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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33)

19화

“으….”

가슴을 꽉 조여오는 답답한 느낌이 들자 하진은 표정을 구긴 채 눈을 떴다.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 사이로 뜨거운 햇살이 침대까지 비쳤다. 어젯밤 담배를 태우고

환기시킨다는 핑계로 열어둔 창문이 말썽이었다. 현우는 긴 양팔로 하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품으로 가둔 채 아직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갈색빛의

보송보송했던 하진의 머리카락은 밤새 흘린 식은땀에 흥건히 젖어있었다.

찌푸린 표정으로 곤히 잠들어있는 현우를 빤히 쳐다보던 하진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들어 상체를 일으켰다. 그 좁은 침대 위에서 벗어나자, 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우의 품 안에 종일 갇혀있어서 그런지 온몸이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진이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뚝뚝거리는 뼈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비몽사몽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하진은 냉장고에서 페트병을 꺼내 병째로 물을

들이켰고, 페트병에 반쯤 채워져 있던 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그는 몸이 이상할 정도로

훤하다는 걸 깨달았다. 주마등처럼 어젯밤의 기억들이 하나씩 머릿속을 치고 지나가자

하진의 귀 끝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서야 잠결에 보지 못했던 어질러진 바닥이

눈에 보였다.

얼룩진 검은색 천과 눈에 띄는 빨간색 끈, 바닥에 널브러진 티슈들까지 평소보다 더

어지럽혀져 있었다. 하진은 빨개진 얼굴을 획 돌려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밑 서랍장에서

잘 개켜진 옷가지를 챙겨 들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욕실 문이 닫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기 물소리가 문밖에까지 들려왔다.

후 - 짧은 숨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욕실 문이 달칵 열렸다. 욕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뜨거운 김이 모락거리며 거실까지 퍼져나갔다. 반팔 티셔츠와 짙은 회색의 긴 바지.

가벼운 옷차림을 한 하진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아직 잠들어있는 현우를

내려다봤다.

“…절대 안 깨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기가 곤히 잠들어있던 현우의 뺨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흐르자 현우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내려다보고 있던 하진을

올려봤다. 순간 식겁한 하진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현우가 덮고 있던 이불을

양손으로 걷어버렸다.

“이거 빨려고요. 더러워서….”

“…추워.”

현우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어눌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하진은 자기 몸보다 큰 이불을

다소 작은 세탁기 안으로 쑤셔 넣으며 말했다.

“누구 때문에 추운 건데…. 형이 어제 담배 피우고 창문 제대로 안 닫았잖아요.”

“미안. 어제 정신이 없어서.”

평소와 달리 재깍 사과하는 현우가 하진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세탁기 버튼을 누르던

하진은 잠깐 동안 멈칫하더니, 슬쩍 고개를 돌려 게슴츠레 뜬 눈으로 현우를 쳐다봤다.

가루 세제를 한 움큼 크게 퍼 세탁기 안으로 넣으며 하진이 말했다.

“…형 어제부터 이상한 거 알아요?”

“뭐가?”

“그냥… 평소 같지 않다 해야 하나….”

현우는 아무 대답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한걸음 내딛고는 널브러진

휴지들과 어제 사용했던 끈을 가만히 내려봤다. 그리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책상 옆에 세워진 휴지통 안으로 버려버렸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하진은 불편함을 느껴졌다. 괜히 잘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앞에 서서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현우의 눈치를 살폈다.

바닥청소를 끝낸 현우가 책상 밑에 놓인 플라스틱 박스를 뒤적였다. 뒤적이는 소리가

뒤돌아 서 있던 하진의 귀에까지 들려오자, 그제서야 고개를 뒤로 돌려 현우 쪽을

쳐다봤다. 현우는 박스 안을 한참 동안 뒤적여 파스를 꺼냈다.

“파스 붙여줄게. 침대에 엎드려봐.”

“…역시.”

“뭐?”

…형 오늘따라 이상하다구요.

한 손엔 파스를 들고, 검은색 드로즈만 걸친 채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현우를 하진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이 큰 소리로 알람을

울려댔다. 하진은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 알람을 꺼버렸고, 어색한 웃음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하하… 벌써 10시네….”

“…너 오늘 수업 있는 날 아니야?”

“어…?”

***

“다들 다섯 명씩 팀 짰으면 과제 설명할게요.”

“…교수님.”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이태가 손을 들고 말했다. 다소 어수선했던 강의실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이태에게 집중됐다. 손목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을 슬쩍 보던 이태는 마저

말을 이었다.

“아직 안 온 사람이….”

“잠시만요!!”

이태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강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하진이 몸을 숙인 채 조심스럽게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맨 앞에 서 있던 교수님과 학생들의 시선이 이태에게서

하진에게로 옮겨갔다. 짧은 시간 동안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던 하진에게 교수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학생 이름이?”

“…유하진이요.”

“어디 보자. 지금 인원 부족한 조가….”

“저희 조요.”

이태는 강의실에 앉아있던 학생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대답했다.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에

하진은 설마 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파랗게 질린 하진의 얼굴이 이태 눈에 띄었다. 하진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하진은 어딘가 떫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로봇이라도 된 마냥 정면만 바라본 채 이태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 시간이나 늦은 수업을 10분 내로 뛰어오느라 그의 숨이 차오를 대로

차오른 상태였다.

하필….

자리에 앉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괜히 가방을 뒤적이던 중 현우 형이 챙겨줬던 파스 한 장이 손에 만져졌다.

급하게 싸 들고 온 가방 속에 있는 거라고는 검은색 볼펜과 너덜너덜한 노트가 전부였다.

형이 친히 신경 써서 넣어준 파스 덕분에 가방 안은 파스 냄새로 진동했다. 살짝 열린 가방

사이로 알싸한 냄새가 풍겨오자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내 쪽을 힐끗 쳐다보던

이태는 종이에 뭔가 적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학번이 어떻게 돼?”

“…내가 적을게.”

나는 무심결에 그가 쥐고 있던 펜에 손을 갖다 댔다. 내 손끝이 이태의 피부 결을 스치자

순간적으로 모든 행동이 멈추는 것 같았다. 점점 뜨거워지는 귀와 떨려오는 손끝.

당황해서 표정관리조차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것쯤은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이태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그대로 책상 위에 놓아버렸다. 그도 그런 내 반응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종이에 학번을 적었다. 내 이름 위로 적혀진 이름들을 슥

한번 훑은 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짧은 정적

끝에 ‘안녕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입꼬리를 씰룩거린 웃음은 누가 봐도 억지라는 걸

알아차릴 만큼 어색했다.

복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탓에 같은 팀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강이태뿐이었다.

“일단 핸드폰 번호 적어주신 대로 단톡 하나 팔게요. 급하게 연락해야 될 수도 있으니까

알림은 꺼두지 말고….”

강이태는 이런 어색한 분위기도 능숙하게 이끌어갔다. 그렇다고 나와 달리 다른 팀원들과

잘 아는 사이라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난 아마 고등학생 때 이태의 저런 모습에 끌렸던 거겠지….

쓸데없는 생각까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강이태와는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긴장됐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자 팀원들은 핸드폰을 들고 서로의 번호를 교환하느라 바빴다. 나는 남들보다

반 박자 느리게 상황 파악을 하고는 가벼운 가방 속을 뒤적거렸다.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꺼냄과 동시에 현우 형이 챙겨준 파스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활짝 열린

가방으로부터 퍼져오는 파스 향이 코끝을 찔러왔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이태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파스를 주워 나에게

건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잽싸게 받아 파스를 가방 안으로

쑤셔 넣었다. 민망함에 휩싸이자 나는 습관처럼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아…!”

무의식적으로 상처가 난 부분을 건드렸고, 쓰라린 느낌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강이태는 그런 내가 신경 쓰였는지 뚫어져라 날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풀어헤쳐 있던 체크 남방을

다급히 여몄다.

바쁘게 나오느라 잊고 있던 어젯밤의 상처들이 하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소매 사이로

살짝 보이는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어젯밤을 더 생생히 기억나도록 했다. 지금 내 귀에

교수님의 얘기가 들릴 리 없었다. 그저 웅성거리는 잡음으로 들려 올 뿐이었다. 어제의

기억을 잊으려 할수록 내 머릿속을 더 집요하게 헤집었고,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자

얼굴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분명 강이태는 내 목덜미에 붉게 자리 잡은 키스

마크들을 똑똑히 봤을 것이다.

왠지 어젯밤 현우 형과 있던 일들을 강이태에게 전부 들킨 것만 같았다. 게다가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강이태의 뜨거운 시선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분명 봤겠지…. 몸 파는 애라고 오해하는 거 아냐?

몸을 파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비슷한 거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차라리 속 시원히 물어봤으면

변명이라도 할 텐데, 그의 성격상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혼자 심술을 부리며 몸 곳곳에

자국을 남긴 현우 형이 괜히 밉상처럼 느껴졌다. 어젯밤 안 그래도 뻣뻣한 팔을 등 뒤로

묶는 바람에 온몸이 뻐근하고 욱신거렸다.

게다가 어찌나 혈기왕성하던지, 현우 형이 밤새 날 붙잡고 괴롭힌 덕분에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

형이 내 첫사랑을 잊게 해주겠다는 그 말은 어쩌면 충격 요법 같은 거 아닐까?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현우 형이라면 가능한 생각일 수도….

교수님의 과제 설명이 끝나고, 내 머릿속에 남는 거라곤 팀원들의 이름뿐이었다.

강의실에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채 안 지나 끝나버린 수업이 왠지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는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팀원들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며 ‘그럼 다음에

봐요.’라던가, ‘안녕히 가세요.’ 같은 간단한 인사라도 주고 받으려 했다.

“다음에….”

봐요….

나는 다음 내뱉을 말을 마음속으로 삼켜버렸다. 나름 번호까지 교환했는데, 별 인사 없이

흩어져버리는 팀원들이 우리 팀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흔들던 손은 그대로 목

뒤에 갖다 대며 멋쩍은 웃음을 띠었다. 그 모습을 옆에 서 있던 강이태와 눈까지 마주치는

바람에 민망함이 더 극대화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볍다 못해 종잇장처럼 느껴지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충 눈인사 정도만 하고 나갈까 했는데.

“하진아.”

이태가 강의실 뒷문으로 나가려던 날 불러 세웠다. 그가 내 팔을 잡아당겼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며 미간을 좁혔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풀고 조심스럽게 이태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에 띄지 않게 소매

깊숙이 손목에 든 멍 자국을 숨겼다. 내 입에서 ‘왜?’라는 말이 나가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너 아까 교수님이 과제 설명하실 때 제대로 못 들은 거 같던데…. 다음 수업 없으면 내가

설명해줄까 싶어서.”

“아… 아냐. 나 제대로 들었는데?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횡설수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어젯밤 한바탕 큰일을

치르고, 좁은 침대에 밤잠도 설친 데다가 아침 수업도 까먹어서 한 시간 반이나

지각해버렸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이태와 같은 팀이라니.

나는 가능한 한 이 공간을… 아니, 강이태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더 이상 함께 있다간

이태가 내 모든 걸 알아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그는 내 당황한 표정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나는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하기 급했다.

짧으면서도 얕은 한숨. 그의 한숨 소리에 나는 죄인이라도 된 마냥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태는 손을 뻗어 내 어깨에 얹으려 했지만, 반사적으로 움츠리는 내 모습에 그는

멈칫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내가 그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 보였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나는

도망치듯 강의실을 벗어났고,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학교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오후 1시. 적당하게 따뜻한 봄 날씨에 선선한 바람이 지금 내 상황과는

정반대처럼 느껴졌다. 시험 기간인데도 학교 도서관은 텅 비어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올라가 있지 않은 깨끗한 책상 위에 엎드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전 만들어진 단체톡방을 살피며 팀원 한 명 한 명의 프로필을 눌러봤다. 분명 한 시간 이상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거 같은데, 팀원들의 얼굴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강이태.

나는 그의 메신저 프로필을 몇 분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지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으면 또다시 강이태의 SNS에 들어가거나, 그의 상태 메시지를

멋대로 해석하며 괜히 혼자 과거에 젖어들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몰려오는

답답함에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5년… 5년이라는 시간은 누군가에게 짧게 느껴지지만, 나에겐 꽤 긴 시간이었다. 새로운

환경과 낯선 사람들. 적응하기도 바쁠 시간에 나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머리 한구석으로 내몰았다. 1년씩 시간이 지날수록, 한 달에 한 번 생각나던 그 사람이

점점 기억 속에서 옅어졌다.

분명 옅어졌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내 눈앞에 나타나서 날 괴롭힌다. 너무나도 선명히….

***

순간, ‘헉’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와 다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을까 싶었지만, 문득 복학 후 첫 술자리에서 그를 봤을 때가

떠올랐다.

“…여긴 웬일이야?”

“왜 메시지 확인 안 해? 전화도 안 받고.”

이태는 아까 수업에 늦어 뛰어왔던 내 모습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내 핸드폰을 빤히 보더니,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이럴 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 내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건지, 그는 아끼던 말을 다시

이어갔다.

“내가 아까 알림 켜두라고 했잖아. 방금 톡으로 역할 다 정해졌어. 너 빼고….”

“벌써?”

난 놀란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전원을 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인사말이

전부였던 톡방은 어느새 50개가 넘는 알림이 쌓여있었다. 나는 빠른 속도로 쌓여있던

메시지를 훑어봤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다시 책상에 박아버렸다.

― 그럼 대본 제작 남았으니까 하진 후배가 하면 되겠네.

― 넵!

메시지 상으로 힘차 보였던 대답과는 다르게 나는 절망했다. 순간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잊은 채 정말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떡하지? 영문 대본이면 진짜 헬이잖아. 교수님 완전 깐깐해 보이던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책상에 엎어진 상태로 한 번 더 머리를 헝클었다. 순전히

핸드폰을 꺼둔 내 잘못이라 할 말도 없었고, 납득을 못 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그와

서먹한 지금 이 상황을 최대한 유하게 넘어가고 싶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었다. 나는

용건도 끝났으니, 이태가 이제 별말 없이 일어나 자기 갈 길을 가길 바랐다. 아무 말 없는

그를 나는 곁눈질로 살짝 흘겨봤다.

이태는 턱을 괸 채 절망하고 있는 나를 그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재빠르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넌 팀장이더라? 팀장에다가 발표까지 맡고 대단하네.”

“다들 안 하려고 하니까 한 거지. 발표도 그냥 대본 받아서 읽는 건데 뭐….”

“아… 대본…. 내가 엄청 잘 써야겠네.”

“내가 도와줄게. 혼자 하는 것보단 둘이 하면 빠를 거 아냐.”

“괜찮아!”

내가 이렇게 빠른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의 말에 재빠르게 대답했다. 다소 큰

목소리가 조용한 도서관 안을 울렸고, 나는 목소리톤을 확 낮춘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한주 선배? 그 선배가 자료 전달해주기 전까지 다른 과제들 다 끝내놓으면 되니까…

별로 힘들 것도 없어. 마감도 다른 수업에 비해 넉넉하고….”

나는 절망했던 아까와 달리 희망적인 말들을 내뱉으며 그를 설득하기 바빴다. 대화를

하면서도 내 시선은 그의 어깨쯤에 머물렀다. 이태의 눈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내 생각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아 무서웠다. 현우 형과 이태는 정반대 같으면서도 은근 눈치가

빠르다는 점이 비슷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내 쪽만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

지레 겁을 먹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내가 계속 피한다고 생각하나?

강이태는 나와 예전처럼 잘 지내고 싶어하지만, 그건 그저 이상적인 생각이다. 만약 나와

현우 형의 관계를 그가 알게 된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현우

형의 말대로 이보다 더 가까워진다면 서로에게 악영향만 끼칠 뿐이다.

“그리고 누가 도와주고 그러는 거…. 뒤에서 말 나오면 점수에도 영향 있을 거고….”

나는 소매를 손끝까지 내리고 벌어지려는 남방 옷깃을 다시 여몄다. 혹시라도 몸에

새겨진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이태의 눈에 보일까 노심초사했다. 입술을 잘근 씹으며

가만히 앞에 앉아있던 이태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할 얘기 없으면 난 수업 가볼게.

그가 나에게 아무런 대답을 안 했다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처럼 그를 피할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아무 말 없이 날 쳐다보고 있던 이태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까 머리를

헝클며 책상에 머리를 박아대는 탓에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강이태의 눈엔 꽤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 큰 손으로 내 머리를 두어 번 쓸어내리더니,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점점 뜨거워지는 귀를 양손으로

붙잡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의 다리 부분이 바닥에 끌려 시끄러운 마찰음을

울렸고, 뜨거운 체온이 귀 끝을 타고 뺨까지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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