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제발요…. 제발!”
깔끔히 정리된 책상 앞에 앉아있던 하진은, 두 손을 모은 채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하나하나 각을 맞춘 듯 반듯하게 꽂혀있는 노트와 책들. 책상 위에 펜들은
색깔별로 흐트러짐 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가 정리를 못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깔끔한 책상이 강박적으로까지 느껴졌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손을 키보드에
갖다 대고 한 자 한 자씩 학번을 공들여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성적확인’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 ‘제발’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되뇌었다. 그는 겁먹은 어린애마냥 한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조심스럽게 스크롤을 내렸다. 노트북 화면에 A라는 글자가
띄워지자, 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책상에 떨궜다.
예상보다 높은 점수라 다행이었지만, 강이태와 팀 과제를 진행했던 수업 점수까지 A라는
건 이해가 안 됐다. 발표 당일 참여도 안 했는데 이 점수가 나온다는 건 사실상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선배가 내 점수 알면 난리 나겠네.”
하진은 자신에게 구구절절 잔소리를 내뱉던 복학생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동안
긴장한 탓인지, 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발끝을 이용해 의자를 침대까지 밀었다. 그리고는 기절하듯 침대에 엎어져버렸다.
침대에서 일어난 지 정확히 1시간밖에 안 지났지만,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로 몸이 계속
무겁고 모든 일에 의욕이 없었다. 분명 창문을 닫아놓은 것 같은데, 평소보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마이크를 입에 대고 말하는 듯한 소리와 클럽에서나 나올 법한
시끄러운 음악 소리.
하진은 멍한 표정으로 말없이 천장만 쳐다보던 중, 벌떡 몸을 일으켜 핸드폰 화면을 켰다.
핸드폰 캘린더에 선명히 적혀있는 ‘축제’라는 글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참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신입생이었으면 지금쯤 선배들 눈치 보면서 천막 치고 있었겠지….
지금이 뭐야, 아마 축제 일주일 전부터 준비하느라 난리였을 게 뻔했다.
나는 폭신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니 그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베고 있던 베개를 접어 양쪽 귀를 꽉 막았다.
책상 앞에 앉아 성적을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안 들렸던 거 같은데, 한번 자각한 후로 더 잘
들리기 시작했다. 꽉 막고 있던 베개 틈 사이로 아까보다 더 큰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현우 형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받았겠지만, 오늘따라 연락을 피하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현우 형은 우리 학교의 그 누구보다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누구보다 그런 시끄러운 자리를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반대인 사람끼리 만나게 된 건지….
“네. 형.”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너 지금 어디야?”
“…여기가 어디더라.”
“너 집이지?”
“…하하”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음 같아선 통화 중이던 핸드폰을 꺼버리고
종일 집 안에서 뒹굴고 싶은 심정이었다.
“5시까지 학교로 올라와. 그래도 학교 축제인데 술은 마셔줘야지.”
“형이 술 사 들고 그냥 집으로 오면 안 돼요?”
물음에 대답도 없이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린 현우 형이 얄밉게 느껴졌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침대 구석에 처박아두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오늘따라 몸은 더
무겁게 느껴졌고, 차마 술을 마시러 갈 자신도 없었다. 아무리 자취생인 데다가 학교가 집
앞이라지만, 이틀 동안 안 감은 머리와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학교까지 가기엔 무리였다.
그래도 축제니까 다들 한껏 꾸미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엮여 보려고 난리일 텐데, 지금
이 꼴로 갔다간 분위기만 깨버릴 것 같았다. 나는 가까스로 욕실까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자취방 건물들과 편의점을 지나고 나면 학교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쭉 이어진다. 그
넓은 오르막길 양쪽으로는 카페와 술집이 즐비해 있고, 축제시즌에 맞게 빛을 내고 있는
예쁜 모양의 등이 가로수를 연결하고 있었다. 나는 갖고 있던 옷들 중 봄 날씨에
어울릴만한 베이지색 바지와 아이보리 색 티셔츠를 골라 입었다. 나름 신경을 쓴
편이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쯤으로 생각할 것
같았다.
4시 50분. 주변 술집들도 축제시간에 맞춰 조금 이른 시간에 불을 켜기 시작했다.
학교 정문을 지나자, 행정실과 교수님 연구실이 있는 세정관 앞까지 하얀색 천막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딱 보기에도 신입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텅 빈 천막 아래를 꾸미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딱한 표정으로 그들을 빤히 쳐다봤다. 20개에 가까운
부스들에선 거의 의무적으로 술을 파는 것 같았다. 무거운 박스들을 이리저리 바쁘게
나르고 있는 신입생들을 보고 있자니, 어렴풋이 1학년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일들 중
기억나는 거라곤 입학 날 당일과 현우 형을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축제 기간 내내
선배들한테 잔소리만 진탕 들으며 서빙 했을 때. 얼마나 인상 깊은 날이었는지 모른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
나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 바지 주머니 안으로 대충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평소만큼이나 깔끔하게 차려입은 현우 형의 옷차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봤다.
형은 그런 내 반응이 웃겼는지, 실실 웃으며 자연스럽게 내 어깨 위로 팔을 얹었다.
“위쪽 부스들은 열었던데…. 가보자.”
“…저 오늘 조금만 마실 거예요.”
“누가 뭐랬냐. 너 사람 많은 거 싫어할 것 같아서 애들도 안 불렀어.”
“…아, 네.”
잘했지?
형은 뜨뜻미지근한 내 반응에 마치 칭찬을 갈구하는 막내 동생 마냥 되물었다. 나는
마지못해 건성에 가까운 대답을 내뱉으며 어깨에 걸쳐져 있던 그의 팔을 살며시
걷어냈다. 형은 그런 내 행동을 멀뚱히 쳐다보더니, 오기 부리듯 손을 꽉 잡았다. 나는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현우 형은 이에 질세라 손에 깍지까지
껴버렸다.
“…형?”
“아무도 안 쳐다보는데 뭘 그렇게 혼자 오바하냐?”
“…형이야말로 오바하잖아요! 왜 안 하던 짓을….”
쳐내려 할수록 더 꽉 감싸오는 그의 손이 쉽게 놔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최대한 세게 내려치며 가까스로 손을 빼냈다. 평소 현우 형이었다면 이런 사소한
일로 삐지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손을 쳐낸 이후로 그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와 안 어울리게 시무룩한 모습이 괜히 내 탓인 것 같아 불쌍해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묵직한 팔을 잡아 내 어깨 위에 얹었고, 어색해진 분위기에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며 형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부스는 아직 저기밖에 안 열렸나봐요.”
“…그러게. 일단 자리 잡을까?”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현우 형의 눈치를 살폈다.
요즘따라 그의 이해 안 가는 행동들이 부쩍 늘었지만, 나름 날 생각해서 한 행동들이었다.
다만, 내가 아는 현우 형에게 그런 자상한 모습은 안 어울리다 못해 어색한 게 흠이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며 유일하게 열려있는 부스 안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요리에 열중하고 있던 신입생들이 ‘어서오세요!’를 외치며 우리 둘을 맞이했다. 깔 맞춤한
빨간색 앞치마와 머리를 질끈 묶은 학생이 다가와 천막의 맨 끝쪽 자리로 안내해줬다.
등받이라곤 없는 플라스틱의 딱딱한 간이 의자가 나에겐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접이식 테이블에 몸을 기댄 채, 천막 곳곳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군가가 집에 있는 펜이란 펜은 모조리 꺼내 정성 들여 쓴 흔적이
가득한 메뉴판이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고 있던 나와 다르게, 현우 형은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시킨 지 30초 만에
메뉴를 결정해버렸다.
“차돌박이 숙주볶음 어때? 그거랑 레몬 소주.”
“어… 야끼소바도 하나 시키면 안 돼요?”
“그럼 소주 두 병?”
“…형이 마실 수 있으면 시켜요.”
현우 형의 남다른 결정력으로 주문까지 3분도 채 안 걸렸다. 주문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천막 내부를 천천히 훑어봤다. 3일만 운영되는 부스인데도 이것저것
갖다놓고 꾸민 게 신입생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천장에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달린 붉은빛의 홍등과 살짝 조잡해 보이는 피규어들이 어렴풋이 이자카야 분위기를 내는
것 같았다. 지금 보니 메뉴판에 적혀있던 음식 이름 모두 일본풍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다른 부스들도 하나둘씩 문을 열고 있었다. 해가 지는
걸 기다렸다는 듯, 부스들은 하얀색 천막 위에 연결해둔 조명들을 밝히기 시작했다. 형과
내가 앉아있는 이 부스는 문을 일찍 연 덕분인지, 다른 부스들에 비해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나와 현우 형은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종업원들을 말없이 빤히
쳐다봤다.
주문 받았던 종업원이 네 대가 나란히 나열되어있는 간이 냉장고 안에서 소주 두 병을
꺼내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미리 잘라뒀던 레몬을 유리병 안에 넣고 소주를
부어 흔들었다.
“짠 할까?”
“아직 안주도 안 나왔잖아요?”
“언제 내가 그런 거 따진 적 있어? 마셔 마셔~”
현우 형은 오랜만의 술자리에 한껏 들떠 보였다. 아까의 일 때문인지, 오늘만큼은
들떠있는 그에게 맞춰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말을 깔끔히 무시한 채,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여있던 소주잔에 레몬 소주를 한가득 따랐다. 그 소주잔은 자연스럽게 내
손에 들리게 되었고, 이어지는 건배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원샷을 해버렸다. 새콤하다
못해 시큼하기까지 한 레몬 향이 입천장을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저절로 찌푸려진 내
표정과 다르게, 현우 형은 잔을 비워낸 후 재밌다는 듯 내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현우 형을 바라보며 얼음물을 들이켰다. 그는 내 술잔이 비어있는 걸 못
본다는 듯, 자연스럽게 잔을 채워나갔다. 종업원이 내 생각을 읽었는지 타이밍 좋게
주문했던 안줏거리를 가져왔다. 나는 까슬해진 입 안을 달짝지근한 야끼소바로 달래며
현우 형을 빤히 바라봤다. 그는 나와 달리 무서운 속도로 잔을 비우고 있었다. 가끔씩 그의
주량을 두 눈으로 확인할 때면 신기하다 못해 대단했다.
“야! 아는 후배들 좀 부르라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내 바로 뒤쪽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유독 튀는 목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이 목소리는
분명….
나와 같은 팀이었던, 나에게 심한 말을 했던 그 ‘강한주’ 선배였다. 방금 들이켠 레몬 소주
때문인지, 속이 매스꺼워지는 것 같았다. 티가 날 정도로 어두워진 안색에 현우 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뇨. 그냥….”
마음 같아선 그동안 겪은 뭐 같은 일들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지만, 당사자가 바로 뒤에
있는 걸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할 만큼 내 배짱은 두둑하지 못했다. 나는 티가 날 정도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형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가 채워준
술잔을 한 번에 죽 들이켰다.
“야, 마시라고! 내 말 무시하냐?!”
한주 선배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금방이라도 싸움 날 것 같은 분위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주 선배에게 쏠렸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다른 선배들도 주변 눈치를 보며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현우 형은 아무 말 없이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빈 잔을
만지작거리는 내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저 새끼는 또 저러네.”
“네?”
“강한주 말이야…. 쟤는 신입생 때부터 저랬어. 나이도 많은 새끼가….”
“…형, 목소리 너무 커요. 듣겠어요.”
나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우 형은 금방이라도
일어나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라도 하려는 듯, 나는 앉아있던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그리고 한쪽
손을 뻗어 현우 형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우린 술이나 마셔요….
비워진 술잔을 다급히 채우며 그의 손에 강제로 쥐여줬다. 건배부터 원샷까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그렇게 형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한잔, 두 잔씩 마시고 따르고 하다보니,
가득 채워져 있던 소주 두 병이 어느새 빈 병으로 바뀌어있었다. 온몸이 붕 뜨는 기분에
슬슬 취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형은 취하지도 않는지,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부스 안은 학생들로 가득 차있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다들
술을 몇 병씩 시켜 테이블에 줄지어 놓고 있었다. 나는 살짝 흔들리는 시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앞에 놓인 술잔에 고정시켰다. 분명 방금 전에 비웠던 것 같은데, 가득 채워져
있는 술잔이 이젠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어서오세요!”
대형 철판에 고기를 볶고 있던 남학생이 큰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 소리에 맞춰 부스
곳곳에 흩어져있던 종업원들의 시선이 천막 앞쪽으로 향했다. 그 남학생의 우렁찬
인사말에 취한 나까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나는 술을 깨기 위해 구석으로 치워져
있던 차가운 물을 원샷 했다.
“야! 강이태! 이쪽이야.”
분명 내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나는 마시고 있던 물을 왈칵 쏟아버렸다. 입가가 흥건히
젖은 채로 내 쪽으로 걸어오는 강이태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지금의 내 표정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잔뜩 젖어있는 티셔츠만 봐도 우스워 보였을 거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잔뜩 벙 찐 표정으로 이태를 올려봤고, 이태는 그런 날 내려다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음 지었다.
손을 올려 인사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술기운의 몽롱함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의 모습이 살짝 흔들려 보였다. 그는 내
옆을 지나 뒤에 있는 강한주 선배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상황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멍하니 앞만 바라보던 내 눈 앞으로 현우 형의 손바닥이
보였다.
“괜찮아? 너 속 안 좋아 보이는데.”
“…어. 네….”
평소의 현우 형이었다면 ‘강이태 때문이야?’라고 캐물으며 집요하게 날 괴롭혔을 게
분명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린 채 형의 눈치를 보며 말없이 술잔을 채웠다. 이 이상으로 내
몸에 알코올을 부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술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강제적으로 형이 들고 있던 술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외쳤고, 눈살을
찌푸리면서까지 한 번에 잔을 비워냈다. 술을 넘기자, 목에서부터 위장까지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시선은 오로지 앞을 향해있었지만, 모든 신경은 등 뒤로 향해있었다.
“뭐야. 누가 남자 후배 부르래. 그것도 이런 새끼를….”
“…한주 선배. 취하셨네….”
왜 하필이면 저 둘이 같은 테이블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유쾌하지 않은 조합이었다.
나는 한 손에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테이블의 대화 소리에 집중했다. 현우 형은
어느 정도 눈치챈 것처럼 말없이 빤히 내 쪽을 쳐다봤고, 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에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형, 더 안 마셔요?”
“너 취했어. 무리하지 마.”
“와… 형이랑 안 어울리는 말이다. 방금….”
평소였으면 뻗을 때까지 먹일 거면서.
나는 투덜거리며 말끝을 흐렸고, 새 소주병을 손에 들어 보란 듯 뚜껑을 열었다. 웬일인지
현우 형은 날 말리지 않았다. 그저 술잔을 채우고 있는 날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술
덕분이라고 해야 될진 모르겠지만, 한잔 두잔 들이켜다보니 신경 쓰고 싶지 않던
소리들이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지금의
내가 가장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던 현우 형은, 참다 못해
내가 들고 있던 술잔을 뺏어 한 번에 쭉 들이켜버렸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잔뜩 어눌해진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뭐 애도 아니고… 뭔 맨날 애 취급이야….”
“뭐?”
“…왜 애 취급이냐고…. 짜증 나게….”
현우 형은 내 말이 끝맺기가 무섭게 실실 웃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기분 나쁘다는 듯 그를
쳐다봤지만, 속이 안 좋아져 금세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취할 때면 모든 소리가
귓가에서 크게 울렸다. 축제 분위기에 맞게 부스 밖에선 공연이 시작된 것 같았다. 캠퍼스
전체에 울리는 음악 소리가 어지러운 속을 더 자극시켰다.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기분에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고, 나는 참다못해 테이블 위에 이마를 박아버렸다.
“야, 너 왜 그래?!”
가벼운 플라스틱 의자가 아스팔트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뭔가가 던져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내 뒷자리, 강이태와 한주 선배가
있던 테이블에서 나는 소리였다. 바닥에는 술잔이 깨져 유리조각 파편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있었고, 이태가 한주 선배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내가 아는 강이태는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애였나, 싶을 정도로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