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버 보이 (Lover boy)
1화
그 날은 지독하게도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그렇게까지 온도 높은 날은 아니었다. 뜨겁게 느껴졌던 건 여름날의 온도 때문이 아니라,
고등학생 때부터 항상 내 옆에 있던 그 아이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 아이의 곁에 있기 위해 노력했다. 아마 내가 졸졸 쫓아다녔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 같았다.
지독하게 약한 체력임에도 불구하고, 전학을 오자마자 그 아이를 따라 농구부에 들었다.
처음엔 너같이 약한 애가 어떻게 운동이냐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표정이 어찌나
웃기던지.
다른 사람들은 다 걱정스럽게 쳐다봤지만 그래도 그 아이 만큼은 날 진심으로 응원해줬던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와 달리 그 아인 인기가 많았다.
특히 밸런타인데이 때는 교실 뒷문이 다른 반 여자애들로 종일 붐볐다. ‘요즘에 누가
편지를 쓰고 고백을 해?’라는 나의 고전적인 생각과 달리, 여자애들은 그 아이의 핸드폰
번호라도 알아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었다.
덕분에 그 옆에 있던 나까지 여자애들의 심부름을 해야 했지만, 그 덕분에 그의 취향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단 음식을 생각보다 안 좋아한다는 것과 특히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를 보내는 행동은 딱히 이 아이에게 호감을 살 만한 행동은 아니구나, 정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부러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감정을
깨닫기까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토록 부러워하고 질투심을 느꼈던 이유는 그 아이가 아니라, 고백할 수 있는
여자애들이었다.
나도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그때 그렇게 떠나진 않았을 텐데….
***
“강이태?”
누군가가 내 뒤통수로 큰 쇠망치를 내려찍는 기분이었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느려진 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한껏 시끄럽게 달아오르던 술집의 분위기는 나의 한마디로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로 바뀌어버렸다.
오랜만에 학교에 복학해 학기가 시작하기 전, 동기들 얼굴 좀 익혀볼까 싶어 나왔더니….
정말 생각도 못 한 인물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괴물이라도 본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도 적잖게 놀랐는지 말없이 멍한
표정으로 날 쳐다볼 뿐이었다.
오랜만이야. 못 본 사이에 키 좀 자란 거 같다? 옛날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아직도
사귀고? 그때 너 인기 완전 많았잖아. 지금도 인기 많지? 스타일도 멀끔한 게 여자애들이
좋아할 것 같은 스타일이네. 좋겠다? 인기 많아서.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정적이 이어졌고, 나는 머릿속으로 대본을 짜내기 급급했다.
“유하진?”
반사적으로 내 이름이 불리는 그의 입술에 초점을 맞췄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5년. 5년 만에 그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게 뭐라고 또
기분이 좋았는지….
나는 점점 올라가는 입꼬리를 있는 힘껏 말았다. 꾹 깨문 입술이 괜히 간지럽게 느껴졌다.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보는 사람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
눈치 빠른 현우 형이 꽤 길었던 정적을 깼다. 나는 평소에도 말주변이 없어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고민 끝에 한마디를 내뱉는 편이었다. 그 덕분에 느리고 둔하다는 말은
초등학생 때부터 달고 살았고, 애들한테서 치이는 게 일상이었다.
“아뇨. 그냥….”
한참 생각했던 대사 중 하나를 읊기도 전에 강이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이젠 아는
사이도 아니라는 뜻인가?
그는 유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고,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훑어봤다. 조용했던 테이블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제서야 나는 동기들 얼굴을 차근차근 둘러보며 사회화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기들이라고 해봤자 1학년 때 잠깐 본 낯익은 얼굴들뿐이었다. 사실 내 성격상 ‘친한
동기들’은 있을 수 없는 타이틀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아웃사이더. 그게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토록 시끄러운 술자리는 2년 만이라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나는 애써
웃으며 현우 형의 옆자리에 앉았다.
복학생들은 이런 분위기에 잘 못 낀다던데. 딱 날 두고 나온 말 같아서 괜히 머쓱했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강이태는 옆에 앉은 선배와 빈 술잔을 채우기 바빠 보였다.
근데 너가 왜 여기 있어?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내 옆에 앉은 현우 형이 대신 대답해줬다.
“올해 우리 학교로 편입했대. 2학년이라는데… 너랑 같은 학년이지?”
“네. 1학년 마치고 복학한 거니까….”
가끔 이 형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종업원이 건네준 소주잔을
양손으로 들고 시선은 소주병에 고정했다. 그러자 현우 형은 한 손으로 갓 딴 소주병을
들어 내가 들고 있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신입생 때 나였다면 소주의 쓴맛을
질색했겠지만, 지금은 뭐든 상관없었다. 빨리 취해 이 분위기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만큼 지났는지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잔을 비워갔다.
대학가 자취촌의 반지하에 위치한 술집. 환기라곤 갈라진 시멘트벽에 두세 개 정도 달린
환풍기로 하는 것이 다였다. 그 덕분인지 쾌쾌한 먼지 냄새와 술 냄새가 섞여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울렁거리는 건 내 위장 속뿐만이 아니었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건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한참 떠들던 동기들은 소주잔보다 큰 맥주잔을 가져와 테이블의 가운데에 올려뒀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술 게임의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나는 흔들리는 시야를 붙잡기
위해 미간에 잔뜩 힘을 주었다. 복학하자마자 한껏 달아오른 술자리에서 토를 하는 둥
동기들한테 내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신입생 때 선배들과 어울려야겠다 싶어 술 게임을 검색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2년 이상
흘렀으니.
술 게임은 이미 바뀔 대로 바뀌어 정신 못 차리면 10잔까지 마셔야 될 기세였다. 처음
들어보는 술 게임에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이게 뭔데?만 외칠 뿐이었다.
당연히 나는 벌칙에 걸려버렸고, 그들은 들뜬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다양한 술이
섞인 잔을 건넸다. 유리잔을 타고 넘쳐흐르는 술이 보기만 해도 독해 보였다. 술로 가득
채워진 잔이 내 얼굴 앞에 들이밀어지자 코끝으로 독한 알코올 향이 풍겨왔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저으며 입을 막았지만 한참 달아오른 분위기에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유리잔 가득 채워진 술이 꽤나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얘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강이태는 몸을 일으켰고, 그 긴 팔을 대각선에 위치한 내 자리까지 뻗었다. 그리고는 내
손에 있던 그 위협적인 알코올을 빼앗아갔다. 날 기대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동기들은
강이태에게 야유를 보냈다. 동기들과 이태는 생각보다 꽤 친한 눈치였다.
하긴 강이태가 보통 친화력은 아니지.
“남자애한테 무슨 흑기사야? 재미없게.”
“복학생 신고식도 모르냐?”
이태는 동기들의 야유 속에서도 웃음을 지으며 그 독한 술을 원샷 했다.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애들은 이미 이태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은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무난하고 착한 성격에 그렇다고 너무 바보 같지도 않은, 배려심 깊고 매너가 항상 몸에
배어있는 그런 남자.
강이태 그 자체를 설명해주고 있는 말이었다.
어느새 복학생 신고식은 편입생 신고식이 되어 버렸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어리바리하고 느린 나보단 이태에게 술을 먹이는 편이 훨씬 재밌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8명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긴 쉽지 않은데. 나는 부러움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그대로 내 앞에 있던 빈
소주잔을 혼자 채워갔다.
“청승맞게 이런 자리까지 와서 혼술이야?”
“하하….”
방금 채워진 술잔에 현우 형의 잔이 맞닿았다. 챙 - 하고 부딪히는 잔 소리가 시끄러운
술집에선 유독 튀게 들려왔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잔을 조금씩 천천히 비웠다.
청승맞게… 맞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와 가장 잘 어울리고, 날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
넌 왜 이렇게 청승맞아 보여? 자신감 좀 가져. 왕따야? 사회성 좀 길러.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였다. 난 1학년이 끝나자마자 군대로 현실도피 해버렸고,
그곳에서도 적응하느라 꽤나 애를 썼다.
눈치 없이 선임들이 한 짓을 그대로 말한다거나, 생각 없이 바른말을 해버려 사회
부적응자라고 욕을 먹기도 했다.
복학하고 나서는 남들과 같은 대학생활을 해보고 싶었는데,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렇게 무너지긴 싫었다.
하필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강이태라니…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게 돼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죄인이 된 마냥 양손으로 작은 소주잔을 쥐고 한 모금씩 들이켰다. 나는 곁눈질로
대각선에 앉은 이태를 슬쩍 훑어봤다.
그의 양옆으로는 동기 중 제일 시끄럽고 말 많은 술꾼 한 명과 과대로 활동하고 있는 선배
한 명이 앉아있었다.
오른쪽에선 술꾼이 강이태에게 건배를 권하고, 왼쪽에 앉은 과대 선배는 쉴틈 없이 그의
빈 잔을 채워줬다.
너도 참 딱하다….
그렇게 반쯤 넋 나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던 그때.
그도 도망칠 구석을 찾고 있던 건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던 중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쳐버린 것이다.
나는 서둘러 그의 눈을 피했고, 눈앞에 놓인 소주잔을 한 번에 비워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이라도 시키려는 듯 시선을 잔에 고정시킨 채, 현우 형 앞에 놓인
소주병으로 손만 쭉 뻗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취했냐?”
“아…아니요. 형 저랑 짠해요.”
입 밖으로 무슨 말이 나가는지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술잔이 채워지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현우 형의 앞에 놓인 빈 잔에 건배를 해버렸다. 머리끝까지 얼굴이 빨개져
열이 올랐다. 몰래 쳐다보고 혼자 생각하고 있던 게 이태에게 들킨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 나이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5년이나 지났으니까 지금 정도면 강이태를 봐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3일 전에 했었다. 정말 잠깐이었지만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지 않나?
어릴 때 싸우거나 서먹해진 친구를 몇 년 후 만나면 다시 친해질 수 있을 것 같고 다 잊고
말을 걸 수 있을 거라 확신이 들 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못했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놈이 무슨….
구석에 쭈그려 앉아 친한 사람이라곤 같은 학번인 형 한 명밖에 없고, 혼자 술이나 마시는
나. 그에 비해 이제 갓 편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동기들과 친해진 강이태.
이런 느낌을 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비참한 기분을 아무한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상대가 강이태라면 더더욱.
나는 눈썹에 힘을 준 채 가득 채워진 술잔을 마저 비웠다. 괜히 심술부리고 삐뚤어져 혼자
술이나 마시는 꼴이 다른 사람에겐 실연당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강이태가 내 존재를 몰랐으면 좋겠어.
제대로 고백한 적도 없는 놈이 이런 생각해서 뭐하지. 나도 참 답 없는 새끼네.
이런 생각들이 5년이나 지난 지금은 안 들 거라 생각했다. 5년이면 모든 걸 잊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거만한 생각이었다.
***
혼자 생각이 많아질 때면 무거워지는 마음을 버티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낸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주사는 술에 취하면 혼자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잠깐 한눈팔던 현우 형이 우는 날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을 서너 장 뽑아
나에게 건넸다.
“이 새끼 왜 울어?”
“왜 혼자 술 마시게 놔뒀어? 얘 취하면 우는 버릇 있잖아.”
술집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큰 음악 소리 사이로 형들의 말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평소에
안 마시다 갑자기 마셔서 그런지 손끝이 저릿한 게 느껴졌다. 누군가 옆에서 날 부축하는
것 같았고, 그에게 기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분명 다리에 힘을 줬는데도
비틀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일렁이듯 흔들리는 시야가 어지러워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간간이 들려오던 사람들의 말소리는 웅얼거리는 잡음으로 바뀌었고,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울려대던 술집의 음악 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잠깐만….”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길거리에 멈춰 옆에 보이는 기다란 회색 전봇대를
붙잡았다. 그제서야 쾌쾌하고 더러운 지하 술집을 탈출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초봄이라 그런지
밤바람은 생각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진동소리마냥 귓가에서 울려대던 낮은 목소리가
강이태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뜨거운 얼굴이 더 뜨거워져 터질 것 같았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그것도 혼자….”
빨개진 얼굴에 손등을 갖다 대며 멍하니 고개를 숙였다. 술에 취하면 평소보다 행동이 더
느려지고, 말도 어눌해진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 쓸데없이 충실해져 솔직하게
말을 내뱉는다. 이 사실을 꼭 술에 깨고 나서야 깨닫는 게 함정이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의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코끝이 빨갛고, 눈도 풀린 게
꽤나 웃겼는지 강이태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니가 여기 있는 거야?”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줄 알았는데 그대로 거르지 않고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살짝
찌푸린 표정에 어눌한 발음이 내 생각에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고, 무해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술기운 덕분에 얼굴이 빨개진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뜻밖의 솔직한 언행에 강이태도 적잖게 놀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 없이 날
쳐다봤다. 나는 혼자 웅얼거리며 투덜댔고, 이태는 전봇대에 기댄 나를 부축했다.
약 6센티 정도 나는 키 차이에 그의 허리가 살짝 굽어졌다. 나에게 키를 맞추려고
허리까지 굽히는 모습이 묘한 부분에서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지금 상황이 우습고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표정에 기분 드러나는 건 그대로네.”
“너도 인기 많은 건 그대로면서….”
나는 그의 말에 최대한 퉁명스러운 말투로 받아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강이태를 신경 안
쓰는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알코올만큼 사람을 솔직하게 만드는 약은 없는 법.
살짝 당황한 그는 내 말이 끝난 후, 어떤 말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취한 상태인 내
머리로는 정상적인 뇌의 회로로 말을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나는 마냥 좋다는 듯 실실
웃으며 그의 발에 맞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느리고 둔한 반응에 그도 직감한 건지 내 뺨을 한 손으로 가볍게 치며 말을 이었다.
“너 자취방 어느 쪽이야? 이쪽 맞아?”
“으응….”
술자리는 항상 피곤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친해져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 말이
끝날 때마다 다음엔 무슨 이야길 이어갈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게 나에겐 너무
힘들고 익숙하지 않은 활동이다. 술에 취해 행동이 느려지는 건 감각이 마비되는 것처럼
무뎌지고, 심한 졸음이 몰려온다.
“야… 너 여기서 자면 어떡해. 정신 차려.”
다리에 힘이 풀려 나도 모르게 그의 팔에 기댔다. 179센티의 남자가 온몸에 힘을 푼 채로
기대니 그만큼 무거운 짐이 없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가까스로 힘을 줘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비틀거리며 익숙해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다행히 1층이라 무리 없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틀거리는 날 부축하느라 힘을 다 쓴 건지 이태는 숨을 몰아쉬며 복도 벽에 기댔다.
5초 정도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몸을 만지작거렸다.
“…뭐야 갑자기….”
“열쇠 좀 찾을게.”
103호라 적힌 철문 앞에 기대고 있던 나는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고, 내 몸을 더듬고 있는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
열쇠 하나 찾는 것뿐인데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얼굴이 달아오른 건 술 때문이라고 둘러대면 되는 문제였고, 이제 내 손으로 가방을
뒤적여 열쇠를 찾은 다음 문을 열면 되는 거였다.
“가방….”
“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속이 울렁거렸다. 딱히
강이태를 보고 토가 나온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갑자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니까 술기운이 위로 확 솟는 느낌이
들었다.
위장 속을 채운 각기 다른 술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토까지 하면 진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겠지. 술에서 깨는 순간 그대로
휴학신청서를 쓰게 될 거야….
잠깐만. 열쇠 가방 안에 있어.
그 짧은 한마디를 하려던 것뿐이었다. 결국 난 뜨겁고 울렁거리는 속을 참지 못하고 왈칵
쏟아내 버렸다.
그것도 하필 강이태의 하얀 셔츠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