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33)

6화

“새연대학교 영문과 신입생 장현우 인사 드립니다!”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형은 180센티가 넘는 큰 키에 매력적인 외모가 눈에 띄었다. 살짝

노르스름하면서도 어두운 조명이 술집 전체를 잔잔하게 밝히고 있었고, 선배들 앞에 서

있는 30여 명의 신입생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명 한 명 자기소개를 큰 목소리로 하자 선배들의 농담 섞인 질문들이 하나씩 쏟아졌다.

형은 훤칠한 외모 덕분인지 대학 생활 시작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에 비해 나는 딱

보기에도 만만해 보이고 재미없게 생긴 데다가 말주변도 없었다. 인기는커녕, 자기

앞가림 하기에도 바쁜 처지였다.

당시 강이태에게 도망치듯 전학을 왔고, 원하는 대학에 힘들게 입학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머릿속은 복잡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어도 강이태 생각에 대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누군가 말을

시켜오면 심장이 크게 뛰었고, 딱히 부끄럽거나 창피한 상황이 아닌데도 얼굴은 새빨개져

한심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강이태를 못 잊어서라기보단 ‘내가 남자를 좋아하나? 강이태 말고 다른 남자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은 없는데…’ 같은 쓸데없는 생각이 뒤덮였기 때문이다.

고3 때 강이태를 피해 전학까지 갔었고, 1년 이상 지난 상태였는데도 난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

차라리 다른 남자들에게도 호감을 느끼거나 성적 끌림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면 이 정도로

혼란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저… 영문과 신입생 유하진 인사드립니다….”

다른 사람들의 자기소개 때와는 다르게 조용하게 넘어간 내 차례가 괜스레 창피했다.

그렇게 신입생소개가 끝나자 한 명씩 돌아가며 선배들이 친히 섞어준 폭탄주를 들이켰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것저것 뒤섞인 정체불명의 술잔이 내 앞에 놓여있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선배들의 관심은 일제히 현우 형이나 다른

여자애들에게 쏠린 것 같았다.

하긴… 신입생 환영회에서 나같이 재미없는 애를 신경 쓰는 게 이상한 거지.

어느새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시끄러운 분위기의 술집을 슥 한번 훑었다.

시끄러운 술집 분위기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성인이 되고 처음 와본 술집인 데다가 술

게임이니 뭐니 하면서 떠드는 소리가 머릿속을 더 어지럽힐 뿐이었다. 홧김에 들이켠

폭탄주의 기운이 그제서야 올라오는 건지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얼얼한 몸이 누군가에게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술기운에 시야는 점점 흐릿해졌다. 꽤 넓은 술집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선배들 덕분에 숨이 턱 막혀왔다. 카운터 옆에 위치한 환풍기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섞여 귓가에 울렸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는 내가 입을 여는 것조차 방해했다.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뱉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생각한 덕분에 속에서부터 매스꺼운 액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혹시라도 이 즐거운 분위기를 깰까 싶어 몸을 벽 쪽으로 틀었다.

내 몸에 알코올을 들이부은 건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내 주사가 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아빠는 술 많이 마시면 기억 못 한다던데….

앞에 놓인 빈 잔을 빤히 보던 나는 손을 뻗어 소주병을 쥐었다. 반쯤 남아있는 소주병 위엔

빨간색 뚜껑이 느슨하게 얹어져 있었다.

테이블 구석에 처박혀있는 소주병에게 괜히 이입이 되는 것 같았다. 소주병을 들어 빈

맥주잔에 들이붓자 꽤나 많은 양의 소주가 잔을 채웠다. 우스운 점은 이렇게까지 혼자

술을 따르는데도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된 게 대학 생활이 고등학생 때보다 더 잔인한 거 같네…

술집 전체에 울려대는 큰 음악 소리가 마치 정신 차리라는 듯 신경 하나하나를 때리는 것

같았다. 이미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분은 좋았고, 아까까지만 해도 첫사랑 생각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슨 짓을 해도 안 잊힐 것 같았던 기억이 술 몇 잔 마시고 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해지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나는 정신이라는 실 한 올을 겨우 붙잡고 주변을

둘러봤다.

자기들끼리 신났네. 좋을 때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야가 느릿하게 흔들리는 게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혼자 쿨한 척

실실 웃으며 테이블을 짚고 일어났다. 일어나자 앉아있을 땐 못 느꼈던 심한 메스꺼움이

찾아왔다. 한참 술 게임을 즐기고 있던 애들을 해치고 쾌쾌한 먼지가 가득한 술집을

탈출했다. 밖으로 나오자 숨통이 탁 트이는 밤공기에 주변 술집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발밑을 울리는 것 같았다.

***

“저기요. 괜찮아요?”

눈앞이 흐리다 못해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시야가 끊겼다. 바닥을

울리는 음악 소리 사이로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 걸어온 남자의 얼굴을 봤다. 얄쌍한 눈에 짙은 눈썹, 어떻게 보면 강하게

생긴 인상이 취한 내 눈에도 한눈에 들어왔다. 하진은 나사가 풀린 사람마냥 그 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저 토할 거 같은데….”

혼자 중얼거리며 끝말을 흐렸다. 그 말에 당황하던 남자는 하진을 일으켜 골목길 사이에

있는 돌계단 위에 앉혔다.

그 후로 남자는 하진에게 괜찮냐는 말을 계속해서 되물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불쾌하게 울렁거리는 느낌에 하진은 얼굴을

잔뜩 구겼고, 이마를 계단의 벽면에 기댔다.

그의 큰 손바닥이 하진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자, 울렁거리던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속을 진정시킨 하진은 건물 한쪽 벽면에 몸을 기댄 채 점퍼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하진은 담배 끝에 시선을 고정하며 최대한 시야를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그 모습이

웃겼는지 옆에 앉아있던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라이터를 켰고, 그대로 하진의 앞에

갖다 댔다.

“감사합니다….”

하진은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고, 살짝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담배 피울

땐 항상 아무도 없는 뒷골목에서 혼자 폈었는데, 이렇게 누군가랑 맞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이 하진에게는 새로웠다. 담배를 입에 문 남자는 라이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진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리고는 하진의 담배 끝에 자신의 담배를 갖다 대며

능숙하게 불을 옮겨 붙였다. 은근 묘한 분위기에 살짝 얼굴이 빨개진 하진은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우던 하진은 머릿속으로 어떤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생각 중이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술기운에 몸에서 열까지 나는

것 같았다.

“내 이름 알지? 장현우. 그냥 말 놔도 돼.”

“아… 전 말 놓는 것보다 그냥 존댓말이 더 편해요.”

너무 철벽 치는 거 같나…

내 생각에도 친화력 안 좋고, 재미없는 사람인 티가 팍팍 났던 것 같다. 괜히 머쓱해진

분위기에 나는 습관처럼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 덕분에 속은

좀 진정됐지만, 혼자 들이켜댄 폭탄주에 아직 취기는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혀에 마취제를 놓은 것처럼 얼얼한 상태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어눌한 발음으로 최대한

정확히 말하기 위해 애를 썼다.

“전 유하진이에요. 형… 이라고 불러도 되죠?”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는 듯 헤헤거리며 웃었다. 이 바보 같은 웃음 때문에 중학생

내내 애들이 날 만만하게 봤었는데… 고1 땐 옆에 강이태가 있어서 무시당하진 않았지만….

강이태에게 연락 없이 도망친 지 2년째.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지, 강이태라서 좋아했던 건지 마음을 정리하기엔 혼자선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현우 형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턱을 괸 채 날 지긋이 바라봤다. 누군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나한텐 익숙할 리 없는 행동이었다.

형의 시선은 내 머리끝부터 담배를 들고 있는 손끝까지 천천히 움직였다.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앉아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벽면에 등을 기댔다.

“사실 이런 술자리 별로 안 좋아해. 같은 재수학원 출신인 선배들이 오라고 난리 쳐서 온

거지.”

나는 벽에 반 이상 몸을 기댄 자세로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느리게 흘리는 숨을

따라 하얀 연기가 실오라기 마냥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흩어져

사라지는 담배 연기를 빤히 쳐다봤다.

“…그래도 저보다 잘 어울리시던데…. 다들 형 좋아하는 눈치였고….”

“그래 보였어? 다행이네. 일부러 웃어준 거지 사실 존나 재미없어. 술게임도 왜 하는지

모르겠고….”

“여자 선배들한테도 인기 많으시던데….”

오… 나름대로 대화 잘 이어가는 것 같은데….

속으로 세 마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 하고 있었던 그때.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난 게이인데.”

“아아….”

술이 뇌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상태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와 닿지 않았다. 그가

말을 끝맺은 지 6초쯤 지났을까…

지금 내 옆에 있는, 알게 된 지 하루도 채 안 된 사람이 나한테 커밍아웃을 한 건가?

나는 멍한 표정으로 형을 쳐다봤다. 형은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꽤 많이 남아있던

담배를 벽면에 짓누르며 웃어댔다.

내가 기대고 있는 벽면에서 방금 형이 짓뭉갠 담배의 쌉싸름한 향이 풍겼다. 더더욱

어색해진 공기에 시선을 돌리며 애써 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내 눈에 고정된 그의 시선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놀랐어? 이제야 술이 좀 깨?”

“네네… 아… 아뇨 아직은 안 깬 거 같은데….”

마치 누군가 내 귀에 달린 볼륨 크기를 0에서부터 100까지 조종하는 것 같았다. 현우 형의

말소리가 커졌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며 단어 하나하나가 들려왔다. 그제야 내 술버릇이

방이든 길거리든 무조건 잠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정신력으로 겨우 버티며 형의 말을 들으려 노력했다.

“하진아? 유하진?”

***

눈을 뜨자, 살짝 톤 다운된 브라운 계열의 낯선 천장이 보였다. 옅은 초록색 암막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와 방 전체에 퍼졌다. 처음 보는 방 풍경에 놀란 나는 재빨리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묵직한 무언가가 내 배 위를 덮고 있어 일으킬 수 없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려 옆을 봤다.

비교적 짙은 눈썹에 꽤 세게 생긴 인상. 살짝 헝클어져 있지만 염색한 남색 머리에 올해

유행 헤어스타일 목록에 있던 쉼표 머리였다. 내 옆에 누워있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굴까

생각하던 그때, 그 사람도 나도 둘 다 옷을 벗은 상태라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놀란 나는 조심스럽게 내 배 위에 올려져 있던 그 사람의 팔을 치웠다.

나는 촌스럽지 않게 적당히 깔 맞춤 한 녹색 이불을 살짝 들어 침대 밖으로 나왔다. 팬티만

입은 상태로 어찌할 줄 몰라 하던 나는 현관 주변에 벗어던져 놓은 옷을 서둘러

주워입었다. 옷을 입는 순간 어제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내 옆에서 자고 있던 남자의 이름은 장현우.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신입생이고, 이 자취방도

그 남자의 집이다.

어쩌다 보니 맞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 사람이 나한테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름이

끊긴 것 같은데.

내가 실례되는 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겠지….

나는 옷을 대충 챙겨입고 말없이 집을 나가야 하나, 아니면 메모라도 남겨야 하나 짧은

시간에 여러 생각을 했다.

“언제 깼어?”

형은 검은색 드로즈만 입은 채 방과 현관 사이 문턱에 기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벙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현관 쪽으로 찰싹 붙었다.

“방금요! 형 죄송해요…. 혼자 취해버려서 필름까지 끊기고… 제가 뭐 실수라도….”

형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베란다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베란다 밖에 있는 빨랫대에는

그가 어제 입었던 옷들이 널려 있었다. 신기하게도 널려 있던 옷들을 보자 어제의 기억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분명 형의 부축을 받으며 이 집까지 힘들게 왔고,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고 있던 옷들을 하나둘씩 던져 벗었다. 거기까진 참을

만했는데, 그대로 형의 옷에 토를 해버렸다.

“형… 형 죄송해요!!”

“아니 뭐… 취한 애 데려온 내가 잘못 아니겠어? 설마 주사가 토해버리고 자 버리는 거일

줄은….”

첫인상부터 가관이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한껏 자책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형은 뭐가 웃긴지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몇 초 참는 것 같더니, 끝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해장은 하고 가야지. 내가 해장국 하난 기가 막히게 잘 끓이거든.”

어색한 웃음을 짓던 나는 조심스럽게 현관에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못 봤지만, 다시금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자 분위기 있게 톤 다운된 갈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방이 보였다. 책상 위는 노트북이랑 전공 책 몇 권이 다였다.

아까까지 나체상태로 누워있던 침대 위는 흐트러진 시트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다.

난 침대 밑에서 모서리 부분을 삐죽 내밀고 있는 책을 꺼냈다. 꽤 수위가 있는 포르노

책자였지만, 옛날에 친구들이 봤던 잡지들과는 약간 달랐다. 여자와 남자가 아닌 남자와

남자가 거의 다 벗은 상태로 스킨십을 하고 있는 잡지였다.

왠지 남의 사생활을 멋대로 꺼내본 것 같아 다시 침대 밑으로 급히 밀어 넣었다.

어느새 부엌에서부터 시원한 콩나물국 향이 퍼져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어제 실수한 일이 더 없었는지 되짚어봤다.

강이태…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긴 하진은 다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태의 프로필을

눌렀다. 텅 빈 대화창에 하진이 보낸 메시지들만 주르륵 떠올랐다.

적어도 10개는 넘어 보이는 메시지들이었다. 다행히 데이터를 꺼놓은 상태라 메시지가

보내지진 않았지만, 꽤 놀란 건지 하진은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 삭제 버튼을 눌렀다.

휴… 혹시 모르니까 차단이라도 해둬야겠다….

난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려놨다. 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을

때쯤, 형이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상 위에는 달걀 두세 개와 콩나물이 들어간 해장

콩나물국과 흰 쌀밥이 올려져 있었다.

형은 내 얼굴을 살피더니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너 어제 어디까지 기억나?”

큰 숟가락으로 밥을 한술 푸던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열심히 뇌를 굴렸다.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꽤 요란했던 건지 형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생각나는 것만 말해. 뭐라 할 생각은 없으니까.”

“…부분부분 기억나긴 하는데… 형이 저한테 커밍아웃하신 거랑… 제가 형 옷에 토한

거랑…

“또?”

“그다음은 잘….”

“그게 끝이야?”

형은 혼자 생각에 잠긴 듯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건지, 형은

다시 웃으며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너 어제 취한 상태로 전여친한테 톡 보냈어?”

“네? 왜요?”

“너 어제 뭐 누구 이름 부르면서 핸드폰 만지작거리던데. 흔하잖아. 취해서 전여친한테

진상 짓 하는 애들.”

진상 짓…

“전여친은 아니지만 하긴 했어요…. 다행히 데이터 꺼놔서 메시지는 안 갔나 봐요.”

난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깨작거리며 말했다.

“저도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남자만 좋아하는 건 아닌데, 남자애를

짝사랑했었어요. 지금도 그런 거 같고….”

“그래? 그 애는 지금 어디 있는데? 고백은 안 했어?”

“고백… 고백하기에 걔는….”

“스트레이트?”

“….”

아마 형이라면 날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아무한테도

털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면 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

형은 얼마 안 지나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고, 테이블 모서리에 걸터앉아 밥상 앞에

앉아있는 나를 살짝 내려다봤다.

“그래서… 걔한텐 말없이 갑자기 이사 왔다고? 절친이었다며.”

“…….”

“너 의외로 결단력 있구나. 생각보다 대단하네. 잠수 타는 거 아무나 못 하는 짓이잖아.”

그렇게 잠수를 타고 나서 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1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이태를 그리워하고 있고, 갑작스럽게 떠나 당황했을 걸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뿐이다.

형은 책상에 턱을 괸 채 웃음을 지었다. 고른 치열이 한 번에 보이는 미소가 강이태랑 꽤

닮아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형은 손을 뻗어 책상 앞에 있는 창문을 반쯤 열었고, 검은색 스텐으로 된 담배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케이스까지 맞춘 걸 보면 꽤 패션이나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것 같았다. 형은 라이터로 가볍게 불을 붙이며 나에게 말했다.

“이젠 그 남자애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잘 모르겠어요. 아직은.”

깊은숨을 마시며 날 훑어보던 형은 한숨 비슷한 연기를 내뱉으며 마저 말을 이어갔다.

일렁이던 연기는 열려있던 창문 밖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내가 도와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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