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3)

12화

― 강이태 애프터잡혔댄다 한턱쏴라.

― 헐 대박ㅋㅋㅋ 그럴 줄 알았다.

“아….”

나는 쓰고 있던 회색 후드에 얼굴을 더 깊게 파묻었다. 한 손으로 스크롤을 위아래로

올렸다 내리며 망설이던 끝에 호응하는 척 대충 답했다.

― 부럽네. 한턱쏴라

한턱 쏘긴 개뿔. 이제 더 이상 강이태와는 만나기도 싫고, 그에게 곧 여자친구도 생길 것

같으니 내가 바라던 대로 엮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이런 식으로

강이태와 멀어지고, 내 머릿속에서 잊히면 되는 거니까.

나는 첫 번째 서랍 구석에 처박혀있던 담배를 꺼내 들고, 암막 커튼을 걷어버렸다.

창밖에서 비쳐오는 햇빛을 따라 방 안의 먼지들이 날리는 것 같았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컴퓨터 앞에서 겨우 일어나 창문을 열자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풀 냄새가 풍겨왔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깥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미팅을 한 지 벌써 5일이나 지났다. 톡방의 분위기를 봤을 땐 강이태만 미팅한 여학생과

그 이후로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그 여학생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5일 동안 강이태를 최대한 피해 학교와 집만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한마디로 거의 폐인 같은 삶을 살며 최대한 현실을 회피하는 중이다.

시험이 몇 주 안 남은 지금 상황에서 남의 연애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난 5일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그의 SNS를 들어갔다. 덕분에

집중은커녕 과제도 못 끝낸 상황이었다.

장학금이 꼭 필요한 형편에 미팅이라니. 내가 미칠 대로 미쳤지…

짤막하게 타들어 간 담배를 열린 창문 틈새에 지져 꺼버렸다. 창문을 닫으려던 그때

자취방 건물 1층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의자 뒤에 걸려있던 학과 점퍼를 대충 걸치고 지갑을 챙겼다. 자취방

아래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자, 깡 마른 작은 체구의 삼색 고양이가 가만히 앉아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고양이는 내 걸음 소리에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몸을 잔뜩

웅크렸다.

1미터 정도 거리를 둔 채 고양이를 살피던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가만히

앉아있던 고양이에게 꼼짝 말고 여기 있으라는 듯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는 고양이가 그사이 도망이라도 갈까 서둘러 자취방 건물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편의점 안을 훑어 참치 맛 삼각김밥 하나와 캔디 맛 막대

아이스크림, 고양이용 간식 캔 하나를 샀다.

급하게 계산하고 나오던 중, 바닥에 동전을 떨어트린 나는 작게 욕을 뱉으며 떨어진

동전들을 하나씩 주었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꽤 멀리 굴러가는 걸 누군가 잡아 내 앞에 건넸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자, 한껏 밝게 웃고 있던 표정이 한순간에 경직되어버렸다. 나는 그가 건네준

500원을 받아 주머니 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양이용 간식 캔을 따

뚱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던 고양이 앞에 갖다 주었다.

가장 피하고 싶던 사람을,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만난다는 건 생각보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시선을 고양이에게 고정한 채 입만 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 오늘 수업 있지 않았어?”

“내가 수업 언제 있는지까지 알아봤어?”

쓰고 있던 후드 안으로 귀가 뜨거워지는 것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나는 당황한 내 모습이

혹시라도 들킬까 싶어 고개도 못 들고 고양이만 쳐다볼 뿐이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숨기기 어려웠지만, 최대한 일정한 목소리톤으로 말을 뱉었다.

“뭐야… 전에 너가 말해줬잖아.”

“그랬나?”

그럴 리가… 사실 너가 SNS에 수업 가기 싫다고 썼던 걸 본거지.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편의점 앞에 펼쳐진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강이태는

그런 내 모습을 내려다보더니, 아무런 말없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어느새 캔을 깨끗이 비운 고양이는 내 다리 밑에서 부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짧은

바지를 입은 덕에 털이 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낮 2시라 그런지 뜨거운 햇빛이 구름

사이로 비춰왔다. 검은색 봉지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한입 베어 물자 입 안 가득

차갑게 퍼지는 소다 향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에 놀란 고양이가 주차장 밑까지 빠르게

도망쳐버렸다.

“이리와.”

“그렇게 저음으로 말하면 잘도 오겠다.”

나는 허리를 숙여 고양이와 눈높이를 맞추려 노력했다. 최대한 살가운 목소리로 이미

도망간 고양이를 불러봤지만 딱히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내 옆에 서 있던 강이태는 검은색 봉지에서 꽤 큰 용량의 캔맥주를 꺼냈다. 그리고는

내 얼굴 앞으로 맥주를 들이밀며 말했다.

“마셔.”

얼떨결에 두 손으로 맥주를 받아 든 나는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물고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으게머어?”

“뭐긴. 네가 한턱 쏘라며.”

순간 아까 잠결에 보낸 메시지가 머릿속을 지나쳤다.

아-

짧은 깨달음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아이스크림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텅 빈

입에는 쓴맛이 맴도는 나무막대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태는 그런 날 보며 피식 웃더니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나는 차갑다 못해 얼얼한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점점 뜨거워지는 얼굴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를 신경 쓰면 신경

쓸수록 얼굴은 더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지난 5일 동안 있던 일들을 간략히 말하자면,

강이태와 겹치는 3개의 수업 모두를 일부러 늦게 들어갈 정도로 피해 다녔다. 출석을 부를

때 칼같이 들어가 뒷문 맨 끝자리에 앉았고, 가끔 강이태가 날 붙잡으려는 심산인지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면, 일부러 맨 앞자리에 앉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와 접점이 생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아침엔 습관처럼 과 톡방을

확인했는데, 그때마다 동기 애들이나 후배들이 국문과 여학생 한 명과 강이태를

이어주려고 하는 메시지들이 가득했다.

뭐… 애들 말로는 국문과 여신이라나?

미팅에 나온 여자애들 중 한 명이라는데, 네 명 중 유독 눈에 띌 정도로 예쁜 애가 있긴

했었다. 나는 워낙 긴장하느라 고개를 들지도 못했었지만, 예뻤던 건 분명하게 기억난다.

연한 갈색 웨이브진 머리스타일에 하얀 피부, 웃을 때 눈이 접히는 귀엽고 예쁜

얼굴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그 여학생이 강이태의 옆을 나란히 걸을 땐 속으로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강이태는 그 여자애랑 잘된 건가? 사귀고…있나?

나는 갑자기 몰려드는 이유 모를 분노에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는 그가 건네준 캔맥주를

소리가 나도록 세게 따버렸다.

어떤 이유에서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괜한 심술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강이태는 헛기침을 하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피울래?”

강이태는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나에게 들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와 그 얼굴을 번갈아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찾던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는 강이태를 말없이 쳐다봤다.

비스듬히 숙인 고개, 담배 끝에 불이 붙어 연기를 내뱉고 천천히 내 쪽을 쳐다보며 살짝

웃는 모습이 나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강이태는 지금보다 좀 더 순박한 느낌이었다. 그 당시에도 무표정일 땐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였지만, 교복 차림이라 지금보단 친숙해 보였다.

지금 이태의 이런 모습엔 아직 면역이 생기려면 한참 먼 것 같았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라이터를 쥐어 담배 끝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이태가 당연하다는 듯 라이터를 잡아 불을 켰다. 누군가 대신 불을 붙여주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자 뜨거우면서도 탁한

연기가 목 안을 툭 치고 들어왔다. 평소 내가 피우는 가벼운 담배와 달리 묵직하면서도

독한 향이 저절로 기침을 일으켰다.

뜨거운 연기를 내뱉자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연기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말없이 담배 연기와 캔맥주를 번갈아가며 마시던 이태는 의자 뒤에 몸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나 너랑 예전처럼 잘 지내고 싶어.”

“…….”

“근데 너가 날 피하는 거 같아.”

나는 끝이 타들어 가는 담배를 조용히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를 경계하고 있던

고양이에게 고정되어 있던 강이태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그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스팔트 바닥에 비추는 그림자를 통해

내 앞에 앉은 그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훔쳐볼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담배를 크게 한

모금 마시고는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종이컵 안으로 담배를 짓눌렀다.

아까 받은 캔맥주의 겉면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쓸어 닦았고, 옅게 심호흡을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무슨 소리야. 너가 피하는 거 아니었어? 미팅 때 걔… 그 여자애랑 잘되어가니까

바빠서 나한테 신경 못 쓴 거잖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최대한 내가 이태를 피했다는

사실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피했던 이유를 물어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더 상처받은 사람마냥 어색한 표정 연기를 했고, 내 말이 끝나자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그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캔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강이태는 마치 내가 맥주를 다

마시길 기다리는 듯 천천히 연기를 내뱉었다.

내가 이태를 피한 이유… 그저 나 혼자 상처받기 전에 상대방을 쳐낸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자기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상태고, 친구 사이에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하냐는 소리만 들을 게 뻔한 일이었다.

애초에 강이태가 나한테 신경써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강이태였다면 멋대로 연락을

끊어버린 내가 괘씸해서라도 모르는 척하고 살았을 것이다.

“너야말로 남들이 하는 말만 듣고 멋대로 판단한 거 아니야?”

“어제….”

“…어제?”

어제 전공수업이 끝나고 복도에서 강이태와 그 여자애가 같이 있는 걸 봤었다. 주변에

다른 애들이 있었다면 아무 생각 없었겠지만 다들 자리를 피해 준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오늘 아침 애들이 말한 애프터 얘기를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너가 그 여자애랑 같이 있는 걸 내가 봤는데 뭘 멋대로 판단했다는 거야…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가벼운 플라스틱 의자가 울퉁불퉁한 아스팔트에 밀려 드르륵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비운 캔을 편의점 앞 쓰레기통으로 골인시켰다.

자리에 앉아있는 강이태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아냐. 됐어.”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결국 하던 말을 대충 얼버무렸고, 그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자취방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자리에 앉아 날 보고만 있던 그가 말없이 사라지려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거 놔….”

손을 쳐내기엔 생각보다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세게 잡힌 손목에 피가 안 통하는 듯

저릿해지자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했고, 그는

평소라면 볼 수 없던 다소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 외의 반응에 말끝을 흐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따듯한 햇빛이 비치는 봄 날씨와는 안 어울리게 무거운 공기가 우리

주변을 감싸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을 정리하기도 바쁜 내가, 무서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그의 속까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마치 주인에게 혼나는 새끼 강아지마냥 기가 죽어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여자애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뭐?”

“…애프터 같은 거 안 잡았다고… 걔네가 계속 밀어준 거지. 난 생각도 없었어.”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변명하고 있어?

난 강이태의 얼굴이 이 정도로 빨개지는 걸 여태 본 적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귀

끝부터 점점 얼굴 전체가 붉어지는 게 생각보다 순진해 보였다. 의외의 모습에 나는

신기하다는 듯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거웠던 공기는 때마침

불어오는 봄바람 덕분인지, 다시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손 좀….”

“아… 미안.”

그는 부러트릴 것처럼 꽉 잡고 있던 내 손목을 서둘러 놔줬고, 강이태는 얼굴이 빨개진 채

더듬거리는 말투로 사과를 했다. 얼얼하면서도 저릿한 손목은 그의 얼굴처럼 붉게

올라있었다.

헛기침을 하며 뒷목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모습에 괜히 옛날 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이태는 다른 사람들한테 항상 반듯한 모습만 보여줬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완벽할

정도로 반듯한 모습에 동경을 하고 있었다. 매사에 진지하고 굳어있는 표정에 선뜻

다가가기 힘든 인상이었지만, 가까워질수록 자주 보이는 그의 웃는 표정이 보기 좋았다.

얘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나는 그와 마주 보고 서서 이목구비 하나하나,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봤다.

참다못한 강이태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내 눈과 똑바로 마주쳤다. 살짝 당황한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섰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나에게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야, 기억나?”

“…뭐?”

“옛날에 시험 기간이라고 너가 우리 집 와서 공부한 거.”

“어….”

갑작스러운 그의 추억팔이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긴 어려웠다. 중학생마냥 해맑은

표정으로 눈까지 빛내며 말하고 있는 그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나 취미에 대해 말할 때면 곧잘 눈을 빛내며 설명을 해줬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참으며 이태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으려

노력했다.

“그때 우리 집에 아무도 없어서 냉장고에 있던 술 다 마셨잖아. 공부한다면서 영화나

보고….”

“…그랬나?”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그 날들을 내가 잊을 리 없었다. 처음 이태의 집에 놀러 갔던 날,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온

날, 그리고 처음 우리 집으로 놀러 온 날까지…

“…갑자기 그건 왜?”

강이태는 내 눈 바로 앞에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 긴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댔다. 그의 웃는 표정 때문인지 내 두 뺨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밝은 시간대라 점점 빨개지는 내 얼굴이

그의 눈에 띄었을 것 같았다. 이미 머리카락이 다 헝클어진 후에서야 그의 손을 쳐냈다.

나는 손끝으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그가 하는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내일 우리 집에서 과제 할래?”

“…너네 집에서?”

“…별로야?”

나는 또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라는 물음을 뱉기도 전에 강이태가 먼저

선수를 쳤다.

“너 아직도 크림파스타 좋아하냐? 내가 내일 저녁으로 해줄게.”

“너 내가 돼진 줄 아냐. 먹을 거로 유인하게….”

“돼지 맞잖아. 맨날 급식실 정리할 때까지 같이 남아있던 게 누군데.”

“그건 체육 때문에 배고파서 그런 거고…. 무슨 맨날이냐? 몇 번 안 그랬는데….”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이태와 대화를 주고받자 한껏 달아오른 얼굴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뜨거워질 정도였다. 반면에 강이태는 아까에 비해 훨씬 여유로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는 파라솔 테이블에 살짝 기댄 채 담배를 하나 꺼냈다. 익숙한 듯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가볍게 불을 붙이는 그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봤다.

“…왜? 라이터?”

“아니.”

그는 담배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담뱃재를 손끝으로 톡톡 쳐 맥주캔 안으로 떨어트렸다.

내 쪽으로 라이터를 들이밀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가 뱉은 담배 연기는

불어오는 바람에 아지랑이 마냥 일렁였다.

고등학생 때 강이태는 얼굴도 반반하게 생겼었고, 키도 컸었다.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학교 선배들은 강이태를 눈여겨봤던 것 같았다. 같이 다니면서 강이태에게 찝쩍거리는

선배들만 수두룩했고, 그때마다 강이태는 칼같이 잘라냈다. 단호할 땐 단호하고, 자기가

손해 볼 일인지 아닌지 누구보다 잘 판단하는 애였다.

담배 같은 거 성인이 돼서도 안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내가 강이태를 모범생 취급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너 완전 골초 다 됐네.”

“…너가 할 말은 아니지. 학생 땐 몸이 안 좋아서 성인이 돼서도 술, 담배 같은 거 못 할 줄

알았는데….”

“그땐 내가 생각해도 약골이었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자세로 편의점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내 모습이 내가 봐도 어색해

보였다. 그렇다고 의자에 다시 앉기는 애매한 시간이었고 쨍하게 비추던 햇빛은 어디론가

숨은 듯 한결 선선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제대로 쏴. 이런 캔맥주 말고. 크림파스타랑 와인이라든가….”

“너 술 잘 못 하잖아. 그냥 무알코올 샴페인 같은 거 어때?”

“…저번엔 섞어 마셔서 토한 거야. 나 술 못하진 않아.”

“그래? 고딩 땐 완전 장난 아니었잖아. 그때 너 변기 부둥켜안고 운 거 기억난다.”

“난 그때 토한 기억 없거든?”

“…이제야 똑바로 쳐다보네. 맨날 피하더니.”

“….”

강이태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음을 삼켰다. 평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한텐 장난도

안 치던 놈인데, 내가 편하긴 한 것 같았다.

항상 피하기만 했던 이태의 눈을 이렇게까지 오래 본 적이 있었나?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습관처럼 고개를 숙여버렸다. 나는 서둘러 파라솔 테이블 위

검은색 봉지를 낚아채듯 쥐고 자취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 더 오랜 시간 강이태와 함께

있다간 말하면 밤새 그동안 있던 일을 얘기해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분명 혼자 분위기에 취해서 이상한 말을 해버리겠지…

“그럼 내일 연락해.”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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