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 셔츠 얼마야? 돈으로 줄게.”
“아니. 그렇게까지 받아낼 생각은 없었는데….”
“그게….”
하진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습관처럼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망설이던 끝에 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피곤해서… 세탁기에 넣어놓고 안 말려서….”
“아… 그래?”
강의실 문을 막고 서있던 이태는 그의 말을 듣고 오히려 잘됐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옅게 지었던 미소를 헛기침 몇 번으로 서둘러 감췄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내가 내일 너희 집으로 갈게. 그때 줘.”
“아… 아냐!! 그냥 돈으로 줄게.”
한참 강의실 뒷 문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중 강의실을 나가려던 교수님이 우리
쪽을 보며 말했다.
“학생들 거기 계속 있을 거야? 있을 거면 뒷정리 하고 나와.”
“네. 지금 나갈게요.”
“…나중에 연락해. 굳이 우리 집까지 올 필요 없어….”
나는 못 이기는 척 다시 지갑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고, 그를 지나쳐 먼저 강의실을
나와버렸다. 내 일정에 대해 하나하나 캐묻는 강이태에게 화났다기보단 그와 같은 자리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텅 빈 복도를 거쳐 캠퍼스 정문을 나설 때까지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문을 지나 자취방
방향 쪽으로 가려던 참에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걸음을 멈추자 뒤따라오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쓰고 있던 검은색
캡모자를 다시 고쳐 썼다. 그리고는 괜스레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내 뒤엔 강이태가 멀뚱히 서 있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그는 한 치의 당황 없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당당함에 할 말을 잃은 나는 어이없는 웃음으로 답했다.
“왜 쫓아와?”
“아까 카페 간다고 하지 않았어? 이쪽은 네 집 방향 아냐?”
아니…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없이 불만을 드러냈다. 그런 날 내려다보면서
웃음을 짓는 그가 괜히 얄미워 보였다.
나랑 대체 뭐하자는 거야.
나는 강이태를 지나쳐 보란 듯이 자취방 건물 옆에 있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는
4개월이나 남은 여름을 벌써부터 대비하는 건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으로 오한이
들기까지 했다. 텅 빈 카페 안을 훑어보던 나는 카운터 왼편의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았다.
창가 자리에 앉은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내 뒤를 따라 강이태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원래 카페에 올 계획이었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 바로 뒤 테이블에
앉았다.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카페 점원 위 쪽에 위치한 메뉴판을 건성으로 한번 훑고는 미리
정해둔 메뉴로 주문했다.
나는 휘핑이 잔뜩 올라간 아이스 카페모카를 시키고, 살짝 딱딱한 등받이가 있는 원목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곧이어 일어난 강이태는 주문을 끝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 시선은 핸드폰 화면에
고정된 반면, 고정되어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내 뒤에 앉은 강이태에게로 향해 있었다.
애초에 날 따라 카페까지 왜 쫓아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제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사라지더니, 지금은 알 수 없는 행동으로 날 신경 쓰이게 만들고 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1시간이 지나도록 현우 형은 오지 않았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
정확히 2시간 20분째. 두 시간 전부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빨간색으로 깜빡이는 배터리를 보고 있으려니 더 이상은 못 참을 것 같았다. 아마 인내심
테스트도 이것보단 힘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두어 번 크게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카페모카를 빨대로 쭉 들이켰다. 녹은 얼음에 섞인 카페모카의
쌉싸름한 커피 향이 찝찝하게 입 안을 맴돌았다.
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지? 미행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행이야.
이대로 있다간 제대로 된 이유도 모른 채 5시간이고 6시간이고 이 카페에 눌러앉을 것만
같았다.
나는 어느새 얼음만 남아버린 빈 컵을 양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플라스틱 컵을 감싸고
있던 두꺼운 재질의 컵 홀더는 표면에 맺힌 물방울에 젖어 잔뜩 눅눅해져 있었다. 컵
표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 이 상태로 시간을 버리긴 아까운 것 같았다.
참다못한 나는 금방이라도 카페 밖으로 나갈 손님처럼 벌떡 일어나 빈 컵을 카운터 위에
올려뒀다. 카페 문 쪽으로 향하던 걸음은 그대로 강이태의 앞에서 멈췄다.
“너 여기서 뭐 해?”
“…뭐하긴. 커피 마시고 있지.”
강이태가 지금 하는 행동들이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거였다면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욕설들이 들끓었지만 나는 최대한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낙서 가득한 그의 노트를 덮어버렸다. 멀뚱히 날
쳐다보고 있던 강이태의 눈빛에 힘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의 강이태와 나의 정황을 대충 파악해보자면….
지금은 생각하기도 싫은 고등학생 시절 짝사랑이, 복학하고 나니까 우리 학교로 편입을
했고, 갑자기 느닷없이 날 미행하고 있다.
“날 미행하고 있는 건 아니고?”
“…현우 형은?”
애초에 강이태는 내 얘길 귀담아들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점원밖에 없는 한적한
카페 안을 슥 훑어보고 나서야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자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날 보던 그는 ‘왜 그래? 형은 안 온대?’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뿐이었다.
나는 허탈한 웃음 섞인 한숨을 내뱉었고, 평소엔 절대 볼 수 없을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한테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밖엔 그의 이상한 행동들이 해석되지 않았다.
“너….”
“너네 여기서 뭐 해?”
그때,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변명거리를 더 생각해 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강이태는 왜 여기 있어?”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못 온다 했던 현우 형이 어쩐 일인지 우리 둘 앞에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모든 생각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극심한 분노상태의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닥치면 제대로 된 대화가 힘든 것처럼. 그게 딱 지금의 내 상황이었다. 형은 카페에
오기 전 나와 얘길 맞춘 것처럼 행동했다. 만약 내가 형에게 ‘형 여긴 웬일이에요? 오늘 못
오는 줄 알았는데.’처럼 눈치 없는 말을 내뱉었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서로 뚫어질 듯이 노려보는 둘 사이에서 나는 섣불리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강이태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살짝 거만한 자세로 형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만큼은 인상
좋아 보이는 건실한 청년 흉내를 내고 있었다.
“형 늦으셨네요. 하진이가 얼마나 형을 기다렸는데.”
“아… 됐고. 넌 여기 웬일이야?”
이미 이태의 목소리를 귀에서부터 걸러내는 것 같았다. 형은 누구보다도 좋고 싫음의
의사 표현이 정확한 사람이다. 분위기가 싸해질 정도로 강이태를 몰아붙이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게 됐다. 내 몫까지 대신 화내주는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였다.
“얘한테 볼일 있어서 온 건데… 굳이 형한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방금까지 나한테 캐묻던 놈이 뭐라는 거야….
게슴츠레한 눈으로 강이태를 흘겨봤다. 그는 지금 나보다 현우 형이 거슬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랑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얘기 중이었으면서 뭘 그렇게까지 이를 가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이태는 한껏 여유로운 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전투태세로 현우 형을 보고 있었다.
내가 이태를 본 지 5년이나 지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항상 남들 앞에선 좋은 모습만
보이던 그가 이렇게까지 자기 할 말 다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카페 점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카페 입구 앞을 세 명의 장골들이
막고 있으니 점원 입장에선 곤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세 명의 눈치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던 나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양손을 뻗어 내 양옆에 서 있는 두 남자의
팔을 꽉 잡아당겼다.
“일단 좀 나와봐요. 둘 다 카페 앞에 서서 뭐하는 짓이에요….”
무거운 전면유리문을 밀고 나가자 밖은 봄이란 것을 말해주듯 3층 정도의 단층 짜리
건물들 사이로 뻗은 벚나무 꽃잎들이 휘날렸다.
지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봄이라니.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둘을 보며 저절로 좁혀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억지로 웃음을 유지하느라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깊은 한숨을 푹 쉬던
나는 허리를 짚은 채 될 대로 되라는 듯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난 자기들 때문에 잠도 못 잤는데. 지금 내 꼴이 딱 사자와 호랑이의 싸움에 끼어있는
먹잇감 같았다.
“그럼 나랑 하진이는 따로 할 얘기 있으니까 넌 이만 가봐. 하진이 표정 보니까 둘이 얘기
끝난 것 같은데.”
“…….”
강이태는 아까와 다르게 묘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팔을 꽉 잡고 있는
그의 손과 눈빛으로 유추해 봤을 땐, 분명 가지 말라는 뜻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숨을 가다듬었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의 힘이 들어가 있는 손을
겨우 떼어 놓을 수 있었다.
이것 좀 놓고 얘기하지. 이 사람들은 왜 내 양팔을 잡고 안달이야….
“강이태. 어… 더 이상 할 얘기 없지? 할 얘기 남아있으면 나중에 따로 연락해.”
형은 내 말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심기 불편했던 건지 찌푸려진 얼굴로 날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이태의 떨떠름한 표정을 철저히 무시한 채 현우 형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강이태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을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썩 내키는 기분은 아니었다. 내게 할 말이 남아있던 그를
억지로 떼어놓은 것 같았다. 자취방에 가까워지자 그제서야 형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형. 카페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회의 있댔잖아요.”
“…회의가 뭐 종일 걸리는 줄 알아? 집 가는 길에 너네 둘이 심각한 표정으로 싸우고
있길래 들어온 거지.”
“싸우긴요. 누가 싸웠다고….”
형 때문에 분위기가 더 심각해졌잖아요….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잡고 있던 그의 옷깃을 손에서 놓았다.
“난 담배 피우고 들어갈게.”
“복도에서 피면 주인아저씨가 저 쫓아내요. 밖에 나가서 피워요.”
“네네… 먼저 들어가서 나한테 할 말이 뭐였는지나 생각하고 있어.”
집 안을 들어서자 쾌쾌한 먼지 냄새에 코끝이 아릴 정도였다. 방을 가득 메운 먼지
때문인지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고, 코끝을 한 손으로 막은 채 벽면 구석에 있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창문을 끝까지 열어 재끼자 시원한 바람이 쾌적하게 불어왔다.
나는 허리에 두 손을 얹으며 방 안을 쭉 훑어봤다. 아침에 대충 치운다고 치웠던
쓰레기들은 분리수거도 안 된 채 검은색 봉지에 꽉 채워져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린
세탁기엔 빨랫감들이 가득해 공기를 눅눅하게 만들었다.
불쾌하게 섞인 냄새에 어제의 술기운이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자 입을 막으며 세탁기 문을 닫아버렸다. 때마침 경쾌한 도어록 소리를 내며
들어온 현우 형은 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방금 전 나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제도 이렇게 더러웠었냐?”
“어제 들어왔을 땐 아무 말 안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그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섹스할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형 진짜!”
형은 가끔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표정을 찌푸린 채로 그의 등을
세게 때렸다. 딱딱한 등근육 때문인지 형보다 내 손이 더 아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내
모습이 재밌다는 듯 웃어대는 형이 괜히 미워졌다.
방을 치우다 말고 침대에 앉아버린 나는 주먹으로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 때문에 오늘 죽는 줄 알았어요.”
“왜?”
나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그를 올려다봤다. 언제 말도 없이 꺼내온
건지 그의 손엔 시원하게 보이는 캔맥주가 들려있었다. 청소를 해주진 못 할망정
쓰레기를 더 만들고 있는 형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현우 형은 손을 허리에 짚고,
그 많은 양의 맥주를 거의 반 이상 원샷 했다. 그리고는 내 옆에 앉더니, 딱 보기에도
가벼울 것 같은 캔맥주를 내게 들이밀었다.
아마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내가 그제서야 안쓰럽게 느껴졌나보다.
“너도 마실래?”
“…아뇨.”
“그래서 할 말이 뭐야?”
형은 멋쩍은 표정으로 남아있던 맥주를 입 안으로 탈탈 털어내며 말했다. 빈 캔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애써 웃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 뜨거운 시선을 마주하기엔 분명 분위기에 말려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형이 내 집으로 오는 이유쯤은 알고 있다.
형이 우리 집에서 볼일은 두 가지다.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다거나, 나머지 하나는 갑자기
자고 싶다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지만, 술을 마시고 싶은
이유도 그저 술 취한 상태로 나랑 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할 말은 무슨… 나는 그를 카페로 불러낼 핑곗거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형에게 말했다.
“그냥 가끔 그런 거 있잖아요… 형이랑 술 마시면서 저 군대 가기 전 얘기를 한다거나~”
“뭐야 그게?”
진짜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더니 얼추 문장이 완성된 것 같았다. 어색한
웃음으로 넘어가 보려 했지만, 눈치 빠른 현우 형은 그런 날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형은
뭔가를 꿰뚫어보는 사람마냥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부담스럽게 왜 그래요….”
“너야말로 뭐 숨기는 거 있어?”
“아니… 그런 거 없는데.”
“…그럼 이번엔 내가 뭐 물어봐도 돼?”
“아… 아뇨…?”
난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그의 눈을 쳐다봤다. 그런 내 표정에 혼자 웃어대던 현우 형은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너 아까 강이태랑….”
“아 걔랑은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건데….”
“너무 과민반응 아니냐? 아직 아무것도 안 물어봤는데.”
하진은 호랑이 앞의 토끼라도 된 것처럼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은
질문을 알아서 줄줄 대답하는 꼴이 현우에겐 꽤 웃긴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현우 형은 침대 모서리 부분에 걸터앉아 겁에 질린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묘하게
내몰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에 하진은 더듬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형.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요.”
“내가 내 눈으로 쳐다보겠다는데도 뭐라 하냐?”
“아니… 형 눈빛이….”
현우 형만의 능글거림은 아무도 못 따라올 것 같다.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허를 찌르는
말들은 나 같은 사람에게 정말 고역이다. 우리 둘 다 침대에 앉은 상태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몸이 왠지 다음 장면을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형! 저 허리 아픈데….”
“그래?”
“그리고… 안 씻어서… 오늘 좀 더웠잖아요… 네?”
“난 약간 끈적한 상태로 하는 것도 좋아하거든. 그리고….”
“….”
“너 지금 쓸데없는 생각하는 거 같아서.”
형은 내 속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가끔은 무서울 정도로 내 생각들을 다 꿰뚫고
있는데, 아무리 내가 그를 속이려고 연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의 말을 끝으로 짧고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동요한 건지, 내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잊게 해줄게. 그런 생각 안 들게….”
맞아… 그동안 내가 그 일들을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한 손을 뒤로 젖힌 채 침대를 짚었다. 슬쩍 뒤로 몸을 빼려 했으나, 형은 내 반응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길쭉하고 힘 있는 팔이 내 허리를 감싸더니 사타구니 부분이 그의
몸에 닿는 게 느껴졌다. 확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의 목덜미에 입맞춤을 하며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작은 싱글침대가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눕기엔 턱없이 좁아 보였다.
이 침대에서 어떻게 둘이 잤었더라….
가을이나 겨울엔 추위에 둘이 꼭 껴안고 잤던 기억이 있다. 싱글침대가 원치 않게 형과 내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 준 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틀 연속은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졌었어?”
식은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이 더 야하게 느껴졌다. 형의 어깨를 잡은 채 세게 밀어냈다.
내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그는 내 팔을 꽉 잡아 몸 곳곳에 키스를 해댔다. 이미 침대에
엎어진 후부터 게임은 끝난 셈이었다. 항상 이런 식으로 형은 날 은근슬쩍 눕혔고, 그 위에
올라타 나를 자기 마음대로 물고 빨아댈 뿐이었다. 그렇다고 나와 형의 속궁합이 안
맞는다거나, 일방적으로 내가 당하는 건 아니다.
나도 이런 관계가 나쁘지 않으니까 형을 집까지 들인 거고, 형도 내가 허락하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던 것이다.
“형… 천천히….”
형은 그런 내 말을 듣긴 하는 건지 어딘가 급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내가 남기지 말라는
키스 마크를 시작으로, 두 손으로 내 웃옷을 한 번에 벗겨버렸다. 천천히라고 말할 때면
그는 더 다급하게 나의 곳곳을 탐하려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밝은 자취방의 형광등은
딱히 어울리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한참 바빠 보이는 형의 뺨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형 제발 불만이라도 끄고 하면 안 돼요?”
“어젠 별로 신경 안 썼으면서?”
“어제는 제정신 아니었잖아요….”
“맥 끊기게….”
찌푸린 표정으로 작게 투덜거리던 형은 손을 뻗어 가까스로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꺼지자 방 안은 언제 환했냐는 듯 깜깜해졌다. 형이 침대 위에서 움직일 때마다 싸구려
자취방 침대매트리스의 삐걱거림이 방 안 가득 울렸다.
저녁 7시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밖은 밤 9시라도 된 것처럼 어두웠다. 대학가의 맨
구석에 위치한 건물이라 그 흔한 가로등 불빛마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창밖이 꽤나 낯설었고, 형은 그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조심스럽게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