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33)

30화

“…여보세요?”

“하진아.”

핸드폰 화면에 ‘강이태’라고 적혀있는 글씨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서, 막상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손끝부터 발끝까지 크게 떨려왔다. 이토록 떨리는 이유는 통화 상대가

이태이기 때문도 있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마….

미끌거리는 젤이 체액에 뒤섞여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급하게 입은 청바지의 다리

사이가 점점 진한 청색으로 물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방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어째선지 이태는 내 이름을 부른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정적이

괜히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절대 그럴 리는 없었지만 내가 이태를 반찬 삼아 한 짓들을

들킨 건 아닐까 싶어 초조해졌다. 어떤 대화든 일단 얘기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먼저 입을 열었다.

“너가 나한테 빌려준 옷… 내일 안에 돌려줄게.”

“옷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닌데…. 천천히 돌려줘도 돼.”

또다시 정적. 핸드폰 밖에서 그의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태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 수업. 나올 거지?”

“…….”

“…여보세요?”

“너무 당연한 얘기라….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야?”

“응….”

이태답지 않게 목소리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엉뚱하면서도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조용히 웃음을 참아야 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가시진 않았지만,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그와

이렇게 1분 이상 통화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신기하면서도 아직은

낯선 기분. 그리고 이어지는 일상적인 대화.

현우 형과도 평소 잘 안 해본, 정말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지금 어디야?’부터

시작해서 ‘어제 잘 들어갔어?’와 같은 아주 평범한 얘기들.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이태와의 통화를 끊고, 잠시 찾아온 공허함에 나는 한참을

핸드폰 화면만 바라봤다. 침대 시트 위에 다소 능청스럽게 살포시 놓인 핑크색 러브젤이

잠시 잊고 있던 아까의 기억을 상기시켜줬다. 나는 꽤 큰 소리로 괴성을 지르며 대충

정리한 침대 위로 고개를 두어 번 박았다.

유하진. 이 미친 새끼….

현우 형이 이 사실을 알면 적어도 일 년 치의 놀림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방에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었지만, 지금 느끼고 있는 이 ‘현자 타임’은 절대 죽어도 못 잊을 것

같았다. 오늘 이태의 얼굴을 보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왜 항상 이런 날에 꼭 피하고 싶은 상대와 수업이 겹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

“으….”

새하얀 색이었던 천장이 눈을 떠보니 어느새 어둡다 못해 까만색으로 변해있었다.

몽롱함에 눈이 다시 감기려 할 때쯤, 잊고 있던 오후 수업이 강제로 내 몸을 일으켰다.

정말 놀라면 ‘헉’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온다던데, 이럴 때 하는 말이구나….

나는 당황한 나머지, 뻗친 머리를 손으로 대충 만지작거리며 어두운 방 안을 더듬거려

겨우 핸드폰을 찾았다. 오후 6시 40분. 다행히 수업이 끝나기까지 1시간 반 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지금이라도 준비하고 나가면 교수님께 사정해 지각처리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검은색 크로스백에 잡히는 대로 책을 쑤셔 넣고 옷장에 잘 개켜진 맨투맨

티셔츠 중 하나를 서둘러 입었다. 그리고는 항상 신던 운동화 뒷굽을 대충 구겨 신었다.

그래도 거울은 보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현관 옆, 전등 스위치를 켰다. 환하게 들어오는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신발장 위에 놓인 거울을 살폈다. 바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장을 향해 한껏 뻗쳐 있는 머리카락을 나는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진정시키려 했다.

“아… 바빠 죽겠는데.”

나는 현관에 서서 방 안에 걸려있는 모자까지 팔을 쭉 뻗었다.

늦은 시간, 거의 마지막 시간대에 잡혀있는 수업이라 캠퍼스 안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오르막길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켜져 있는 가로등과 이미 수업이 끝나 정문 앞에 서서

술자리를 찾고 있는 학생들뿐이었다. 나는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모여있는 그 무리를

곁눈질로 흘끗 살폈다. 혹시나 현우 형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현우 형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계속 마음에 밟혔다. 못하고 묵혀둔 말이 있거나, 형에게 쌓인

게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느낌. 속 시원히 내가 할 말을 한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형과 얼굴을 맞대고 평상시 했던 얘기들을 웃으면서 나눠야 비로소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일하러 간 형이 저기 있을 리 없지.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좀 더 걸음을 재촉했다. 그 가파른 학교의 오르막길과 3층까지의

계단을 빠르게 올라오느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조용한 복도 끝 강의실에서 비쳐오는

불빛이 내 시야를 환하게 밝혔다. 나는 거친 숨을 최대한 가다듬으며 강의실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닫혀있던 강의실 문을 열자, 언제나 그랬듯 수면제에 가까운 교수님의

목소리와 나직이 끼익거리는 문소리가 울렸다.

나는 죄지은 사람마냥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에 보이는 빈자리에 슬며시 앉았다. 한참

열띤 강의를 하고 계시던 교수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으셨다.

“…유하진 학생?”

“아… 네.”

교수님이 이름을 외울 정도로 내가 자주 늦었었나?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가방에서 전공책을 뒤적였다. 시선은 빈 책상에

고정시킨 채, 가방 안에 들어가 있는 모든 책들을 하나씩 꺼내 올렸다. 교양책은 종류별로

갖고 왔는데, 하필이면 지금 가장 필요한 전공책이 눈에 띄지 않았다. 급한 대로 책상 위에

쌓아놓은 책들 중 가장 두꺼운 책을 펼쳐 손에 펜을 쥐었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페이지 맨 구석에 알 수 없는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 수업이라 그런지 강의를

듣고 있던 학생들은 이미 고개를 숙인 채 졸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기까지 40분 남짓한 시간. 평소에도 수업시간을 꽉 채워 학생들을 괴롭히는

교수님이었기 때문에 일찍 끝나길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 맞다.

정신을 가다듬자, 잠시 잊고 있던 사람이 문득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무심한 척

고개를 천천히 돌려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을 살폈다. 마음속으로는 누군가의 얼굴을

되짚으며 그 사람이 어디에 앉았는지 찾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이 눈치

없게 요란한 소리를 울려댔다. 한참을 설명 중이던 교수님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고개를

두세 번 꾸벅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무의식중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뒤에 봐. ]

내가 찾고 있던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작스럽게 뒤를 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내심 기대했으면서, 메시지를 읽고 내

뒷자리에 강이태가 앉아있을 거라는 예상을 했으면서도 막상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시야가 세 갈래로 나뉘는 느낌이었다. 나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작게 말했다.

“…깜짝이야.”

이태는 느슨히 턱을 괸 채, 비교적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앞에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뒤에 보랄 땐 언제고….

나는 녹슨 기계마냥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아까와 달리, 핸드폰 진동소리가

조용히 울려댔다. 맨 앞에 서서 한참 열띤 강의를 하고 계신 교수님의 눈치를 살피며

핸드폰을 조심스레 책상 밑으로 내렸다.

[ 수업 끝나고 영화 볼래? ]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메시지 옆에 적힌 1을 지울 뿐이었다. 갑자기 얘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조용히 눈만 깜빡이며 이태가 보내온 메시지를 빤히

바라봤다.

예전부터 혼자 영화 보는 걸 즐기던 강이태는 나와 친해진 이후로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꼭 영화를 보자고 징징댔었다. 체육 시간 때 혼자 빨빨대며 뛰어다니고, 시험

기간만 되면 모든 애들에게 둘러싸이던 그의 모습은 어느 순간부턴가 나에게 낯선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태와 가까워졌고, 그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을 느끼게 되었다.

혼자 추억에 잠겨서 얼굴까지 빨개지는 게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어떤 대답을 할지 망설였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까지 혼자 대답을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이태는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마지못해 내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나는 구부정히 고개를 숙여 폰만 바라보던 중, 생각지 못한

그의 재촉에 흠칫 놀라 몸을 뻣뻣이 세웠다.

[ 그랭ㅇ ]

떨리는 손끝으로 급하게 쓰다보니 의도치 않게 밝은 분위기의 대답을 해버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 대답을 질질 끌더니 결국 보낸 말이 이 짧은 한마디라는 게 내가 생각해도

우스워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태가 내 옆도 앞도 아닌 뒷자리에 앉아있다는 것.

옆에 앉아있었으면 분명 내 시뻘건 뺨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어댈 게 뻔했다. 다른 사람한텐 몰라도 나한테만큼은 감정에 솔직한 어린애 같으니까….

수업은 예상대로 꽉 채워서 끝났다. 나는 한 시간이 어떻게 흐른 건지 모를 정도로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강의실에 졸고 있던 학생들은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책상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진아, 가자.”

“어? 어…. 영화 예매했어?”

“예매? 너네 집에서 보려고 했는데?”

“…….”

우리 집?

입을 떡 벌린 채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건 만화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딱 지금 내

표정이 그 장면에 나오는 캐릭터 같았다. 나는 책상 위에 무의미하게 쌓아둔 교양책들을

가방에 쑤셔 넣으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엇나간 시선으로 이태 쪽을 바라보며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내뱉었다. 누가 봐도 당황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입꼬리가

어색하게 씰룩거렸다.

나는 이태가 사람이 많은 영화관보다 조용한 집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걸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버렸다. 게다가 이태네 집도 아니고, 우리 집에서

보겠다니….

아까 잠에서 깨자마자 급하게 뛰쳐나와 뒷정리도 제대로 못 하고 나온 물건들이 머릿속을

더 어지럽혔다. 그 러브젤을 어디다 놨더라? 전에 쓰다 남은 콘돔 박스는? 현우 형이 샀던

성인용품이 우리 집 어딘가에 굴러다닐 수도 있을 텐데? 혹시라도 아까 바닥을 제대로 안

닦아서 정체 모를 액체가 묻어있다면….

불그스름했던 얼굴빛은 한순간에 사색이 되어버렸다. 자취방에 부모님이 계신다는

핑계는 말도 안 되는 거고, 어쩔 수 없이 뻔한 이유를 주절대기 시작했다.

“근데… 우리 집 엄청 더러울 텐데.”

“…대충 앉을 곳만 있으면 되는데.”

“진짜 엄청 더러워서 그래. 내가 너네 집으로 가면 안 돼?”

“…그럼 그럴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제서야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농구부에 들 만큼 체육을

좋아했던 이태는, 처음 부서를 정할 때 영화 감상부와 농구부를 두고 고민할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극과 극의 취미지만 둘 다 각각 다른 매력이 있다나 뭐라나. 사실

나는 그를 동경하고 그와 더 가까이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많은 부서들 중 농구부를

들었었다. 대충 시간만 때우는 독서부를 택할까 고민도 했지만, 체육 시간에 그의

덩크슛을 본 게 잘못이었다. 그를 따라 농구부에 들어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봤었다.

덕분에 저질 체력에서 벗어날 순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경기를 뛰어보지

못했다는 건 평생 묻어갈 비밀이다.

어둑해진 하늘에 가로등 불빛이 내리막길 전체를 밝게 비췄다. 나는 이태 옆을 나란히

걸어가며 생각보다 막힘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의식의 흐름이었지만, 보고 싶은

영화부터 오늘 어떤 술을 사 갈지, 맥주는 어떤 맥주를 좋아하는지까지. 정말

쓸데없으면서도 일상적인 대화였다. 현우 형과는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자주 했던 것

같은데 현우 형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런 얘길 나누는 건 언제적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다. 현우 형과 할 법한 대화를 이태와 하고 있는 것도 신기한데,

아까까지만 해도 마음에 걸렸던 현우 형과의 일들이 점점 잊히고 있었다. 어이없고

웃기면서도 나는 참 이기적이구나. 순간 이런 이기적인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학교 정문에서 이태의 자취방까지는 불과 10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비록 수업이 있던

건물에서부터 학교 정문까지가 6분 좀 넘는 거리였지만, 이태와 한참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보니 정문까지는 순식간에 내려온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태의 눈을 쳐다보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게다가 오늘 그를 반찬 삼아 한 행위 때문에라도 더더욱 눈 마주치는

게 힘들어야 했는데 오늘은 나름대로 떨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아마 날이 어두워

이태에게 내 얼굴이 잘 안 보일 거라는 생각 때문일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남 눈치 안 보고 웃어본 게 얼마 만이더라….

“…어.”

기쁨도 잠시, 타이밍도 아주 기가 막히게 떨어졌다. 아무리 봐도 익숙한 얼굴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확인했고,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라는 확신에 빠른 속도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형이 왜 여기 있지? 오늘 알바 하는 날인가? 저 정장 차림은 또 뭐야….

순간 형이 왜 여기 있는지 혼자 많은 추측을 하느라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이태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있는 걸 봤을 때 아직 현우 형을 못 본 것 같았다. 현우

형은 건물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익숙한 담배 향과 평소 형이 기분 내킬 때만

뿌렸던 향수의 시원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가로등이 멀찍한 곳에 세워진 골목길이라

그가 입고 있는 정장색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짙은 남색이거나 깔끔한 검은색

슈트처럼 보였다. 형도 건물 사이 벽 쪽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날 보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지나가면 됐을 텐데, 나는 속에 묵혀둔 찝찝함을

씻어내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 인사를 받아준다면 그래도 가끔 힘들 때마다 현우

형에게 전화를 걸 수 있지 않을까, 형과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친한 사이로 남길 바랐다.

“형…. 여기서 뭐 해요?”

“…어. 이제 알바 가려고.”

형은 나와 눈이 마주친 후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생각도 못한 사람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거 같았다. 길 가다 말고 우뚝 서서

갑작스러운 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내가 생각해도 웃긴 상황이었다. 형의 당황한 표정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살짝 굳은 얼굴로 변해버렸다. 평소 보지 못한 그의 낯선 반응에 나는

어색함이 가득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작게 인사했다.

“잘가요.”

“그래…. 너도.”

당황해서 그런 걸 거야.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이 찝찝함을 떨치려 먼저 입을 연 거였는데, 오히려 더 생각이 많아졌다. 형과 짧고

무미건조한 인사를 끝낸 후 자취방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느릿하고

무거워진 발걸음. 이태도 나와 현우 형 사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지, 조용히 내 걸음

속도에 발을 맞출 뿐이었다.

어느새 편의점 앞까지 도착한 나는,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이태에게로

옮겼다.

“내가 술이랑 먹을 거 사 갈 테니까 집에 가서 준비하고 있어.”

“그럼 나 먼저 가서 설거지 좀 해놓을게. 영화도 준비해놓고.”

지금쯤 ‘같이 들렀다 가자.’라든가, ‘현우 형이랑 무슨 일 있어?’ 같은 말을 물어볼 법도

한데, 이태는 일부러라도 날 혼자 두려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혼자 이 어질러진

관계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이던 그는, 갈색 가죽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여줬다.

그리고는 무거운 걸음으로 편의점에 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회색 바구니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어딘가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편의점을 두 바퀴, 세 바퀴 돌며 이것저것 담아댔다. 딱히 무슨 음식을 할지,

이태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막 담다 보니 바구니는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져 있었다. 나는 그 묵직한 바구니를 두 손으로 겨우 들어 카운터 위로 올려놨다.

“십일만팔천삼백 원이요.”

생각보다 많이 나온 가격에 정신이 번쩍 트이는 것 같았다. 이태가 쥐여준 카드를 빤히

바라보며 짧은 생각에 잠긴 끝에, 나는 가방에 처박혀있던 지갑을 꺼냈다.

계산을 끝내고도 그 많은 물건들을 봉투에 옮겨 담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은 무슨….

나는 작게 투덜거리며 무거운 봉투를 양손에 들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편의점 바로

앞에는 금방 짓밟아 끈듯한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었다. 쾌쾌하면서도 꿉꿉하게 풍기는

독한 담배 냄새에 기침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아직 이태의 담배 냄새까지 알아챌

정도로 많이 맡아본 건 아니었지만, 왠지 이 담배꽁초의 주인은 강이태일 것만 같았다.

“…5분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짐을 편의점 앞 파라솔 테이블에 잠시 내려놓고 플라스틱 의자에

피곤한 몸을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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