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한결 따뜻해진 바람과 적당한 온도. 해가 졌는데도 따뜻한 걸 보면 확실히 6월에 가까워진
것 같다. 뜨겁게 타들어 가고 있는 담배 끝에선 커피 향이 뒤섞인 오묘한 담배 향이 회색
연기를 타고 널리 퍼져나갔다. 하진은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점점 더
어두워지는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더 답답했다, 하진은 미간을 잔뜩 구기며 피우고 있던 담배를 테이블 위에
얹어진 페트병 안으로 빠트렸다. 500ml 페트병의 반을 채우고 있던 물에 담배꽁초가 젖어
불씨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혼자 3인용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던 하진은, 괜히
코를 훌쩍거리며 자신의 어깨 부근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옷에 벤 담배 냄새의
쾌쾌함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짐을 손에 쥐려던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우렁찬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르는 번호.
하진은 짧은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진은 익숙한
기계음이 통신사 이름을 말한다면 곧바로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통화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들리는 거라곤 미세하게 들려오는 시끄러운 잡음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이며 웃고 떠드는 소리와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 하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살짝 떨어트렸다. 5초 정도 지났을까, 그는
장난 전화겠지 싶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 했다.
― …유하진.
익숙한 목소리였다. 분명 익숙한 목소리인데…. 이렇게 가라앉은 톤으로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건 하진에게 낯설었다.
“형? 핸드폰 바꿨어요?”
― 아니. 핸드폰 두고 나와서 친구한테 빌렸어.
“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어색한 기류가 핸드폰을 타고 전해졌다. 하진은
아랫입술을 질근 씹으며 현우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하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현우가 먼저 말을 이었다.
― 전화로 이런 말 하는 거 자체가 진짜 별로라는 거 나도 잘 아는데….
…지금 이렇게라도 말 안 하면 내가 진짜 후회할 거 같아서 전화했어.
현우의 말에 하진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골랐다. 어둑해진 하늘에
멈춰있던 그의 시선은 페트병 안에 잠겨버린 담배꽁초에 머물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형…. 지금 저 일부러 긴장시키려는 거예요? 불안하게….”
하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 섞인 대답을 내뱉었다. 긴장감이 뒤섞인 표정에
목소리에서만큼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 옆에 강이태 있어? …아니다. 옆에 있어도 그냥 가만히 듣기만이라도 해줘.
“…없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요.”
시끄러운 잡음 사이로 꽤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런 현우의 행동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 하진을 더 떨리게 만들었다. 하진은 앉아있던 플라스틱 의자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현우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 아… 그게….
현우는 자신 있게 전화 걸었던 것에 비해 1분가량 ‘그러니까’,‘그게 있잖아.’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 궁금해진 하진이 그의 말을 가로채 되물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 내가 너한테 첫사랑을 잊게 해주겠다고 말했던 거. 그냥 너랑 어떻게든 가까워지려고
뱉어본 말이었어.
“…….”
짜인 대본을 그대로 읊는 듯, 현우는 딱딱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통화를 하게 되면
하진에게 어떤 말을 해야 될지 미리 메모지에 적어놓은 것 같았다.
― 그러니까…. 나 너 좋아한다고.
“…….”
아무런 리액션도 없는 하진의 반응에 안 되겠다 싶었는지, 현우는 생각나는 말을 줄줄이
내뱉기 시작했다.
― 내가 이 말 하려고 진짜… 얼마나 돌아온 줄 아냐?
…갑자기 생각도 못한 놈이 끼어들었으니 내가 빡치지 않겠어? 힘든 애 달래놨는데 이제
와서….
현우는 진심으로 억울한 듯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게다가
일까지 하고 있던 거였는지, 누군가 ‘장현우!’라고 크게 외쳤고, 현우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하진은 아무 대답 없이 현우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통화 시간은 3분, 5분. 점점 늘어갔고, 간결하게 끝날 것 같았던 사랑 고백은
그동안 쌓여있던 자신의 감정을 하진에게 푸는 꼴이 되어버렸다.
― 미안. 내 할 말만 해버렸네.
“형….”
― 대답하라는 건 아니니까….
“현우 형, 저는….”
현우는 계속해서 하진의 대답을 회피하려 했다. 최대한 다른 주제로 이끌려 했고, 대답을
안 해도 된다는 말로 무마시켰다. 하진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으로 플라스틱 간이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쳤다. 그 소리는 핸드폰 너머 현우에게까지 들렸고,
얘기하던 현우의 말소리도 멈췄다. 갑자기 울려 퍼진 큰 소음에 편의점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도 일제히 하진 쪽을 쳐다봤다.
“전… 형한테 거짓말했어요. 잊었다 해놓고….
지금 생각해보면 이태를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하진에게 숨기듯 얕게 내뱉은 현우의 한숨 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하진의 귓가에
맴돌았다.
― …나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 알고 있던 사실이긴 한데….
현우의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하진은 입술을 질근 씹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 야, 할 말 다해놓고 이제 와서 미안할 게 뭐 있냐? 강이태 그 새끼 너 좋아하는 거
확실하니까 이번엔 피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현우 형.”
― 등신같이 또 혼자 질질 짜면서 도망가지 말고.
“제가 언제 질질 짰다고….”
― …그리고 그 새끼랑 헤어지면 나한테 연락해.
“…저희 안 사귀어요. 아직 고백도 안 했는데….”
― 그러니까 지금 당장 강이태한테 고백하라고! 답답한 새끼야!! 너 아까 강이태랑 어디
가는 거 같던데, 어?!
현우는 버럭 소리치며 차분하게 다듬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었다. 그리고는
검은색 앞치마 앞주머니에 들어있던 담뱃갑을 꺼내 들고 밖으로 향했다.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 사이로 현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비상구 철문을 닫아버렸다. 생각보다 하진과의 대화는 잘 마무리되었고, 현우의
인사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겨버렸다.
15분 32초. 이렇게 오랫동안 전화할 생각은 없었는데, 딱히 고백을 한 이유가 긍정적인
대답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면서.
그는 시멘트가 울퉁불퉁하게 발린 건물 벽면에 몸을 기댔고, 담배를 문 채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금쯤 발견되고도 남았을 라이터가 눈에 띄지 않자 현우는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일하면서 들리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웃는
소리가 오늘따라 현우를 괴롭혔다.
***
습관처럼 도어록 버튼을 누르던 하진은, 멍한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태가 문을 열어줬고, 이태는 밝은 표정을 띠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와…. 이게 뭐야?”
새하얀 벽면엔 마치 간이 영화관이라도 설치한 듯 푸른빛 조명이 비쳐 있었고, 깔끔한
나무재질의 테이블 위엔 와인과 곁들여 먹어야 할 것 같은 음식들이 놓여있었다. 비싸
보이는 치즈와 크래커, 유명한 베이커리의 초콜릿 케이크까지. 이태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하진은 붉어진 얼굴을 살짝 숙이며 이태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 어딘가 어색한 모습이
이태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연기력은 또 어찌나 서툰지, 누가
봐도 의심할 수밖에 없이 어설프게 행동했다. 이태는 혼자 밝은 척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
하진의 말을 흘려듣는 것 같았다. 그저 유심히, 그의 행동을 관찰하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진은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짐을 두 손으로 들어 식탁 위에 얹었다. 비닐봉지 한가득
들어있던 과자와 술들이 무게에 못 이기고 와르르 쏟아졌다. 편의점에서 자취방까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일로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그래도 분위기를 깨긴
싫었는지, 방 안을 휘젓고 다니며 이것저것 이태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태는 그런
하진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더니, 뭔가 눈치챈 듯 조용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정리하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넌 걱정 말고 씻고 와.”
이태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하진은 괜히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붉어진 눈시울을
감췄다. 괜찮다고 말하는 하진의 등을 양손으로 밀며 욕실 안까지 데려다줬고, 거의
반강제로 욕실문을 닫아버렸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법도 한데, 자기한테
캐묻지 않고 쉴 시간을 내주는 이태가 하진에겐 고맙게 느껴졌다.
비교적 조용하고 밀폐된 욕실 안으로 들어오자 적적했던 마음이 더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진은 양쪽 손바닥을 펼쳐 짝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뺨을 세게 쳤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던 것 같은데….
묘하게 과거와 겹치는 상황이 마치 데자뷔라도 겪는 것 같았다. 하진은 일부러
수도꼭지를 맨 오른쪽으로 돌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얼음장만큼 차가운
물이 뜨겁고 울긋불긋한 얼굴에 닿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누군가를 위해 방을 깔끔히 정리하고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테이블보까지 꺼내 음식을
세팅하는 건 이태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본가를 나와 혼자 사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필요 없는 물건까지 사다보니 쌓아둔 박스만 어느새 두 박스가 넘었다.
욕실에서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려오자 이태는 기다렸다는 듯 식탁 위에 쏟아진
안줏거리와 술을 냉장고 안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빔
프로젝트가 작동하는 소리. 시끄럽다면 시끄러워야 할 방 안이 왜인지 모르게 이태에겐
공허하게 느껴졌다.
달칵하고 열린 욕실 문소리에 살짝 굳어있던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듯, 이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진에게 하얀색 가운을 건네며 말했다.
“영화는 내가 골랐는데, 괜찮지?”
“뭘 골랐길래 그래?”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아낸 하진은, 이태가 아무렇지 않게 건네준 하얀색 가운을
멍하니 쳐다봤다.
“…보통 자취방에 가운이 있나?”
“나도 잘 안 입긴 하지.”
“하긴…. 너네 집에 와인 오프너도 있는데 뭐….”
하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가운을 가볍게 걸쳤다. 차가운 물을 온몸에 들이부은
건지, 하진은 덜덜 떨었다. 그리고는 의자에 얹어진 두꺼운 담요를 몸에 둘렀다.
“넌 맥주 마실 거지?”
“내가 사온 거 맥주밖에 없지 않아?”
“저번에 보드카 남긴 거 마시려고. 한잔 줄까?”
“독한 거 아냐…?”
이태는 하진의 물음에 아무 대답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술 종류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하진도 병 디자인만 보면 알 법한 유명한 보드카였다. 편의점
가판대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보드카. 그는 투명한 유리컵에 얼음
서너 개를 털어 넣고 냉장고 안에서 과일 주스를 꺼내 보드카와 적당히 섞었다. 하진은 방
한가운데에 앉아 부엌에서 열심히 술을 제조 중인 이태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
뒷모습이 마치 바텐더만큼이나 능숙해 보였다.
가만히 앉아 턱을 괸 채 말없이 이태를 바라보던 하진은, 괜히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이 영화.”
“본 적 있어? 나는 네 번째 보는 건데. 진짜 재밌게 봤거든.”
“언제 봤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넌 예전부터 이런 영화 엄청 좋아하더라. 잔잔하고
슬픈 거.”
“내 취향 어디 가겠냐?”
그는 장난스레 하진의 말을 받아치며 술잔을 들고 하진의 옆에 앉았다. 침대와 책상으로
들어 차 있는 원룸에 접이식 테이블까지 펼쳤으니, 다 큰 남성 두 명이 나란히 앉기에는
살짝 좁아 보였다. 그가 건네주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다소 뻣뻣하게 행동하는
하진이 이태의 눈엔 어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태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하진의
앞에 있던 노트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까보다 더 가까워진 간격에 하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슬쩍 몸을 옆으로 빗겼다. 이태는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팔을 뻗어 방
전체의 불을 꺼버렸다.
큼직한 창문을 덮고 있는 암막 커튼 덕분에 방 안은 진짜 영화관에 온 것처럼 깜깜해졌다.
보이는 거라곤 빔 프로젝트에 반사되어 어렴풋이 보이는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었다.
하진은 손에 들린 보드카를 한 모금 홀짝 들이켰고, 생각보다 달달한 주스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태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맛있지.”
“…완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이내 눈을 잔뜩 빛내며 이태를 바라봤다. 얼굴이 가깝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하진은 얼른 고개를 스크린 쪽으로 돌려버렸다.
“영화… 시작한다.”
***
분명 이 영화를 봤던 기억은 있는데, 언제 봤더라….
줄거리를 다 아는 건 아니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영화 같았다. 장면이 넘어갈 때마다
익숙한 기분이 들었고, 이 다음 장면에 어떤 대사를 할지 예상할 수 있는 정도였다. 조용한
방 안에 들리는 소리라곤 영화 대사밖에 없어서 그런지, 대사 하나하나 마음속 깊이 와
닿았다. 실어증에 걸린 남자가 오랜만에 만나는 첫사랑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흔하면서도 잔잔하고 슬픈 줄거리였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본 적 있다고
생각했는데, 슬픈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가까스로 눈물샘을 잠갔다. 처음 봤을 때도 이
정도로 슬펐나 싶었지만, 그땐 다른 일을 하며 봤던 건지 운 기억이 없었다.
나는 옆에 앉아있는 이태를 흘끗 쳐다봤다. 그는 딱히 슬픈 기색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비워내고 있었다.
차라리 울고 있었으면 나도 맘 편히 울고 말았을 텐데….
괜히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술을 원샷 했다. 어두워 술의 색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맛으로 봤을 땐 진한 오렌지 맛이었다. 달달하면서도 끝 맛에 알코올
향이 살짝 풍겼다. 내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이태는 빈 내 잔을 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냉장고 안에 넣어뒀던 보드카와 주스를 병째 꺼내왔다.
날 계속 신경 쓰고 있었나?
이런 생각을 한번 하기 시작하면 영화는커녕 뇌가 멈춘 것처럼 한가지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나오려던 눈물까지 쏙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태는 내 앞에 놓여있던 빈 잔을 자기
쪽으로 가져가 다시 한번 술을 섞었다. 어둡지도 않은지, 아까와 똑같은 비율로 정확하게
섞어 꽉 채워진 술잔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입 모양으로 ‘고마워.’라고 말하고는 채워진
잔을 조금씩 들이켰다.
언제 말하지.
어느새 그 슬픈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었고, 내 눈은 스크린과 이태를 번갈아
보느라 바빴다. 잔 가득 채워져 있던 술은 10분도 채 안돼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급한
성격은 절대 아니었지만, 한번 생각한 계획은 한시라도 빨리 실천해야 했다.
현우 형이 말한 대로 예전처럼 도망치지 않고 차이는 한이 있더라도 고백은 해야 돼.
…그래. 영화 끝나고 말하자.
계속해서 힐끗거리던 걸 눈치챈 건지, 이태는 영상을 멈추고 불을 켰다.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혼자 찔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안의 모든 연기력을
발휘해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한참 재밌을 때….”
“아니. 술도 마저 마시고 케이크도 꺼내놨는데 영화 때문에 하나도 못 먹고 있잖아. 30분
정도만 있다가 마저 보자.”
그는 내 손에 들린 잔에 건배했고, 꽤 많이 남아있던 술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VIP 영화관
못지않았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포장마차 분위기로 바뀌어버렸고 이태의 바텐더
못지않은 알코올 제조 실력도 엿볼 수 있었다. 오랜지 주스와 보드카가 섞인 술은, 달달한
맛 때문인지 석 잔, 넉 잔째 빠르게 잔을 비워냈다. 초콜릿의 진득한 맛이 층마다 배어
있는 케이크와 보드카는 의외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술을 마시는 동안 분명 어색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태는 지금 본 영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냈다. 영화의
초반부까지는 정확히 기억났지만, 중반부로 접어들 때쯤 내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나는 생각나는 줄거리를 되짚어보며 그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다섯 잔 정도 마셨을까, 눈앞이 어질한 느낌에 마시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아까부터
혀가 살짝 마비된 것처럼 꼬였었는데, 보드카의 단맛에 취해 별 생각 없이 잔을
비워버렸다. 한참 얘기 중이던 이태는 내 풀린 눈을 보고 눈치챈 듯 내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구석으로 치우며 말했다.
“너 그만 마셔야겠다. 지금 취했어….”
“그런가….”
“…뭐가 ‘그런가’야? 너 나중에 또 기억 안 난다고 할 거잖아.”
“안 돼….”
아마 여섯 잔째 알코올을 몸속에 부어버렸다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다음날 필름이
끊겨버렸을 것이다. 하진은 아까보다 느려진 말투로 아주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번엔 꼭 기억해야 해. 중요한 말할 거니까…. 너도 잘 들어.”
하진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눈썹에 힘을 주며 이태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