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33)

8화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곤란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소 시끄러웠던 카페 안이 지금은 너무나 조용하게 느껴졌고, 점점 빠르게 뛰는 심장이

유독 거슬렸다. 그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중에 강이태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와 사람 진짜 많아.”

“내가 자리 잡아놓을 테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시켜줘.”

누군가 귀를 꽉 막은 것처럼 그의 목소리를 제외한 모든 소리가 단절된 것 같았다.

일정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괜히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숨을 죽였다.

“누가보면 스릴러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네….”

“아….”

맞다. 나 혼자가 아니었지…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현우 형을 쳐다봤다. 몰래

숨어있는 사람처럼 허리를 굽힌 채 숨죽이고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세우며 앞에

놓인 컵을 만지작거렸다. 무심한 척 빨대를 입에 물고 남아있던 커피를 쭉 들이켜자,

얼음이 녹아 싱거워진 커피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어. 현우 형!”

“너네 여기 웬일이냐.”

“왜긴요. 동호가 커피 쏜다 해서 왔죠.”

“아아… 그래? 너네 몇 명이야? 여기 테이블 합쳐서 앉아.”

나는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있는 현우 형을 쳐다봤다. 그 표정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지만,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뭐?’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현우 형은 내가 강이태를 피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합석하자고 말을 꺼낸

게 분명했다. 술자리면 몰라도 카페에서의 합석은 처음이었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강이태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갇힌 신세가 되어버린 나는, 거의 반강제로

카페 쇼윈도에 딱 붙게 되었다.

주문을 마치고 온 후배들은 현우 형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고, 앞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딱 봐도 어색한 티가 나는 인사법에 괜히 내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일제히 현우 형에게만 쏟아지는 관심에 서운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그저 바로 옆에 앉은 남자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나는 얼음으로만 채워진 컵을 입 안에

탈탈 털어내고 일부러 소리 내서 얼음을 깨물었다.

현우 형은 후배들의 말에 대답하느라 바빠 보였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혼자

심술이 났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빨대를 세워 얼음을 쿡쿡 찌르며 시간이 빨리 흐르길

바랐다. 평소 과묵한 성격의 강이태가 나에게 말을 걸자, 다소 북적거렸던 카페 분위기가

한순간에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과제하러 온 거야?”

이태는 내가 몇 자 끄적거리고 있던 노트에 시선이 가 있었다. 3초 정도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 과제….”

나에게 사람과 소통하는 건 항상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상대가 이태일 경우엔 특히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나는 어색함이 가득 담긴 웃음을 지으며 뒷목을 두어 번 쓸어내렸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수다스러운 후배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태 형이랑 하진 선배 둘이 아는 사이에요?”

“맞아. 둘이 저번 술자리에서도 아는 사이 같았는데.”

“뭐야…. 근데 왜 이렇게 어색해요?”

눈치 없는 후배들은 발을 밟아버리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나는 입꼬리만 삐죽 올려 애쓴

웃음을 지어댔고, 강이태도 자신의 한마디에 후배들이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예상 못

했던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둘이 싸우기라도 한 거예요? 분위기 봐.”

그 후배가 내 옆자리나 앞자리에 앉았다면 지금쯤 운동화 끝 부분으로 후배의 정강이를

세게 찼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또 한 번의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야~’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분명 더운 날씨가 아님에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다리를 쭉 뻗어 앞에 앉아있는 현우 형의 발을 건드렸다. 분위기

메이커로 불리는 현우 형이 팔짱 낀 채 지켜만 보고 있는 걸 보면 이 모든 게 그의 계획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형은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이번 주 금요일에 국문과 여자애들이랑 미팅 잡혔는데… 현우 형 시간

되세요?”

“갑자기 웬 미팅?”

“좀 있으면 과제 쏟아질 거 아니에요…. 놀 수 있을 때 놀아야죠.”

“맞아. 현우 형오면 딱일 거 같은데. 지금 한 자리 비었거든요. 세 명은 구했어요.”

“여기서 동호랑 저랑… 이태 형 세명 나가기로 했어요.”

미팅이라는 말엔 애초에 반응할 필요성도 못 느꼈는데, 강이태도 미팅에 나간다는 말에

저절로 고개가 들렸다. 내가 생각해도 티 나는 반응에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팅? 몇 시에 하는데?”

“6시요.”

현우 형은 너가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후배들

쪽으로 돌려 그를 무시해버렸다.

시간 물어보는 것도 안 되나? 자긴 어차피 알바 때문에 시간도 안 되면서.

“나는 어차피 알바라 못 가는데 다른 사람 구해봐.”

“현우 형만 있으면 분위기 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데… 아쉽다.”

“하진 선배는 그때 시간 안 되세요?”

“뭐? 나…?”

갑작스러운 후배의 질문에 당황한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내 앞에 앉아있던

현우 형도 적잖게 놀란 건지 마시던 커피에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 대본이

짜여있는 듯 그 후배의 말이 끝맺음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보나마나 현우 형 옆에 있으니까 예의상 물은 거겠지…

나는 애써 웃음을 짓고 손사래를 쳤다.

“미팅은 별로… 그런 자리 어색해.”

“그러지 말고 한번 나가봐요.”

“맞아요. 선배 복학하고 연애는 한번 해봐야죠.”

“제가 총대 메고 주선한 자린데 머릿수 달리면 안 되잖아요. 하진 선배 제발요….”

생각보다 끈질긴 후배들의 권유에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거의 자동이다시피 웃는

습관 덕에 입꼬리가 떨리는 느낌까지 들었다. 철벽에 가까울 정도로 튕기는 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미팅에 참석하기로 한 후배 한 명이 옆에 앉은 이태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맞아. 미팅 나가시면 저희가 거기서 제일 예쁜 애랑 미뤄줄게요.”

“…뭔 소리야.”

강이태는 꽤나 짜증 섞인 목소리 톤으로 말하며 후배의 팔을 쳐냈다. 얼떨결에 싸해진

분위기가 날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현우 형은 언제나 그렇듯 방청객 마냥 팔짱을 낀 채

날 쳐다보고 있었고, 후배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부탁을 해댔다. 어쩌다 타깃이 현우

형에서 나에게 옮겨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머릿수만 채울 겸 나갔다가 난 중간에 빠질게.”

“뭐?”

뜻밖의 대답에 현우 형은 그제서야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앞에 앉아있는 형을 바라봤고, 후배들은 가까스로 머릿수를

채웠다는 것에 한껏 들떠있었다.

“애들 때문에 억지로 가는 거면 굳이 가지마.”

미팅 얘기가 나온 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이태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별로…. 딱히 억지로는 아닌데.”

어쩌면 강이태가 미팅에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흔들린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태를 잊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그에게 이렇게나 쉽게 흔들리는 내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고 미울 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왕 이렇게 되어버린 거 이번 미팅을 계기로 이런 성격을 고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평생 동안 첫사랑 이후로 아무도 좋아해 본 적 없다는 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절대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았다. 듣기만 해도 꽉 막혀 보이고

재미없는 인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까보다 훨씬 시끌벅적해진 분위기 사이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앞에 놓여있던 빈 컵을 구석으로 치우고 턱을 괬다.

현우 형은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고,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톡톡 쳤다. 떠들고 있는 후배들을 힐끗 흘겨보고는 형 쪽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래요?”

“내가 뭐?”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무 재질의 의자 밑부분이 바닥에 밀려 꽤

큰 소리를 냈다. 신나게 얘기 중이던 후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으로 집중됐다.

머쓱해진 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봐야 될 것 같아.”

“아… 선배. 그럼 나중에 단톡방에 초대해드릴게요.”

“나도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볼게.”

“형은 또 왜 쫓아와요?”

나는 뒤따라 쫓아오는 현우 형을 보며 입 모양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그런 내 말에

아랑곳하지않고 따라오는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카페 문

너머로 나오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현우 형을 쳐다봤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양손을 허리에 짚었다.

“후배들은 왜 불러서 합석하자고 한 거예요?”

“뭐 어때. 후배들이 불편해?”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겨우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자,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점점 풀렸다. 현우 형과 이 정도의 말다툼은 항상 있던 일인데도

피곤해지는 건 매번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강이태 때문이야?”

“네?”

“강이태 잊은 거 아니었어? 근데 왜 계속 신경 써?”

“아니… 형. 잊긴 했는데….”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현우 형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 마음에 둔한 편이다. 자기가 잊고 싶은 건

기계적으로 잘 잊는 편이니 남들도 당연히 그게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기적일 수도 있는 그런 점 때문에 나랑 자주 다툼이 일어났다. 섬세한 것까진 안

바라니까 최소한 내 마음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잊긴 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첫사랑인 데다 제가 일방적으로 피한 거고… 당연히

껄끄럽지 않겠어요?”

“잊었는데 껄끄러울 게 뭐가 있어?”

“아 진짜…!”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투를 내뱉어버렸다. 나름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이며 이 남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해봤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 이 사람이랑은 말을 섞지 말자.

나는 무의식중으로 고개를 돌려 카페 쪽을 쳐다봤다. 카페 창가 쪽에 앉아있던 강이태가

아무렇지 않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식겁해 티 날 정도로 고개를 획

돌려버렸고, 현우 형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건물 뒤편으로 들어갔다. 형은 의외로 순순히

날 따라 걸음을 옮겼다.

“미팅은 뭐하러 나가?”

“진짜 1절만 해요. 형이랑 제가 뭐 결혼이라도 했어요?”

“….”

“형은 맨날 술집 가서 다른 남자들이랑 키스하고….”

생각할수록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형에게 섭섭한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자 어떤

것부터 말해야 될지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지금 누구보다 힘든 게 나인데도

불구하고, 이해해주진 못할망정 윽박지르는 형이 마음에 안 들었다. 서운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쯤, 가만히 서 있던 형이 말을 이었다.

“재작년 이후로 그런 적 없어. 요즘에도 내가 그러는 거 봤어?”

“….”

“바에 들락날락하는 건… 거기서 일하게 돼서 그런 거고.”

“…거기서 일해요?”

“가끔 질척거리는 손님들이 있긴 한데… 시급은 센 편이니까.”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혼자 형에 대한 오해를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평소 현우 형의 이미지라면,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마음에 드는

남자들에게 대시를 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이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데려갔던 게이바에서 형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요즘 예전보다 통이 커진 이유가 시급 높은 바에서 일하기 때문이었구나….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에 형은 아까와 다르게 웃음을 지으며 얼굴이 잔뜩 빨개진 날

끌어안았다. 왜 바에서 일하게 된 걸 나한테 안 말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지적한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익숙하게 포옹해주는

형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다고 먼저 징징댄 건 분명

나였는데, 이제 와서 날 걱정하지 말고 놔두라 말하는 건 너무나도 이기적인 놈 같았다.

나는 형의 품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제가 계속 강이태랑 엮이는 게 불안한 거예요?”

“너가 이도 저도 아니게 행동하니까 나 혼자 불안해서 그런 거야.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내가 1학년을 자퇴 안 하고 이어온 건 다 현우 형덕분이었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형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내가 너무 어리게 행동한 것 같아 창피할 따름이었다. 형은 나를

달래주듯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고, 나는 고개를 들어 형을 올려다봤다.

“형. 오랜만에 형 집에 가도 돼요?”

“지금? …좀 더러울 텐데. 요즘 밤부터 아침까지 알바 나가서 집 상태 장난 아니야.”

“형 집이 더러워 봤자 아니에요?”

“…몸이 힘든데 청소가 중요하겠냐….”

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고, 형의 걸음을 따라 집

쪽으로 향했다.

***

형의 자취방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반대방향이었다. 사다리 형태의 아슬해 보이는

계단이 있는 복층형 원룸이었다. 대학교 정문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오피스텔.

자취촌에선 보기 드문 보안시설에 원룸치고는 나름 널찍한 방이었다. 1학년 때 처음으로

가봤던 형의 집은 이 오피스텔의 옆 건물이었다. 보증금 문제 때문인지, 투룸에서

원룸으로 옮긴 것 같았다.

형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손목시계부터 옷까지 어디 하나 신경 쓰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대학생이 사기엔 비싸 보이는 브랜드를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니는 형이 내

또래들에겐 멋있어 보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버지는 명문대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듣기만 해도 쟁쟁한 집안인데, 아버지에게 커밍아웃을 하고부터는 생활비가 완전히

끊겼다고 한다. 형은 그래도 생활비만 끊겨서 다행이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런 형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형 웬일이에요?”

“좀 더럽지? 내가 미리 말했잖아. 더러울 거라고….”

형은 머쓱한 듯 목 뒤를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자, 새 걸로

보이는 각양각색의 구두와 운동화들이 현관에 널브러져 있었다. 평소의 현우 형이었다면

새 신발을 깨끗하게 털어 현관 옆에 쌓여있는 박스에 차곡차곡 다시 넣어뒀을 것이다.

형을 알게 된 이래로 처음 보는 모습이라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방을 천천히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식탁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나도 모르게 뻣뻣한 정자세로 앉아

바닥을 훑어봤다.

형은 민망한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 고민 없이 세탁기 안으로

골인시켰다.

“형. 일 너무 빡센 거 아니에요?”

“별로 안 빡세. 거기 관둘 생각은 없어. 생활비도 넉넉히 벌고. 일하는 보람도 있고….”

“바에서 무슨 일 해요?”

“그냥 바텐더. 저번에 자격증 땄었거든. 너 군대 가 있는 동안….”

“역시 형은 부지런하다니까….”

그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빈 잔에 따랐고, 상대적으로 낮은 싱크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

식탁 앞에 앉아있는 날 빤히 쳐다봤다.

뭐라도 먹을래?

그의 물음에 나는 손을 내저으며 지친 몸을 일으켰다. 형한텐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미팅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창가

바로 옆에 위치한 매트리스 침대에 몸을 눕히자 아까부터 쌓여 있던 피로가 쏟아졌다.

침대에 헝클어져 있던 시트와 베개에서는 기분 좋은 비누 냄새가 났다. 나도 모르게

시트에 코를 박자, 무거웠던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다.

형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내가 누워있는 침대 위에 앉았다. 나는 묵직하게 끼익거리는

침대 소리에 눈을 살짝 떴다.

창밖의 구름 낀 어두운 날씨가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쏟아 낼 것 같았다. 둘만 있을 때 꼭

찾아오는 조용한 분위기가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시 감기는

눈꺼풀 위로 형은 쪽 소리가 나도록 입맞춤했다. 이마에서부터 입술까지 자기가 원하는

만큼 키스를 하더니, 끝났나 싶어 눈을 슬며시 뜨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입술에

딥키스를 했다.

따뜻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그의 키스에 나까지 녹아나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살짝 짧고

아쉬운 키스.

나는 달아오른 숨을 내뱉으며 그의 팔을 꼭 잡았다.

“오늘까지 하면 거의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하는 셈인데….”

“너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뭐하러 참아요. 저 없어도 다른 남자랑 하면 되는 거지.”

어차피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하긴. 그렇지. 다른 남자가 있었지….”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천천히 내 얼굴을 훑어보던 현우 형은

조금 전과는 다른 미소를 지었고, 이내 형과는 안 어울릴 정도로 달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오늘은 불을 꺼도 너가 보이겠네.”

현우 형은 손을 뻗어 방 안 스위치를 껐지만, 오후 5시밖에 안 된 밖은 환하게 우리 둘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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