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태 너가 신경 좀 써줘. 아버지께서도 걱정 많이 하시는 것 같더라….”
“네.”
“애가 워낙 내성적이니까… 알겠지?”
“걱정 마세요. 선생님.”
담임 선생님한테 항상 부탁받았던 그 사소한 일들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었다. 반장에게
전학생을 맡기는 건 당연하면서도 익숙한 부탁이었다. 한 달 정도 어울려주다 보면
알아서 적응하거나, 적응 못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는 최선을
다한 거니까.
“이름이… 유하진….”
나는 그 일을 가볍게 생각하며 전학생에게 다가갔다. 깊은 관계는 절대 원하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한테 대했던 것처럼 다가갔을 뿐인데, 그는 오히려
그런 내 호의를 어색해했다. 그때의 표정을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반장이라는 애가
웃으면서 다가오니까 웃어주긴 해야겠는데, 한쪽 입꼬리만 삐죽 올라간 미소가 아무리
봐도 억지웃음 같아 보였다. 그때 나에게 비친 그의 첫인상은 다가가면 오히려
움츠러드는 애라고 생각됐다. 그런 하진이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내 오기가 발동한 것
같았다.
“야, 너 열나? 나보다 뜨거운 거 같은데.”
“아… 아니. 더워서 그런 거….”
처음엔 날 피하기만 했던 애가 날 따라 농구부까지 들어왔다는 게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말 잘 듣는 남동생 같다고 해야 하나….
언제부터라고 확실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깜짝
놀라며 귀까지 빨개졌다. 하진이가 내 곁에 있는 날들이 점점 늘어났고, 한 달 정도만
어울리다 말자는 내 안일한 생각은 잊힌 지 오래였다. 그러다 보니 서로 집에 놀러 갈
정도로 친해졌다. 그리고, 평소 의식하지 못한 그의 행동들에 나는 의문을 두기 시작했다.
그 의문은 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둔 채, 하진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설마… 아니겠지.’
처음엔 내 착각일 거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착각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한번 머릿속을 뒤덮자 그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끊임없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생각보다
하진이를 많이 좋아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여자애도 아니었고
좋아하는 감정을 남자애한테 먼저 느끼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모든 감정이 나에겐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나에 대한 감정조차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그의 다이어리를 읽게 되었다.
처음부터 하진이의 다이어리를 훔쳐 볼 생각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내 눈앞에 그
다이어리가 놓여있었고, 나는 아무런 악의없이 다이어리를 읽었다. 깨끗한 외관치고 꽤
많은 양의 일기가 적혀있었다. 부분부분 고의로 찢은듯한 페이지도 있었고, 도중에 일기
내용을 일부러 지운 자국도 많이 보였다.
중학교 때부터 쭉 써온 일기였다. 대부분의 내용은 좋지 않았던 집안 사정이 적혀있었다.
이렇게까지 어두운 성격이었나, 그저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하진이의 일기를 보고 있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기분이었다. 그의 속내를
몰라준 것만 같아 미안한 감정도 들었고, 이렇게까지 힘들었으면서 나에게 힘든 내색
한번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서운함도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서너 장씩 뒤로 넘겨 그가 최근에 쓴 일기를 읽어봤다. 다행히 최근에 집안
사정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전학을 온 이후로는 거의 학교생활을 많이 적는 것 같았다.
“…강이태.”
페이지를 넘길수록 익숙한 이름이 점점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가 전부터 생각했던 그
설마가 어쩌면 내 착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이 그의 일기장을
뒤덮고 있다는 건, 그만큼 하진이가 날 많이 생각하고 나처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니까…. 일기를 읽고 있던 내 입가엔 점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 일기를 읽고
나서 복잡했던 내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건, 좋아한다는 뜻이었구나.
“너 왜 허락 없이….”
그때 하진이의 놀란 표정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난 내 행동에 대한 아무런 자각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잘못한 일이었는데도 그저 오랜 시간 동안 혼자 고민해왔던 내
감정을 깨달았다는 사실에 빠져 중요한 걸 놓쳐버렸다.
빨리 사과를 하고 차라리 속마음을 털어놨어야 했는데, 누구보다 빨리 내 감정을
전했어야 했던 건데…. 너의 주변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이후로 하진이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갔고, 나는 그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섣불리
행동해버렸다. 일부러 그가 보는 앞에서 웃고 떠들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면 그가
다시 다가와줄 거라 생각했다.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겁먹은 하진이를 온전히 내 옆에 둘
수 있는지 수만 가지 생각을 했으면서 그에겐 한 점의 티도 내지 않으려 했다. 내 안일한
생각은 이 상황에서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고, 다시 가까워질 줄만 알았던 우리 관계는
완전히 끊겨버렸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가 떠나버린 후였다. 나는 주변
학교까지 수소문하며 몇 개월 동안이나 그를 찾아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었다.
***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침대에서 좀 쉬어.”
나는 그의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던 하진이의 얼굴빛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내 말의 어떤 부분에서 얼굴이
빨개졌는지, 너무나도 티가 났다. 그런 그의 뜻하지 않은 정직함에 나는, 터져 나오려던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나 나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
하진은 한참 동안 핸드폰 화면을 보더니, 겉옷을 챙겨입으며 말했다.
“누구한테?”
의외의 반응에 하진이는 꽤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을 살짝
가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가리고 있는 핸드폰 화면에 ‘장현우‘라는 이름이
적혀있을 걸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심술이 났다. 하진이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색한 웃음을 띠었고, 내 입에서 ‘장현우?‘라는 말이 나가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현우 형. 아까 술 마시다가 내가 먼저 일어나버렸거든. 지금쯤 연락 안 돼서 화났을
거야.”
‘현우’
… 그 이름만 들으면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나와 그 남자 사이에서 눈치 보며 행동하는 하진이가 딱하게 느껴졌다. 예전엔 그의 눈치
보는 표정이 귀여워 일부러 약 올린 적도 있었는데, 그때의 고약한 취미가 다시 돋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 통화하고 와.”
나는 인심 썼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진이는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날 흘끗 쳐다보고는 서둘러 운동화를 구겨 신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버리자, 방 안의 공기는 한순간에 차갑고 묵직하게 변해버렸다.
이대로 저 문이 영영 안 열리면 어떡하지.
나는 이 학교에 들어와 하진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오해를 풀
수 있을까. 많은 생각들을 해왔지만, 하진이를 처음 만난 날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할 때, 그때는 이미 그와 눈을 마주친 후였다. 그동안 그렇게 찾아 헤매고
다시 만나는 날만 기다려왔으면서 막상 마주하고 나니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었다. 티는
안 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떨리던지. 당황한 그의 표정조차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졌다.
이젠 그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데, 누구보다도 잘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의 옆엔 나를 대신할 누군가가 버티고 있었다.
장현우를 알고 지낸 지는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내가 피하고 싶었던
최악의 인간이었다. 편입 합격 후,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선배가 세연 대학교 영문과라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엔 항상 장현우가 있었다. 리더십이라는 핑계로
자기 멋대로 사람들을 구슬리는 그의 성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든 후배든, 그의
앞에선 그저 순한 양이 되는 것 같았다. 평소 뒤에서 도는 소문은 안 믿는 성격이었지만,
룸에 다닌다, 전 여자친구랑 헤어진 이유가 폭행이었다… 그의 안 좋은 소문들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순응하고 있었다. 가끔 그가 권하는 술을 받아마셨을 뿐, 따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친분이 있는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첫인상은 정말 피하고 싶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의 옆에 하진이가 있는 걸 보고 순간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현우는 어떤 달콤한 말로 하진이를 구슬렸는지, 하진이를 곁에 둔 채
유흥거리 마냥 날 조롱하고 있다. 나는 가까스로 잡고 있는 이 끈을 놓아버려 그동안
쌓아올렸던 공든 탑이 무너질까 두렵다. 하진이를 다시 만나기까지 내가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는데, 그깟 시답지 않은 놈 때문에 모든 걸 놓칠 순 없었다. 어쩌면 장현우는 내가
참지 못하고 하진이에게 윽박지르는 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잔뜩 겁먹은
하진이가 제 발로 자신의 손안에 들어오길 바라는 거겠지.
마치 기한 없는 눈치 게임이라도 하듯, 누가 그를 잘 어르고 달래는지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의 옆에 라이벌이 생긴 건 생각보다 더 기분 나쁘고, 불쾌하다.
조용한 방 안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다섯
발자국 정도 걸어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밖에 하진이가 있는 건
당연했지만, 왜인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초인종 고장 났더라.”
“저번 주에 고쳐주신댔는데… 또 안 고쳐주셨나 보네.”
방에 들어온 그의 손안엔 불투명한 봉지가 들려있었다. 내가 ‘뭐 사 왔어?’라고 묻기도
전에 그는 봉지 안에서 소주병 하나를 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같이 마셔줄래?”
“…….”
의외의 행동에 나는 약 5초 동안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하진이의
입에서 술을 마시자는 말이 나오다니, 정말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은, 내 입에서 흔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점점 시무룩해져 갔다. 나는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재빠르게 대답했다.
“좋지. 안주는? 뭐 만들어줄까?”
“11시 넘었는데… 그냥 술만 마시자. 배도 부르고….”
“그래.”
잠깐 통화하고 온다는 애가 왜 술까지 사 들고 온 거지? 장현우와 무슨 얘길 했을까.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떠오르는 질문들을 속으로 삼키며 그가 알아서 천천히
말해주길 기다렸다. 나는 싱크대 선반에 얹어져 있는 길고 투명한 유리잔 두 개를 꺼내
식탁 위에 얹었다. 좁지도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이 방 안에선 봉지의 부스럭 소리만 날
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소주병과 캔맥주를 따 적당한 비율로 잔에 따랐다. 하진의
멋쩍은 미소 끝엔 왜인지 모를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나에게 티를 안 내려 노력하는 그 모습이 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술잔 중 하나를 들어 남은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한껏 가라앉은 분위기와
다르게 잔이 부딪히는 소리만큼은 밝고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천천히 술잔을 비우려던 그때, 하진이는 무언가 결심한듯한 얼굴로 앞에 놓인 술잔을
한번에 원샷해버렸다. 평소 도수 낮은 술을 즐겨 마시던 그가 소주와 맥주가 뒤섞인 술을
한 번에 들이켠다는 건 다소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잔을 비우자마자 미간 사이를 잔뜩
좁히며 울상을 지었다.
“…천천히 마셔.”
“너도 원샷해. 같이 마셔준다며.”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슥 닦아내며 실실 웃었다. 내 눈엔 그 웃음이 은근히 날 도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술로 가득 채워진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제서야
하진이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비워진 잔을 술로 다시 채웠다. 평소 그의
모습과 다른 행동에 나는 살짝 벙찐 표정으로 술을 따르고 있는 하진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는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마음 같아선 더 캐묻고 싶었지만, 채워진 지 1분도
채 안된 술잔을 바로 마셔버리는 그의 행동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렇게 한잔, 두잔. 처음엔 내가 술잔을 비우지 않으면 안 마실 것처럼 말하더니, 그는
혼자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캔을 비워냈다. 의자에 앉은 지 30분은 됐나? 혼자 엄청난
속도로 마셔대고는 몽롱해지는 술기운에 하진이의 눈이 점점 풀려갔다. 그는 겨우 정신을
붙잡으며 이마를 팔에 괸 채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흔들어 정신을
깨웠고,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너 많이 취했는데 괜찮아?”
“…아니. 네 눈엔 지금 내가 괜찮아 보여?”
하진이는 한껏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듯 웅얼거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솔직함에 나는 약 3초 동안 아무런 말 없이 멈춰있었다.
“…하진아?”
우선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진이는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내 팔을
쳐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잊는 게 쉬운 줄 알아?”
“…….”
“…형은 자기 일 아니라고 맨날… 나한테만 뭐라 하고….”
“하진아.”
“난 뭐 그 새끼 안 잊고 싶은 줄 알아? 진짜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형도 내가 만만해
보이나 본데.”
그 새끼….
아무리 바보라도 문맥상 ‘그 새끼‘가 누굴 일컫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술주정을 말려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술이나 달라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테이블에 엎어져 풀린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모습이 나에겐 귀엽게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내 눈을 쳐다보긴커녕, 어떻게 하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 혼자 고민하고 있었을 거면서. 하진이의 이런
당돌한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고등학생 때, 부모님 두 분 다 여행 가신 날이었다. 분명 숙제 때문에 만났던 거였는데,
냉장고에 들어있던 온갖 술들을 꺼내와 다 마셨었다. 세 잔 만에 뻗어버린 하진이가
지금처럼 횡설수설했었다. 그때만 해도 하진이의 행동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가 내뱉었던 말들이 지금에서야 무슨 뜻이었는지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진이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술병을 들고 비어있는 잔을 다시 채우려 했다. 나는 그 병을
낚아챘고, 그는 팔을 뻗어 나에게서 술병을 빼앗으려 했다. 술병을 가운데에 두고 짧은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결국 손에 들고 있던 술병에서 투명색 액체가 흘러나와 내 옷을
그대로 적셔버렸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확 찌르는 기분이었다. 꽤 많은 양이 옷을
적시자, 하진이도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그가 당황한 틈을 타 의자에서 일으켜
침대에 눕혀버렸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건지, 하진이는 멍한 눈빛으로 천장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졸려서 그래….”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나 싶었는데, 횡설수설 혀가 꼬이는 건 아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나는 옅은 웃음을 띠며 그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손끝에 스치는 촉감. 마치 강아지를 만지는 것 같아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하진아.”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러 깨웠다. 붉게 달아오른 두 뺨에 손등을 살며시 갖다 대며 나는 마음속에
담아놨던 말을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널 좋아해.”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던 그는, 풀린 눈으로 내 시선과 똑바로 마주했다. 그와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일은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았다. 그때, 아무 말 없던 그의 눈동자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나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탁상 위에 놓여있는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아줬다.
내가 울린 건가?
아무리 닦아내도 눈물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고백 때문에 그가 우는
것 같아 방금 전 내뱉었던 말을 다시 주워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했고, 하진이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건지 소리까지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 가까이 눈물을 쏟아내던 그는 어눌한 발음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
“일찍 말해주지…. 왜 이제 와서…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는 서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눈물을 참아내며 겨우 말을 끝맺었다. 나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과거에 내가 잘못한 거니까. 죄를 지은
사람은 위로도 사과도 섣불리 내뱉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 때문에 힘들었던
사람에게 위로와 사과를 하는 건, 오히려 그 사람을 더 힘들고 괴롭게 만들 수 있어
누구보다 조심해야 한다.
[ 하진이가 대학 와서 너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어. ]
장현우가 나에게 했던 그 말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미안해.”
하진이의 눈물샘은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에게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