀려왔다.
“태경아.”
“오늘 자주 부르네, 내 이름 안 까먹었어.”
“심태경.”
“…….”
“나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어.”
이람호는 어느새 파도가 닿을 듯 깊은 곳까지 가 있었다. 새로 사 온 티가 역력한 그의 운동화가 덜컥 젖어버릴까 무서워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뭘?”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거.”
“…….”
“날 그렇게까지 좋아해준 사람은 내 인생에서 네가 처음이었거든.”
“…….”
“그래서 겁내지도 않았어. 너를 찾아갈 결심을 했을 때.”
노을. 살아온 날짜만큼 지겹게도 보았던 노을. 일출은 매일 못 봐도 노을은 빠짐없이 보게 된다. 내 출근길은 보통 저물녘이었기 때문에. 수천 수백 번을 상상했었다. 노을을 등지고 나타나는 이람호를.
상상 속의 나는 대체로 이람호를 매정하게 거절하고 거부하고 밀어냈었다. 십 대의 상처가 온전히 내 것이었다고 믿는 자의식과잉적 판타지였다.
가방을 열어 카메라를 꺼냈다. 한 손에 맞춤한 크기의 미러리스 카메라에는 오늘 하루의 행적이 이미 빼곡히 담겨 있었다. 점심으로 먹은 게장, 게스트 하우스의 간판, 배 티켓을 사기 위해 기다리던 중에 찍은 하늘,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의 이람호.
“람호야.”
불렀지만 이람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멀리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한 번 더 부르는 대신 그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쏴아아, 파도가 먼바다의 바람을 싣고 밀려들었다.
같은 선까지 걸어가니 옆모습이 보였다. 잘 뻗은 콧날에 저물어가는 하루의 흔적이 벌써부터 그립다. 찰칵, 셔터 소리에 이람호가 드디어 돌아보았다. 웃고 있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뷰파인더에 새로운 그림이 떠올랐다. 슬쩍 미소 지은 얼굴이 소리 내 웃고, 손을 뻗어오는 움직임 하나하나를 일일이 카메라에 담으며 나는, 나를 떠나갔던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버지, 다정한 거짓말을 남긴 어머니, 그리고 나의 오랜 친구, 나의 수호자, 나의…….
“…….”
무언가가 톡, 하고 손끝을 건드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키보다 높게 치는 파도인가 했다. 이대로 쓸려나가 죽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무서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인 후에야 나는 그것이…, 이람호에게서 물결쳐 나오는 푸른 피쉬라는 것을 알았다.
- 넌 무슨 색인데?
이람호가 묻는다. 아니, 물었었다. 언제더라, 그래. 양호실에서. 꼴사납게 코피를 터뜨리고 누워 있던 나를 찾아온 이람호에게 피쉬에 대해 말했던 날…….
- 응?
- 사람을 보면 뭐 색 같은 게 보인다며. 넌 무슨 색이냐고.
- …….
- 대답 못 하는 거 보니 구라네.
정말이지 누군가 내게 물어본 적도, 스스로 궁금하게 여겨본 적도 없는 문제였다. 나는 무슨 색일까. 그때까지 나는 피쉬가 사람마다 붙어 있는 독립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었다. 피쉬가 보이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거울을 볼 때 내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데에 의문을 느낀 적도 없었다.
한 번 마음에 박힌 의문은 오래도록 뱃속을 휘저어 놓았다. 너에게 붙은 피쉬는 뭔데? 너는 어떤 색인데?
“…아.”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람호야.”
피쉬는 단 한 순간도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모두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내게 알려주기 위해서, 눈부신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위로하고, 나와 함께 있어주기 위해서.
“이람호!”
파도. 고향을 찾아 돌아가는 열대어들의 행진. 경이롭고 압도적인 풍경에 나는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였다. 셔터를 누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람호에게서 피어난 거대한 파도가 내 뺨을 스치고 바다를 침식하고 있었다. 산란하는 빛무리를 뚫고 어리둥절한 얼굴이 나타난다. 그래서 깨달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이별이라는 것을.
손에서 카메라가 떨어져 나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이람호를 끌어안고 두 발에 힘을 주었다. 피쉬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람호가 휩쓸려 함께 바다로 끌려갈까 겁이 났다.
“왜 그래?”
다급하게 묻는 목소리는 분명하고 또렷하다. 손에 닿은 몸은 그 이상 분명할 수 없는 실체로써 내 품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무엇도 꿈이나 환상이 아니다.
“…그냥….”
그냥 잠깐만 있어. 이대로 조금만 기다려. 그러자 이람호는 착하게도 온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물결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이어졌다. 반짝, 반짝, 햇빛을 받은 비늘이 눈가에 달라붙는다. 그것이 그들 나름의 노크라는 것을 나는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이람호를 꽉 붙들어 안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느새 눈앞에는 한 점의 피쉬만이 남아 있었다. 일정한 형태가 없는 빛무리에 지나지 않지만- 어쩐지 눈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피쉬는 아쉽다는 듯 내 코끝을 톡톡 두드리고 눈가를 쓰다듬었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잘 가.
목소리 없이 입만 벙긋하여 속삭였다. 잘 가. 고마웠어. 잊지 않을게. 네가 나를 사랑했던 것을.
쏴아아,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 발밑으로 밀려드는 포말. 우리는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눈을 감으면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내게 왔던 색을 기억한다. 푸르다 말하기엔 희고, 희다 말하기엔 푸른색. 손끝이 닿는 순간 찌릿한 통증이 일 듯한, 신경이 얼어붙고 살이 썩어들어 갈 듯한, 나를 괴사시킨 후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홀로 고고할 듯한 그런 색.
“태경아.”
“…….”
“이제 됐어?”
이람호는 뭘 알기나 한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아예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실, 가장 명징한 형태의 이별 앞에 내게 찾아온 사람이 이람호인 것은 무슨 의미일까.
람호야, 우리는 둘 다 낙오되어 있던 사람들이지.
조심스레 두 눈을 떴다. 날은 완전히 어두웠고, 언덕 위 민박들의 불빛에 희미하게 드러난 이람호의 얼굴은 깨끗하다. 곧은 눈, 어린 날에 너무나 좋아했었고 이제는 너무나 사랑하는.
환상은 없다. 오롯이 혼자인 나와, 어떤 빛도 입지 않은 네가 존재할 뿐. 몸을 조금 떼어내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람호야.”
“나도 내 이름 안 까먹었다.”
“반가워.”
그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씩 웃자 이람호는 영문을 모르는 눈을 하면서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래.”
이 밤이 끝나고 아침이 오면.
“반가워.”
다시 한 번 이 말을 할 수 있겠지.
우리는 바닷물 섞인 모래를 밟고 돌아섰다. 모래투성이가 되어버린 카메라를 어깨에 건 채 장난을 들킨 어린애들처럼 웃었다. 미래는 몰라. 그래서 낙관도 비관도 할 수가 없어. 다만 십 년을 뛰어넘어 붙잡은 이 손이 언젠가 내게 또 다른 의미가 될 것을 믿을 뿐이지.
바다는 해를 삼키고, 피쉬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둘만 남은 넓고 깊은 바다, 나는 마주 쥔 손에서부터 돋아난 지느러미가 먼 그리움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