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33)

9화

잠결에 희미하게 느껴지는 묵직함이 이른 아침 날 깨웠다.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떠 내 위에

덮어져 있는 무거운 팔을 옆으로 겨우 치워냈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습관처럼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언제나 그렇듯 다 벗은

차림이 어젯밤의 기억을 되짚어줬다.

우리 집 싱글침대에 비교할 수도 없이 큰 퀸사이즈 침대. 원룸 오피스텔에 다소 안

어울리는 사이즈였지만, 인테리어에 신경 쓴 집인 만큼 큰 침대조차 인테리어의 하나로

보였다.

테이블 아래쪽에 놓여있는 플라스틱 휴지통 안엔 어제 사용했던 콘돔이 걸쳐져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어제 생각에 허리가 찌뿌둥해지는 느낌이었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벌써 깼어?”

“저 때문에 깼어요? 더 자요.”

옆에 누워 깊게 잠든 것 같던 현우 형은 어리광 피우듯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끔 이런

애교를 부리는 형을 어떻게 받아줘야 할지 막막했다. 보통 그의 어리광엔 어색한

입맞춤으로 달래주는데, 그럴 때마다 형은 내 팔을 잡으며 본격적인 스킨십을 한다.

입맞춤하던 입 안으로 간지럽히듯 들어오는 그의 혀가 몽롱한 기운까지 깨워주는 것

같았다.

“하아….”

“한 번 더 할까?”

“…미쳤어요? 저 수업 가야 해요.”

“2시간이나 일찍 일어났잖아.”

형은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투덜거리며 말했다. 현우 형은 의젓한 이미지의 강이태와는

확실히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형이 비슷한 나이 대의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면,

강이태는 나이에 안 맞는 의젓함과 리더십 때문인지 나이가 지긋하신 교수님이나,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그래. 됐다 됐어.”

과 내에서 인기 많은 그 장현우가 내 앞에선 매일같이 하룻밤을 구걸하는 걸 누군가

본다면 정말 웃길 것 같았다. 삐진 척 등을 돌려 누워버린 그의 모습이 측은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 부분에 걸터앉아 바닥에 널브러진 바지를 주워

입었다. 베개를 끌어안은 채 그런 내 뒷모습을 보고 있던 현우 형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보니까 너 허리 엄청 얇다.”

“…갑자기 뭐예요?”

형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꿍꿍이가 담겨있을 것 같아 괜스레 불안함이 느껴졌다.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 형을 바라봤다. 불안함 가득한 내 눈빛이

우스웠던 건지 형은 혼자 웃음을 터트렸고, 1시간은 더 누워 있을 것 같았던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니. 밝은 곳에서 다 벗은 상태로는 어제가 처음이었잖아.”

“….”

“너 몸이 그렇게 부서질 것 같은지 처음 알았어.”

“…그만 말하면 안 돼요?”

“그동안 내가 너무 거칠게 했나 싶더라. 미안해.”

“…미안하다는 사람이 어제 3시간 동안 해요?”

“나도 그만하고 싶었는데 어제 너가 너무 귀여워서.”

“그냥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얹어진 물을 컵에 따랐다. 그리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 세탁기 안으로 넣어버렸다.

“형. 오늘만 형 옷 빌려도 돼요?”

“거기 서랍에서 찾아봐.”

작은 다용도실 옆에 놓여있는 가루 형 세제를 한 스푼 떠 세탁기 안으로 털어 넣었다. 나는

피곤함에 밀려오는 하품을 한 손으로 막으며 세탁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서랍장을

열자, 어지럽혀져 있던 방 안과는 다르게 옷가지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각 맞춰 돌돌 말려있는 옷들을 하나씩 꺼내 펼쳐보자 형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거… 서랍 맨 안쪽에 검은색 티셔츠 너한테도 맞을걸.”

“이거요? 좀 커 보이는데.”

나는 눈으로 보기에도 커 보이는 반팔 티셔츠를 몸에 대봤다. 못 이기는 척 옷을 갈아입고

어지럽혀져 있는 선반 위의 화장품들을 쭉 훑어봤다. 그렇게 깔끔하던 현우 형의 방이 이

정도로 더럽혀진 걸 보고 있으려니 안쓰럽게 느껴졌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나는 선반 위의 수건을 하나 집어 욕실로 들어갔다.

***

“형. 향수 뿌려도 되죠?”

형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유리로 된 선반 안의 향수를 하나 집어 손목과 귀 뒤에 뿌렸다.

시원하면서도 적당히 은은한 향이 비누 향과 섞여 기분 좋게 풍겼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물기로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털어내며 거울 앞에 섰다. 프리사이즈라고 적혀있는

티셔츠치고는 기장이나 폭이 꽤 큼직해 보였다. 5분가량을 거울 앞에 서 있던 나는 바지

안으로 티셔츠를 느슨히 넣으며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혼자 바쁘게 방을 치우던 형은

헝클어져 있던 침대 시트를 털어내며 나에게 말했다.

“학교 앞까지 데려다줄까?”

“…학교 처음 가는 애도 아니고. 괜찮아요.”

남들 눈에 띄는 짓은 사서 하고 싶지 않았다. 현우 형과 친한 사람이라면 내가 입고 있는

옷이 형의 옷과 같다는 것쯤은 눈치챌 것이고, 학교 앞까지 형의 스쿠터 뒤에 탄 채로 가는

건 대놓고 티 나는 행동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형과 원나잇을 하는 사이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하겠지만….

괜히 내 스스로 양심에 찔릴 뿐.

“나는 오후에 알바 때문에 바쁘니까 연락할 일 있으면 톡 남겨놔.”

“네네.”

현관문을 닫자 짧고 경쾌한 도어로크 소리가 울렸다. 나는 학교 정문까지 익숙한 걸음을

옮겼다. 어젯밤 초대된 단체톡방으로 인해 핸드폰은 쉴 틈 없이 울려댔지만, 뜨거운 햇빛

덕분에 핸드폰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미간을 좁히며 계속해서

얘기가 오가고 있는 메시지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얼추 분위기를 보아하니 흔히들 주고받는 허세 가득한 이야기들인 것 같았다. 미팅에서

누가 몇 명에게 애프터 신청을 받을지 내기하는 정도의 대화였다. 항상 그렇듯 주고받는

메시지들을 나는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고, 강이태도 딱히 대화에 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걔가 이런 대화에 낀다면 내 안의 강이태에 대한 이미지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가 뭐하러 걔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거지?

강이태랑 가까워질수록 나 혼자 기대를 하게 되고, 괜한 욕심을 부려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가고 싶어질 게 뻔했다. 현우 형의 말대로 내가 어정쩡한 마음 상태로 이태랑 엮이는

건 결국 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현우 형의 지나친 참견에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가 조언한 대부분의 말들은 나에게 도움이 됐다는 게 사실이었다.

어쩌다보니 후배들의 등에 떠밀려 미팅까지 엮이게 됐지만, 더 이상 엮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다짐한 것도 잠시.

“죄송합….”

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계단을 오른 탓에 앞서가고 있던 사람에게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사과를 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평소 믿지도 않는 신을 찾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놀란 표정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나와 부딪힌

사람은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인물. 바로 강이태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제 집은 잘 들어갔어?”

“아… 어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멈춰있던 머리를 굴리느라 꽤나 애를 썼다. 애쓰는 모습이 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줄도 모른 체 할 말만 열심히 생각해냈다. 강이태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서서는 천천히 걸음을 맞췄다. 강의실까지 이대로 같이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머릿속엔 강의실까지 얼마나 남았는지까지 계산하느라 이미 포화상태였다.

“어제 잘 들어갔지. 가자마자 과제도 안 하고 그냥 잤어.”

“…얼핏 보니까 현우 형이랑 싸우는 거 같았는데. 별일 없었어?”

“아… 안 싸웠는데.”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거짓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들은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다. 없던 일을 말로 지어낼 때면 심하게 다리를 떤다거나, 손톱을

물어뜯는 것처럼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티가 나는 행동들이었다.

“너 거짓말 진짜 못하는 거 알지?”

“…거짓말 아니야.”

잊고 있던 사실 중 하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강이태고, 그 애는 내 작은 습관

하나하나까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얘랑 다신 엮이지 말아야지.

방금 한 내 다짐이 무색하게 강이태랑은 이렇게나 쉽게 엮일 수 있는 게 현실이었다.

엮이지 않으려면 적어도 내가 1년 더 휴학을 하거나, 강이태가 휴학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내 말을 마지막으로 짧은 정적이 이어졌고, 생각보다 강의실은 가까웠다. 계단을 올라 3층

앞 강의실에 다다르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옆에 서 있던 그를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수업 잘 들어.”

그래. 이 이후로 다신 만나지 말자. 이태야…

“나도 인문학 수업인데?”

“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내비쳤을 게 분명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며 강의실 문을 열었다.

“…그래? 잘됐네.”

그는 내 뒤를 따라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떨리는 입꼬리로 그에게 웃어 보이며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았다.

강의 10분 전. 미리 자리에 앉아 수업을 기다리고 있던 몇몇 학생들이 강이태와 인사를

나눴다. 누가 보면 내가 편입생이고, 강이태가 1학년 때부터 다닌 학생인 줄 착각할 것

같았다. 강이태는 옛날부터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친구들이 생기는 타입이었다. 현우

형은 순발력과 남다른 재치로 인기가 많은 거라면, 얘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친구가 붙는 느낌. 정말 본받고 싶은 능력이었다.

자리에 앉자 끼익거리는 의자 소리가 얼마나 오래된 강의실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내 앞에 앉은 후배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나누던 강이태는 이미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는

듯 당연하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묵직하게 울리는 의자 소리가 의아하게 들릴 정도였다.

너가 왜 내 옆에 앉아? 라는 눈초리로 옆에 앉은 그를 흘끗 쳐다봤다. 강이태는 턱을 괸 채

아무렇지 않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 아니. 앞에 자리도 많은데….”

“너 혼자 강의 들으면 심심할 거 같아서.”

“하하….”

나는 로봇처럼 딱딱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몸을 반대쪽으로 슬쩍 돌려 최대한

그와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의 행동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차라리 나에게 욕을 하거나, 화난 티라도

냈으면 사과하고 넘어가는 편이 이보다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이 수업까지 합하면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강이태랑 겹치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건데, 지금 얘 행동을 보아하니 내가 작정하고

피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접점이 만들어질 것만 같았다.

3층 복도 맨 끝에 위치한 301호. 다소 오래된 이 강의실은 저번에 현우 형과 그렇고 그런

짓을 했던 그 강의실이었다. 처음에 들어올 땐 생각도 못 했는데, 지금 앉아있는 책상의

낙서들을 보니 기억이 나버렸다.

이 책상… 형이 여기에 날 앉히고 이상한 짓을 시켰었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 날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를수록 내 얼굴은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나는 그런 얼굴을 가리려 이마에 팔을 갖다 댔다. 팔에서부터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머리를 팔에 기댄 채 옆을 힐끗 쳐다보자 날 쳐다보고

있던 강이태랑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 빠르게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옆에 앉아있는 그에게 들킨 것 같아 귀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던 거야…

“출석 부를게.”

후덕해 보이는 인상의 교수님이 구겨진 노트로 부채질을 하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교수님은 손을 뻗어 강의실 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선풍기를 켜며 출석을 불렀다.

나는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꽉 쥔 채 이 수업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람이 내 바로 옆에 앉아있는 지금 상황에서 수업이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

“오늘은 첫 수업이니까… 이쯤에서 끝낼까.”

1시간 30분이 오늘만큼 길게 느껴진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누구보다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교수님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사실 수업이 끝날

것 같은 조짐이 보인 30분 전부터 가방을 챙기고 잔뜩 긴장한 채로 앉아있었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이미 문 쪽을 향해 몸을 틀고 있었다. 단순한 내 예상이었지만,

수업이 끝나면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 것만 같았다.

더 이상은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만큼 엮일 상황을 내 쪽에서 만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다음 주는 중간고사 조 짤 거니까 다들 늦지 말고. 오늘 수고했어.”

“무슨 개강 주부터 중간고사 타령이야.”

강이태는 작게 불만을 투덜거리더니 서둘러 일어나는 내 팔을 덥석 잡아당겼다. 어디

가냐고 물어보는 그의 물음에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시선을 돌리며 말을 더듬거렸다.

“집에 가야지… 어딜 가겠어.”

“다음 수업 없어?”

“나 수강신청 망해서 쉬는 날 없이 5일 다 나가….”

“아아….”

어색한 대화 끝엔 항상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후배들은 강이태에게

인사를 했고, 아마 다음 수업도 이 후배들이랑 같이 듣는 것 같았다. 강이태에게서 도망칠

기회라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책상 위에 얹어진 가방을 들고 그가 잡고 있는 손을 쳐냈다.

“그럼 나 먼저 가볼게.”

“잠깐만….”

“내일 미팅 때 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날 잡으려 했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사람마냥 바쁘게

강의실을 나와버렸다. 누구보다 빠르게 1층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학교 정문을 나서면 쭉 세워진 포장마차 양옆으로 자취방들이 들어서 있다.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현우 형이 사는 오피스텔이 있고, 왼쪽 길가엔 내가 사는 자취방 건물이

있다.

술자리에서 알게 된 후배 말로는 내가 살고 있는 건물 바로 옆에 강이태가 살고 있다는데…

이제부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그를 피하는 수밖에 없다.

도어로크를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종일 문을 닫은 채로 비워놔서 그런지 꿉꿉한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방 창문을 열었고, 창문 틈으로 구겨진

종이컵을 힘겹게 빼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난다

생각했는데 누군가 창문 틈으로 담배꽁초를 쌓아놨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우리 집을

드나들 사람은 정해져 있었지만, 내 집 창문에 멋대로 담배꽁초를 쌓아둘 사람은 역시

현우 형밖에 없었다. 구겨진 종이컵 안으로 까맣게 탄 담뱃재와 짤막한 담배꽁초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다용도실에 있는 휴지통에 그대로

버려버렸다.

며칠 정리 안 하고 넋 놓고 살다 보면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 있었고, 어느 정도 정돈되어

있던 집 안은 금세 지저분한 꼴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현우 형이 경악을 하면서

청소를 도와주곤 했는데, 요즘엔 일 때문인지 바빠지는 바람에 청소는커녕 담배꽁초나

만들고 자기 집으로 사라져버린다.

나는 혼자 투덜거리며 바닥에 눌러앉은 채 빗자루를 침대 밑으로 뻗었다. 설렁설렁

청소하는 지금 내 모습을 형이 봤다간 잔소리 폭탄을 맞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옷차림이나 하고 다니는 걸로 봐서는 세련된 사람 같으면서 청소에 있어서는 시골

할머니처럼 굴어댔다.

휘적거리던 빗자루 끝으로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뻗어 꺼내보자 검은색 담배

케이스였다. 내가 수업을 듣는 사이에 잠깐 왔다 간 건지… 한 시간이라도 담배가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 담배 케이스를 두고 간 걸 보면 지금쯤 엄청 난리 났을 것 같았다. 나는

하던 청소를 잠깐 멈추고 현우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형의 목소리는 얼핏 듣기에도 바쁜 것 같았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 설명해주고 있었다.

“지금 많이 바빠요?”

― 잠깐은 괜찮아. 왜?

“형 지금 담배 필요 없어요?”

― 어… 아 너네 집에 있어? 아까 두고 왔나 보네.

“언제쯤 퇴근해요?”

― 새벽 3시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고 있어. 잠깐 들러서 가져갈게.

형의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한결 빠르고 급하게 들려왔다. 그에 맞춰 다급하게 대답을

했고 2분도 채 안 돼 끊어진 전화가 왠지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는 쓸던 빗자루를 방구석에 던져놓고는 쌀쌀해진 밤 기온에 맞춰 겉옷을 하나 챙겨

입었다. 그리고 옷장 안에 처박혀 있던 먼지 쌓인 모자를 하나 꺼냈다.

“들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

나는 상반신까지 보이는 거울 앞에 서서 모자를 꾹 눌러썼다. 평소엔 쓰지도 않는

안경까지 챙겨 쓰고 나서야 집 밖을 나설 수 있었다.

누가 보면 나쁜 짓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마냥 되지도 않는 분장을 하는 내 자신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워 보였다.

혹시라도 버스정류장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아 택시를

잡았다. 현관 앞에서 나갈 준비만 한 시간가량 했던 건지, 시간은 벌써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엔 바람이라도 셀 겸 나선 거였지만 막상 바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우 형이 일하는 곳은 학교에서 버스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단층 짜리 건물

술집이다 단층 건물의 술집이었다.

전에 형이 말했던 것처럼 평범한 술집은 아니었다. 외관상으로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만큼 눈에 안 띄는 술집이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종업원과 손님들은

남자뿐이었다. 2년 전 처음 그 술집을 갔을 때만 해도 그 분위기가 낯설어 혼자 벽만 보고

칵테일만 3잔을 마셔댔었다. 아마 그때부터 형은 그곳의 일을 도왔던 것 같았다.

택시에서 내리자 술집에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다. 나는 한껏 긴장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모자를 깊게 눌러썼고, 이내 바 안으로 들어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