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유하진에게 짝사랑에 대한 상처가 있다는 걸 처음 듣는 순간, 나에게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 잘난 짝사랑의 빈자리에 내가 들어가면 되겠지. 어차피 우리 둘 앞에 그
남자가 나타날 리는 없으니까.
내 계획은 정말 단순하고도 쉬운 일이었다. 하진이는 이미 상처가 깊은 상태였고, 기댈
곳이 필요한 아이였다. 그 덕분인지 짝사랑을 잊게 해주겠다는 내 제안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다. 처음엔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는 만큼 나에 대한 경계도 꽤 심한 편이었다.
나는 그를 아이 다루듯, 예전의 깊은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했다.
하진이가 내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에 기뻐한 것도 잠시, 우리 둘 앞에 그 짝사랑이 다시
나타났다. 그 묘하게 흘러가던 술자리의 분위기를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평소와 다른
그의 표정과 행동.
나는 직감적으로 강이태가 하진이가 말했던 짝사랑이라는 걸 눈치챘고, 그를 계속해서
타일렀다.
흔들리지 말라고, 강이태랑 가까워지면 너만 힘들어진다고.
그에겐 내 말이 그저 잔소리에 가까웠겠지만, 그만큼 나는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빼앗아 갈 것 같아서, 강이태가 하진이에게 고백을 한다면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날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에게 난 단순히 짝사랑을 잊기 위한 수단이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섹스파트너일 뿐이었으니까.
마음이 불안해질수록 나는 그에게 더 집착하며 몸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강이태가 그를
탐내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네가 넘볼 애가 아니야. 네가 하진이와 가까워질수록 그 애의 상처가 더 깊게 덧날 뿐이지.
***
“세탁기 다 되면 건조대에 대충 올려놓기만이라도 해줘요.”
“알았어.”
“…건성으로 대답하지 좀 말고.”
“누가 보면 집에 애 혼자 두고 나가는 부모인 줄 알겠네.”
“집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고요. 방금 청소했으니까…”
“청소는 내가 했지 너가 했냐….”
나는 입 안에 칫솔을 문 채 문 앞에서 그를 배웅했다. 하진은 느긋하게 운동화 끈을 묶으며
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고, 비교적 깔끔하게 청소된 집 안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둘러보고 나서야 현관문을 열었다. 자동적으로 나오는 내 대답에 그는 못 미더운 얼굴로
날 쳐다봤지만, 나는 서둘러 그의 빈손에 회색 크로스백을 쥐여줬다. 도어록 잠금 소리에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불이 켜진 화장실 안으로 향했다. 서너 번 입 안을 물로 헹구고,
썼던 칫솔을 하진의 칫솔이 있는 컵 안에 꽂았다.
나란히 꽂아둔 칫솔을 보고 얼굴이 새빨개졌던 하진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가 몇 년 전이더라….
지금은 이런 거에 별 감흥 없는 것 같아서 좀 아쉽긴 하지만.
그때 참 많이 놀렸지. 나한텐 아무것도 아닌 거에 혼자 부끄러워해서.
나는 주름 하나 없이 잘 정리된 침대 위에 살포시 몸을 눕혔다. 새롭게 깐 빳빳한 시트에선
아직 그의 체취가 묻어있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평소 즐겨듣던 플레이리스트를
누르고, 아무도 없는 집 안 전체에 울리는 음악 소리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나는 습관적으로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담뱃갑에 손을 댔다. 나가기
직전까지 집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며 경고했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손에는 담뱃갑, 남은 한 손에는 라이터까지 쥔 채 눈싸움이라도
하듯 창밖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겉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누구세요?”
이 집을 내 집처럼 들락날락한 지도 꽤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집의 초인종 소리는
처음 들어본 것 같았다. 나는 별 의심 없이 현관문을 열었고,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치자
내 표정은 티가 날 정도로 점점 굳어갔다. 둘 다 말없이 약 30초 동안 서로를 탐색하느라
바빴다. 그의 손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검은색 크로스백이 들려있었다. 옷차림은
평소보다 더 신경 쓴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알기론 그의 집에서 여기까지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라고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온 건지 나로서는 한가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고, 한 손으로 문고리를 꽉
잡은 채 금방이라도 문을 닫아버릴 것처럼 굴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형이야말로 웬일이세요?”
강이태는 굳은 표정으로 날 똑바로 쳐다보며 내 물음을 되받아쳤다.
“그건 벨 누른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
그는 나에게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열린 문틈 사이로 내 뒤 방 안에 유하진이 있는지
없는지, 혹시라도 방 안에서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는지가 더 궁금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몸으로 가리며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진이는 지금 집에 없는데.”
“그럼 다음에 다시 올게요.”
…잠깐만.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려던 그를 멈춰 세웠다.
“나가서 얘기 좀 하자. 너도 나한테 할 얘기 많을 것 같은데.”
하진이 없이 널 만날 기회는 흔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
자취방 건물에서부터 가까운 카페까지 5분밖에 안 걸리는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오후 4시. 이 시간에 문을 연 술집이 없어서 아쉬울 뿐이었다.
분위기는 딱 술 한 잔씩 마셔야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인데, 서로 기 싸움이라도
하듯 누가 먼저 입을 여나 재보는 꼴이라니.
항상 가는 널찍한 자리의 카페를 놔두고, 다소 작은 크기의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갔다. 하진이랑 몇 번 오던 곳이었지만, 이곳을 강이태랑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자리를 잡기 전, 카운터 앞에 서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했고, 나는
그제서야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뭐 마실 거야?”
“제 건 제가 계산할게요.”
“딱히 사 줄 생각 없었는데.”
나는 그보다 먼저 주문을 끝내버렸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통유리로 된 창문에 고개를 기댄 채 핸드폰을 꺼냈다.
― 나중에 수업 끝나면 연락해.
하진에게 메시지를 남기던 중, 테이블 위에 얼음이 띄워진 유리잔이 놓였다. 슬쩍 고개를
들자, 한 손에 뜨거운 커피잔을 들고 맞은편 자리에 앉은 강이태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하진에게 보내려던 메시지를 마저
작성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앞에 놓인 길쭉한 유리잔을 손에 들고 커피를 쭉
들이켰다. 강이태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계속해서 날
주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아, 미안. 하진이한테 문자가 와서.”
“할 말이 뭐예요?”
“성격도 급하긴….”
밝게 미소 짓고 있던 표정은 1분도 채 안 지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턱을 괸 채,
강이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 유하진 좋아해.”
이 말을 당사자 앞에서 해야 할 텐데, 이런 새끼 앞에서 말고.
오랫동안 쌓아놓은 무언가를 털어놓는 기분이었다. 내 말을 듣고 놀란 강이태의 얼굴엔
여러모로 많은 의미가 있어 보였다. 내가 하진이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예상한 것
같았지만, 이런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솔직해질 줄은 미처 생각 못 한 것 같았다. 나는
유리잔의 반 정도 남은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구석으로 밀었고, 두 손을 가볍게 깍지 껴
테이블 위에 얹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지, 내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아까처럼 내 말을 되받아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리는 것
같아 보였다.
“너도 알고 있었지?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모르면 바보잖아?”
“…티 내는 거. 하진이가 많이 곤란해하는 거 같던데 웬만하면 자제하시지 그러셨어요.”
평소 잘 웃는 편은 아니라 생각하긴 했었는데, 이렇게까지 굳은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지금의 너보단 내가 하진이랑 더 가까운 건 사실이니까, 화는 안 내고
있지만 내 말에 동요하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나는 아까보다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남아있던 커피를 가볍게 원샷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2차전 시작.
“아… 자제? 하진이를 보면서 자제를 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
“저도 잘 알죠.”
거만하게 짓고 있던 웃음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너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듯 빤히 쳐다봤다. 시선 하나 흔들리지 않고 날 바라보던 그는, 앞에 있던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잔이 다시 테이블 위에 놓이자, 강이태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는 현우 형은 하진이랑 사귀는 사이라도 되세요? 아까 보니까 좋아한다고만 말한
거 같아서.”
“….”
“…대답 없으신 걸 보니 그냥 엔조이인가 보네요? 그냥 일방적인 감정이네. 좋아한다는
거.”
“…너 슬슬 말이 짧아진다?”
유하진 앞에선 혼자 착한 척 다하더니, 역시 뒤가 재수 없는 놈이었어.
나는 유리잔을 들어 얼음 한두 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일부러 소리 내어 얼음을 씹어댔고,
복잡한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딱히 강이태와 싸우자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생각 못 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유하진
주변에 얼쩡거리지 좀 말고 꺼져.’ 이 의미가 담긴 말들을 퍼부어주고 싶었던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참 유치하기 짝이 없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었다.
“하진이가 대학 와서 너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어.”
치사하게 이런 얘기까진 꺼내기 싫었지만, 한편으론 어차피 언젠간 나와야 할 얘기 중
하나였다.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충 표정 변화만으로 살펴봤을 때,
하진이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절친하다고 생각했던 하진이가 어느 날부턴가 자기를 피하기 시작했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이유를 알고 싶은 건 당연했기 때문이다. ‘궁금하면 어디 물어보든가’라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말없이 강이태를 쳐다봤다. 그는 마지못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하진이가 얘기했어요?”
“얘기했지. 너가 하진이한테 어떤 상처를 줬는지까지.”
강이태는 확실히 아까보다 생각이 많아진 얼굴을 띄고 있었다. 나는 그를 쏘아붙이듯, 좀
더 말을 덧붙여갔다.
“…내가 이제 와서 너한테 다 말해주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하진이한테 찾아가서
물어보는 짓은 하지 마. 걘 너랑 있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니까.”
“…하진이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걔가 너만 만나고 나면 날 찾아와.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나는 강이태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강이태 때문에 힘들어했던 그 애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떼어놓고 싶었다.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게, 같은 상처를 받지 않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듣고 조용히 나갈 줄 알았는데, 강이태는 오히려 아까보다 다소
여유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형, 지금 저 견제하세요?”
“…뭐?”
“저 하진이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했어요. 이건 형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예요.”
가라앉은 분위기. 그가 지금 나한테 무슨 얘길 지껄이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강이태가
우리 학교에 편입을 한 후, 하진이의 그 짝사랑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내가 느낀 그의
첫인상은 모든 사람이 느낀 대로였다. 반듯하고 착한 성격, 자기 실속도 잘 챙기면서 남을
이끌어주는 건실한 이미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를 보면 볼수록 마냥 착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보통 이런 새끼를 뒤가 구리다고들 표현하지….
표정관리에도 한계를 느꼈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고, 의자를 당겨
테이블에 좀 더 가까이 앉았다.
“너가 걜 좋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존나 어이없네….”
“제가 왜 하진이한테 고백 안 하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지 아세요?”
나는 더 심한 욕이 입 밖으로 나오려던 걸 겨우 참아냈다. 강이태의 본 모습을 나 혼자 보고
있다는 사실에 억울함이 들끓는 기분이었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 내 귀에 제대로
들릴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땐 큰 착각을 했거든요. 저한테 언젠가 고백해주지 않을까, 사실대로 말해주길
기다렸던 건데….”
“….”
“…형도 알잖아요. 걔가 엄청 여린 거. 조금만 겁먹으면 도망가버리고.”
“웃기고 있네. 내 말은 너가 잘못 판단한 덕분에 하진이가 상처받았으니까 그냥
꺼지라는 거야.”
“현우 형.”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난 너 존나 싫거든? 결국 하진이가 네 손에 놀아났었다는 뜻인
거 같은데 이 얘길 내가 왜 듣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카페에 들어와 자리 잡고 앉은 지 1시간도 안 된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친다면 겨우 붙잡고 있던 인내심마저
끊겨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멱살 잡고 한바탕 싸울까 생각했지만, 때마침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엔 익숙하고도 가장 반가운 이름이
적혀있었다.
“…어, 하진아. 수업 끝났어?”
나는 전화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비온다고?”
의자에 앉아 통화 중인 날 쳐다보고 있던 강이태를 슬쩍 흘겨보고는, 인사 없이 카페
밖으로 나와버렸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가 그나마 남겨져 있던 벚꽃들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강이태와
말싸움에 가까웠던 이야기를 한 시간 만에 끝내고, 카페 바로 옆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을
골랐다. 자취방 쪽으로 향하던 학생들은 급하게 집으로 뛰어갔고, 학교 쪽으로 향하던
학생들은 편의점으로 들어와 다 똑같이 생긴 비닐우산을 계산했다.
나는 비닐우산 두 개를 손에 쥐었다가 짧은 고민 끝에 카운터 앞에 세워진 검은색 장대
우산을 하나 집었다. 일주일도 안 가 고장나버리는 비닐우산과 달리, 장대 우산은 웬만한
바람에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얇았던 빗방울은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형, 오늘 알바 가는 날 아니었어요?”
“몇 번 말하냐. 주말로 옮겨졌다고. 내일부터 나가.”
“다행이다. 근데 왜 우산을 하나만 갖고 왔어요. 다 젖겠네….”
그는 비에 젖지 않기 위해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밀착했다. 나는 팔을 뻗어 젖어가던 그의
어깨를 감쌌다. 우산 표면에 굵은 빗방울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제법 시끄럽게 귓가에
울렸다. 강이태를 만나고 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후련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방금 전 강이태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그에게 비밀로 하기 위해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했다.
“집에 있다가 온 거예요?”
“어, 침대에 누워있다가….”
비밀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말수를 줄이는 편이 낫다는 걸 오랜 경험 끝에 깨달았다.
나는 그가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할 뿐, 그 어떤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후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나는 자취방 건물 현관에서 비에 젖은 검은색 장대 우산을 접어 탈탈 털어냈다. 하진은
현관문을 연 채, 우산을 털고 있던 내 쪽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형, 빨리 들어와요.”
“…오늘 저녁 뭐 먹을래?”
“그냥 시켜먹어요. 설거지도 귀찮고.”
하진은 구겨 신은 운동화를 대충 벗어 던져놓고는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정돈된 이불
안으로 향했다.
“으…. 비 와서 그런가… 쌀쌀하네.”
허리를 주먹으로 두어 번 치더니, 현관을 정리 중이던 날 빤히 바라봤다. 나는 검은색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놓고는 신발장의 신발들을 하나씩 꺼내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진이와의 데이트를 생각하며 일주일 전에 사둔 구두였는데, 갑작스럽게 내린 비 때문에
구두 안쪽까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신발장 맨 밑에 쌓여있던 신문
한 뭉텅이를 집어 구두 안쪽을 채워 넣었다.
“현우 형, 햄버거 어때요?”
“아무거나 시켜놔. 너 슬리퍼 좀 빌린다.”
“담배?”
“왜. 너도 나오게?”
“아뇨. 귀찮아….”
나는 다소 작은 사이즈의 삼선슬리퍼를 빌려 신고 현관문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한결 얇아졌지만, 5월에 안 어울리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짤막한 지붕이
솟아있는 건물 앞에 서서 회색빛이 도는 밖을 눈으로 훑었다. 비 때문인지 길가엔 아무도
없었고, 7시가 넘은 저녁 시간이라 가로등 불빛만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 끝을 손으로 가리며 조심스럽게 불을 붙였다. 불이 붙음과 동시에 담배 연기가
눅눅한 공기 중으로 일렁였다. 깊은숨을 내뱉자, 그만큼 깊이 잊고 있던 아까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강이태와 했던 얘기들을 천천히 되짚어볼수록 미간 사이는 점점
찌푸려졌다.
“…씨발.”
당장 강이태의 집으로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진이에게 먼저
고백한다 해서 다 해결되는 일이었다면 진작에 그랬겠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이태의 말대로 유하진은 누구보다 부서지기 쉬운 애였고, 한마디로 고백을 받으면
지금의 관계보다 더 어색해질 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쉴 틈 없이 타들어 가던 담뱃불이 손끝의 살갗까지 뜨겁게 타들어 갔다. 나는 작게 욕을
내뱉으며 짧아진 담배를 시멘트 벽면에 짓눌러 뭉갰다.
오늘따라 눅눅하고 습기 찬 비 냄새가 짙은 담배 냄새에 뒤섞여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