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를 마주하면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심장이 크게 뛰고, 손끝이 저리는 것 마냥
덜덜 떨려왔다. 나는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고등학생 때, 내가 그를 좋아했다는 사실과 지금의 나는 같은 학교의 친한 형과 몸을 섞는
사이라는 것. 그 중 어느 하나라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저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사실들이 있으니까 떨리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왔고, 앞으로도 이 생각은 변함없을 것이다.
***
지금쯤 발표 끝났겠지.
나는 현실을 잊으려는 듯 헝클어진 이불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불과 침대
시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온도가 얼마나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있었는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제 수업이 끝나고 낮 3시부터 누워있었으니까, 거의 20시간을 침대에서 지낸
셈이었다.
햇빛은 어느 때보다 더 밝게 암막 커튼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다소 따뜻한 온도의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그 덕분에 가려져 있던 햇빛이 침대까지
비춰 눈살을 찌푸리도록 만들었다. 나는 퉁퉁 부은 얼굴을 양손으로 쓸어내리며 기지개를
켰다. 주먹 끝이 침대 헤드 부분에 쾅하고 부딪힌 후에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아이보리색 벽지가 붙어진 천장을 빤히 쳐다보며 그동안의 일들을 쭉 더듬어봤다. 엊그제
밤 11시 50분. 10분을 남겨둔 채 가까스로 팀 과제 대본을 마감했다. 이틀 동안 1시간도
제대로 못 자 어제 낮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절 잠을 청했고, 나는 뜻하지 않게 팀 발표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실, 이 모든 걸 잊고 그냥 잠이나 자자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핸드폰 배터리도 제대로
확인 안 하고 누운 거겠지만….
나는 까만 화면을 띠고 있는 핸드폰을 침대 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충전기에 연결했다.
기다렸다는 듯 밝은 빛을 내며 켜지는 핸드폰을 보고 있자니 괜히 속까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 후 화면에 뜬 부재중 통화 목록을 보고 있는 심정이란 겪어본 사람만 아는
떨림이었다. 나는 살짝 떨리는 엄지손 끝으로 부재중 통화 목록을 쭉 내려봤다.
예상했던 이름들과 메시지들….
나는 깊은 숨을 내뱉으며 짧은 시간이나마 마음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팀원들이 있는
톡방에 들어가 메시지를 써내려갔다. 마치 방금 막 일어나 당황한 사람처럼.
― 죄송해요. 몸이 안 좋아서 잠깐 잔다는 게 지금 일어나서… 발표 끝났어요?
몸이 안 좋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어차피 발표는 이태 담당이였으니까 내가 없다해서 피해가 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차마 답장을 보지못하고 고개를 침대에 묻어버렸다.
메시지 알림이라기엔 다소 긴 진동소리. 슬쩍 고개를 들어 핸드폰 화면을 봤을 땐, 이젠
익숙해져 별 감흥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름이 떠 있었다.
“…네. 현우 형.”
―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방금 일어났어요….”
내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있던 현우 형은 짧은 정적 끝에 마저 말을 이었다.
― 한 시간 후에 나올 수 있어? 영화나 볼까 해서. 너 시험도 끝났잖아.
“아 맞다….”
나 시험 끝났지….
끝났는데도 왜 찝찝한 거지.
“그럼 한 시간 후에 정문 앞에서 봐요.”
나는 전화가 끊긴 후에도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밀린 메시지를
한참 동안 정독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나기 전까지
손에 핸드폰을 쥐고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이 오진 않았는지 계속해서 확인했다. 어떤
답을 기대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팀원들이 어떤 반응을 내비칠지 궁금했다.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세게 헝클며 핸드폰을 침대 위로 가볍게 던졌다.
잠들 때 만큼은 복잡했던 머리가 새하얗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기분 좋게까지 느껴졌다. 지금도 머리 아픈 일들을 조금이나마 잊기 위해
현우 형과 만날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밖으로 나가야된다는 말도 있으니까….
어질러진 책상 위, 시커먼 담뱃재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를 신경질적으로 휴지통 안에
털어냈고, 선반 위 마른 수건을 챙겨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달리 차가운 물을 들이부은 덕에 몽롱한 기운이 사라진 것 같았다. 머리카락 끝에
맺혀있던 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자 휴지로 물기를 대충 닦아냈다.
목욕탕에 온 기분이라도 내 볼 겸,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맨 끝 구석에 처박혀있던 커피 맛
우유를 꺼내 들었다. 시원한 커피 우유를 한 번에 쭉 들이켰고, 때마침 침대에 엎어져 있던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얌전히 있는 핸드폰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는, 마침 핸드폰 진동이 울리자 못 이기는 척 핸드폰을 들어 알림을 확인했다.
― 많이 아파?
밑도 끝도 없이 단답형으로 보내온 메시지가 발신자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팝업창에 뜬 메시지를 빤히 바라봤고 강이태는 그런 날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듯, 또 다른
메시지를 보내왔다.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 집에 약 있어?
방금 전까지 차가운 물로 샤워하고, 시원한 커피 우유까지 원샷했는데….
내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강이태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웃음기 하나 없이
딱딱한 말투의 메시지. 이태 나름대로 고민해서 보낸 메시지 같아 보였다. 2라는 숫자가
표시되어있는 알림창에 손을 갖다 댔다 떼기를 반복하던 중, 현우 형과의 약속 시각까지
30분도 채 안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고, 옷장에 쌓여있는 옷들 중 하나를 꺼냈다. 하얀색 반팔 티셔츠에 항상 입던
익숙한 청바지. 완전히 말랐다기엔 애매할 정도로 눅눅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뒷굽이 다 달은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나는 현관 벽면에 붙은 전신거울
앞에서 3초 동안 옷차림을 가볍게 훑은 후, 밖으로 향했다.
***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행정실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빼곡하게
쌓여있는 서류 더미와 두꺼운 책들이 마치 업무가 잔뜩 쌓인 회사원의 책상 같았다. 얼핏
보기에도 조교 같아 보였던 사람은, 어깨에 핸드폰을 걸친 채 누군지 모를 교수님과
통화를 하고 있었고, 두 손은 키보드 앞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하진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가까스로 조교와 눈을 마주쳤다.
“…혹시 분실물….”
“분실물 거기 뒤에요.”
하진의 말이 끝맺기도 전에 조교는 통화 중이던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트린 채 말했다.
느릿느릿한 하진의 말투와는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만큼이나 말투까지도
빠르게 들렸다. 멍하니 서 있던 하진은 한 박자 느리게 뒤로 돌았고, 갈색 시트지가 붙여진
캐비닛을 열었다. 자취방 열쇠부터 이어폰까지. 자잘한 분실물들은 가득했지만 검은색
크로스백은 아무리 살펴봐도 없는 것 같았다.
분명 행정실에 맡겨둔댔는데….
가방 안에 있는 거라곤 교양 책 한 권이랑 펜 두세 개가 다였기 때문에 누군가 훔쳐 갔을
리는 없었다. 하진은 캐비닛 안을 몇 번이고 다시 훑어봤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조교가 앉아있는 쪽을 쳐다봤다. 다행히 통화는 끝난 것 같았지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손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았다. 하진은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최대한 순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기. 분실물 중에 검은색 크로스백은 없었나요?”
“네. 없었어요.”
짤막하고 칼 같은 그의 대답에 하진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남긴 후, 도망치듯 행정실에서 빠져나왔다. 하진은 때마침 뒷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 기다렸던 건지 멀끔한 옷차림을 한 현우가 귓가에 핸드폰을
댄 채, 정문 앞에 서 있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거리던 하진은 한 손을 휘저으며
그에게 아는 척을 했다.
잘 다려진 하얀색 셔츠와 검은색 재킷, 멀끔해 보이는 검은색 바지와 얼핏 보기에도 꽤
고가로 보이는 갈색 가죽 벨트, 주름 하나 없는 몽크 스트랩 로퍼.
흰색 반팔 티셔츠, 항상 입는 청바지, 구겨신은 캔버스화. 하진이 입은 옷들과 정반대의
옷차림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현우는 실실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짜고짜 하진을 꽉 끌어안았다.
급하게 뛰어온 탓인지 숨을 몰아쉬던 하진이 그의 등을 세게 치며 밀어내려 했다.
“형. 숨 막혀요.”
“왜 이렇게 오랜만인 거 같냐….”
“일주일밖에 안 지났잖아요….”
“그랬나?”
‘그랬나’는 무슨….
하진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가까스로 그를 품에서 떼어냈다. 하진의 반팔 차림이
현우 눈엔 추워 보였는지, 긴 팔을 쭉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 행동에 하진은 식겁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걸쳐진 팔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다들 쳐다보잖아요.”
“아무도 안 보는데.”
현우는 살짝 퉁명스러워진 말투로 하진의 말을 받아쳤고, 하진이 쳐낸 손은 바지
주머니로 숨기듯 집어넣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탓에 하진의 귀 끝이 점점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정해진 장소 없이 마냥 앞을 향해 걸어가던 하진은 그제서야
현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요?”
빨리도 물어본다.
현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까보다 느릿해진 걸음으로 핸드폰을 두드리더니, 하진의 눈앞에 핸드폰 화면을 갖다
댔다.
“영화 예매해놨어. 너가 전에 보고싶어했던 거 맞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 정돈 기억하지. 날 뭘로 보고….”
하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수고했다는 듯 현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5관까지밖에
없는 단출한 영화관.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영화관이라곤 이곳밖에 없기 때문에 평일이든
주말이든 대학생들로 항상 붐벼있었다. 덕분에 영화표 예매는 당연한 순서 중 하나였고,
팝콘이라도 먹기 위해선 적어도 30분 전에 줄을 서야만 했다.
영화관에 도착하자, 현우는 당연하다는 듯 스낵바 줄로 향했다.
“달콤한 맛이지?”
“그냥 반반시켜요. 형은 단 거 싫어하잖아요.”
문득, 서로의 입맛까지 뻔히 알 정도로 가까워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짧게나마 생각에
잠긴 하진은, 스낵바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현우를 빤히 바라봤다. 메뉴를
하나하나 살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현우가 하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둘이 먹기엔 세트가 낫겠지?”
“….”
“…왜?”
평소답지 않게 노려보듯 쳐다보고 있는 하진이 낯설게 느껴졌는지, 현우는 손등으로 자기
뺨을 문질렀다. 하진은 꽤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손을 뻗어 잘
세팅된 현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예상 밖의 행동에 현우는 주문 차례도 잊은 채
멍하니 하진을 바라봤다. 웃는 얼굴과 친절한 목소리로 ‘손님’이라고 부르던 점원은 두
번을 불러도 둘 다 아무 반응이 없자, 한층 높아진 톤으로 다시 불렀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현우가 습관에 가까운 영업용 미소를 띠며 능숙하게 주문했다. 둘은
그 자리에서 콜라 두 잔과 라지 사이즈의 팝콘까지 받아든 후, 모바일 영화표에 적혀있는
2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진과 현우는 그렇게 말없이 2관이라 적혀있는 어두컴컴한 문
안으로 들어가 뒤쪽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영화 시작 시각까지 5분 정도 남았던 터라,
넓은 스크린에선 영화관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틀어져 있었다.
“다행이다. 딱 맞춰 들어왔네.”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하진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오른편에 꽂아둔 콜라를 쭉
빨아들였다. 빨간색 빨대를 타고 올라온 콜라가 목을 넘기자, ‘캬’라는 소리를 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진은 뭔가 잊고 있던 일을 기억해내기라도 한 듯,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꽤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하진은,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 저번에 행정실에 맡긴다던 가방 아직 안 맡겼어?
하진의 손가락이 ‘전송’이라 적혀있는 버튼 앞을 맴돌 때,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현우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웬 가방?”
“…아, 아니에요.”
하진은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 안으로 숨겨버렸다. 현우는 그런
하진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더니 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해 하는 모습에 하진도 눈치를 챈 건지 먼저 말을 꺼냈다.
“저한테 할 말 있어요?”
아주 짧은 망설임 끝에 현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툭 던지듯 그에게 물었다.
“…아까 왜 그렇게 쳐다봤어?”
“아까요?”
그는 잠깐동안 생각하는 듯 싶더니, 이내 혼자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 처음에 만났을 땐 좀 더 자기 멋대로였던 거 같아서요. 근데 지금은… 뭐랄까.”
또다시 현우를 관찰하듯 이리저리 살폈고, 마저 말을 이으려던 찰나에 웅장한 효과음이
영화관 전체를 울렸다.
“시작한다.”
하진의 고개가 현우 쪽에서 스크린으로 옮겨지자, 현우는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심드렁한
표정을 띠었다.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현우는 턱을 괸 자세로 옆에 앉아있는 하진을 슬쩍
훔쳐봤다. 맨 앞 스크린에 띄워져 있는 영화가 그의 눈엔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신발
끝이 닳은 운동화부터 캐주얼하다 못해 편해 보이는 하진의 옷차림까지. 다소 어두운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현우는 그의 몸 곳곳을 천천히 훑었다.
꽤 오랜 시간, 얼굴이 따가워질 정도로 하진을 쳐다봤지만, 그는 영화에 집중하느라
현우를 신경 쓰지도 않았다. 스크린에서 밝고 어두운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칠 때마다
현우의 시선은 아주 느긋하게 움직였다.
현우는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그를 부르기라도 하듯, 플라스틱 재질의 음료 받침대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쯤, 하진은 마른 침을 삼키며 아직
수북이 남은 팝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팝콘을 크게 한 움큼 쥔 하진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현우는, 그의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확 당겼다. 갑작스러운 현우의 행동에 그는
놀란 표정으로 현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입 모양으로.
“…갑자기 무슨….”
하진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크게 뛰는 심장 소리와 조금씩 떨려오는 손을
숨기기엔 아직 그의 연기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영화관 전체를 밝게 비추던 조명 덕분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까지 훤히 보이자, 현우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실없이 웃어댔다.
어느새 밝은 빛을 내던 스크린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하진은 작은 목소리로
‘놔요.’라며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어딘가 음흉해 보이는 현우의 미소에 하진은 더
불안했는지, 잡혀있던 팔을 어떻게든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현우는 그런 하진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며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혀끝으로 핥아댔다.
방금 전까지 달큰한 팝콘을 쥐었던 탓에 손에선 달짝지근한 향과 끈적함이 묻어있었다.
계속되는 현우의 돌발행동에 하진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 갔고,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그나마 뒤에서 두 번째 줄 자리라는 사실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현우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하진은 최대한으로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음소거 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놔요!”
현우는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 당황한 하진의 눈을 지긋이 마주쳤다. 마치 자신의 입에
집중하라는 듯, 혀는 아까보다 더 집요하게 그의 손가락을 감쌌다. 미끌거리면서도
질척한 타액이 손가락을 점점 더 적셔오자, 하진은 곤란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질근
씹었다.
현우의 느릿한 혀 놀림에 맞춰 하진은 천천히 그를 살폈다.
반듯하게 다듬은 눈썹과 색소 짙은 속눈썹, 그의 손목에 보이는 도드라진 근육과 뼈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그의 모습에 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빠지는 숨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아무리 작은 영화관이라지만 적어도 80명은 있을 텐데…
하진은 그의 어깨를 힘껏 밀어냈고, 그제서야 둘은 멀찍이 떨어지게 됐다. 어두운
공간이라 서로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하진의 표정을
보며 현우는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진이 붉어진 얼굴빛을 띤 채 다리를
오므리자, 현우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오른편에 꽂혀있던 콜라를 쭉 들이켰다. 방금
있었던 몸 다툼 덕분인지, 현우가 들고 있던 팝콘은 이미 바닥에 엎어져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상태였다. 현우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스크린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