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직 내 도움이 필요해?”
현우 형의 목소리가 원래 이렇게 차분하고, 침착한 분위기였나 싶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혼자 고민에 빠졌다. 강의실을 채우고 있던
그 많은 학생들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하필이면 강의실 안엔 형과 나, 둘밖에 없었다.
평소처럼 대충 얼버무리고 나중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연락하면 되지 않을까? 안일한
생각도 잠시, 내 대답보다 먼저 형의 입이 열렸다.
“아니…. 내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게 맞겠다.”
이 말을 하기까지 현우 형이 얼마나 많은 생각에 잠겼을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됐다. 평소
같았으면 심한 말도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 보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운 형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 불쾌하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태를 만나기 전, 그러니까 형과 만난 지 별로 안 됐을 때였다면 지금쯤 형의
어깨를 툭 치며 밥이나 먹자고 장난스레 말했을 텐데. 왠지 오늘만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넘겨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
형이 말한 ‘도움’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해석되지 않았다. 그가 잡고 있는 팔
부분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뜨겁다 못해 따가운 느낌.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말했잖아. 첫사랑 잊게 해주겠다고….”
“아 그때….”
[ 내가 도와줄까? ]
강이태에 대해 털어놨던 날. 형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들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기억의 맨 끝에 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형이 말한 ‘도움’이 그 뜻이었다는
걸 확실히 알았지만,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답을 찾진 못했다. 오히려 머릿속을 더
어지럽혀 모든 생각이 뒤섞인 것 같았다. 혼란함 가득한 내 얼굴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챈 현우 형은 또다시 말을 덧붙였다.
“처음엔 잊게 해줄 자신이 있었거든? 근데 요즘 널 보면 자신이 없어.”
난 더 이상 형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손끝부터 가슴 깊숙한 곳까지 누군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아 괴로웠다. 차라리 누군가 내 속마음을 정리해 대신 대답해줬으면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이젠 이태를 잊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현우 형이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모르겠어요. 저는…. 이제….”
예전의 나였으면, 현우 형을 처음 마주했던 나였다면 이런 식으로 도망쳤겠지.
“이제 이태를 잊고 싶지 않아요….”
분명 따뜻해야 할 5월인데, 손가락 끝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오는 기분이었다. 4월에
피었던 벚꽃은 온데간데없이 떨어져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형과 단둘이 있을 때만
해도 계절의 변화를 잘 느낀 편이었다. 지난 두 달이 왜 그렇게 길었던 걸까. 길고도
복잡했다. ‘관계’라는 것에 온 정신을 쏟느라 모든 걸 놓쳐버린 것 같다.
내 대답을 들은 현우 형은, 그렇게 한참 동안 가만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화난 표정도,
그렇다고 기쁜 표정도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 미묘한
얼굴을 하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세게 헝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평소같이 날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 진작 좀 말하지 그랬냐? 하여튼 너같이 답답한 애도 요즘에
드물다니까.”
“형 때문에 머리 다 헝클어졌잖아요….”
마구잡이로 내 머리카락을 뒤엉켜놓는 그의 팔을 가볍게 쳐내며 말했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한걸음 그에게서 멀어진 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다시 고쳐맸다.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강의실
밖으로 끌고 갔다. 목을 조이다시피 꽉 끌어당기는 그의 팔을 손으로 치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이것 좀 놔요. 아… 아프다니까.”
“…남자애가 이 정도로 엄살은.”
“아까까지 분위기 잡던 사람 맞아요?”
“내가 언제 분위기를 잡았다고 그러냐.”
그의 능청스러운 말투와 표정이 이젠 얄밉게까지 느껴졌다.
그래. 이래야 현우 형이지.
***
내가 그에게 했던 대답 때문인지, 형은 날 집 앞까지 데려다준 채 어디론가 가버렸다.
말로는 알바 때문에 바쁘다는데, 금요일은 항상 일도 안 잡고 내 침대에서 뒹굴었으면서
안 어울리는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는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말투로 집
비밀번호를 바꾸라 했다.
이젠 안 오겠다는 뜻인가?
내심 서운한 마음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굳게
닫힌 욕실 안에서 1시간 내내 뜨거운 물을 온몸에 뿌려댄 탓인지, 욕실 전체에 뿌연 김이
서렸다. 손등으로 거울을 닦아내도 금방 다시 뿌예질 정도였다. 나는 선반에 얹어뒀던
옷을 대충 입고 욕실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점차 뜨거운 김이 사라져 어느 정도
눈앞이 보였다. 입고 있던 회색 티셔츠의 소매를 걷자, 팔 전체가 불그스름하게
익어있었다. 나는 뜨거워진 두 뺨을 손으로 매만지며 냉장고를 열었다. 사둔 지 한 달이
넘어가는 캔맥주 하나를 꺼내 시트가 헝클어진 침대 위로 다이빙하듯 누웠다.
새하얀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왠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현우 형과 매일 이
침대에 누워있던 건 아니었지만, 이 천장을 이제 혼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게 어색했다.
첫사랑인 강이태를 잊겠다는 이유 하나로 형과의 관계를 이어왔던 거였나? 만약 나한테
첫사랑이 없었더라면, 형과 나는 어떤 사이가 됐을까.
그동안 형과의 관계를 내가 이용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머리맡에
있던 베개로 양쪽 귀를 막은 채 2초 동안 크게 소리를 질렀다. 방음이 안 되는 자취방에서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에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리 지르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바로 옆집에서 크게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향수 냄새.”
베개에 얼굴을 묻자, 현우 형의 손과 옷에서 나는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시원하면서도
싸한 향 끝엔 형이 즐겨 피우던 담배 냄새가 살짝 풍겼다. 쌉싸름한 담배 냄새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루 정도 옆에 현우 형이 없다 해서 외로운 게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 당연하게 저 현관문을 열고 웃으며 날 안아줬던 그가 이젠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지 않아서. 그게 가장 두려웠다. 그게 무서워서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를 이용했다. 두
달 전, 이태를 마주한 순간부터 나는 이 애를 잊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현우 형과의 관계가 끊기는 게 무섭다는 이유로 내 감정을 회피하려 했다.
결국엔 이렇게 혼자 남겨질 거였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고 나니 괜히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베개에 얼굴을 깊게 묻은 채
잠든 사람처럼 한참 동안 엎어져 있던 나는, 옆으로 누워 몸을 잔뜩 웅크렸다.
“헐…?”
순간적으로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두 달 전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하나씩 되짚던 중, 평생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던 어제의
필름들이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이어지고 있었다.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겼던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셈이었다. 꿈인지 진짜 어제 일어났던 일인지 가물가물할
정도였지만, 이렇게까지 생생한 기억의 경우엔 거의 99퍼센트로 꿈일 리가 없었다.
어제의 일들이 퍼즐처럼 일어난 시간과 상관없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똑똑히 기억하는 건 이태의 옷에 토를 했던 것과….
나는 하던 생각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차가워진 손을 심장 부근에 올렸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떨리는 손으로 한쪽 뺨을 세게 꼬집었다. 어제의 기억 중 하나는 강이태가 나에게
입맞춤을 했다는 거였다. 술에 취해 잠들기 직전 누군가 내 입술에 입맞춤을 했었던 게
아주 생생하게 촉감까지 기억이 났다. ‘분명 꿈꾼 거겠지.’라는 생각도 잠시, 나는 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있는 필름들을 잊기 위해 책상에 얹어져 있던 캔맥주를 따버렸다.
그리고는 한 뼘이 넘는 꽤 큰 크기의 캔맥주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차가운 알코올에 기운이 단번에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차가움에 이를 꽉
깨물며 어느새 텅 비어버린 캔을 손으로 뭉갰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방 안에
찌그러지는 캔 소리가 유독 시끄럽게 들렸다. 정신 차리려고 원샷한 술이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았다. 만약 꿈이 아닌 진짜 일어났던 일이라 해도 그 입맞춤이 뭐라고… 현우
형이랑은 더 한 짓도 했으면서 이태와의 입맞춤 하나에 다리 사이까지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강이태를 진짜 좋아하긴 하나 보구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멋쩍어진 분위기에 헛기침을 해댔다. 그 작은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방 안을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바지 버클을 풀었다. 바지 지퍼 사이로 하얀색 드로즈가 봉긋 솟아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키며 못 이기는 척, 오른손으로 그 성난 물건을 드로즈 채 느슨히 쥐었다.
차가웠던 손끝이 그곳을 감싸자, 한순간에 뜨거운 체온이 옮는 느낌이었다.
혼자 내 물건을 만지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조금이라도
쌓일까 싶으면 현우 형이 귀신같이 내 옷을 벗겨 이곳저곳을 물고 빨아댔기 때문이다.
아마 저번에 현우 형이랑 영화 보고 와서 집 현관에서 한 게 마지막이었지.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인데 체감상 엄청 오래된 것 같았다. 욕구가 쌓이기도 전에 현우 형이
알아서 빼준 덕분이라 해야 하나? 어느새 현우 형의 놀라운 정력에 맞춰 성장한 셈이었다.
이런 성장 전혀 안 반가운데….
나는 잠시 무거운 생각들을 저 멀리 치워둔 채, 몸 곳곳을 손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몸에 긴장을 풀려고 했지만, 어째선지 허리부터 손끝까지 한가득 긴장해 뻣뻣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자위…를 하는 건 두 달? 세 달 전의 일이니까 몸이 긴장할 만한
일이었다.
하진은 침대에 옆으로 누워 살짝 두꺼운 감의 윗옷을 목 끝까지 올려 이 끝으로 꽉 물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딱 감고 한 손으로 가슴 주변을 가볍게 문질렀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한껏 긴장한 가슴을 매만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두 끝이 딱딱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차가운 방 안의 온도와 오랜만의 자극에 몸이 극도로 민감해진 것 같았다.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매만지던 끝에 하진의 왼쪽 손이 하얀색 드로즈 안으로 향했다. 천장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 하진은, 어색한 눈길로 흘끗 아래를 쳐다봤다. 적당하게 딱 맞던 사이즈의
속옷은 잔뜩 성난 페니스에 얼핏 꽉 끼는 것처럼 보였고,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베개에 묻어버렸다. 자신의 물건 주변만 맴돌던 하진의 왼쪽 손은, 망설이던 끝에
그것을 감싸 쥐었다. 이미 묵직해진 페니스가 만져달라고 안달 난 것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페니스의 끝 부분을 살살
문질렀다. 문지름과 동시에 쥐고 있던 것을 조금씩 흔들기 시작하자, 이 자극을 원했다는
듯 굳게 닫혀있던 하진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작은 신음 소리조차 입을 꾹 다문 채 참고 있는 하진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느릿하면서도 엉성한 손놀림으로 흥분한 페니스를 만지고 있던 그는,
뭔가 부족했는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서랍장을 뒤적였다. 반쯤 침대에 몸을 눕힌 채,
손끝의 촉감에만 의존해 어떤 물건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랍장을
뒤적이던 하진은, 얼핏 보기에 핸드크림처럼 보이는 튜브형 러브젤을 꺼내 들었다.
핑크색 불투명한 튜브에 반쯤 남아있는 젤. 하진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빨개져 있었다.
아마 현우에게 러브젤의 존재를 들켰던 게 떠오른 것 같았다. 하진은 말없이 튜브를
만지작거리며 괜히 헛기침을 해댔고, 미끌거리면서도 끈적한 젤을 페니스 위에 짜기
시작했다. 젤을 많이 써본 건 아니었는지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자세가 낯설면서도
어색해 보였다. 한껏 발기된 페니스 위에 차갑고 미끈한 러브젤이 한 움큼 뿌려지자,
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엉덩이골에 살짝 걸치고 있던 하얀색
드로즈부터 세탁한 지 얼마 안 된 침대 시트까지. 어느새 투명한 젤로 흥건히 젖고 있었다.
봉곳 솟아있던 그의 페니스를 타고 엉덩이 안쪽까지, 미끌거리는 젤이 흘러들어 갔다.
“하아… 으응….”
손가락 사이에 페니스를 끼운 채로 아까보다 좀 더 빠르게 흔들자, 그는 참던 신음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의 얇은 허리선이 빳빳하게 세워져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하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손을 세게 움직였다. 그의 손바닥에 잔뜩 묻어나는
러브젤에선 향긋하면서도 달큰한 복숭아향이 풍겼다. 그는 눈을 지긋이 감았고, 오른쪽
손을 젤로 흥건히 젖은 드로즈 안에 넣었다. 손끝에 미끈한 젤이 묻어 질척이는 소리가
분위기를 더 고조시켰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어젯밤 함께 있던 남자를 생각하며 자기 몸 곳곳을 탐색하고 있는
상황이 그에겐 새로우면서도 자극적인 행위였다.
하진은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움직이던 잠시 손짓을 멈췄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꿔 침대에 엎드렸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허리를 살짝 추켜올렸다. 가쁜 숨을 내쉬던
끝에, 그는 눈을 딱 감고 손가락 하나를 세워 굳게 닫힌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혼자 뒤까지 푸는 건 3개월… 아니,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젤로 젖은 구멍이 손가락 한
마디를 빨아들이듯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끼익거리는 침대
매트리스 소리가 뒤섞여 이미 흥분한 하진의 귓가를 괴롭혔다. 손가락 한 마디만 넣었을
뿐인데, 그의 허리가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달아오른 신음 소리와
성기가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하진은 ‘좀 더…’라는 말을 나직이 반복하며 손가락 하나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평소 다른 사람과 했을 때. 아니, 현우와 했을 때 손가락만으로는 분명 부족했었다. 손가락
하나로 간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화날 대로 화난 현우의 성기를 대신할 다른
물건은 딱히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그 관계의 만족감은 대단했다. 하지만, 하진이
스스로의 것을 탐하며 상상하고 있는 상대와 자기 몸의 어딜 만져줘야 기분이 좋은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도의 흥분까지 많은 힘이 들진 않았다.
두 번째 손가락까지 그 깊은 곳에 들어가자 단단해져 있던 페니스 끝에서 진하고
불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정액이라기엔 다소 적은 양이 성기의 기둥 부분을 타고
흘러 그의 사타구니 부근을 적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웠던 젤이 미적지근해져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하진은 다리 사이에 걸쳐진, 젤로 젖어 반투명해진 하얀색
드로즈를 침대 밑으로 내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몸에 느껴지는 쾌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가쁘면서도 들뜬 숨소리가 얕은 신음에 뒤섞여 그 작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는 한 손으로 페니스를 세게 흔들며, 손가락 두 개를 젤로 적셔져 벌름거리는 구멍에
넣었다 뺐다 반복했다. 베개에 고개를 묻고 있던 하진은 쾌감에 몸을 움찔거렸고, 앞뒤로
계속되는 자극으로 인해 성기 끝에 농도 짙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쾌락이 절정에
치달을수록, 하진의 손은 더 바쁘게 움직였다.
“하악… 하아… 이태야….”
미세한 신음을 흘리며 입술 끝을 잘근 깨물던 하진은 강이태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고,
성기를 꽉 쥐고 있던 손안엔 어느새 자신의 체액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미쳤어. 유하진….”
하진은 멍한 얼굴로 침대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었다.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금 전까지 누워 그렇고 그런 짓을 했던 침대를 눈으로 훑었다. 야하고
자극적이게만 느껴졌던 투명한 액체들이 하얀 침대 시트에 흥건히 젖어있었고, 드로즈는
젤에 흠뻑 젖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사정과 함께 물밀듯 밀려온 자괴감과 후회. 하진은
헐벗은 채로 쭈그려 앉아 쓸쓸히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진은 매트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는 시트를 벗겨 며칠째 열려있던 세탁기 안으로 쑤셔
넣었다. 바닥에 뚝뚝 떨어져 있는 부끄러운 액체들을 휴지로 닦으려던 그때, 익숙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바탕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바닥으로 떨어진
건지, 핸드폰은 침대 밑에서 미세하게 진동을 울리고 있었다. 하진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어떡하지?’라는 말만 두세 번 반복하다가 탁자 위에 올려진 휴지로 다리 사이를 대충
닦아냈다. 그리고는 의자에 걸쳐진 청바지를 다급히 입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적어도 통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해야 하나….
하진은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