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너 현우 형이랑 무슨 사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어깨와 쇄골 부근이 지끈거리듯 아려왔다. 예상 못 한 질문도
아니었으면서, 그의 질문에 난 지레 겁부터 먹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표정관리는커녕 나는 굳은 표정으로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누군가 도와주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무런 행동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역시 그때 내 목에 난 상처들을 본 거겠지….
내가 찾고 있는 건 그저 변명뿐이었다. 내가 현우 형과 잤다는 것과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 그 어떤 것도 이태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실을 그가 알게 될 경우 일반적인 반응과 나에 대한 태도가 바뀔 걸
생각하면 난 예전보다 더 심하게 무너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 너무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쳐 혼란스러웠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었다.
“난….”
멋대로 생각되는 미래에 대해 겁을 먹은 하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태는 어떤 뜻도 없는 표정으로 잔뜩 주눅 들어 있는 하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하진이 말을 이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줬지만, 이후로 하진은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하진의 미세하게 떨려오는 손을 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하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갖다 댔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하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한참을 망설였다.
그 넓은 강의실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아주 조용했다. 열린 창문 밖에서 들려왔던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조차 지금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급했나보네.”
이태는 분위기에 살짝 굳어있던 표정을 다시 풀며 하진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는
느슨히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천천히 놓아줬다. 풀어진 이태의 표정과 달리 하진은 아직도
불안해 보였다. 그 후로 계속 이어질 것 같았던 정적은 이태의 핸드폰 진동소리에
너무나도 쉽게 깨져버렸다.
“…선배. 저희 오늘 모이기로 했는데 안 오셔서요. 네.”
생각보다 길어지는 통화에 하진은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태는 잠깐
기다리라는 듯 하진에게 눈짓을 보였지만, 하진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강의실
안을 나가버렸다. 쾅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강의실 밖으로 나오자 왜인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졌다.
하진은 고개를 숙인 채 복도 바닥만 쳐다보며 무거운 발을 내디뎠다. 분명 그 넓고 둘밖에
없던 강의실보다 소란했지만, 하진의 귀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후, 하진은 일주일간 학교를 나가지도 않았고, 이태의 연락을 받는 일도 없었다.
***
“얘는 왜 안 와? 다음 주가 발표 아니야?”
“…대본 맡은 애 이름이 뭐였더라? 유….”
낡다 못 해 삐걱거리는 의자에 기댄 채 핸드폰을 하던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던 핸드폰에선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팀원들이 유하진의 이름
맞추기에 빠져있는 동안 이태는 무심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태가 보고 있는 화면엔 영문이 가득한 인터넷 창들이 떠 있었다. 과제가 아닌 다른
얘기로 한참 시끄러운 테이블과 달리 다른 팀들은 모두가 노트북을 펴놓고 얘기하기 바빠
보였다.
이태는 뭔가 안 풀렸던 건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바쁘게 타이핑하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는 손톱 끝으로 맨질한 플라스틱 책상을 가볍게 톡톡 쳤다. 딱 보기에도 밤새고 온
것처럼 피곤에 찌든 사람 같아 보였다. 한참을 빈 책상 앞에서 수다만 떨고 있던 팀원들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이태는 살짝 쉰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한주 선배. 저한테 보내주신 자료 이게 끝이에요?”
“어어…. 그거 맞아.”
이태가 선배라 부르던 남자는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시킨 채 성의 없이 대답했다. 이태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팀 내의 분위기가 싸해지자 기다렸다는 듯 낡은 문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끼익거리는 소리 끝에 반가운 목소리.
이태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고, 반가운 마음에 굳었던 표정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뒷문으로 슬금슬금 들어오던 하진이 가볍게 강의실을 둘러봤다. 집 떠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 마냥 하진을 쳐다보던 이태와 눈이 마주쳤다. 하진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팀원들이 앉아있는 빈자리로 향했다. 검은색 캡모자를 눌러쓴 하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를 했고, 이태는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냐. 어차피 대본 짤 일도 없었어.”
“아니 대본 짤 일이 있든 없든…. 적어도 연락은 받았어야지.”
예상치 못한 선배의 말에 분위기는 더 가라앉은 상태였다. 회의에 늦은 하진에게 타박을
주는 선배를 이태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 선배는 한참을 붙잡고 있던
핸드폰을 그제서야 주머니에 넣으며 꽤 진지한 표정으로 하진을 가르치려 들었다. 하진의
입에선 기계적으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왔고, 선배의 잔소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태는 그 누구보다 하진의 표정과 행동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연락을 받지
않은 지난 일주일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가 했던 말 때문에 또 도망치려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몇 분이 지나도 계속되는 설교에 이태는 일부러 큰 소리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자기 앞에 펼쳐져 있던 노트북을 테이블 가운데로 들이밀었다.
“지금 PT 편집 중인데 다 같이 확인 좀 하자고요. 아까부터 저만 하는 것 같아서.”
이태는 평소보다 밝은 표정으로 한껏 주눅 들어 있던 하진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그제서야 고개를 든 하진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띠었다. 잔소리에 가까웠던 선배의
연설이 끝나고, 드디어 팀원들이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좁은 화면을 다
같이 보기 위해 하진은 어쩔 수 없이 이태의 옆에 밀착했다. 이태가 무슨 말을 하는지,
회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지금 하진의 머릿속에 들어올 리 없었다.
“피티는 지금 피드백드린 거 참고해서 수정해주시고, 하진이 너는…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수정 전 자료 참고해서 대본 짜주면 될 것 같아.”
“그럼 우리 회의 끝난 거지? 가도 되냐?”
“아뇨.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모여요. 자료가 부족하기도 해서 대본 도입부는 같이
확인해야 될 것 같아요.”
이런 일에 대해 생각보다 칼같이 구는 강이태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팀원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시큰둥한 반응에도 이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마우스를 붙잡았다. 분위기를 살피던 하진이 참다 못 해 손을 살짝 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하진은 마치 처음부터 없던 사람이었다는 것처럼 조용히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꽉 막힌
분위기 속에서 나오고 나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회의가 끝난 팀의 팀원들이 그 낡고 좁아 보였던 강의실을 하나둘씩 나왔다. 하진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쯤 비어있던 복도는 마지막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애들로
북적거렸다. 그는 혼자 서서 화장실 옆에 세워진 자판기를 유심히 훑어봤다. 고민 끝에
결국 항상 마셨던 아이스티를 선택했고, 또다시 짧은 고민에 빠졌다. 뒤에 서 있던 학생이
헛기침을 하자, 화들짝 놀란 하진은 손이 가는 대로 아무 버튼이나 눌러버렸다. 버튼이
눌림과 동시에 캔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넓은 복도를 울렸다. 하진은 몸을 숙여
떨어진 캔 두 개를 손에 쥐었다.
하진의 손엔 차가운 아이스티와 ‘홍삼차’라고 적혀있는 캔이 들려있었다. 그는 한참을
강의실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홍삼차를 펑퍼짐한 후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야, 유하진? 걔는 오늘 왜 늦게 온 거래?”
살짝 열려있는 강의실 문틈 사이로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내 이름이 문틈을
타고 내 귓가에 맴돌자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 목소리는 아까
나에게 왜 늦었냐며 다른 팀원들 앞에서 꽤 긴 시간 동안 설교를 해댄 복학생 선배였다.
나는 강의실 문 앞에 그대로 멈춰 섰고, 뜻하지 않게 내 얘기를 엿듣게 되어버렸다. 이
이상 내 얘기를 엿들을 자신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발걸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도 아니면서, 중학생 때부터 간혹 겪었던 일이었으면서도
막상 이런 일들이 나에게 들이닥칠 때마다 낯선 기분이 들었다. 절대 유쾌하지 않고,
다시는 경험하기 싫은 일들. 요즘따라 나에게 자주 찾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다시 우울함 속으로 잠겨버렸다.
“아니…. 저번 주가 제일 중요한 시기였잖아. 근데 메시지도 확인 안 하고. 내가 자료
넘겨주려고 전화 걸었더니 받지도 않더만.”
아까까지만 해도 많은 학생들이 오갔던 것 같은데,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 복도
덕분에 그 선배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들려오는 말들 중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과하는 것쯤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팀원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들어오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많은 경험 끝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옛날의 눈치 없는 나였다면 무작정 들어가 사과를
했겠지만, 이런 분위기에선 나서지 않는 게 약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게 뭐 혼자 하는 과제야? 팀 과제잖아. 아니면 왜 늦었는지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하든가….”
…이런 얘기. 흔히 말하는 뒷담을 한 명이 시작하게 되면 여러 명이 마치 먹잇감을 물듯
달려들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 뻔하고도 익숙한 레퍼토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캔 음료가 유독 차갑고, 무겁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모든 걸 때려치우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가 헝클어져 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싶었다. 날 귀찮게 하는 팀
과제도, 나에게 언제 또 곤란한 질문을 던질지 모르는 강이태도… 지난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던 것처럼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었다.
“안 그래? 하여튼 처음부터 답답해 보였….”
탁-
구구절절 혼자 떠들고 있던 선배의 목소리가 딱딱한 물체가 덮이는 소리와 함께
끊겨버렸다. 얇으면서도 딱딱한 물체. 소리로만 추측해봤을 때, 이태의 앞에 펼쳐져 있던
하얗고 얇은 노트북을 덮는 소리 같았다. 나는 복도 벽면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굽혀 앉은
채, 잠자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주 선배. 선배도 저번 주 수요일에 안 오셨잖아요? 전화만 5번을 했는데.”
“아니, 그건….”
“어제 보내주신 자료도 주소만 복사해서 주신 거 아니에요? 이거 인터넷에 검색하니까
첫 번째로 뜨는 사이트던데.”
“야…. 강이태.”
평소같이 잔잔한 목소리톤으로 나긋이 말을 잇는 강이태와 달리, 한주 선배의 언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복도까지 느껴지는 살벌함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고,
조심스럽게 강의실 문틈을 흘끗 살폈다. 좁은 문틈으로 보이는 강이태의 표정이 보기보다
화난 것 같았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평소와 다를 거 없는 표정이라 생각하겠지만, 내 눈엔
강이태의 미세한 표정변화가 너무나도 잘 띄었다. 욱하기로 유명한 선배의 성격에
강이태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의 말이 거슬렸는지, 앉아있던 의자까지
넘어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태를 노려보듯 내려봤다. 플라스틱 재질의 의자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강의실 전체를 울렸다.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벽면에 딱 붙어 몸을 숨겼다.
“이대로 자료 주실 거면 선배 이름 팀원 목록에서 빼는 수밖에 없어요.”
“…뭐? 너 미쳤냐?”
선배의 한껏 높아진 목소리가 그 좁은 강의실 안에 꽉 들어찼고,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까지 들려왔다. 나머지 팀원들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급하게 둘을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주먹질이 오갈 것만 같은 분위기에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주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손에 쥐고 있던 캔
음료를 복도 바닥에 세워놓고 용기를 내 몸을 일으켰다.
깡-!
아무도 없는 긴 복도에 둔탁한 깡통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슬며시 바닥을 내려봤다. 바닥엔 후드 주머니 안에 얌전히 있어야 할
홍삼차가 잔뜩 찌그러진 채 음료까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홍삼의 쌉싸름한 향이 점점
복도에 퍼져, 저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심하게 뛰었던 심장 소리가 순간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문틈으로 강의실 안을 훔쳐봤다. 소란스러웠던 강의실
안이 아무도 없는 복도처럼 조용했고, 이태와 그런 이태의 멱살을 잡고 있던 한주 선배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식겁한 표정을 지으며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리가 그 정도로 컸나….
강의실 안에 있던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나는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채, 최대한 강의실에서 멀리 도망쳤다. 발걸음 소리와 끼익 하고
강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내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지만, 나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가 점점 멀어져가는 내 뒷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
“허억… 헉….”
오르막길에 위치한 자취방까지 쉬지 않고 걸어온 탓에 숨이 턱 끝까지 차는 기분이었다.
거친 숨을 천천히 고르며 방금 전까지 있던 일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나열했다.
그때 복도로 나왔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한주 선배? 싸움을 말리던 팀원 중 한 명?
아니면… 강이태?
나는 차가운 쇠문에 기댄 채, 조용한 방 안을 눈으로 훑어봤다. 일주일 동안 이불 속에서
꼼짝 안 한 흔적들이 집 안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
다용도실 바구니에 가득 찬 옷들, 아직까지 따뜻한 체온이 남아있을 것 같은 흐트러진
이불. 조용한 공간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고 나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꺾어 신은 운동화를 현관에 대충 벗어놓고 어질러진 바닥을 건너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익숙하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이 지금 나에게는 너무나도 필요했다. 나는
푹신한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웅크렸다. 발끝에 닿는 축축한 바짓단이
불쾌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의 날 일으키기엔 부족한 이유였다. 끝 부분이 살짝 젖어든
바지 끝에선 아까 떨어트린 홍삼차의 쌉싸름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아까 일어났던 일들도, 모든 걸 던져놓고 도망쳐온 내 무책임한 행동도, 모두 다 잊고
싶었다. 차라리 이렇게 다시 혼자가 되는 편이 나에겐 편하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다시 옛날처럼 잘 지내보자는 이태의 말이 생각났지만, 그것조차 지금의 나에겐 사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든 생각을 잠시 미뤄두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가방?
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가방을 찾아 헤맸다. 순간적으로 아까 화장실에
들리기 전, 강의실 안에 두고 나온 가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차분했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헝클며 크게 절망했다.
때마침 큼직한 사이즈의 후드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의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잊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말없이 발신자가 떠 있는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에 떠 있는
‘이태’라는 이름을 오늘따라 더 피하고 싶었다. 망설이던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차마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미안하다는 말도, ‘여보세요.’라는 간단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내기라도 하듯, 핸드폰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정적에 괜히 긴장감까지 더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 헛기침을 하며 최대한 차분한 척 입을 열었다.
“미안…. 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 대본은 이틀 안에 메일로 보내줄 테니까
걱정 마.”
이태가 내 말을 자르기 전에, 나는 생각했던 말들을 떨리는 목소리로 나열했다. 누가
들어도 그저 변명에 가까운 말이었다. 아까보단 짧은 정적이 흘렀다. 분명 방금 전까지도
들었는데, 전화로 듣는 이태의 목소리가 더 반갑게 느껴졌다.
“…너 가방은? 내가 너네 집으로 갈까?”
“아… 아니. 그냥 행정실에 맡겨줘. 어차피 든 것도 없고… 나중에 내가 찾아갈게.”
“…그래.”
이태는 이미 모든 걸 아는 눈치였다.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리고,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아마도 내 예상일 뿐이지만…
아까 강의실 밖으로 걸어와 말없이 내 뒷모습을 바라본 건, 어쩌면 강이태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