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바의 겉모습은 2년 전 내가 처음 왔을 때와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평범한 시멘트
건물보단 벽돌식 단층 건물이 이국적인 느낌을 내고 있었다. 건물 밖엔 몇몇 남자들이
나와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영국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같아 보였다. 평범한 술집도 잘 안 가는 나에겐 이 모든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바 안은 생각보다 손님이 많지 않았다. 한껏 꾸민 남자들 사이로 후줄근한 차림의 내
모습은 술집 분위기와는 동떨어져 보였다.
묵직하게 울려대는 음악 소리는 아직 나에게 낯설게 느껴졌고,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시끄러웠다. 바람이라도 셀 겸 여기까지 찾아온 거였지만, 여기에 오래 있다간 더
피곤해질 것만 같았다.
단 층짜리 술집치고는 테이블들이 널찍하게 즐비해 있었다. 나는 어깨에 메고 있는
크로스백 끈을 양손으로 꽉 쥐고, 술집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바닥이 쿵쿵 울리는 큰
음악 소리에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바쁘게 테이블 사이로 움직이는 종업원들은 빈 술잔과 병들을 술집 맨 끝 카운터 쪽으로
나르고 있었다. 나는 바빠 보이는 종업원 뒤로 잽싸게 따라붙었다.
사람 키만큼이나 거대한 스피커를 지나자 끝 부분에 위치한 카운터 테이블이 훤히
보였다.
형한테 얼핏 듣기론 카운터에서 일한다고 들었던 것 같았는데…
카운터는 오른쪽 끝에서부터 왼쪽 끝까지 연결된 홈바형 테이블이었다. 어두운 조명
탓인지 눈으로 대충 훑어서 현우 형을 찾아내는 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카운터
주변을 맴돌고 있는 남자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하얀색 와이셔츠 차림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몇몇 남자들이 이 술집에서 일하는 종업원임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카운터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술집 전체에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테이블 앞엔 유독 사람이 몰려있었다.
테이블 주변을 맴돌고 있던 남자 몇 명은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주변을 슥 눈으로
훑었다. 얼떨결에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잔뜩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내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그 남자들은 테이블 앞에서 술을 마시며 날 안줏거리 삼듯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모자를 더 꾹 눌러쓰고는 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 날 보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세게 뛰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숨을 느리게 내뱉으며 최대한 몸에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나름
용기를 내서 카운터 안쪽에 있는 종업원을 부르려 했다.
“… 저기요.”
워낙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인지 내 작은 목소리로는 턱도 없었다. 나는 살짝 주눅이
든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저….”
“네네. 이쪽으로 앉으시면 돼요.”
얼떨결에 종업원의 손에 끌려 자리까지 잡고 앉게 된 내 앞엔 어느새 달달해 보이는
칵테일까지 놓여있었다. 나지막하고 길쭉한 잔 위엔 보기만 해도 시큼할 것 같은 레몬이
꽂혀있었고, 잔의 가장자리 부분에 묻은 설탕에선 달달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들이켜자 레모네이드에 가까운 맛이 은근하게 중독성 있었다. 새콤한
향 끝에 혀에 감싸듯 퍼지는 알코올이 온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 옆엔 아까 날 힐끗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던 무리가 서
있었다.
분명 현우 형에게 담배케이스만 건네주고 돌아가려 했는데…
그들을 보고 있자니 점점 오기에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보란 듯 종업원을
향해 칵테일 이름을 외쳤다.
“여기 슬로 테킬라 하나 주세요.”
***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깜빡이는 조명들이 나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은 채 테이블을 둘러보자 각기 다른 형태의 칵테일 잔들이 내 앞에
놓여있었다. 짧은 시간에 알코올을 들이부은 탓인지 목이 말라왔다. 나는 마치 사막에서
물을 찾는 사람마냥 이미 빈 칵테일 잔을 들이켜며 물이라는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모자… 내 모자….”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꾹 눌러 쓰고 있던 모자가 어디 갔는지 머리에서 훤한 느낌이 났다.
나는 흔들리는 시야로 힘겹게 고개를 숙여 의자 아래를 살폈다. 고개를 숙이자 위장을
가득 채운 알코올들이 입 밖으로 쏟아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나오려는
헛구역질을 양손으로 다급히 막았다.
“괜찮아요?”
“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내 모자를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주워 건네줬다. 머리까지 올라온
술기운 때문에 반응이 한 템포 느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가 건네준 모자를 받아 머리에
꾹 눌러쓰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애초에 현우 형만 찾고 구경 좀 하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가려 했었는데…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동안 술까지 마시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괜찮아요? 꽤 취한 것 같은데….”
모자를 주워 준 남자는 빈 내 옆자리에 앉아 나에게 말을 시켰다. 평소에도 혼자 술 마시는
걸 더 즐겼던 나는 누군가,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거는 상황이 귀찮게
느껴졌다. 술에 취했다는 핑계로 손을 휘적이며 대답을 피했다. 술기운에 제대로 된 의사
표현이 힘들기도 했지만, 알코올 덕분에 평소 하지 못한 말까지 시원하게 내뱉을 수
있었다.
“아뇨. 안 취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누가 봐도 취해서 제대로 된 발음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 어눌한 말투에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흘끗 쳐다봤다. 그리고는 앞에서 바쁘게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종업원에게
손을 번쩍 들었다. 순간적으로 종업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을 향했다. 나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여기 얼음물 한잔 좀 주세요…. 그리고….”
술에 취하면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 게 사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닥만 보고
어버버거렸을 내가, 일정량 이상의 알코올이 들어가면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제 옆에 이 남자 좀 치워주세요.”
시끄럽게 울려대는 음악의 비트 소리가 내 말을 끝으로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각자
시끄럽게 떠들던 손님들의 말소리도 타이밍 좋게 끊겨 내 말이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종업원들은 3초 동안 나와 옆에 앉아있는 남자 손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날 달래려 했다. 때마침 카운터 안쪽 주방에서 다른 종업원이 나왔다. 그리고는 내
팔을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손님?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제가 택시 태워드릴게요.”
“무슨… 갑자기 택시예요…. 저 안 취했는데….”
“…안 취하긴 뭐가 안 취해. 너 여기 왜 왔어?”
내 팔을 잡아당긴 종업원은 익숙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그
남자를 유심히 본 후에야 현우 형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지은 현우
형은 내 옆에 앉아있던 손님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했고, 취한 날 끌고 술집 안쪽으로
데려갔다. 술집 안쪽은 알바생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았다. 양 벽면의 천장까지
상자가 쌓여있는 게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너 아까 그 남자가 어떤 손님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한 거야?”
“아니… 나는….”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은 형의 목소리가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술 때문인지 몰려오는
노곤함과 졸음에 몸까지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형의 물음에 대충
대답하고는 주머니 안쪽을 뒤적거렸다. 허리에 양손을 받친 채로 꽤나 화난 표정이었던
형이 내가 꺼낸 담배케이스를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이 시간에?”
“…딱히 이거 때문은 아니고… 그냥 혼자 집에만 있는 것도 심심하고… 바람이라도 쐴
겸….”
“그러다가 술까지 마시고? 아까 보니까 빈 잔만 5잔 넘어 보이던데.”
형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창고 구석에 있는 간이의자에 날 앉혔다. 나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무거운 몸을 기댔다.
“여기서 기다려. 손님이 많진 않아서 좀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거 같아. 옷 갈아입고 올게.”
그의 말이 울리듯 귓가에 들려오자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아까 그 손님은 누구길래 다들 난리예요?”
“이제야 술 좀 깼나보네.”
새벽 2시가 살짝 넘은 시간. 현우 형은 날 부축한 채 택시 뒷좌석에 앉았다. 창고 의자에
기대 잠깐 눈을 붙인 덕인지 술은 어느 정도 깬 상태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말끔한
차림이었던 형은 폭이 넓은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술에 취했을 때 기억이 다 나는 건 아니었지만, 간헐적으로 하나씩 떠올랐다. 분명 카운터
앞에서 형을 찾으려 했는데, 얼떨결에 다른 종업원이 주문하라고 하는 바람에 칵테일까지
시키고 자리에 앉았었다. 첫 번째 칵테일이 나오고 세 번째 칵테일을 시킨 것까진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내 옆에 어떤 남자가 앉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취한 상태에서 낯선 사람이 말 거는 게
썩 좋지만은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심한 말을 했었다. 그다음 어디선가 형이 나타나서 날
끌고 창고로 데려갔다.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내 옆에 앉았던 그 손님은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고, 꽤나
잘생겼었다. 정장에 가까운 옷차림이 술집과는 안 어울렸던 것 같았다. 단정한 회사원
이미지. 딱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와 가방이 그 남자의 재력을 대신 말해줬다.
“뭐 단골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점장? 뭐 그런 거예요?”
“꼭 젊은 남자를 한 명씩 데려오는데 그때마다 제일 비싼 술들만 시키고… 다음은 뭐.
그대로 데려가는 거지.”
“…아깐 혼자 있던데요?”
“가끔 그렇게 혼자 와서는 좀 괜찮은 남자애들을 하나씩 낚아가. 단골이기도 한데… 존나
별로야.”
형은 손을 내저으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남자한테 엮였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술기운에 쳐낸 게 다행이지. 어영부영 주는 술 다 받아먹고
완전히 뻗어버렸으면 집에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모텔까지 끌려갔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 형은 습관적으로 내 뒤를 따라 집까지 들어왔다.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현관에 멀뚱히 서 있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형은 그런 내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어이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나는 이미 포기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1리터 생수병에 반도 안 남은 물이 오늘따라 더 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일에 지친 형은 옷도 안 갈아입은 채 침대 모서리 부분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닫혀있던 창문을 끝까지 열어 재꼈고, 앉아있던 현우 형을 억지로 일으켜
창문 앞에 서도록 했다.
“형이 창문틀에 종이컵 껴놨죠.”
“아… 그거 버렸네. 내 재떨이였는데….”
“그거 때문에 담배 냄새가 다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내 책상 위를 유심히 훑어보는 형에게 나는 투덜거리며 서랍장 안에 처박혀있던 라이터를
건넸다. 형은 능청스럽게 실실 웃어 보였고, 손을 뻗어 책상 구석에 처박혀있는 재떨이를
입으로 후 불었다. 재떨이 위에 쌓여있던 먼지가 날려 고스란히 방바닥 밑으로 떨어졌다.
나는 3살짜리 조카를 보듯 형을 쳐다봤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자 한껏 눌려진 머리카락의 밑부분이 붕 떠 있었다. 나는
핸드폰 액정을 거울 삼아 머리를 만져댔다.
학교가 개강하고 거의 매일 형과 단둘이 있다 보니, 이젠 어색하지도 않았다. 처음엔 형과
둘이 있는 게 어색하다 못해 떨리기까지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이 내 집에 오거나, 날
자기 집으로 부를 때면 목적은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친한 형동생 사이보단
정말 서로 필요해서 만나는 관계였다. 그래도 형과 알게 된 지 1년이 지나고 3년째가
넘어가니 단둘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친해질 수 있었던 사람은 강이태를 제외하고 거의 처음이었다.
“웬만하면 나 일하는 곳에 찾아오지 마.”
“…왜요? 언젠 형이 데려갔으면서.”
“그땐 그때고… 아까 그런 손님한테 걸리면 곤란하잖아.”
“내가 뭐 애도 아니고.”
내가 한 말이 맞는 말이긴 했는지 현우 형은 아무 대답 없이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어냈다.
가끔 형의 과도한 참견에 불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살짝 퉁명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리고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알람을 맞췄다. 짙게 풍겨오는 독한 담배 냄새에
미간이 저절로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미팅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가 보이면 어떻게 할 거야?”
“…갑자기 뭐예요.”
갑작스러운 형의 질문에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집요하게 날 바라보며 정확한
대답을 요구하는 형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등에 떠밀려 미팅까지 잡혔지만, 딱히
좋은 결과를 기대하진 않았다. 경험 정도로만 생각하고 나가는 거라 애프터라느니, 미팅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을지는 생각도 못 한 부분이었다.
여태까지 난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강이태를 좋아했던 건 남자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강이태 그 자체를 좋아했던 것뿐이라
생각해왔다. 사실 내가 여자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딱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항상 그랬듯 평범함에 날 끼워
맞추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당연히 다음에도 만나겠죠?”
“…아 그래?”
떨떠름한 대답을 내뱉은 형은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에 짓눌렀다. 무심하게 말한 내
대답이 그의 마음에 안 든 건지 책상에 걸터앉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날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난?”
“…형이 왜요?”
“나랑은 어떤 사이가 되는 건데?”
***
“…갑자기 뭐예요.”
어색해진 분위기에 최대한 밝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아무리 형이랑 친하다 해도 이런
분위기에는 아직 면역이 없었다.
짧다면 짧은 정적 끝에 보인 형의 표정은 딱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어떤 말을
해도 분위기는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괜히 만지작거렸고, 웃으려 노력했던 표정은 점점
무표정에 가까워졌다.
형. 저 이런 분위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내 팔을 잡고 날 위에서 짓눌렀다. 꽉 조여오는 그의 손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형… 비켜요….”
“넌 아무렇지도 않아?”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현우 형은 말없이 날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평소답지 않은 형의 모습이
나에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내 말을 끝으로 형은 체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꽉 잡고 있던 내 팔을 놔줬고,
현관 앞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을 대충 챙겨 들었다. 나는 말없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 형을 쳐다볼 뿐이었다.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형을 붙잡을 만큼의 성격이
되진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고, 계단을 내려가는 형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나는 빨갛게 부어오른 팔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끔하게 아리듯 아파 오는 팔이
방금까지 있던 일들을 다시 한번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게 들이부은
알코올들이 내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었다. 나는 방금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형이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낸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강이태가
나타나고 나서 형의 태도는 알 수 없었다.
현우 형이랑 이런 식으로 안 좋아질 줄 알았다면 일정 선 이상 가까워지지 않았을 텐데…
나는 침대에 누워 몸을 잔뜩 웅크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켜자, 언제 이렇게 많은 대화들을 나눈 건지 메시지 알림이 300개 이상
쌓여있었다. 옅은 한숨을 내뱉고 흥미없는 대화들을 쭉 훑어봤다.
― 강이태 애프터 신청 존나 많이 받을 거 같지 않냐?
― 아냐. 여자애들이랑 남자애들 눈이랑 다르다니까.
아무렇지 않게 쭉 넘기던 대화들 중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이 보였다. 나는 마치 영어
문장이라도 해석하듯 천천히 대화를 읽었다.
정작 강이태 당사자는 그 대화에 끼지도 않고 있는데, 미팅에도 안 나가는 남자 동기들이
미팅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이태가 키도 크고 남자다운 이미지라 인기가 많기도
했지만, 고등학생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여자들한테도 충분히 인기가 많을
얼굴이었다.
얼추 대화를 훑어보니 여자들이 조용하고 과묵한 남자보다 재치있고 시끄러운 성격의
남자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건 얼굴이 받쳐주고 나서의 이야기고… 너네랑 강이태는 급이 다르지.
나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대화를 보며 혀를 찼다. 망상에 빠져있는 것보다 차라리
나처럼 자기 주제를 알고 나대지 않는 편이 훨씬 낫겠다 생각했다. 나는 새벽 1시에 끊긴
대화에 조심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내가 너무 늦게… 확인했네….”
내일 6시 30분에 봐.
새벽 5시. 나는 현우 형이 떠난 후에도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