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3)

16화

가끔 숨이 턱 끝까지 막힐 때가 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숨이 가빠지고, 손끝부터 다리까지

떨려온다.

사람이 많은 곳에 혼자 있거나, 조금이라도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면 증상은 더

악화된다. 어떤 병원을 가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이 증상은 시간이 지나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한 후부터 아주 천천히,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 그러니까 정확히 몇살 때의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 아빠는 내가 어릴 적부터 따로 살았다. 엄마와 나는 오피스텔 같은 깔끔한 집에서

살았고, 아빠는 예전 우리 가족이 살았던 방 두 개 딸린 평범한 빌라에서 지냈다. 엄마는

매일 일에 치여 제대로 얼굴도 볼 수 없을 만큼 바빴다.

가끔 엄마가 집에서 쉬는 날엔 한껏 꾸민 채로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거나, 나를 작은 방에

들여놓고선 어떤 아저씨를 집에 데려오곤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차마 엄마한테 그

아저씨가 누구냐고 물어보지 못했었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이른 아침부터 엄마의 손에 끌려 어디론가 향했다. 한껏 꾸민

엄마에게서 나던 그 향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코끝을 자극하는 독한 향수 냄새.

달달한 향을 온몸에 세 번… 아니, 거의 여섯 번을 들이부은 것 같았다. 차갑고 손가락

마디가 두드러진 엄마의 손은 내 팔을 꽉 잡고 있었다. 와인색 매니큐어에 큐빅까지

박혀있는 손톱과 얇은 손목을 감싸고 있는 고급스러운 팔찌. 어딘지 모르게 화나 보이는

엄마의 뒷모습에 내 시선은 저절로 바닥에 머물렀다.

노르스름한 빛을 내는 조명이 가득한 카페. 그 나이에 처음 가본 카페가 어린 나에겐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넓은 카페의 맨 끝 창가 자리엔 어딘가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반갑게 인사하기엔 그의 표정이 어딘가 어두워 보였고, 분위기는 무거웠다.

엄마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먼저 와있던 아빠에게 어떤 종이를 내밀었다. 내내 표정이

어두워져 있던 아빠는 엄마가 내민 종이를 대충 훑어봤다. 그리고는 엄마 옆에 조용히

숨죽인 듯 앉아있는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내 존재가 그곳에서 조용히 지워지길

바랐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여태까지 엄마와

아빠가 무슨 일 때문에 서로 언성을 높이고 싸웠는지 그때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숨죽이고, 못 본 일처럼 웃어넘겨야 했다.

그 날, 나는 누구보다 강해 보였던 엄마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봤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내가 아는 엄마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뭐가 그렇게 서러웠던 건지….

낯선 분위기에 못 참고 나도 엄마를 따라 눈물이란 눈물을 다 쏟아냈다. 카페에서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나갈 땐 아빠의 뭉툭하고 거친 손에 끌려 나왔다. 그 손에 들려있던 갈색

서류봉투와 낡아 보이는 검은색 지갑. 나는 더 쏟아지려던 눈물을 참으며 뒤를 돌아봤다.

방금까지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에 혼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며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정갈하게 정리되어 고급스러운 머리핀으로 한번 집은

머리가 지금은 얼핏 보기에도 헝클어진 것 같았다.

그땐 어려서 부모님의 사정 같은 건 잘 알지도 못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알고 보니

나와 엄마가 살던 그 넓은 오피스텔은 엄마의 애인이 얻어준 집이었다. 매일같이

이혼서류를 들고 매달리던 엄마에게 질린 아빠는 3년이 넘도록 나와 엄마를 멀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는 이혼서류에 사인을 해주는 대신, 엄마에게서 양육권을 가져온 것

같았다. 이 모든 가정사를 혼자 이해하기까지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병적으로 눈치를 보며 웃음을 짓게 된 것이….

***

“다녀왔습니다….”

“부모님 계셔?”

“아니. 아빤 여덟 시 정도에 올걸.”

“…그럼 누구한테 인사하는 거야.”

그 후로 나와 아빠는 단둘이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절대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조그마한

거실에 작은 방 두 개가 딸린 집. 이래 보여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빌라다. 옛날 이

동네가 개발되기 전, 운 좋게 할머니께서 마련해둔 집이었다. 지금은 허름한 빌라촌

곳곳이 재개발된답시고 부서지고 있지만, 아빠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보상금을 받기 위해

두 달 가까이 거리에 나가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아빠의 얼굴을 본 지 꽤나 오래됐다.

아빠하고 단둘이 살게 된 지는 나름 오래됐다면 오래됐지만, 아직 어색한 건 그대로다.

집 자체는 낡아 보일지 몰라도 옥탑방이라 방 밖으로만 나가면 탁 트인 서울 시내를 볼 수

있다.

나는 지저분하게 놓인 신발들을 대충 발끝으로 정리했다. 친구를 집에 데려온 것은 아마

오늘이 처음일 거고, 앞으로도 이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집으로 먼저 들어선

강이태가 메고 있던 검은색 가방을 신발장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방 여기 내려놓을게.”

현관에 들어서면 집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다소 작아 보이는 하얀 냉장고에 성인 한

명이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아담한 크기의 부엌,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낡은

나무재질의 문지방. 아빠가 느지막이 집을 나선 건지, 아침엔 깨끗했던 설거지통 안에

냄비가 담겨 있었다. 반사적으로 집을 둘러보는 강이태의 눈을 가리며 현관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나는 방 안에 멀뚱히 서 있는 이태를 나름 깔끔히 정돈된 침대 위에 앉혔다. 다행히 방 안

만큼은 평소보다 깨끗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을 발 뻗어 침대

밑까지 쭉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 선을

앞으로 당겨 최대한 책상 끝까지 밀었다.

“너 뭐 안 마실래?”

“…아 맞다. 이거 먹으면 되지.”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봉지를 부스럭거렸다. 봉지 안에는 익숙하면서도

예스러운 포장지가 눈에 띄는 소다 맛 아이스크림이 들어있었다. 이태는 내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여주며 익숙한 듯 이 끝으로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뜯어버렸다. 이미 녹은

아이스크림을 서둘러 입 안에 넣는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어린 애처럼 보였다. 학교에선

절대 못 볼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우스에 손을 갖다 댔다.

“무슨 영화라 했지?”

느릿한 인터넷 속도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손끝으로 마우스 버튼을 가볍게

두드리며 인터넷 창이 뜨길 기다렸다. 영화 감상 발표. 다섯 명씩 조를 짜 두 명은

영화감상문을 적고, 나머지 인원이 발표와 발표자료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발표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려 하다보니 이번에도 할 일이 많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웬만하면 이태네 집에 가고 싶었지만, 매번 이런 숙제가 생길 때마다 신세를 지게 돼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서 영화를 보게 됐다.

“영화… 안 정해주지 않았냐? 그냥 아무 영화나 봐도 될걸.”

“아무 영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그럼 내가 골라도 돼?”

이태는 품에 베개를 끌어안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얗기만 했던 인터넷

창은 몇 분 지나고 나서야 점점 채워져 갔다.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앉아 키보드만

만지작거리던 나는 침대에 엎어져 있는 강이태를 힐끗 쳐다봤다. 그는 뭘 그렇게 찾는

건지,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가 쥐고

있던 키보드에 손을 얹어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검색창에 채워지는 글자 하나하나를 소리 내어 읊었다. 생소한 영화 이름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 언제 적 영화야?”

“…10년도 더 된 거 같은데.”

“…그런 영화도 괜찮은 거야?”

“뭐 어때. 옛날 영화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강이태는 익숙한 듯 영상 다운로드 사이트에 들어가 다운로드 버튼을 클릭했다. 우리와는

다르게 느긋한 다운로드 속도가 새삼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 재꼈다. 그러자 미지근하게 불어오는 여름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뜨거운 햇볕까지 방 안을 뒤덮자 공기 중을 채우고

있던 먼지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위에 물티슈를 몇 개 뽑아 책상 위를

대충 닦아냈다. 한숨 돌리고 나서야 책상 위에 잠깐 동안 올려둔 아이스크림이 눈에

띄었다. 포장지를 뜯어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꺼내자 이미 녹아버린 액체가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뚝뚝 떨어지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벌써 다 먹었는지 강이태의 입엔 나무막대만 물려있었다. 턱선을 타고 흐르는 소다 맛

아이스크림이 시원하기보단 오히려 걸리적거렸다. 나는 손을 뻗어 강이태의 팔을

건드렸고, 어눌한 발음으로 휴지를 외쳤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를 열 칸

정도 끊어 내 손에 쥐여줬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까지 뒤덮자 나는 표정을 구기며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참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보던 강이태는 나에게 다소

다급한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야 그냥 한입에 다 먹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막대를 타고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물어버렸다. 차갑다

못해 시린 느낌이 입 안 가득 퍼져왔다. 바닥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던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뭐가 재밌는지 혼자 실실 웃어댔다.

“손 씻고 와. 어차피 오래 걸릴 거 같은데….”

“마실 거 가져올게. 다운로드 다 되면 자막도 좀 찾아봐.”

손목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아이스크림을 휴지로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태는 발끝으로 낡은 선풍기 버튼을 눌러 틀었다. 작은 창문을

끝까지 열었지만, 빌라의 맨 꼭대기 층인 만큼 방 안은 달아오를 대로 뜨거워져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덥긴 더웠는지 강이태는 입고 있던 하복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괜히 머쓱해진 나는 당황한 모습을 최대한 숨기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손을 넣자 끈적거리고 단내나는 아이스크림이 씻겨져 나갔다. 나는 숨을

깊게 내쉰 채 물기가 묻은 손으로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생각보다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빨갛게 물든 얼굴을 닦아내기라도 하듯 서둘러 두

손으로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이 두 뺨에 닿자 뜨거웠던 체온은 점점 내려갔다.

격하게 세수를 한 탓인지 앞머리까지 뒤덮은 물기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강이태랑 단둘이 한 공간에 있던 적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그저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 같아서 신기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져본 적은 처음이었고, 처음 느꼈던 단순한 호기심은 시간이 지나자 동경심으로

번져갔다. 같은 나이 대의 친구를 동경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지치고,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게 되는 것 같았다. 동경이라는 감정은 애초에 좋아함으로 번지기

쉬운 감정이었지만, 그걸 알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내 감정을 부정하기 위해 계속해서 동경이라는 감정으로 포장하기 급급했다. 내가

강이태를 단순히 동경한다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평소에도 인기가 많던

강이태에게 조금이라도 친해 보이는 여자애가 보인다거나, 고백을 받았다는 소문이라도

듣게 되면 종일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곤 했었다. 내 뒷자리에 앉아있던 강이태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어딘가 넋 나간 사람처럼 대답했고, 책상 위에 펼쳐둔 책은 첫 장에서 더 이상

넘어가질 않았다.

나는 화장실 벽면에 걸려있던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까보단 훨씬 진정된

마음으로 깊게 숨을 내뱉었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낡은 나무재질로 짜인 화장실 문을

열어 네 걸음쯤 떨어진 위치에 부엌으로 향했다. 트레이 위에 각기 다르게 생긴 유리잔을

오렌지 주스로 가득 채워 올렸다.

“아빠한테 에어컨 좀 사자고 해야겠어. 완전 더워….”

나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섰다. 트레이를 책상 위에 얹어놓고 나서야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어… 방금 다운로드 다 됐대.”

이태는 침대 밑바닥에 앉아 갈색 인조가죽 재질의 다이어리를 읽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이어리 안을 쭉 훑어보는 강이태가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내 표정이 그에게 어떤 식으로 비쳤는지는 지금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약 5초 동안 여러 생각이 들었고, 짧은 시간 안에 생각이 정리된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한껏 떨리는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너 왜 허락 없이….”

차마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가 읽고 있던 다이어리를

뺏어버렸다. 당황한 강이태의 표정을 보자 화를 어떻게 내는지 까먹을 정도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내뱉어야 최선일지 혼자 열심히

생각해봤지만, 몸은 혼자서 행동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하라고…. 사과라도 하든가.

나는 ‘다운로드 완료’ 창이 떠 있는 화면을 무시한 채 모니터 화면을 꺼버렸고, 길게

바닥까지 늘어진 코드를 뽑아 책상 위로 대충 올렸다. 묵직한 모니터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유리잔을 건드려 넘어트리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나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모니터 화면을 끈 채 스피커만 켜놓은 것처럼 내 귓가엔 그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괜찮아…?”

그는 나에게 다가와 내 팔을 꽉 잡았다. 그의 손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쳐다봤다. 지금은 내 감정을 추스르기도 급급해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가 내 팔을 잡자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들이었다.

“숙제는 내가 대신 해 갈 테니까… 그냥 집에 가.”

“…하진아.”

“…….”

“미안….”

차라리 사과라도 안 했으면 마음 놓고 욕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의 사과 한마디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목에서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으니까 그냥 가줘.”

마냥 착한 줄만 알았던 강이태는 가끔 이런 식으로 날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순전히 내 자격지심에서 빚어진 상처들이었지만, 말 한마디라도 깊게 생각하고 묵혀두는

나에겐 하나하나가 마음속 깊숙이 남아있었다.

강이태는 내 말이 끝나자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말아 책상 위를 닦아냈다. 내 앞에 말없이 서 있던 강이태는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녹슨 철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쾅 하고 닫히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나갔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나서야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발밑에 떨어진

유리조각들이 시야에서 점점 흐릿해졌다.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고, 얼굴 전체가 화끈거릴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이 나이에 일기라니….

누가보면 되게 우스운 상황이었다. 웃으면서 말하고 간단한 사과만 받으면 끝날 일을

이렇게 크게 키운 건 어쩌면 나 때문일 수 있으니까….

초등학생 때 부모님 사이에서 그런 일들을 직접 보고 심적으로 힘든 상황들을 겪으면서

나 혼자 찾아냈던 방법 중 하나였다. 지금 같았으면 당장에라도 병원에 갈 정도로

심각했는데, 어린 나이였던 터라 병원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혼자 집과

학교를 오가면서 틈틈이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때그때 생각을 정리했다. 하루 동안 겪은 감정과 일들을 몇 줄이라도 적고 나면 한결

편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그 당시에 적었던 글들을 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한없이

가라앉아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다이어리를 펼쳐 조심스럽게 눈으로 훑었다. 학교에 전학 왔던 순간,

이유 없이 날 챙겨주는 강이태에 대한 의심.

일상을 적어놨던 내 다이어리는 점차 강이태의 비중이 늘기 시작했다. 일기라기보단 그에

대한 관찰일지에 가까웠다. 그 정도로 이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적혀있었고, 누가 봐도

내가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아차릴 만큼 티가 많이 났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물밀듯 몰려왔다. 나는 감정에 못 이겨 다이어리를 꽉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쯤 강이태가 이 다이어리에 적힌 글들을 곱씹으며 날 혐오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알아챘겠지.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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