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태야…. 선배가 취해서 그래.”
“그래. 일단 이거 놓고….”
금방이라도 주먹이 오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태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한주 선배의
멱살을 잡고 있었고, 한주 선배는 이미 술기운이 오를 대로 올라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였다. 주변 사람들도 처음엔 웃으면서 둘을 말리는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취한 한주
선배가 이태에게 도발을 하면서 일이 커진 눈치였다. 이태가 잡고 있는 한주 선배의
멱살은 쉽게 놓일 것 같지 않았다.
부스 안에서 즐겁게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던 많은 학생들의 시선이 이태네 테이블로
집중됐다.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싸워?’… 웅성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보다못한 종업원들이 둘을 말리려 다가왔지만,
“…이젠 선배까지 치려고? 어디서 굴러먹다온 새끼가….”
한주 선배의 도발에 강이태는 넘어가고 말았다. 이태의 주먹에 한주 선배는 아스팔트
바닥으로 엎어져버렸고, 말리고 있던 선배들이 취한 한주 선배를 부축해준 덕분에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이태는 그대로 부스 밖으로 나가버렸다. 몇몇 선배들이 강이태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술기운에 잔뜩 몽롱해진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황 파악을 하기엔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더 오래 걸릴 정도로 뇌 회로가
망가진 느낌이었다. 나에게 모질게 대했던 선배. 한주 선배의 한쪽 뺨은 시뻘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고소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내 모습을 지켜보던 현우 형은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다소 세게 테이블에 내려뒀고,
나는 그 소리에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쟤도 참 막 나가지 않아? 아무리 강한주가 미친놈이라지만, 그래도 선배인데.”
“…제가 그런 말 하지 말랬잖아요.”
밑도 끝도 없는 비난에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빤히 봤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난 건지, 현우 형은 조용히 빈 잔을 채워 내 앞으로 놓았다.
“…형, 이거 형이 사는 거라 했죠?”
“응. 갑자기 왜?”
“…그럼 저 먼저 일어나볼게요….”
필터 없이 내뱉는 말.
나는 느릿하고 어눌한 발음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도 내 말에 살짝 당황한 듯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고,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날 부축해줬다. 어디 가냐는 말에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그의 손을 쳐내며 대답했다.
“강이태한테요. 분명히 저 때문에… 싸웠을 텐데…. 형은… 그것도 모르면서….”
잔뜩 마셔댄 술 덕분에 근거도 없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투정에 가까웠던 내 말을 듣던 현우 형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으려 했다. 나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형의 손을 쳐다봤다. 그는 뻗었던 손을 멈칫하며 어딘가 씁쓸한
얼굴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를 뒤로한 채, 뒤를 돌아 부스 밖으로 향했다. 이미
강이태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부스 밖으로 나오자, 먹먹하게만 들렸던 음악 소리가 더 웅장하게 귓가에 울렸다.
이런게 헤비메탈인가?
꿈을 꾸는 것 마냥 눈앞의 물체들이 두 개로 나뉘어 보였다. 나는 많은 인파 속을 한 걸음씩
내디디며 자취방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가 계속해서 부딪혔지만,
취한 나에게 보이는 거라곤 눈앞에 세워진 학교 정문뿐이었다. 5월 초, 해가 져도 당연히
따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살짝 쌀쌀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훤하게 드러나 있는
양쪽 팔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자취방 쪽에 있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생각인지, 강이태가 바로 집으로 들어갔을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초점이 반 이상 나간 눈빛으로 편의점 알바생에게 밴드와 연고를 계산했다. 불그스름한
얼굴빛에 어눌한 발음이 누가 봐도 취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챌 것 같았다. 나는
뒷주머니에 있는 카드를 꺼내 계산하고, 편의점 앞에 펼쳐진 파라솔 의자에 잠깐 앉았다.
갑작스럽게 속이 뒤집어질 것처럼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으로 배를 쓸어내리며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벌써 7시가 넘은 시간. 술병을 비운 이후로 시간이 점점 빠르게 흐른 기분이었다.
매스꺼웠던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강이태의 자취방
건물로 들어갔다.
“…304호. 304….”
미친 듯이 흔들리는 시야를 가까스로 붙잡으며 문 앞에 적혀있는 숫자에만 집중했다.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올라갈 때마다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304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술만 마시면 어떤 일이든 아무렇지 않게 해버릴 줄 알았는데,
아직 덜 취하기라도 한 건지 손끝은 초인종 주변만 맴돌 뿐 누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나는 용기를 내 초인종을 눌렀다. 집 안에서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내 심장은 당장 어떻게 돼버릴 것처럼 세게 뛰기 시작했다. 눈앞은 흐릿해지고,
어지러워지는 게 알코올을 더 마신 것도 아닌데 더 취하는 기분이었다. 초인종 소리가
끊겼는데도 집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문틈을
살피며 초인종에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안 들어왔나?
생각해보면 강이태가 집으로 왔을 거라는 이유는 딱히 없었다. 나는 티가 날 정도로
시무룩해진 얼굴을 띄며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때, 조용했던 집 안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현관문이 묵직한 소음을 울리며 열렸다.
나는 멍한 얼굴로 한동안 이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평소 같았으면 무슨 말을 할지
적어도 5가지 경우의 수로 대본을 짰을 텐데, 술에 취해 대본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그저 이태가 걱정되는 마음에 무작정 쫓아온 것뿐인데, 막상 얼굴을 보니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온 그의 표정은 마냥 밝지도, 그렇다고 어두워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그 얼굴에 나는 왠지 모를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아까 샀던
밴드와 연고가 담긴 봉투는 왜 뒤로 숨긴 건지….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까… 싸운 거 같길래….”
내가 생각한 대로 자연스럽게 말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당연하게도 발음은 발음대로
꼬였고, 나조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앞에서 혼나는 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게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나의 두서없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태는 현관문을 끝까지 열어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들어와.”
***
그의 집은 항상 그랬듯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흐트러짐 없이 놓여 있는 신발들
사이로 운동화를 벗어놨고,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오긴 했는데,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술도 제대로 안
깬 상태라 몸 전체엔 후끈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저 말없이 어색한 미소를
띠고는 무의식적으로 숨기고 있던 약 봉투를 꺼내 들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에게
내밀었고,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너 아까….”
다친 거 같길래…
말끝을 흐림과 동시에 용기를 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술기운으로 계속해서 흔들리는
시야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조용했던 이태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내가 들고 있던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아까 뭘 본 거야. 나 한주 선배한테 안 맞았어. 오히려 내가 친 거지….”
한껏 벙 찐 내 표정에 그는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생각해보면 이태가 맞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한주 선배가 일방적으로 멱살이 잡혔고, 한 대 세게 얼굴을 맞았던 것밖에 못
봤는데, 술에 취해 잠깐 혼동했던 것 같았다. 실실 웃던 강이태는 내 머리카락을 그 큰
손바닥으로 마구 헝클더니, 부엌 쪽으로 가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왔다. 긴장감에 잊고
있던 취기가 조금씩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잔뜩 풀린 눈으로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았다. 깨끗한 유리컵에 주스를 따르던 이태는 바닥에 주저앉은 날 보더니, 침대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침대에 앉아도 돼. 너 많이 취한 거 같은데.”
“…고마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일어나 주름 한 점 안 잡혀있는 침대 시트 위로 향했다.
폭신하고 적당히 딱딱한 매트리스가 나에게 누우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컵에
가득 따른 오렌지 주스를 바로 앞까지 가져다줬고, 찬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적거리던 이태는, 찬장에서 과자 세트를 잔뜩 꺼내 방 한가운데에 펼쳐놓았다. 마치
누군가 자취방에 와주길 기다린 사람 같아 보였다. 내가 혼자 실실 웃고 있자, 이태는 왜
웃냐며 박스 안에 든 오레오 맛 과자를 뜯어 건넸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다과회에 나는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주스를 홀짝이며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 한주 선배랑 어쩌다 싸운 거야?”
“내가 그 선배 팀플 명단에서 빼버렸거든. 그거 때문에 술 마시고 시비 건 거에, 내가
넘어간 거지. 참았어야 됐는데….”
“명단에서 뺐어?!”
“그 선배가 정도껏 했어야지…. 너도 알잖아. 막무가내였던 거.”
이태는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오레오 맛 과자를 입으로 넣었다. 나는 그의 말을
천천히 되짚어보며 최대한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래서 그렇게 한주 선배가 이태한테
시비를 건 거구나….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손끝부터 머리끝까지
후끈거리는 열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최대한
숨기려 노력했다. 갑작스럽게 고개를 숙인 나의 어색한 행동에 이태는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아… 아니.”
“뭔데? 너 얼굴 엄청 빨개졌어.”
나는 시뻘게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양팔을 동원했지만, 그는 평소답지 않게 내 팔을
붙잡으며 캐물었다. 나 때문에 싸운 줄 알고 혼자 착각해서 집까지 쫓아왔다는 사실을
절대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도끼병도 아니고…. 아까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니,
정말 나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었다. 잔뜩 올라있던 취기가 이 생각 하나만으로 확
달아났다. 이태는 필사적으로 내 팔을 잡더니 벌게진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뭐가 웃긴 건지, 혼자 실없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나만 보면 혼자 웃어대는
이태가 왠지 모르게 얄미워 보였다. 나는 살짝 퉁명스러운 말투로,
“…왜 비웃냐?”
“아니. 비웃는 게 아니라….”
그는 꽤 오랜 시간 혼자 웃으며 침대에 턱을 괸 채, 내 얼굴을 살폈다. 다소 부담스러운
그의 눈빛에 내 시선은 이곳저곳을 방황하느라 바빴다. 장난기 섞인 이태의 행동은 정말
오래간만이라 마치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인 물을 마시며 나에게 말했다.
“너 아까 엄청 많이 마시던데, 해장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라면 끓여줄까?”
“진짜? 나 좀 배고픈데….”
“넌 술만 마시면 위장이 블랙홀 되는 거 같더라…. 엄청 많이 먹어.”
“나 아까 안주도 제대로 못 먹었어.”
졸음이 점점 몰려와 눈꺼풀까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따뜻한 햇빛 향이 배어있는
침대 시트로 몸을 눕혔고, 부엌에 서 있는 이태의 뒷모습을 훔쳐봤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저번에 과제 하러 왔을 때가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베개로 파묻어버렸다. 이태는
물이 끓는 사이 침대로 다가왔고, 꽤 오랜 시간 내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비스듬히 짝 다리를 짚은 채, 양손을 허리에
둔 그의 자세가 곧 그 입에서 잔소리가 나올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가 말하기 전에
나는 먼저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먼저 씻고 나와. 너 금방이라도 잘 거 같아.”
“알았어….”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며 얼떨결에 욕실 안으로 향했다. 욕실 문을 닫고 나서야 한 박자
느리게 상황파악이 되는 것 같았다. 애초에 연고랑 밴드만 전해주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그의 집으로 들어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이곳에서 자고 갈 사람처럼
욕실에까지 들어오게 돼버렸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흔들렸던 시야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약 3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혼자 고민에 빠졌다.
뭐 어때… 친구끼리.
언제나 그랬듯 간결하고 단순한 결정을 내려버렸고, 아무렇지 않은 척 욕실 문을 열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칫솔 남는 거 있어?”
“거기 선반에 있을걸? 근데 어차피 라면 먹을 거 아니야?”
“아… 또 닦지 뭐….”
나는 말끝을 흐리며 세게 문을 닫아버렸다. 당황한 티가 잔뜩 묻어있는 내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나는 붉어진 두 뺨에 손등을 대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술에 진탕 취해 이태네
집에서 자고 간 날, 아침 댓바람부터 도망치듯 집을 나왔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짜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구나….
나는 물기 하나 없는 깨끗한 세면대에 두 팔을 기댄 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선반에 놓여있던 일회용 칫솔 중 하나를 꺼냈다. 혹시 모를
손님용으로 갖다놓았는지 꽤 많은 양의 일회용 칫솔들이 선반을 채우고 있었다. 아무도
못 따라갈 것 같은 그의 준비성에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상하게 강이태만 보면
나도 모르게 고등학생 때 생각이 떠올라 혼자 실실 웃는 것 같았다.
***
“와… 냄새 짱 좋아.”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코끝에 풍겨오는 라면 냄새가 배불렀던 속을 정리시켜주는
기분이었다. 나는 머리 위에 얹어뒀던 수건으로 대충 젖은 머리를 털어내고 재빠르게
식탁 앞에 앉았다. 이태는 내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며 뿌듯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투명한 유리잔에 차가운 우유를 따라 건네줬다.
“…야, 내가 애기냐? 라면 먹는데 우유 마시게?”
“너 매운 거 잘 못 먹잖아. 먹고 나면 맨날 장염 걸리면서 허세는….”
강이태는 턱을 괸 자세로 마치 어린애를 보듯 내가 라면 먹는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그의 걱정 어린 잔소리에 반항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매워
보이는 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알코올로 꽉 막혔던 속이 한번에 해장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흐뭇한 미소로 그에게 만족스러움을 표현했다.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된 건지, 그는 자기 앞에 놓인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대단한 요리를 평가받는 셰프라도 되는 줄 알겠네….
라면을 반 정도 먹었을 때쯤, 깔끔한 디자인의 하얀색 식탁 옆으로 삐져나와 있는 핸드폰
충전기가 눈에 띄었다. 순간 내 바지 주머니에 처박혀있는 꺼진 핸드폰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 핸드폰 충전 좀.”
“거기 옆에 있을걸.”
그가 손수 따라준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식탁 옆에 꽂힌 충전기에 이미 꺼져있는
핸드폰을 연결시켰다. 충전과 동시에 밝은 빛을 내며 켜지는 핸드폰 화면엔 익숙한
이름들이 주르륵 떠 있었다. 나는 자동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부재중 통화 목록을
살폈다. 젓가락으로 얼마 안 남은 라면을 깨작거리던 이태의 시선이 느껴지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식탁 위에 덮어버렸다. 언제 표정을 찌푸렸냐는 듯 최대한
밝은 웃음으로 남은 우유를 원샷 했다.
“너 라면 장난 아니다?”
“옛날에 너 우리집에 와서 술 마셨을 때 내가 라면 끓여줬었잖아. 기억나?”
“아… 그때? 그게 언제 적이냐…. 5년 넘었잖아?”
그래. 그때 한참 널 좋아했을 때였는데….
이태와 옛날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 나누는 짓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 날을 떠올릴 만큼 내 면역은 강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있던 양주 그 날 다 마셨잖아. 넌 완전 뻗어버리고….”
“아아…. 너네 아빠가 엄청 화내지 않으셨나?”
“여행 갔다 와서 양주 병째로 없어진 거 보고 난리 났었지.”
그동안 수다스러움을 참느라 남모르게 힘들었을 것 같았다. 그는 나와 이런 얘기를
주고받길 고대해온 사람처럼 그때 당시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은
이태의 말만큼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고등학생 때 물론 좋은 일들도 많았지만, 좋은
일들을 기억하다보면 꼭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함께 떠오르는 법이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띠며 다른 화재로 얘기를 돌리려 했다. 이태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턱을 괴고 앉아 처음 술 마셨을 때 내 표정이 어땠고, 우리가 무슨 얘길
나눴었는지 하나하나 얘기했다.
아… 맞다.
“내 가방 행정실에 맡긴다 하지 않았어? 행정실에 없던데?”
오랜 고민 끝에 겨우 생각난 얘기가 이것뿐이라니, 분위기 깬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로서는
최선이었다.
“…과제 때문에 바빠서 행정실에 못 들렸었어.”
이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안에 들어있던 검은색 크로스백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가방을 받아들고 지퍼를 열어 안에 담긴 물건들을 살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이태는 ‘왜? 내가 뭐 훔쳐 갔을까봐?’라며 웃음 섞인 농담을 던졌다. 이 뒤를 이을 만한
이야깃거리가 뭐가 있을까 혼자 깊은 생각에 빠지던 중, 이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거리들을 싱크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의 멍한 표정을 흘끗 보던 그는, 내 눈앞에
그 큰 손바닥을 휘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왜 또 멍때려?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침대에서 좀 쉬어.”
…침대?
이태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게 이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인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쯤 되면 안면홍조증이라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다급히 손을 뻗어 한참 충전 중이던 핸드폰 화면을 켰다. 밤 10시 32분. 무음으로
바꿔놨던 핸드폰엔 10분에 한 번꼴로 온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