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그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살짝씩 비춰오는 따뜻한 햇빛. 그
사이로 잠든 날 깨우기라도 하듯 시끄러운 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습관처럼 왼쪽 탁상으로 팔을 쭉 뻗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의지해 가까스로 핸드폰을 쥐어 게슴츠레 뜬 눈으로 화면을
쳐다봤다.
맞다. 어제 꺼놨었지….
그 시끄러운 벨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울려댔다. 나는 잠에 취해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한 채, 미간을 구기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여보세요. 네.”
자다 깬 듯한,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낮은 목소리. 몽롱한 정신에 지금 이 상황이 꿈일
거라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맞닿은 살갗의 체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번쩍 떠진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상황파악에 들어갔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이 목소리가 차라리 현우 형이길 바랐는데, 아무리 들어봐도 이건
강이태의 목소리였다. 나는 마치 아직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이건 꿈일 거야….
나는 울상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믿지도 않는 신을 마음속으로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젯밤의 일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거라곤, 현우 형의 잔소리를
듣다못해 화를 냈던 것과 홧김에 편의점에서 술을 사 간 거. 그리고….
그다음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몸속에 침투한 알코올이 내 기억들을 앗아간 기분이었다. 생각해내려 할수록 오히려
내 바로 옆에서 통화 중인 이태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려 더더욱 눈을 꼭 감아버렸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창밖에서 불어와 맨
어깨를 스쳤다. 그제서야 내 몸이 나체상태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한번
자각하기 시작하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나는 잠결에 뒤척이는 척 그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는 짧은 통화를 끝낸 후 얕은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와 침대 매트리스의 끼익거리는 소리. 마른침을 삼키며
그가 밖으로 나가길 바랐다. 설마 이태도 벗고 있는 건가? 복잡하게 떠오르고 있는 이
생각들을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온몸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이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어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엌 쪽으로 향했다. 나는 헝클어진 이불
틈 사이로 그의 뒷모습을 엿봤다. 그도 나와 같이 나체상태에 드로즈만 입고 있었다. 같은
남자였지만, 왠지 남의 몸을 훔쳐봤다는 생각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이불
속이 유독 조용해서 그런지,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던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다 벗은 채로 강이태 침대에 누워있다는 거.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필이면
냉장고에서 1.5L 생수병을 통째로 마시고 있던 이태의 시선과 정확히 마주쳐버렸다. 약
3초간 당황함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린 채 그를 쳐다봤고, 이태는 마시고 있던
생수병을 어지럽혀진 식탁 위에 얹으며 말했다.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아… 아니.”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을 해버렸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전에, 내 눈으로 들어온 그의 나체가 낯부끄러워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난감했다. 살짝 엇나간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며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어제 입었던 옷가지를 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않았다. 이태가 서있는 부엌에서부터
침대까지, 마치 도로를 세운듯 바지와 윗도리가 널부러져있었다. 나는 이불 안에서
다리만 쭉 뻗어 뒤집혀진 바지를 발 끝으로 끌어당겼다. 이태는 그런 나에게 다가와
바닥에 떨어져있던 옷들을 주워 건네줬다.
얼떨결에 그의 손에 쥐어진 옷가지를 건네받고 슬쩍 고개를 꾸벅였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엔 분위기상 알맞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엇나간 시선으로 이태를 흘겨보고는 이불
안에서 옷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어젯밤만 해도 이렇게까지 조용하고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역시 술은 뒤끝이 안 좋다. 신입생 환영회 때나 MT의 술자리에서도
선후배 할 거 없이 모두와 말을 텄으면서 그 다음 날만 되면 서로 모르는 척을 하기
마련이었다. 술을 멀리하라는 아빠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나뿐만아니라 이태도 어색하긴 했는지, 아무런 말없이 의자에 걸쳐진 검은색
추리닝바지를 입었다.
와… 완전 어색해.
오랜만에 맛보는 어색한 기류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멍하니 꺼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어제 장난 아니였어.”
가만히 있던 그의 입 밖으로 나온 그 한마디에 수만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뭐가 장난 아니었다는 뜻인지, 생각나지도 않는 기억들을 억지로 끄집어내려 했다. 묘한
방향 쪽으로 해석되는 건 왜일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다 벗은 상태로
첫사랑과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고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헛기침을 연이어 해대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제 좀 더웠지?”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하는 건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대체. 내
머릿속으로도 해석 안 되는 뜬금없는 이 말을 다시 삼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짧은
정적. 그 정적 끝에 나는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웃어 보였다. 나는 분명 그의
얼굴을 쳐다보려 했던 건데, 묘하게 그의 맨몸에 시선이 갔다. 예상은 했지만 그의 넓은
어깨선과 탄탄한 몸매가 어쩐지 강이태랑 어울리는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도 몸이
좋았는데, 지금은 좀 더 뭐랄까….
내 앞에 서 있던 이태는 피식 웃음을 짓더니, 옷장을 열어 옷더미를 뒤적이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더웠지. 누구 때문에….”
나는 그의 능구렁이 같은 대답에 두 뺨이 빨개질 대로 빨개져 버렸다. 옷도 다
챙겨입었으면서, 나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건지 이불 안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와 달리 무덤덤한 표정으로 회색 티셔츠를 입은 이태는, 차가운 손등으로 내 뜨거운
뺨을 쓰다듬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혼자 뭘 생각하는 거야. 너 나한테 또 토했어. 이 토쟁아….”
“…뭐?”
당황한 나머지 머리카락 끝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나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강이태를
현우 형의 이미지에 대입해버린 셈이었다. 술에 만취한 날 건드릴 사람은 현우 형밖에
없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토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고 그런 짓을 했으면 정말 강이태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거니까.
애초에 이런 생각을 혼자 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쪽팔렸지만,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방 안이 얼마나 어질러졌는지
한눈에 보였다. 침대 옆에 세워져 있는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술에 찌든
사람 같았다. 나는 잔뜩 부은 눈을 겨우 치켜뜬 채, 식탁 위 어질러진 잔들과 접시를
싱크대로 치웠다.
“내가 치울게. 오늘 수업 있다며?”
“그럼 내가 세탁기 돌릴까? 그… 티셔츠 어디 있어? 너가 어제 입었던 거….”
“아… 그거.”
이태는 살짝 망설이는 듯싶더니, 다용도실 밖에 가득 채워진 쓰레기봉투를 눈짓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나 때문에 옷을 버렸다는 것쯤은 직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침대 밑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미안!! 아 진짜 이 습관 고쳐야 되는데… 내가 한 번 더 술 마시면 진짜 사람이 아니라
개야….”
당황해서 말도 더듬거리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강이태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내가
내미는 지폐를 거절했다.
“친구끼리 뭐 이런 거 갖고…. 이젠 익숙해.”
묘하게 날 놀리는 듯한 그의 말투가 날 더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멋쩍은
분위기에 습관처럼 목 뒤를 만지작거리며 방 맨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더러웠던 식탁 위를 말끔히 정리했고, 싱크대에 수북이 쌓여있던 그릇들마저 빠른 속도로
설거지를 끝마쳤다. 이태는 마치 나에게 먼저 씻으라는 듯, 욕실 문을 활짝 열어주며
새하얀 수건을 품에 안겨줬다.
“지금 입고 있는 옷 찝찝하지 않아? 내 옷 빌려줄게.”
“아… 아냐! 어차피 수업 한 개인데….”
“우린 몰라서 그렇지. 다른 사람이 맡아보면 토냄새 장난 아닐걸?”
옛날이나 지금이나 강이태는 날 손안에 두고 쥐었다 폈다 하는 것 같다. 그 말에 괜히 혼자
찔려 입고 있던 윗옷을 얼굴에까지 걷어 냄새를 맡아봤다. 내 모습을 보던 이태는 혼자
실실 웃으며 조금 열려있던 창문을 활짝 열어 재꼈고,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살짝
비춰오던 햇빛은 방 안 가득 퍼졌다.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던 나는, 그가 건네준 옷가지와
수건을 챙겨 들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 같았으면 샤워고 뭐고, 그가 잠든 틈을 타
도망갈 생각만 했을 텐데… 그사이에 내 얼굴이 많이 두꺼워진 것 같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잔뜩 떡 진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 뻣뻣이
솟고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이태를 마주했다니….
***
4월 말까지만 해도 쌀쌀한 바람이 불었던 것 같은데, 5월로 접어들고 나니 아침이든
밤이든 따뜻한 바람만 불어왔다. 이태 집에서 기분 좋게 샤워를 끝내고, 바로 건너편
건물인 우리 집으로 향했다. 자취방 건물 아래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려댔다. 나는 능숙하게 한 손으로 자전거 손잡이를 쥐고,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른 채 아무런 말없이,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유하진 너 어디야? 수업 5분 남았어.”
“…가고 있어요.”
딱히 형에게 화가 난건 아니었다. 어제 술을 마시면서 이태의 험담을 했던 게 나에겐 썩
좋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거에 대한 심술을 부리는 것뿐이었다. 가고 있다는 내 대답을
끝으로 형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살짝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좀 있다 봐요.”
마치 현우 형과의 대화에서 도망치기라도 하듯, 서둘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일어나자마자 한 거라곤 샤워밖에 없는데 온몸에 있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올라갔던 학교의 오르막길이 오늘따라 더 힘들게 느껴졌다. 이미 지각했다는
생각에 수업을 빠져버릴까 생각했지만, 그 깐깐하고 험상궂은 교수님의 얼굴이 떠올라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수업이 있는 학교 건물 주변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2층 복도 맨
끝에 위치한 강의실로 향했다. 다른 강의실에 비해 딱히 오래된 편도 아니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용한 강의실 전체를 크게 울렸다. 한참 과제 설명을 하고 계시던
교수님과 눈이 마주쳐버린 나는, 최대한 몸을 90도에 가깝게 숙인 채 빠른 속도로
빈자리를 탐색했다.
그나마 가까운 자리는 현우 형의 옆자리.
그의 옆에 앉으면 수업이고 뭐고 항상 들어왔던 잔소리를 3시간 내내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 자리를 지나치려 했지만, 이미 내 속셈을 눈치챈
현우 형이 내 팔을 덥석 잡아끌었다.
무슨 공포 영화도 아니고….
나는 얼떨결에 그의 옆자리로 착석해버렸고, 현우 형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형이랑 앉으면 수업 집중 안 되는데.”
“…….”
현우 형은 무슨 생각 중인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업시간 내내 노트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혼자 설레발 친 것 같아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교수님의 시선은 철저히 노트북 화면과 앞자리 학생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씩
시간이 흐를수록 집중력은 점점 흐트러졌고, 5분에 한 번씩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30명 정도의 학생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강의실 안. 수업시간이
2시간째로 접어들자, 앞자리 학생들을 제외한 학생들이 하나둘씩 책상 위로 엎어졌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나긋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일부러 볼펜 뚜껑을 달칵거렸다. 조용했던 강의실 안에 일정하게 들려오던
시곗바늘 소리와 볼펜 소리가 맞물려 채워졌다.
현우 형의 잔소리가 듣고 싶었다거나 특별히 어떤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어제
이후로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현우
형이 앉아있는 쪽을 쳐다봤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습관처럼 한쪽
다리를 떨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생각해보면 형과의 관계는 매번 같은 패턴이었다. 내가 화내야 할 상황에도 그는 오히려
자기가 더 서운한 척, 상처받은 것처럼 행동했고, 그때마다 먼저 말 걸고 고개 숙이는 건
항상 나였다. 형의 이런 수법에 몇 번을 놀아난 건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현우 형을 알게
된 지 1년도 안 됐을 때는 그의 삐진 척에 항상 속아 얼마나 눈치를 본지 모른다. 강이태는
믿음직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사자 같다면, 현우 형은 좀 더 날쌔고 날이 서 있는 늑대라
해야 하나? 과거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양손으로 차분히 정돈된 머리카락을 헝클며 책상 위에 이마를 박았다.
사람 관계가 제일 스트레스받아….
펼쳐진 노트로 고개를 박은 채, 남은 수업시간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다소 평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마음속은 과거 기억들로 난장판이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과거의
첫사랑을 못 잊어서 혼자 끙끙 앓다가 결국 현우 형에게 의지해 겨우 잊히나 싶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 첫사랑에 여태 묻어뒀던 마음들이 밀물처럼 몰려와버렸다.
허탈한 마음이라도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겠지.
강이태를 보자마자 느낀 감정은 여러 가지였지만, 지금 남은 감정은 설렘과….
“유하진. 수업 끝났어.”
“…벌써요?”
수업이 끝나면 도망치듯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이대로 현우 형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지금 나에게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단순한 직감 같았던
그 생각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강의실 안을 채우고 있던 학생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책상과 의자가 바닥에 끌려 시끄럽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어째선지 나와 현우 형이 앉아있는 이 작은 공간만큼은 다른
세상인 것처럼 조용하고 묵직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답지 않은 형의 가라앉은 목소리.
나는 그에 질세라 형에게 서운했던 어제의 감정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뺐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를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여느 때처럼 빈 책상 위에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 현우 형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먼저 들어가볼게요.”
그게 어떤 목소리였는지, 미세하게 떨렸는지 아니면 서운함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공간에서 벗어나 얼른 익숙한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형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않았고, 가방을 어깨 한쪽에 맨 채 마치
약속이 있어 바쁜 사람처럼 굴었다. 딱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려던 건 아니었다. 나는 분명
내가 할 말만 내뱉고 일어나려 했는데….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현우 형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겼다. 현우 형과 안 어울리는 표정. 형을 알고 지낸 지 꽤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얼굴을 한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내 팔을 꽉 붙잡고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도무지 감
잡을 수 없었다.
“아직 내 도움이 필요해?”
현우 형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이어졌다. 나는 벙찐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그를 쳐다봤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은 무조건 하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적이 길어지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 내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게 맞겠다.”
“…….”
‘너 강이태 아직도 못 잊었어? 바보구나? 또 상처받으려고?’
내가 예상할 수 있던 말들. 어떻게 보면 난 현우 형을 내 인생의 악역 취급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여기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형은 내가 어떤 대답을 해주길 원하는 걸까.
나는 오늘 처음으로 형의 눈을 마주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