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 진동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는 베개로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담요에 가까울 정도로 짤막한 이불이
발끝을 시리게 만들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들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는 아직 꿈속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이불 밖으로 손만 뻗어
머리맡을 휘적였다.
머리맡에 놓여있던 핸드폰은 언제 떨어진 건지 침대 밑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는 잠결에
겨우 뜬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켰다.
시답지도 않은 대화를 쭉 훑어보던 중, 화면 맨 윗부분에 5시 20분이라고 적혀있는 시간이
눈에 띄었다.
“5시 20분?!”
핸드폰 진동이 울리지 않았다면 아마 종일 침대에 붙어있었을 것이다. 1시간밖에 안 남은
약속 시간 덕분에 거의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나는 서둘러 서랍장
위에 얹어있던 새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몸을 적시자 어제 현우 형과 있던 일들이 하나씩 기억났다.
자고 일어나면 완전히 잊히길 바랐는데….
형은 어제 그렇게 말없이 나가버린 후로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어제 형이 화가 났다기보단, 나에게 다른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았다. 현우 형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유독 나한테만 심할 정도로 말을 거르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날 온실 안의 화초
취급을 했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유독 싫어했다.
나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애 다루듯 말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우 형과 있던 일들을 더 이상 떠올리면 우울해지는 것밖엔 답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딴생각을 접고,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냈다.
뿌옇게 김 서린 거울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살폈다. 사실
아직까지도 거울로 내 얼굴을 본다거나, 사진을 찍는 건 아직 나에겐 어색한 일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애들한테 놀림 받은 것 중 하나가 희멀건 한 피부나 얇은
뼈대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이 싫어 고등학생 때는 일부러 농구부를 들었고, 피부를
태우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 있던 적도 있었다. 원체 어떤 짓을 해도
피부가 하얀 외가 쪽을 닮아서 그런지, 아무리 햇빛을 쐬어도 붉게 뜨거워질 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하얗게 변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잠깐 동안 들었던 농구부는 항상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고, 1년 내내
체력단련만 하다 결국 포기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거울을 빤히 쳐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살짝 떨리는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시험 한 시간 전 벼락치기도
아니고… 미팅을 이런 식으로 준비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 같았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만 닦고 욕실에서 나와 옷장 문을 열자, 엊그제 대충 개켜놓은 옷들이
쌓여있었다. 나는 옷장에 있는 옷들을 하나씩 꺼내 시트가 헝클어진 침대 위에 펼쳤다.
내가 갖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무채색 계열의 반팔 티셔츠거나, 다소 요란해 보이는
체크무늬가 가득한 남방뿐이었다.
나는 양손을 허리에 짚은 채 침대에 펼쳐놓은 옷들을 유심히 살폈다. 어떤 옷을 봐도
꾸몄다는 느낌의 옷은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고민 끝에 옷장 맨 구석쯤 걸려있던 하얀색
셔츠를 꺼냈다. 살짝 구겨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나마 내가 갖고 있는 옷들 중
가장 괜찮아 보였다.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걸 확인한 나는 최대한 빠르게 옷을 챙겨입었다. 살짝
더워진 날씨에 맞춰 셔츠 소매를 느슨하게 걷고, 평소엔 끼지도 않던 시계를 왼쪽 손목에
찼다. 아까까지만 해도 젖어있던 머리카락이 눅눅하게 마르자, 힘없이 축 처진 머리가
오늘따라 더 거슬려 보였다. 나는 서둘러 서랍장을 뒤적였고, 평소 쓰지도 않던 롤빗과
반쯤 맛이 간 헤어드라이기를 꺼내 들었다.
***
“하진 선배! 왜 이렇게 늦었어요~”
“미안… 너네 먼저 가 있어도 됐는데…. 여자애들은?”
“글쎄요. 먼저 와 있으면 안 되는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후배들 뒤를 따랐다. 나는 내 앞에 서서 후배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강이태에게 저절로 시선이 갔다. 그는 평소 옷차림에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넓은 어깨나 키, 한마디로 몸매가 되는 덕에 특별히 안 꾸며도 꾸민다는 이미지가 강한
편이었다.
검은색 셔츠를 검은색 바지에 느슨하게 넣어 입은 차림이 강이태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가 차고 있는 시계와 벨트를 슥 훑어봤다. 명품 브랜드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절대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가 차고 있는 물건들이 비싸겠다라는 것쯤은 가늠할 수
있었다.
오늘따라 엄청 꾸미고 나온 것 같네.
하긴 중요한 자리긴 하니까….
후배들의 대화에 어울리던 강이태는 뒤에서 쫓아오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습관처럼 손끝으로 내 뒷목을 쓰다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딱히 훔쳐보려던 건
아니었지만, 이런 옷차림을 한 강이태는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강이태가 날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귀 끝까지 빨개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얼얼할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까 황급히 손으로 가려버렸다.
“다들 아직 안 왔나봐요.”
“자리는 예약해놨지?”
학교 앞 새로 생긴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치고 꽤나 넓어 보였다.
저녁 6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곧 다가오는 여름 덕분인지 밖은 해가 지지 않아 밝은
편이었다. 아직 해가 떠 있는 바깥과 달리 어두운 조명으로 분위기를 조성해놓은 가게
안이 나쁘지만은 않아 보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선반 위엔 사장님이 모으시는 다양한 모형의 소품들이 놓여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작은 향초와 그 향초를 감싸고 있는 독특한 모양의 워머가 눈에
띄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쯤, 점원이 다가와 자리를
안내해줬다.
후배들 뒤를 쫓아 예약해놓은 룸 형태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최대한 강이태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가장 안쪽 자리로 들어갔다. 제일 바깥쪽에 서 있던 강이태는 안쪽에 앉은
날 한번 보더니, 내 옆자리에 앉으려던 후배를 불렀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도 돼?”
“아… 이태 형. 가운데 자리 탐내시는구나~”
“하긴, 형이 가운데에 있어야 여자애들도 좋아할 거 같아요.”
내 옆자리에 앉으려던 후배는 흔쾌히 강이태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수백 번은 내저었다. 어쩌다 보니 강이태 옆자리가 되어버린 나는 평소보다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부터 얘랑은 더 이상 엮이지 말자고 분명 그렇게 다짐하고 나왔는데….
“안녕하세요.”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신입생처럼 보이는 여학생 4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포함한 영문과 남자 4명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를 나눴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미팅 경험이 서로 많다며 허세 떨었던 남자 후배 두 명은 막상 여학생들이
나타나자 입을 싹 닫아버렸다.
나름 분위기 메이커로 믿었던 후배 두 명이 조용해지자, 미팅 분위기는 한순간에
초상집마냥 가라앉았다.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보다 못한 후배 한 명이 웃으며 이내 메뉴판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다들 여기 와보셨어요? 저는 처음이라….”
“저희도 여기 처음이에요. 생긴 지 얼마 안 된 거 같던데….”
또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보다 못한 후배들이 먼저 메뉴를 권하며 말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그들의 노력이 빛을 바라듯 앞에 앉아있는 여학생들은 웃음을 지어줬다.
후배들의 말장난에서 대체 어디가 재밌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예의상 웃어주는 건가….
나는 턱을 괸 채, 메뉴판만 유심히 쳐다봤다. 가게의 분위기에 맞게 가독성 떨어지는
메뉴판이 새삼 더 어렵게 느껴졌다. 주문을 재촉하는 후배의 말에 메뉴를 대충
훑어보고는 음식을 시켰다.
23살이 되도록 미팅에 나가본 적 없던 내가 이런 분위기를 이끌 리는 없었다. 한마디로
구석에 처박힌 신세가 되었다. 딱히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내 옆에 앉아있는
강이태가 괜히 신경 쓰일 뿐이었다. 음식이 나온 후,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분위기가
오히려 더 어색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서든 대화에 껴보려고 웃고만 있는 게 내가
생각해도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참다못해 깊은 한숨을 내쉬고, 음식과 함께 나온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들이켜던 중 우연히 강이태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창가 쪽으로
옮겼다. 여자애들과 능숙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후배들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크게 뛰는 심장 소리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럴수록 얼굴까지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쉽게 달아오르는 얼굴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살짝 떨리는 손으로 맥주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저부터 자기소개할게요.”
1학년 때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짧은 시간에 적응하긴 힘들었다.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고 질문을 하는 동안 나는 괜히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으로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급하게 대본을 짜고 있었다. 자기소개 같은 것도 할 줄은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최대한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으론 티를 안 낸다고 했지만,
다리를 떤다거나, 손에서 땀이 나는 건 숨기기 힘든 습관들이었다.
후배들의 소개가 끝나고, 강이태의 차례가 됐다. 누구든 호감이 갈 만한 목소리에 넓은
어깨와 키, 스타일과 얼굴까지. 당연한 일이었지만, 마주 보고 앉아있는 여자애들 네 명
모두가 강이태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강이태는 역시 말을 잘하는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인지까지
더듬거리지 않고 말하는 게 내가 봐도 호감을 살만한 사람이었다. 순간 내 옆에 앉아있는
강이태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이태가 한편으론 부럽게 느껴졌다. 나에게 강이태는 모든 걸 가진 사람처럼
보이니까….
아마 남들이 보면 꼴불견이라 생각하겠지. 어떻게든 내 성격을 극복해볼까 싶어 온
자리인데, 잊었다고 생각한 짝사랑한테 이런 감정이나 느끼다니….
소개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세례가 쏟아졌다. 앞 순서였던 후배들에 비해
길어지는 질문시간이 다음 차례인 나까지 부담스러웠다. 심하게 떨려오자 안 아프던
배까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긴장한 탓에 후배들이나 강이태가 어떤 식으로 소개를
했는지, 질문에 대답은 어떻게 했는지 제대로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강이태의 순서가 끝나고, 내 차례가 오자 나는 최대한 표정에서 떨리는 티를 안
내려 노력했다. 애써 웃음을 짓는다는 게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 꽤 웃긴 표정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내 소개를 하자니 여간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하진이고요…. 올해 제대하고 2학년으로 복학했는데… 친구들은 아직 다 군대에
있어서 학교 적응하기가 쉽지 않네요….”
어색해… 학교 부적응자라고 떠벌릴 일 있냐….
짧은 한 문장이 끝나자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마음 같아선 테이블에 머리 박고 미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군대 갔다 오셨구나… 엄청 어려 보이시네요. 신입생인 줄 알았어요.”
“이 선배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1학년인 저희보다 어려 보인다고….”
당황하는 날 제쳐 두고 후배가 대신 대답을 했다. 나는 속으로 스스로의 무능함에 대해
자책하느라 바빴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린 채 남들에게 안 보이게끔
감추자, 어느 정도 눈치챈 강이태가 내 쪽을 힐끔 쳐다봤다. 차라리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내 꼴이 우스워 보이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렇게 말없이 피한 이유도 설명 안
해주는 날 보면서 강이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몇 년이 지났는데 찌질한 건 그때랑
똑같네.
절대 남을 비하하거나, 욕할 애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내는 건
일종의 병처럼 느껴졌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생각이 들자 몸까지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나타나는 두통이 하필이면 지금 말썽이었다. 강이태는 테이블 밑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던 내 손을 말없이 잡았다. 큼직하면서도 뼈대가 굵직하고, 따뜻한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던 내 손을 감싸자 진정되었던 얼굴이 다시 빨갛게 올라왔다. 나는 그의
손을 피하며 창가 쪽으로 몸을 더 붙이려 했다. 강이태는 순순히 내 손을 놔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어디 아파?”
“아냐. 괜찮아.”
평소에도 수다스러웠던 후배 두 명은 물 만난 고기마냥 쉴 틈 없이 입을 열었다. 그들 눈엔
우리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고, 반면에 여자애들의 시선은 강이태에게 쏠려있었다. 나는
강이태의 질문을 최대한 회피하며 포크를 손에 쥐었다. 포크 끝으로 이미 식어빠진
파스타를 돌돌 말고 쿡쿡 찌르기를 반복했다. 푹 퍼진 크림 파스타가 입맛을 돋구긴커녕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메슥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사색이 된 얼굴빛에 다들 눈치챈 건지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속 안 좋아 보이시는데….”
“선배 어제 또 혼술하신 거 아니에요? 2차로 술 마시려고 했는데~”
옆에 앉아있던 강이태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후배에게 눈치를 줬다. 나 때문에
분위기까지 가라앉은 것 같아 서둘러 말을 이었다.
“다들 2차로 술마시러 갈거면 저는 그냥 빠질게요. 어제 좀 달렸더니 속도 좀 안
좋아서….”
“…진짜 가는 거예요? 선배 빠지면 아쉬운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하는구나….
속까지 안 좋은 건 아니었지만 술의 독한 알코올 냄새를 생각하니 멀쩡했던 위장까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다들 일어서는 분위기를 틈타 나는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누군가
뚫어져라 날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릿수 채워주겠다고 미팅에 낄 땐 언제고, 1차가 끝나자마자
사라져버리는 꼴이 내가 생각해도 밉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제대로 놀지도 못하게
생겨서는 저럴 줄 알았다고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8시가 넘은 시간이라
건물과 연결된 좁은 지름길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코끝까지
시린 느낌이었다.
***
감기라도 든 건지 차가운 저녁 공기가 목을 간지럽혔다. 집에 오는 내내 코를 훌쩍거리던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저앉듯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나에게 항상 퀘스트를 수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방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버린 나는 핸드폰을 들어 강이태의 SNS를 살폈다. 이태는 내 계정을
알 리 없었지만, 강이태는 워낙 특이한 이름이라 한 번에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의
소식을 몰래 염탐한 건 벌써 3년 정도 된 것 같다. 처음엔 그에 대해 완전히 잊고
대학교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건 내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강이태가 뭘 하고 사는지, 어디 학교를 입학했는지. 나에게 가장 큰 관심사였다.
내가 이런 식으로 자기 SNS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연히 기분 나쁘겠지…
스토커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올라왔던 게시글들은 내가 그의 앞에서 사라진 1년 동안 아무
글도 올라오지 않았었다.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옛날 게시글들은 모조리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한 것 같았다. 주로
올라오는 건 편입 전 학교 애들이랑 찍었던 사진들이나 가족들이랑 찍은 사진들이었다.
“아줌마 아저씨도 여전하시네….”
이태네 부모님은 나에게 누구보다 친절하신 분들이셨다. 항상 바쁘셨던 아버지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이태네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저녁을 함께하곤 했다. 누구보다도
화목하고 잘사는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란 이태가 부러웠다. 열등감이라기보단 나도
강이태랑 같은 집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딱 그 정도의 안타까움이었다.
열등감이나 질투라는 안 좋은 수식어가 달리긴 싫으니까… 애써 부정하는 마음도 있던
거겠지.
나는 과제라도 할까 싶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가까스로 책상 앞에 앉기까진
성공했지만, 핸드폰을 놓긴 힘들었다.
오늘 미팅에 나온 국문과 여자애들은 어떻게 생겼더라….
내 옆에 앉아있던 놈한테 신경 쓰느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책상에 고개를 묻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연락 올 곳도 없으면서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 건 5년 전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도망치듯 전학을 오고 나서 사실 누군가 나를
찾아주길 바랐던 마음이 컸다.
날 찾는 연락이 온다면 그만큼 누군가한테 난 중요한 존재였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
같았다.
― 나중에 이어지는 애들은 꼭 알려줘야 된다?
― 이태 형이 제일 가능성 있을걸요ㅋㅋ 여자애들 하나같이 다 선배만 쳐다보던데
밤 11시가 다 돼서야 다들 집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턱을 괸 채 핸드폰 화면 위에
뜨는 알림창만 뚫어지라 쳐다봤다. 보아하니 강이태는 내 예상대로 잘 풀리고 있는
눈치였다. 1차 때까진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연한 갈색 머리의 여학생과 분위기가 좋아
보였는데 아마 그 여자애랑 잘 풀렸던 것 같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내 책상 위로
엎드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