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니… 그냥 아는 사람?”
누가 들어도 수상쩍은 말투였다. 한참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힐 생각은 없었지만,
어지러운 머릿속이 어떤 말을 해야 될지 정리가 안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한껏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앉아있던 강이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현우 형 이름 밑에 떠 있는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현우 형은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화가 끊기고 1분도 안 돼서 핸드폰은 다시
요란하게 진동을 울려댔다. 나는 핸드폰 화면과 강이태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내 얼굴에 티가 났나?
“그냥 받아. 급한 일인 것 같은데….”
“…….”
내가 강이태와 있을 때 현우 형과의 연락을 피하는 이유와 현우 형과 있을 때 강이태와
만나는 걸 꺼려하는 이유는 같다.
형에게 이런 말을 하긴 미안하지만, 현우 형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간섭이 심한 편이다.
상대가 딱히 강이태가 아니었어도 그의 오지랖은 심했을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현우 형과 다니면서 나와 나름 친한 동기들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그 동기들은 점점 나와 현우 형을 피하고 있었다. 동기들이 날
찾거나 연락을 할 때 현우 형이 내 핸드폰을 낚아채 끊어버린다거나, 내가 약속을
승낙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형이 나타나 멋대로 나와의 약속을 만들어버리곤 했었다.
처음엔 그런 형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따져보기도 했고,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대답 대신 미안하다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래도 그 후로는 더 이상 날 귀찮게 굴지 않았다. 강이태가 다시 나타나기 전까진….
“현우 선배야?”
“…진짜 내 주변 남자들은 왜 하나같이….”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
나는 미간을 좁히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꽉 눌렀다. 평소 주량보다 많이 마신 탓에
머리까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어질한 시야를 붙잡고 부릅뜬 눈으로 앞에 앉아있는
강이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술잔을 비우고 옆에
있던 캔맥주까지 이미 섭렵한 것 같았다. 나는 짧은 숨을 내뱉으며 속을 진정시키려 했다.
“됐어. 분명 나 취한 거 알면 난리치면서 찾아올걸….”
“굳이 그 사람한테 숨기지 마.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거.”
“그 사람….”
언제부터 호칭이 선배, 형에서 그 사람까지 되어버린 거지….
술기운 덕분에 머릿속이 1분에 한 번씩 비워지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강이태는 점점 어두워지는 내 시야를 잡아주듯 자기가 들고 있던
캔맥주를 들이밀며 건배를 권했다. 그 큰 와인병을 비운 건 꽤 전의 일이었다.
내 잔이 비어있자 몸을 일으켜 그는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 틈을 타
바람이라도 셀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킨 것뿐인데 밀려오는 피곤함에 온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게슴츠레
겨우 뜬 눈으로 뒷주머니를 뒤적였다.
“뭐 찾아?”
“…담배 좀. 안 갖고 왔나봐.”
“저기 침대 옆에. 잠깐만….”
이태는 열어 재꼈던 냉장고를 닫고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담뱃갑을 손에 쥐었다. 베란다
문이 열리자 살짝 선선한 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시원하게 느껴졌을
밤공기가 술기운 때문인지 차갑게만 느껴졌다. 이태는 그런 날 살피더니, 침대 아래쪽에
곱게 접혀있던 담요를 들어 내 등 뒤로 둘러줬다. 꽤 오랜 시간, 많은 양의 알코올을
들이켠 덕에 내 얼굴이 빨개진 이유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이미 얼얼할 정도로
뜨거워진 뺨을 숨기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지럽혀진 시야를 붙잡고 몇 개비 안 남은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름 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오늘따라 라이터 불이 잘 안 켜지는 것 같았다. 불이
안 붙자 내 눈살은 점점 좁혀졌다. 중얼중얼 작게 욕을 내뱉으며 라이터를 켜봤지만,
애꿎은 손가락의 살갗만 벗겨질 뿐이었다. 이미 불을 붙인 지 오래였던 강이태는 내 옆에
서서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너 진짜 취했나보네.”
“…안 취했는데.”
강이태는 내가 물고 있던 담배 끝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가 물고 있던
담배 끝과 내 담배의 끝이 맞닿자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불을 붙였다.
불씨가 옮겨붙으면서 하얀 담배 연기가 창문 밖으로 퍼져나갔다. 바람을 타고 사라져버린
연기에 한동안 시선이 고정되었다. 나는 내 눈앞에 머물고 있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묘하게 조용해진 분위기가 오히려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미소를 짓고 이태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아직 취기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바람 때매 그래. 원래 잘 켜는데.”
“무슨….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낮엔 칙칙하게만 보였던 담배 연기가 어두운 밤인 탓에 하얗게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으며 베란다 난간에 기댔다.
“지금 무슨 생각해?”
“…방금 그거. 현우 형이랑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식으로 불붙여줬거든. 그때 내가
취해서….”
“아아….”
나는 난간에 기댄 채 실없이 웃어댔다. 기분 좋을 정도로 마신 술 덕분에 평소 못 했던
말들을 주절주절 떠들 수 있었다. 살짝 들뜬 상태로 어색했던 상대와 단둘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은 일 같았다. 대학에 온 이후로 절대 못 느꼈던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현우 형에겐 잊었다고 했지만, 어쨌거나 강이태는 나에게 첫사랑이었으니까… 떨리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 들어서기 전까진 꽤 걱정을 했었다. 혹시라도 곤란한 질문을 하진 않을까, 둘이만
있던 적은 고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니까 엄청 어색하진 않을까 나로선 많은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강이태는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납작한 재떨이에 담배를 짓눌러 꺼버렸다. 살짝 굳은
그의 표정이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눈치껏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털어내고,
그를 뒤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남았는데 더 안 마셔?”
깔끔히 정돈되어 있던 식탁은 빈 술병으로 더럽혀진 후였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테이블
옆에 기댄 채 반 정도 남은 술병을 들고 흔들었다. 병에 든 술이 흔들거리자 내 속까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한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보기만 해도 토할 거 같아. 이제 술 안 마셔….”
“거짓말도 잘한다.”
피식 웃는 그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다시 안정됐다. 취기에 마비된 것 같았던 몸이
살짝은 풀린 것 같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양손으로 쓸어올리며 보기만 해도 푹신해
보이는 이태의 침대에 뻗어버렸다. 잘 정돈된 시트를 멋대로 헝크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부드러운 극세사 감촉의 시트를 손에서 놓기는 힘든 일이었다. 누워있는 날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병에 남아있던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나는 살짝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맞다. 얘 술 셌었지….
혼자 빠른 납득을 하고는 무거워진 머리를 베개에 묻어버렸다. 얼굴 전체에 폭 감기는
베개에서 강이태 특유의 비누 냄새가 풍겨 기분이 묘해지는 것 같았다. 축 처진
머리카락을 크고 시원하게 감싸듯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눈이 저절로 감겨왔다. 나는
아까보다 훨씬 느릿해진 말투와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야… 우리 분명 가볍게 와인만 마시고 과제 하기로 하지 않았어?”
“…뭐 어때.”
강이태는 기지개를 켜며 내 옆에 몸을 눕혔다. 혼자 쓰는 침대치고 나름 커 보였던
매트리스가 남자 둘이 눕자 작게 느껴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 긴 팔을 뻗어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내 심장은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가라앉아 겨우 진정한 얼굴이 다시 붉게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한순간에 귀 끝까지 뜨거워졌다.
나는 베개에 묻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나보다 훨씬 멀쩡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새삼 낯설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반사적으로 다시
묻어버리는 내 꼴이 꽤나 우스웠다. 크게 뛰는 심장 소리 틈으로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손끝으로 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흐트러트리는 그 사소한 행동조차 날
떨리게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상대적으로 몸이 뜨거웠던 나와 달리 이태는 차가운 편이었다. 게다가
방금까지 술 몇 병을 해치웠으니, 몸은 달아오를 대로 뜨거워져 있었다. 시원한 체온이
느껴지자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온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처음엔 머리카락 한 올씩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끝이 점점 목덜미까지 머물렀다. 평소보다 조용한 분위기에 아무 말
없이 누워만 있는 지금 상황이 한순간에 적응될 리 없었다.
“하진아.”
정적 끝에 내 이름을 부르던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머물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옆에 누워있는 강이태를 바라봤다. 짙은 선을 가진 그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약 10초 동안 방 안의 공기가 멈춘 것처럼 조용하게 느껴졌고,
흔들리는 내 시선과 다르게 강이태는 똑똑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며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다.
그의 입술이 내 얼굴에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깨까지 움츠린
내 모습이 마치 겁에 질린 동물이라도 된 것 같았다. 조용한 정적 속에 미세하게 들려오던
그의 숨소리가 날 잔뜩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그의 모습을
슬쩍 훔쳐봤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얼굴 하나하나를 살피는 것 같았다.
강이태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본 적이 언제더라….
이태는 손끝으로 내 뺨을 천천히 어루만지듯 스쳤다. 누군가의 손길이 어색했던 나는
몸을 반대쪽으로 돌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썼다. 잔뜩 상기된 얼굴을 가린다는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분위기가 더 이어졌다간 지금까지의 내 노력이
물거품 될 것만 같았다. 애초에 이 집에 발을 들이면 안 됐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어느
순간 이 상황까지 와버린 것이다.
“아… 졸려….”
도망치듯 이불 속으로 숨어버린 나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아직
크게 뛰고 있던 심장이, 목소리까지 떨리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불 안에서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남아있는 술기운에 머릿속이 핑 도는 게 느껴졌다.
남자 두 명이 좁디좁은 침대에 웅크린 자세로 누워있다는 게 남들이 보면 이해 안 갈
정도로 우스워 보일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짧은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겼다.
집주인은 강이태인데 내가 침대까지 차지하는 게 맞는 건가?
지금이라도 바닥에 내려갈까… 두세 블록만 걸으면 집에 도착하면서 왜 굳이 얘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거지….
***
작게 들려오는 인기척에 무거운 눈꺼풀이 떠졌다. 내 눈앞에 보이는 건 아까 눈감았을 때
보였던 하얀 이불이었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몸을 웅크린 자세까지 잠들기 전과
똑같았다. 나는 이불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이미 날이 밝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관 서랍장에서 뭔가 뒤적이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현관에 서서 운동화를 신는
소리.
지금쯤 방 안을 둘러보면서 잊고 가는 건 없는지 생각하고 있겠지.
띠리릭 ―
다소 경쾌한 도어록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이불 속이
답답하긴 했는지 몸 곳곳에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머리가 핑 도는
느낌까지 들었다. 힘겹게 뜬 눈으로 건너편에 있는 테이블 위를 대충 살폈다. 얼핏
보기에도 구석에 쌓여있는 술병들이 어제의 밤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베란다 문이 활짝 열려있고, 난간 옆 재떨이에 가득
쌓인 담배꽁초를 봤을 때 방금 전까지 강이태가 담배를 피웠던 것 같았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로 들어서자 확 풍겨오는 담배 냄새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아직 불씨가 남아있는 담배꽁초를 다시 한번 짓눌러
껐다.
강이태가 내 옆에서 잤다기엔 침대 시트는 체온 하나 안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식어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침대 밑바닥을 살펴봤지만, 딱히 누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집에 돌아갈걸.”
누가 봐도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젯밤 이불을 덮고 분명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술기운으로 피곤한 탓에 바로 잠들어버렸다. 나는
이미 삐죽 솟은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헝클며 자책했다.
내가 미쳤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빈 담뱃갑과 라이터.
분명 공강 날 일찍 어디론가 나간 걸 보면 금방 다시 돌아올 것 같았다. 3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을 간 게 유력했다. 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켜 접이식 책상 위에 어지럽혀 있는
전공책과 무거운 노트북을 가방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 가방을 그대로 등에 메자
오늘따라 유난히 묵직하게 느껴졌다. 나는 거울을 볼 틈도 없이 현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컨버스화를 구겨 신었다. 숙취로 몸이 무거울 법도 한데 이럴 땐 꼭 몸의
감각이 둔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나한텐 강이태가 오기 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강이태가 나간 지 5분쯤 지났나? 아니… 10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려댔다. 나는 작게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 떠 있는 익숙한 이름과 부재중 통화 7건이 유독
눈에 띄었다. 계단 여섯 칸을 두 칸씩 한 번에 내려가던 중 자취방 건물 앞에서 익숙한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으며 연기가 풍겨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무슨 일….”
― 너 왜 이제야 받아?
현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강이태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시선을 피했고, 대충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사적으로 빨라지는 걸음이 유독 피하는 게
티가 날 정도였다. 내 이름을 부르는 현우 형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멍해진 날
깨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역시 담배 사러 나온 거였구나….
짧은 생각을 끝으로 강이태에게서 멀어지자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그제서야 나는 형의
말에 대답을 했다.
― 하진아. 유하진?
“…네?”
― 어제 왜 전화 안 받았냐고. 뭘 들은 거야….
“아뇨. 그냥 어제 종일 과제 하느라 못 받았어요.”
누군가에게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 마냥 길거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멍한 머릿속을
누군가 계속 헤집는 느낌이었다. 통화 중 핸드폰에서 짧은 효과음이 들렸다. 종일 충전을
못 한 탓에 핸드폰이 곧 꺼질 것만 같았다. 내 대답 이후로 형이 내게 어떤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형… 미안한데 저 몸이 좀 안 좋아서 나중에 전화할게요.”
나는 내 할 말만 하고 도망치듯 통화종료버튼을 눌렀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괜히 오던
길을 뒤돌아봤지만, 내 뒤를 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느릿한
발걸음을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어제의 일을 되짚어봤다.
건물 앞에서 만났으면 그냥 눈인사 정도만 하면 될 일인데, 왜 또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고 고개 숙여 인사한 거야….
그래. 술이 웬수지….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사실 예전처럼 잘 지내보고 싶다는 강이태의 말에 내가
흔들렸던 거였고, 혼자 아닌 척 다 잊은 척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더니, 결국 술 몇 잔에
예전처럼 강이태에게 혹한 것뿐이다. 강이태를 잊고 싶다는 말로 현우 형까지 끌어들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강이태를 못 잊겠다는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았다. 내가 그를
잊었다고 믿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게 자기세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우 형에게 그를 잊었다고 말했으니까, 사람 갖고 거짓말하는 사람만큼은 되고
싶지않았다.
나는 거의 반쯤 넋 나간 상태로 어느새 방 안까지 도착했다. 메고 있던 무거운 가방을 현관
앞에 던져 놓은 채 어질러진 침대 위로 엎어졌다. 베개에 고개를 묻자 눅눅하고 쾌쾌한 술
냄새가 배어있는 옷차림이 찝찝하게 느껴졌다. 아까는 급하게 나오느라 몰랐지만,
삐죽하게 뻗쳐있는 머리카락부터 땀에 젖은 꾀죄죄한 몰골까지 몸 상태는 엉망처럼
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숙취까지 심해져 속까지 울렁거렸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눕혔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현관 앞 가방을 들어 의자에
올려놓고, 환기라도 시킬 겸 창문을 끝까지 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안 좋았던 속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창밖에서 들리는 익숙한 소리들이 오늘따라 낯설게 들려왔다. 나는 평소보다
힘없는 얼굴로 옷장에서 흰색 반팔티과 검은색 반바지를 챙겨 들었다.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틀고, 머리 위로 샤워기를 갖다 대고 나서야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