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불이 꺼진 방 안, 닫힌 창문에서 비춰오는 햇빛이 책상 위를 환하게 밝혔다. 쨍하게 비추는
햇빛을 타고 방 안의 먼지가 선명히 드러났다. 바닥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구겨진
옷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책상 위도 바닥 못지않게 더럽혀져 있었다. 지난밤을
대신 말해주듯, 책상 한쪽 구석엔 다 먹은 컵라면 그릇 여러 개와 싸구려 캔커피가
쌓여있었다. 하진의 오래된 노트북은 언제부터 켜져 있던 건지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처럼 무서운 소리를 냈다.
하진은 엄지손톱 끝을 잘근 씹으며 느릿하게 로딩되고 있는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평생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노트북 화면에 ‘로딩완료’라는 글씨가 뜨자 하진은 두
팔을 의자 뒤로 젖히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끝났다!”
아침 9시. 약속 시간까지 3시간도 안 남은 시점에서 침대로 향해버리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하진은 삐걱거리는 의자를 제자리에서 돌리며 얼핏 보기에도 푹신해 보이는
침대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렇게 몇 분간 침대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쳐다보던 끝에,
의자에서 일어나 쓰러지듯 침대에 엎어져버렸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 시트에
소복히 쌓여있던 먼지들이 공기 중으로 흩날렸다. 그러든 말든, 하진은 눈을 감은 채
머리맡에 있던 베개를 품에 껴안았다. 잠들었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뻗었고,
어질러진 책상 위를 더듬거렸다. 몰려드는 피로에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하진의 입에선
끙끙 앓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30분 전에 일어나면 되겠지.”
그는 반쯤 감긴 눈꺼풀을 비비며 알람을 맞췄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이불
안을 파고들었다. 한참을 이불 안에서 뒤척이던 하진은 이불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다시
잠에 청하려 노력했다.
카페인도 약한 체질이면서 밤새 커피를 들이부은 탓인지, 눈꺼풀은 감겼지만 머릿속은
쓸데없을 정도로 맑은 상태였다. 하진은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바닥으로
차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밝아지는 햇빛에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마치 주마등처럼 몇일 전 있었던 일들이 하진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학교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 남들이 생각하기엔 별것도 아닌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하진의 머릿속엔 몇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진은 오른쪽 손을 쫙 펼쳐 자신의 눈 앞에 갖다 댔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유심히
살피더니, 밤샘 작업으로 며칠간 감지 않아 떡 진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걔 손은 좀 더 컸던 거 같은데.”
이태의 손은 투박한 것 같으면서도 마디는 얇고 손가락 전체가 길었다. 고등학생 시절
이태가 농구를 할 때, 그 신들린 듯한 드리블 비법은 남다른 체형의 덕도 한몫했었다.
하진은 어느새 살짝 붉어진 두 뺨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두 눈에 힘을 주며 잠을 깨려 노력했다.
“머리나 감아야지….”
***
하진은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며 투박해 보이는 노트북을 가방
안으로 넣었다. 방 곳곳에서 풍겨오는 퀴퀴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창문을 끝까지
열어 재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선한 바람이 딱 좋은 날씨였는데, 오늘 바람은
뜨뜻미지근한 게 곧 여름임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하진은 물기로 살짝 눅눅해진 수건을
머리에 걸친 채, 책상과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질근거리는 느낌이 들자 불쾌함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에 보이는 큰 쓰레기들을 치우고, 바닥 위의 먼지와 과자 부스러기들을 대충 쓸어담아
이미 꽉 찬 휴지통 안으로 살포시 얹었다.
마치 그가 청소를 다 하길 기다린 듯, 하진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핸드폰 화면을 본 하진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아 보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무심한 목소리톤으로.
“무슨 일이에요?”
― 너무하네. 몇일 만에 연락하는 건데…
“알바 끝나고 놀러 오면 되잖아요.”
― 가봤자 과제 한다고 안 놀아줄 거잖아.
“…형도 시험 기간이라 바쁘면서. 저 곧 학교 가봐야 해요.”
―야-
현우는 금방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리려 하는 하진을 불러 세웠다. 하진은 어깨 한쪽에
핸드폰을 두고 기댄 채, 적당히 커 보이는 청바지로 갈아입으며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현우의 평소 이미지와 달리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하진에겐 낯설게
느껴졌다. 하진은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무거운 노트북이 담긴 크로스백을
어깨에 짊어졌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목덜미에 흐릿하게 남은
자국들을 파스로 일일이 붙여 가려버렸다.
핸드폰 건너에 있는 현우가 아무 말도 안 하자 하진은 ‘형?’이라고 되물었고, 가만히 있던
현우가 그제서야 말을 이었다.
― 아니. 시험 끝나고 너랑 데이트나 좀 할까 해서.
문고리를 잡고 밖으로 나가려던 하진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을 열고 나가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고, 도어록의 잠금 소리 만큼이나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맛있는 거 사주면 생각해볼게요.”
― …그래. 뭘 못 사주겠냐. 학교 잘 갔다 와.
“네네. 나중에 봐요.”
핸드폰 밖으로 통화 종료음이 울리자, 현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 화면을
쳐다봤다.
“…데이트라니까.”
***
빈 강의실. 12시까지 만나기로 했던 다섯 명의 팀원들 중 제시간에 맞춰 도착한 사람은
고작 두 명뿐이었다. 빌린 강의실은 또 어찌나 크던지. 얼핏 봐도 80명까지 앉을 수 있을
만큼 널찍한 크기였다. 강의실 벽면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창문들이 모두 활짝
열려있었지만, 두꺼운 기모 후드 차림은 이 날씨에 너무나도 덥게 느껴졌다. 밤을 새운
데다가 아침부터 걸려온 현우 형의 전화통화에 옷장에서 제일 눈에 띄는 옷을 골라
입었던 게 잘못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두 명 중 나머지 한 명이 내 옆에 앉아있는 강이태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긴장한
탓에 손끝부터 발끝까지 평소 나지 않았던 땀이 줄줄 샘솟는 기분이었다. 둘 다 말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나는 알림 하나 없는 깨끗한 메시지창을 괜히 올려보며
시간 때우기에 바빴다. 약속 시각을 15분 정도 넘기자, 이태는 보다 못했는지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태의 핸드폰 너머로 미세하게 들리는 통화 연결음이 점점 길어질수록 더 초조해져
갔다.
몇일 전, 팀이 짜인 첫날 느꼈던 그 불길함은 역시 허투루 느낀 게 아니었다.
이태는 통화 연결음만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그대로 책상 위에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험 기간에 밀린 과제 때문인지 이태도 나만큼이나 피곤해 보였다. 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지금 분위기에 가만히 있기에도 애매하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옆자리에 올려둔 크로스백 안을 뒤적였다.
나는 크로스백 안에서 두꺼운 노트북을 책상 위로 꺼내 펼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태는 힘 빠진 미소를 띠며 말했다.
“노트북 안 가져와도 되는데… 나보고 가져오라 하지 그랬어.”
“…뭐 어때. 집이 바로 앞인데.”
나는 겉보기에도 투박해 보이는 노트북에 마우스 선을 연결하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긴
소매에 땀이 닿아 축축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4층 복도 맨 끝에
위치한 강의실이라 그런지, 복도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강의실
내부도 다른 강의실에 비해 큰 편이라 조그마한 소리도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일단 우리 둘이서라도 해볼까?”
“그러게… 나머지 팀원들은 올 거 같지도 않고….”
“일단 인터넷 좀 켜봐.”
넓은 공간만큼이나 흐르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강의실 뒤 편에 있는 시곗바늘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 마우스를 인터넷
아이콘에 갖다 댔다. 마우스의 달칵 소리가 들린 지 꽤 지난 것 같은데, 30초… 1분이 지날
때까지 인터넷 창은 하얀 박스로 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초조함에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생각나는 말을 아무거나 끄집어 내뱉었다.
“…강한주 선배가 주제선정이랑 자료제출까지 맡은 거 맞지?”
“사실 별로 기대는 안 하고 있었는데 첫날부터 이렇게 안 올 줄은….”
하하…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태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언제 뜰지 모르는 하얀 화면을 말없이 쳐다봤다. 계속되는 로딩에 나는
괜히 투덜거리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켰다 반복했다. 보다 못한 이태는 내가 쥐고 있는
마우스에 손을 겹쳐 얹었고, 몸을 내 쪽으로 밀착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나는 몸
전체가 딱딱히 굳어오는 것 같았다. 맞닿은 팔부터 겹쳐진 손끝까지 저릿한 느낌이었다.
나는 당황한 기색 없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손안을 벗어나려 했다.
“학교 와이파이 켰어?”
“…아마?”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그 큰 손을 벗어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오래된 노트북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눈치 보듯 흘끗거리던 나는 나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하진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너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참을게. ]
이태를 본 첫날, 그가 나에게 말했던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마치 환청처럼, 날
집요하게 괴롭혀왔다. 그동안 내가 이태를 피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왜 그날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게 궁금한 거겠지….
그때의 비참한 감정은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항상 그 당시 일들에 대해 물어볼까봐
혼자 조마조마했다.
그때 나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기엔 너무나도 어렸고, 여러 가지로 미숙했다. 그냥
이렇게, 이 정도의 거리에서만 서로 알고 지내고 싶다. 그게 내 욕심일까?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말고, 딱 여기까지만.
“파스 냄새.”
“…어?”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톤에 어깨를 움츠렸다. 순간 내 생각들을
이태에게 들킨 것만 같아 혼자 찔렸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새하얀 화면엔 초록
검색창이 떠 있었고, 이태는 내 몸을 슥 훑어보고 있었다.
‘파스?’ 나는 짧은 생각 끝에 파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투로.
“어제 종일 과제 하느라 아파서….”
“…많이 아파?”
파스가 붙어있는 목덜미 부근을 유심히 살펴보던 이태는 걱정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그의 진심 어린 걱정에 왠지 양심이 찔리는 것 같았다. 나는 연신 손을 내저으며 이태를
안심시키려 했다.
어색한 웃음 끝에 시선을 노트북 쪽으로 천천히 옮겼다. 밴드를 키스 마크가 남겨진
부분마다 다 붙였다가는 분명 그의 눈에 띄어 들켰을 것이다. 그나마 여름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판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손에 가둬져 있던 손을 빼내며
자연스럽게 어깨를 두들겼다. 긴장한 바람에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일단 주제선정이 먼저일 거 같은데.”
“…선배 아직도 연락 안 받을까?”
“하아….”
또다시 깊은 한숨. 겉보기에도 피곤함에 지쳐 보이는 이태가 불쌍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그의 옆에서 핸드폰을 쥐었다 놨다,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야 하지? 위로를 해줘야 하나? 아니면… 다른 날 다시 모이자고 해야…
이태는 그런 날 흘끗 쳐다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또, 저번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뜨거워지는 느낌. 그의 체온이 머리카락의 끝 부분부터 손끝까지 느껴졌다.
몇 초 안 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 나에겐 그 시간이 좀 더 느리게 흘러갔다.
멍하니 굳은 표정이 우스워 보였는지, 이태는 참던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호탕한 웃음에 나까지 괜히 웃음이 나오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온몸이 천근만근 같았던 피로는 잠깐이나마 사라진 것 같았다.
“역시 그대로네. 강아지같이 안절부절못하는 거.”
“…그거 나 놀리는 거지?”
“아니. 방금 진짜 강아지 같았어.”
“개 같다는 거야?”
그는 눈가에 고인 눈물까지 닦아내며 끊임없이 혼자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 덕분에
굳어있던 몸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았다. 웃느라 얼굴까지 빨개진 그의 모습을
나는 한참 동안 바라봤다. 평소엔 시선을 피하느라 눈은커녕 이태의 얼굴조차 제대로 못
쳐다봤는데,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지금만큼은 그 모습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런 내 행동엔 별 뜻 없이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니까, 그의 모습이 궁금했던
것뿐이었다.
그의 사복 차림은 항상 단정함 그 자체였다. 항상이래 봤자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볼
때마다 주름 없이 잘 다려진 셔츠나 단색 티셔츠, 어두운 계열의 청바지에 아이보리색
운동화. 대학교에서 많이 보이는 평범한 스타일이었지만 그의 얼굴이나 몸매만큼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그동안 웃을 일이 없어서 그런가… 이런 거에 괜히 웃기네.”
한참을 웃어댄 끝에 이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1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가 왠지 오늘따라 빠르게 흐른 것 같았다.
어색한 정적이 또다시 찾아오기 전에, 내가 이태보다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 맞다…. 너 다음 수업 있댔지?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벌써 한시네….”
“결국 아무것도 못 했네. …다음에 시간 정해서 또 보자.”
나는 엉켜있는 배터리 전선을 정리하며 급한 척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지퍼가 활짝 열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크로스백을 들어 무거운 노트북과 전선을 쑤셔 넣었다.
요란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그 넓은 강의실에 꽉 들어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가방을 어깨 한쪽에 힘겹게 걸쳤다. 금방이라도 강의실 밖으로 나갈 것 같은 나와
달리, 이태는 의자에 등을 딱 붙이고 기댄 채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의 손끝이 내 손에 닿자,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빼냈다. 과한 내 반응에
이태도 놀란 건지, 멍하니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가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점점 더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가끔 너무 떨리거나 놀랄 때 입 밖으로 심장이 나올 것 같은 기분.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그 뜨거운 시선이 내 얼굴에 정확히 꽂히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에, 차마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에
목소리가 이상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표정관리는 하나도 되지 않았고,
손바닥은 다시 땀으로 흥건해졌다.
“…아, 안 나갈 거야?”
“조금만 있다 가. 이렇게 둘이 있을 시간도 별로 없을 거 같은데….”
이태는 다시 앉으라는 듯, 내가 방금 일어선 의자를 툭툭 쳤다. 한껏 붉어진 얼굴빛을 그가
봤을 거라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가린다거나 저번처럼 도망을 간다는 건 지금
상황에서 무리일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고집에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았고, 바지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손바닥에 난 땀들을 대충이나마 닦아냈다.
그냥 바쁘다는 핑계로 먼저 나갈걸…
대놓고 말도 못하면서 꼭 나중에서야 후회를 한다. 나는 묵직한 가방 안 깊숙이
처박혀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도피처라도 찾으려는 듯 핸드폰의 이것저것을
눌러보며 일제히 시선을 핸드폰 화면에 고정시켰다. 마음속으로는 내 옆에 앉아있는
이태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노트북 다시 꺼낼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다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태는
턱을 느슨히 괸 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살짝 엇나가있는 시선이
못마땅했던 건지, 눈썹을 씰룩이며 내 시선에 맞춰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하… 듣기만 해도 어설픈 미소였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불리자 심장이 움츠러드는 것처럼 쑤셔왔다. 이태가 내
이름을 부른 후, 나에게 어떤 말을 내뱉을지 전혀 예상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가 말을
잇기 직전까지 나는 여러 생각을 했다.
“하진아, 전부터 궁금했는데.”
…경우의 수라 해야 하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에게 어떤 얘길 할지, 모든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 나열해봤다.
미리 최악의 상황을 염두해 두면 막상 그 일이 들이닥쳤을 때, 좀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너 현우 형이랑 무슨 사이야?”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일까.
그의 한마디가 방금까지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모조리 지워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