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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33)

13화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가봤던 이태네 집은 어림잡아 50평 정도 돼 보이는 넓은

아파트였다. 맨 꼭대기 복층 구조에 테라스까지 있었고,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어머니

덕분에 가구나 벽지 하나하나 신경 쓴 게 보였다. 연한 노란빛 벽지에 따뜻해 보이는

갈색계열 가구들이 이태의 이미지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그때가 아마 고등학교 2학년 10월 초였지…

한창 쌀쌀한 가을 날씨에 어울리는 인테리어였다. 벽지 색에 어울리는 목재 마룻바닥이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끼익 소리가 났었다. 그 소리마저 집안 분위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현관부터 거실까지 이어진 짧은 복도를 지나자 향초 냄새가 옅게 풍겼다.

잘 준비된 슬리퍼에 닿는 푹신한 카펫까지 그 당시 내 눈엔 모든 게 완벽한 집이었다.

***

“강이태. 오름빌 304호맞지?”

― 으응… 맞다니까….

“너 지금 일어났어?”

― ….

방금까지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축 처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가까스로 왼쪽 어깨에 핸드폰을 걸치고 양손에 가득 든 봉투를

바닥에 잠깐 내려놨다. 참다못한 나는 깊은 한숨 소리를 내뱉어버렸다. 잠결에

웅얼거리던 강이태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건지, 마저 말을 이었다.

― 야 잠깐만… 지금 거의 다 왔어? 조금만 기다려.

“왜?”

― …집 너무 더러워서. 나 지금 일어났어.

“괜찮아.”

“내가 안 괜찮거든?”

강이태는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톤으로 말했다. 급하게 일어나 청소라도 하는 건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자 뻐근하게 결려오는 어깨가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그냥 대충 정리해놓고 기다려. 끊는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 안쪽에 쑤셔 넣었다. 무거운 짐을 양손에

가득 든 채 이태가 산다는 자취방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안 나는

계단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씩 무겁게 내디뎠다.

3층에 가까워질수록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평소 숨 쉬는 운동만 겨우 하는

수준인 데다가 1층에 사는 덕분에 체력은 고등학생 때 못지않게 약해져 있었다. 나는

304호 앞에 서서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초인종을 눌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사이…

“왔어?”

내가 집 앞에 서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건지, 기다렸다는 듯 이태가 먼저 문을 열고 내가

들고 있던 짐을 들어줬다. 순식간에 그 무거운 짐들은 식탁 위로 올려졌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얼떨결에 그를 뒤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경쾌한 도어록 잠금 소리가 집 안을 울렸고, 지저분하다던 이태의 말과는

다르게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현관 선반에 올려져 있는 향초에서 풍겨오는 옅은 꽃냄새가 분위기와 어울렸다. 하얀색의

침대 시트와 자취방에서 보기 드문 회색 벽지는 방 전체의 색감을 일부러 맞춘 것처럼

보였다. 하얀색의 아일랜드 식탁 위는 방금 닦은 것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강이태는 방금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것 같았다. 젖은 머리카락 위에 얹어진 검은색

수건과 살짝 물기에 젖은 옷차림, 옅게 풍기는 비누 향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방금 막

일어났다면서 청소에 샤워까지. 절대 남한테 흐트러진 모습을 안 보여주려는 모습이

강이태다웠다.

예전엔 나한테 흐트러진 모습조차 안 보여주려는 이태에게 서운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이거 다 편의점에서 산 거야?”

“…마트에서 여기까지 이걸 어떻게 다 들고 와. 애초에 재료는 너가 사놓지 그랬냐? 한턱

쏜다고 큰소리칠 땐 언제고….”

“미안. 어제 과제 마감 때문에 종일 노트북 앞에 있어서 나갈 시간이 없었어. 근데….”

너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그는 식탁 위에 올려진 봉투를 뒤적거렸다.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재료들을

대량으로 구매한 덕에 원룸의 작은 냉장고 안이 가득 차고도 남았다. 봉투 맨 구석에

처박혀있던 긴 영수증이 얼마나 많은 재료들을 샀는지 알 수 있었다. 강이태는 말없이

영수증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훑어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 쪽을 쳐다봤다.

“뭘 사면 편의점에서 15만 원 어치를 사?”

“내가 다 먹으면 되잖아.”

“그래도 그렇지…. 계좌 톡으로 보내 놔.”

무심한 듯 말할 땐 언제고 금세 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새롭게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강이태는 학교에서는 좀처럼 남들 앞에서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편입한 지도 얼마 안 된 데다가 생각보다 낯을 가리는 그의 성격이

좀처럼 드러나는 걸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엔 좀 더 밝은 느낌이었는데…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성격 자체는 비슷했다. 사람들을 먼저 리드하려고 했고, 눈치도

나름 빨라서 선생님들이나 어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과제 할 거 뭐 가져왔어?”

“강 교수님 수업 있잖아. 인문학 어쩌고… 피티 자료 만들어야 되는데 아직 1페이지야.”

나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창가 밑에 있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분명 방금

일어났다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주름 하나 없이 깔끔히 정돈된 침대 시트가 신기했다.

누운 채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켜자, 입고 있던 하얀색 반팔 티셔츠가 위로 들려버렸다. 날

쳐다보고 있던 강이태는 짧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밖에 더워?”

“응. 덥더라…. 4월 말이면 아직 한참 봄인 거 같은데….”

“너 옛날부터 더위 잘 탔잖아. 농구 하다가도 10분 만에 열 올라서 쓰러질 뻔하고.”

“갑자기 그때 얘기는 왜 해.”

나는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땐 링거를 달고 살 정도로 몸이 약했었다.

유독 더운 여름날 체육관이 아닌 운동장에서 한 시간 이상 서 있기라도 하면 픽 하고

쓰러져버렸다. 덕분에 뒤에서 수군거림도 많이 들었었다.

그게 다 누구 때문에 한 고생들이었는데…

“… 왜?”

“아니…. 바닥에서 공부할 거야?”

“책상 펴줄게.”

강이태는 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접이식 책상을 꺼내 방 한가운데에 펼쳤다. 책상 다리를

하나씩 펼 때마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먼지들에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며 먼지들이 나에게 접근 못 하도록 철저히 막아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보던

이태는 당연하다는 듯 탁자 위 물티슈를 한 움큼 뽑아 먼지가 쌓인 책상 위를 닦아냈다.

하얗던 티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에 가까운 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깨끗해진 책상 앞에 앉았다. 얼핏 보기에도 낮아 보이는 책상에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너무 낮나?”

“…이거 유아용 아니야?”

“아니면 너가 책상 위에서 할래?”

“됐어. 어차피 노트북이라….”

나는 가방 안에서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노트북을 꺼냈다. 두껍고 긴 배터리 선을

연결하고 전원 버튼을 누르자, 꽤나 큰 소음을 내며 노트북 화면이 켜졌다.

“이거 엄청 오래된 모델 아니야?”

“한… 6년? 아직 쓸만해.”

“그 정도면 바꿀 때 됐네….”

강이태는 책상 위에 놓인 묵직한 노트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깔끔한 목재 책상 위엔 6년 된 내 노트북과는 정반대인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얄쌍한 디자인이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요즘 광고에 나오는 신식 노트북이었다.

그는 노트북 전원을 켜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눌렀다. 텅 빈 내

자료 화면과는 다르게 빼곡하게 채워진 창이 낯설어 보였다. 나는 이태의 뒤에 기댄 채

화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뭐야. 너 벌써 이만큼 했어?”

“…일주일도 안 남았잖아. 분명 일주일 후면 다른 과제에 치여서 못할걸.”

“너도 참….”

이런 건 하나도 안 변했네.

나는 한숨 비슷한 헛웃음을 짓고 다시 바닥에 앉았다. 텅 빈 화면이 없던 의욕까지

꺾어버리는 것 같았다.

1시간쯤 지났을까, 조용한 방 안엔 다소 시끄러운 노트북의 소음만 울려댔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바로 등 뒤에 있는 침대로 상체를 젖혔다. 등에 닫는 침대 매트리스의

폭신함에 몸 전체가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슬쩍 들어

입식 책상에 앉아있는 강이태를 빤히 올려다봤다. 시선은 철저히 노트북 모니터에

고정시키고, 일정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 모습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야, 강이태.”

“왜.”

어제까지만 해도 단둘이서 무슨 얘길 할지 고민에 빠졌었다. 작가가 대본을 쓰듯이 몇

가지의 경우의 수를 들어 대사를 생각했었다.

분명 단둘이 있을 때 분위기는 엄청 어색할 것 같았고, 서로 할 말을 생각하느라 가져온

과제도 제대로 못 할 거라 예상했다. 그런 내 예상과는 다르게 할 얘기가 많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내가 강이태에 대해 까먹으면 어떡하지.

어떻게 보면 난 생각보다 강이태를 보고 싶어 했고, 그리워했을 수도 있겠구나…

강이태의 시선은 모니터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살짝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큰 소리로 하품을 했다. 그리고 빳빳하게 주름 하나 없이 펴져 있는 침대

시트 위로 다이빙을 하듯 누워버렸다. 두 팔을 활짝 펴 시트 자락을 최대한 헝클자, 보다

못한 이태가 노트북을 덮고 몸을 내 쪽으로 틀었다.

나는 너무 과하게 장난쳤나 싶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마치 초등학생 조카라도 보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배고파.”

“…아직 한 시간 조금 넘었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태는 헛기침을 하며 살짝 빨개진

얼굴을 숨기듯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웅크린 자세로 누워있던 나는 그의 배에서 난 소리에 실실 웃으며 말했다.

“뭐야. 너도 배고픈가 보네.”

***

나는 조용히 식탁에 기댄 채 그가 싱크대 밑에서 프라이팬 꺼내는 모습을 쳐다봤다.

어깨에 걸친 검은색 수건과 낮은 싱크대에 비스듬히 서 있는 자세. 무심한 척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던 나는 그가 고개를 돌리자 급하게 시선을 옮겼다.

“너 많이 먹을 수 있지?”

“크림파스타면 자신 있는데… 얼마나 하려고?”

말끔히 정돈된 식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이태는

잠깐 고민을 하는 듯싶더니, 이내 파스타 면을 손에 한 움큼 쥐더니 커다란 냄비 안으로

담갔다.

나는 아까 제대로 못 살펴봤던 방 안을 천천히 훑어봤다.

암막 커튼을 기준으로 나눠져 있는 싱글 침대와 방금 앉아있던 책상이라기엔 깔끔히

정리된 필기구와 노트북.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기엔 아무리 봐도 과하게 깔끔해 보였다.

“너 집에서 담배 피워?”

“…가끔?”

창가와 욕실에 올려둔 시원한 향초 냄새 사이로 옅은 담배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침대에 누워있을 땐 못 느꼈었는데, 한 걸음씩 움직여 방을 돌아다니자 풍겨오는 담배

냄새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침대 바로 옆 탁자 위에 다소곳이 놓인 담뱃갑과 형광색 라이터가 유난히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담뱃갑에 붙어있는 흡연 경고 사진이 유독 징그럽게 보여 나는 눈살을 저절로

찌푸렸다. 현우 형이 강이태였다면 당장 인터넷을 켜서 담배 케이스를 장바구니에 담았을

것이다.

의외로 이런 거엔 신경 안 쓰나보네.

나는 시선을 부엌 쪽으로 돌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강이태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강이태는 꽤나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여러 가지 요리를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꽤나 센

불에 채소를 볶아대는 탓인지 탄내와 연기에 눈까지 매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침대 위편에 굳게 닫혀있던 창문을 끝까지 열어 재꼈다.

방 안 천장까지 자욱했던 연기는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서서히 환기되는 것

같았다. 연신 기침을 해대던 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휴지로 코를 풀었다. 매운 연기가

눈살까지 저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강이태는 그런 내 모습의 어디가 웃긴 건지 혼자

실실 웃으며 하얗고 얕게 파인 유리 그릇 위로 능숙하게 음식을 담았다.

“환풍기 좀 틀지….”

“이거 고장 났어. 주인아저씨한테 고쳐달라고 했는데 연락이 없네… ”

“여기 주인아저씨 불친절하기로 유명하잖아.”

“그래? 그나마 남은 방이 여기밖에 없길래 계약한 건데….”

“역시… 남은 방엔 이유가 있다니까… ”

침대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식탁에 놓인 음식들을 쭉 훑어봤다. 얼핏 보기에도 잘

세팅된 음식들이 저절로 날 일으키는 것 같았다. 어느새 식탁 앞에 자리 잡고 앉자, 이태는

내가 잡은 포크를 낚아채며 말렸다. 그러더니 냉장고 안에서 자취생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와인병을 꺼내왔다. 와인병 표면에 붙은 상표는 내가 읽으려고 노력해도 읽을

수 없는 언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 긴 팔을 쭉 뻗어 찬장 맨 위에 올려진 와인잔 두 개를 한 번에 잡아 나에게 건넸다.

그제서야 의자에 앉은 이태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가 능숙하게 와인 따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웃음이 나왔다. 강이태는 빈 와인잔에 와인을 반 정도 따르며 웃는 날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 혼자 살면서 와인오프너까지 준비해놓는 사람은 아마 강이태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철저함에 웃음이 나왔을 뿐이었다.

“혼자 와인 자주 마시나봐?”

“…응.”

아까 냉장고 안 보니까 술이라고는 이 와인밖에 없던데…

게다가 와인잔은 찬장 맨 위에 올려놓고…

강이태는 곤란한 질문을 받을 때면 평소답지 않게 시선을 피하곤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습관만큼은 그대로였다.

이태에 대해 나만큼 생각한 사람이 여태 있었을까?

“뭐해? 건배 안 해?”

“아… 건배까지 해?”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반쯤 채워진 와인잔을 들고 가볍게 건배했다. 유리잔의

경쾌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오는 길에 편의점을 들려 급하게 재료를 샀고, 불러준 주소대로 그의 자취방까지

찾아왔다. 방금 일어났다는 그 말과는 달리 깔끔한 차림에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 시트.

언제부터 피운 건지 집 안 가득 퍼진 향초의 은은한 향과 새로 사둔 듯한 와인.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해놓고 살아?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날 위해 이렇게 준비해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물론 그 깔끔하고 칼 같은 성격상 평소에도 이렇게 해놓고 산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멋대로 단정 지은 이 생각들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엄청난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았다.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지…

나는 홧김에 들고 있던 와인잔을 한 번에 비워냈다. 맞은편에 앉아 천천히 와인을

들이켜던 이태는 맥주 마냥 와인을 원샷해버린 내 모습에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란

표정도 잠시, 그는 내 앞에 비워진 잔을 다시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너 와인 처음 마셔봐? 무슨 와인을 원샷하냐….”

“처음은 아닌데… 이렇게 잔까지 갖춰서 마셔보는 건 처음이야. 뭔가 어색하네….”

실실거리며 웃던 이태는 원샷한 나와 다르게 와인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나도 그를 따라 한 모금 천천히 마셨고, 포크를 들어 잘 만들어진 파스타를 맛봤다. 음식을

한입 먹은 나는 한껏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에 앉은 이태를 쳐다봤다. 우물거리는

입은 멈추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적당히 부드러우면서 입 안 가득 퍼지는 마늘 향이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못지않은 맛이었다.

“진짜 맛있어…. 너 옛날엔 라면만 끓일 줄 알았잖아.”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느릿하게 목 안을 넘어가는 액체가 뜨겁게 느껴졌다. 몇 모금 마셨을 뿐인데 와인의

도수가 생각보다 높았는지, 금세 기분까지 들뜨는 것 같았다. 보통 술에 취하면 생각이

짧아지고, 말이 많아지는 편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앞에 앉아있는 상대가 내

술버릇을 아주 잘 아는 강이태라는 사실이었다.

평소 제대로 된 와인을 마셔보지도 못한 탓에 깔끔한 목 넘김이 꽤나 중독성 있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이태가 따라주지 않아도 그 큰 와인잔에 가득 차도록 따라 마셨다.

그렇게 좋아하던 크림파스타는 이미 불을 대로 불어 담긴 그릇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강이태는 마치 예능프로 시청자처럼 턱을 괸 채 와인을 우아하게 조금씩

마셔댔다.

“조금만 마시라고 꺼내온 건데… 너 과제 할 생각은 있어?”

“…과제 할 생각이었어?”

“…….”

내 말의 어느 부분이 웃겼던 건지 실없이 웃어대던 이태는 빈 그릇을 옆쪽으로 치우고

본격적으로 빈 잔을 채워나갔다. 아직 가득 남아있는 파스타를 옆으로 치우고 반쯤

남아있는 와인병을 가운데로 옮겼다. 그리고는 가볍게 챙 소리가 나도록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

이렇게까지 기분 좋게 취한 적이 언제였더라…

나는 원하지 않은 술자리에 스트레스를 받아 차라리 혼자 취해버리자는 마음가짐으로

마셔댔던 적이 다분했다. 그나마 술맛을 느끼면서 먹어본 적은 현우 형이랑 둘이

자취방에서 맥주를 마실 때 정도였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느껴보는 술기운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와인의 마지막 잔을 따를 때까지 서로 무슨 말을 나눴는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았다. 나는

마지막 잔이 채워지자 아쉬운 티를 얼굴 표정에서부터 드러내버렸다.

마지막 잔을 건배하자 기다렸다는 듯 울려대는 핸드폰 진동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테이블 구석에 엎어놓은 핸드폰을 들어 흐릿한 초점을 겨우 맞추고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이태가 입을 열었다.

“전화 안 받아? 누군데?”

“어….”

나는 한참 울리고 있는 핸드폰과 앞에 앉아있는 강이태의 얼굴을 살피며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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