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나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무조건 내 손에 들어와야 했다.
어느 정도 남들에게 잘 어울린다 싶으면 어느새 그 물건은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새연대학교 영문과 신입생 장현우 인사 드립니다!”
“장현우~ 오랜만이다?”
“가만히 서서 뭐해? 여기 앉아.”
이런 자리는 나에게 익숙하면서도 불편했다. 학원에서 얼굴 정도만 알던 형들은 갑자기
술을 따라주며 선배 노릇을 하려 하질 않나, 본 지 몇 분도 안 됐으면서 말을 놓는
사람들까지. 여러 가지로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차라리 신입생들 사이에 나란히 앉아있었다면 이런 불편한 기분까진 안 들었을 것
같았다. 마치 특혜라도 받는 신입생처럼 한참 고학번인 선배들을 양옆에 두고 앉아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초반엔 선배들이 시키는 말 몇 마디에 대답해주고 웃어주려
나름 노력했다.
시끄럽게 떠들고 웃는 소리.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술기운 때문에 몸까지 무거워졌다.
아무리 술잔을 비워내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채워지는 폭탄주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사이 얼추 30명은 넘어 보였던 신입생들의 소개도 거의 끝나갔다. 비슷해
보이는 단정한 옷차림과 딱딱하게 굳은 얼굴엔 마치 신입생이라고 적혀있는 것 같았다.
몇몇 신입생들은 벌써부터 선배들을 살피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에게 시끄럽게 말을 걸어대던 선배들은 내 떨떠름한 반응에 흥미가 떨어진 듯 다른
신입생 옆으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그제서야 내 주변이 조금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느슨히 턱을 괸 채, 채워진 술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저… 영문과 신입생 유하진 인사드립니다….”
그때, 맨 끝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신입생 한 명이 내 눈에 띄었다. 어두운 계열의
체크무늬 셔츠와 축 처진 헤어스타일. 더듬거리는 말투와 조용한 목소리.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옷깃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얼핏 보기에도 잔뜩 긴장한 것 같았다.
어색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런 술자리는 살면서 처음 와본 게 뻔해 보였다.
그의 소개는 유독 조용하고 아무 소리 없이 지나가버렸다. 구석 자리에 앉아 앞에
채워지는 잔을 그때그때 해치우는 모습이 내겐 불안해 보일 뿐이었다.
저렇게 주는 대로 받아마시면 금방 뻗을 텐데….
나는 잔에 있던 맥주를 조금씩 천천히 마시며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한 공간에서 누군가를 이렇게 느릿한 시선으로 훑어본다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얼굴은 반반했지만, 평범한 옷차림이나 말투, 딱 보기에도 꽉 막혀 보이는 성격 같았다.
한마디로 여태 내가 사귀어 왔던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신입생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나는 유독 그에게만 시선이 갔다.
처음엔 그저 이 소란스러운 공간 안에서 낯설어하고, 남과 잘 못 어울리는 그의 모습이
나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단순한 이유일 줄 알았기 때문에 내 감정에
대해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 남자의 주변에 앉아있던 선배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떠버렸고, 이미 술기운에 얼굴까지 빨개진 그는 혼자 잔을 채우며 마셔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시끄러운 선배들과 같은 테이블이 아니라 혼자 다른 무리인 것처럼
보였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기엔 물가에서 혼자 뛰노는 어린 애처럼 아슬아슬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세워져 있던 맥주병을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대학로에서 나름 크다고 소문난 술집 한층을 통째로 빌릴 정도로 영문과 인원은 꽤
많았다. 환영회를 시작한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내가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술에 못
이겨 혼자 비틀거리며 술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신입생 이름이 뭐랬더라….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비틀거리는 그의 걸음을 따라 술집 밖으로 나갔다.
***
“하진아… 생각보다 잘 참고 있는데?”
“하아… 읏….”
1년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애랑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처음엔
어리바리하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치이는 모습이 마냥 측은해 보여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마치 주인을 잃은 길고양이를 본 기분이라 해야 하나….
그렇게 신경 쓰였던 놈이 내 앞에서 좋아하던 남자를 못 잊겠다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로서는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나한테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에게 냉큼 손을 내밀었다.
“형… 팔 좀….”
헝클어진 시트 위에 엎드린 자세, 등 뒤로 꽉 묶인 두 팔과 검은색 천으로 두 눈이 가려진
채 하진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서는 옅은 진동소리와 진득한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팔에 묶인 빨간색 끈은 유난히 하얀 피부 결 사이에서 더욱
돋보였다.
현우는 침대 모서리 끝 부분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아 하진의 몸 곳곳을 천천히 훑어봤다.
하진을 처음 본 그 날처럼 느릿하게 시선을 옮기던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형 거기 있죠?”
현우는 대답 없이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아까보다 커진 진동소리와
함께 하진은 고개를 시트에 묻은 채 다리를 오므리며 반응했다. 불안감에 목소리까지
떨며 옅은 신음을 내뱉었고, 조용했던 방 안이 어느새 하진의 신음 소리와 진동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가만히 바라보던 현우는 손끝으로 그의 꼿꼿하게 세워진 목선부터
허리까지 천천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손길이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몸을
스치자, 하진의 입에선 교성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진은 낯설 정도로 과한 쾌감에 발끝을 오므렸고, 꼿꼿하게 세웠던 몸을 최대한
안쪽으로 웅크렸다.
하진이 허리를 비틂과 동시에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있던 바이브레이터가 깊은 곳을
눌렀고, 그가 쓰고 있던 검은색 천은 눈물로 점점 젖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풀어질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움직인 탓에 팔은 붉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물들었다.
가빠진 숨소리 사이로 현우의 이름이 몇 번이고 불렸다.
“하아… 아… 현우 형… 현우….”
아까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침대 시트가 하얗고 미끌거리는 액체들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던 현우는 하진의 다리 사이에 비죽 튀어나온 동그란
고리를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는 그의 가쁜 숨소리에 맞춰 고리를 당겼다가
넣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자 하진의 입 밖으로 평소 듣기 힘들었던 신음들이 하나둘씩
더 크게 터져 나왔다. 현우는 엎드려있는 하진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몸 곳곳에 키스
마크를 남기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목선을 따라 뼈가 도드라진 등의
곡선까지 붉은 키스 마크로 천천히 물들었다. 하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덜덜 떨리는 몸이 측은하게까지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못 참아…. 이건 너무 길잖아요… 죽을 거 같아….”
하진은 헐떡이는 숨을 최대한 고르며 말했고, 조용히 하진의 반응만 살피던 현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 끝낼까?”
현우의 나직한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들려오자 눈을 가리고 있던 하진은 살짝 몸을
움츠리며 반응했다. 그는 현우의 물음에 짧은 끄덕임으로 대답했다. 허리 뒤로 젖혀진 채
꽤 오랜 시간 묶여있던 팔에는 짙은 멍 자국이 남겨졌다. 팔을 감싸고 있던 굵은 줄을
풀어주던 현우는 멍 자국이 선명한 팔에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해댔다. 온몸을 감싼
긴장감이 한 번에 풀린 탓인지, 하진의 페니스에선 진한 정액이 흘러 시트를 적셨다.
현우는 그 모습을 아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그의 두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색 천을
풀었다. 살짝 화나 있는 듯한 표정으로 현우를 쳐다보던 하진은 힘없이 손을 뻗어 현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한 시간 가까이 지속된 쾌감 때문에 하진의 몸은 손끝부터 발끝까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땀으로 젖은 하진의 얼굴을 훑어보던 현우는 가볍게 입술에 키스를 남겼다.
가벼운 키스 다음엔 평소보다 길고 무거운 키스가 이어졌다. 살짝 벌어진 하진의 입술
사이로 현우의 혀가 들어왔다. 놀라지 않게끔 치아를 가볍게 쓸어내고, 타액을 넘기며
혀를 섞는 그 행동이 하진에게는 익숙한 과정처럼 느껴졌다.
다소 오랜 시간 묶여있던 탓인지, 현우를 감싸 안고 있던 하진의 팔이 덜덜 떨려왔다.
현우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떨고 있는 그의 팔을 붙잡아 자신의 바지 버클 가까이에
갖다 댔다.
“일단 이것 좀… 빼주면 안 돼요?”
“안 돼.”
하진은 새빨개진 얼굴로 다리 사이가 불편한 듯 울상을 지어 보였다. 그의 부탁을 단번에
거절한 현우는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침대 밑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크게 들렸던 진동소리가 훨씬 작아진 걸 보면 하진의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간 것 같았다.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한시라도 빨리 끝내자고 생각한 하진은,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굳게 닫혀있던 현우의 바지 지퍼를 다급히 내렸다. 하진은 바지 지퍼 사이로
올라온 검은색 드로즈를 혀끝으로 훑으며 현우를 살짝 올려봤다.
현우는 한 손으로 가볍게 그의 머리를 잡아 자신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도록 했다. 그
여유로운 말투와 행동과는 달리 이미 발기되어 있는 그의 페니스에 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드로즈 위를 문지르며 천천히 자극했다.
그제서야 현우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형도 지금 급해 보여요.”
“하아… 하….”
느슨히 풀린 눈, 가쁜 숨소리와 숨김없이 내뱉는 신음 소리.
현우는 하진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말없이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고, 자신의 페니스를
드로즈 안에서 꺼내 쥐었다. 그리고 느슨히 쥐고 있던 페니스를 엄지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점점 세게 흔들었다.
그런 현우를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하진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하진의 반응이 우스웠던 건지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고,
얼마 안 지나 점점 밀려오는 쾌감에 고개를 젖히며 아까보다 짙은 신음을 내뱉었다.
평소보다 낮은 신음 소리가 하진의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낯선 기분에 하진은 괜히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현우는 그의 뒷목을 감싸 한껏 달아오른
다리 사이를 밀착시키자, 빨갛게 달아오른 하진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더 뜨거워졌다.
가쁘게 숨을 고르던 현우는 하진과 마주 보게끔 자리를 잡았고, 자신의 무릎 위에 천천히
앉도록 했다.
“…이대로요?”
“천천히 앉아봐.”
하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안에….”
“왜. 못 하겠어? 내가 해줄까?”
그의 말에 하진은 손사래를 치며 다급히 ‘아니요!’를 외쳤다. 양손을 현우의 어깨에 가볍게
걸친 채, 한참을 망설이던 하진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번 현우를 쳐다봤다. 그에
비해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현우도 급한 마음을 속으로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하진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으며 한시라도 빨리 그의 안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아래를 쳐다봤다.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서는 진동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문 채 최대한 천천히, 가쁘게 쉬던 숨을 고르고 하진은 현우의 다리
위에 조심히 앉았다.
천천히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다른 사람의 뜨겁고 낯선 체온. 반쯤 들어가자 하진은
고개를 젖히며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큰 소리로 진동을 내고 있던
바이브레이터도 그사이에 더 깊이 밀려들어 갔는지 점점 희미한 소리로 들려왔다. 하진은
더 이상 무리라는 듯 허리를 세운 채 어정쩡한 자세로 현우를 내려다봤다.
“…조금 더.”
“하아…읏….”
현우는 얕은 숨을 내쉬며 무릎에 힘을 주고 겨우 버티고 있던 하진의 허리를 꽉 잡았다.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은 점점 그의 허벅지까지 내려갔고, 반쯤 들어가 있던 페니스는
순식간에 바이브레이터가 위치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아…! 으응….”
하진은 아까보다 더 가빠진 숨소리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갑작스러운 쾌감과 자극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밀려 들어온 현우의 페니스가 가장 안쪽까지 들어오자, 아까부터 진동을 울려대고 있던
바이브레이터는 하진에게 더 심한 자극을 느끼게 했다. 그제서야 현우는 떨고 있던
하진을 품에 안으며 짧은 키스로 달래줬다.
“빠… 빨리… 끝내요….”
현우는 숨을 고르며 장난스레 실실 웃어댔다.
“사실 나도 참느라 힘들었어….”
하진의 주문에 현우는 알겠다는 의미로 다시 한번, 아까보다 진한 키스를 했다.
***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막무가내였어요?”
“…내가 뭘?”
나는 비스듬히 창가에 턱을 괸 채, 찌그러진 종이컵 안으로 담뱃재를 털어냈다. 그
종이컵은 일주일 정도 창틀에 처박아놓은 듯 까만 담뱃재가 컵의 반 이상 채워져 있었다.
최대한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무심한 표정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섹스였다는 것 마냥
그의 물음에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뻔뻔스럽기도 하지.
날 쳐다보는 표정이 딱 그래 보였다. 그는 혼자 구시렁거리며 베고 있던 베개를 품에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거칠게 몸을 섞은 후, 당연하다는 듯 사과를 하고 깔끔하게 넘어갈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를 평소처럼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는 그가 내
눈앞에서 사라질까봐 불안해서 좀 더 소유욕을 드러냈던 것뿐이었다. 유치하고 이기적인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에게 속 시원히
좋아한다고 말할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쉽게 부서져 내 손안을 벗어나려 할 것만 같았다.
지난 3년간, 나라고 고백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너… 예전에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처음 만났을 때요?”
나는 무심한 척 그에게 물음을 던졌고, 마지막 남은 담배 연기를 깊게 내뱉었다. 그리고
필터 가까이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수북이 쌓인 담뱃재 사이로 꽉 짓눌렀다. 열려있던
창문 밖의 밤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마치 내 마음속의 답답함 같아 보였다.
하진은 피곤했는지 반쯤 감긴 눈으로 내 쪽을 쳐다보며 한껏 느릿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때 저 엄청 이상하지 않았어요? 형 안 지 얼마나 됐다고 갑자기 짝사랑 얘기하고….”
“…맞아. 너 이상했어.”
“…그때만 해도 형이랑 이렇게 오래 알고 지낼 줄 몰랐어요. 그냥 한 번 보고 말 거 같아서
아무 얘기나 한 건데….”
“…그게 뭐야…. 좀 서운하네.”
나에 대한 그의 무관심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분명 평소대로였다면 그랬을 텐데,
오늘만큼은 가볍게 넘기기엔 그동안 참고 기다린 시간들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나는
창틀에 끼어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종이컵을 손으로 꽉 짓눌러 뭉개버렸다. 그대로
책상 밑 쓰레기통 안으로 골인시켰고, 하진이 누워있는 좁은 싱글침대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나는 손을 뻗어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하진이를 최대한 내 안으로 가둬버렸다. 나와 달리
높은 체온이 왠지 오늘따라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손길이 하진의 몸을 감싸자,
하진은 날 피하듯 이불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와 달리 똑똑히 기억한다. 우리 둘 다 취해 있었고, 속을 달래기
위해 술집 밖으로 나와 둘이 처음으로 얘기를 나눴다. 나와 정반대이면서도 비슷한 면이
있는 그의 모습에 처음부터 묘하게 끌렸다.
그와 함께 술집 옆 골목에서 담배를 태웠던 그 밤공기와 분위기. 소음은 잠시 거둬두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 하진이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 난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에게 커밍아웃을 했던 이유도 어쩌면 조금이나마 그와
가까워지기 위한 내 방식 중 하나였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갔던 것뿐이었다.
앞으로 널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처음 만난 그 날, 나는 그에게 고백을 했었다. 그가 술에 취해 쓰러져 내 말을 기억 못
하지만 않았어도 지금 이렇게까지 혼자 마음 쓰진 않았을 일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언제 다시 고백할까 혼자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와 가까워질수록 내 욕심에 더 멀리
떠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큼이나,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유하진은 쉽게 부서지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진이가 날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확인 받을 자신이 아직 없다.
“잘자.”
불이 꺼진 방 안.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비춰오는 달빛이 누워있는 하진에게 맞닿았다.
그의 하얀 피부 결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붉게 자리 잡는 키스 마크와 선명한 잇자국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그의 어깨선에 조심스레 키스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