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7회 -
지금까지는 사람들의 반응, 그들이 입 밖으로 내뱉는 말, 좀비의 행동마저도 자신이 알던 것과 똑같았기에 침착할 수 있었다. 그저 리얼한 꿈을 한 번 더 꾸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바뀌었어.’
3분 남짓의 변화.
‘고작’이라는 단어를 붙여줄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래가 명백히 바뀌었다.
‘왜? 어째서? 뭐 때문에?’
해결책까지 다다랐던 성공적인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려던 준성이었기에, 이런 작은 변화마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뭔가 다른 짓을 했기에 변화한 거라면 상관없지만, 최대한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데 이처럼 변수가 생겨버렸다. 그것도 가장 조심해야 하는 첫날에.
‘내 탓인가?’
망할 현실감 때문에 좀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해, 건물에 진입하는 시간이 지체되었다. 몇 분밖에 안 되는 시간이지만, 그 오차가 미래에 변화를 가져온 건 아닐까.
좀비를 맞닥뜨린 것과는 또 다른 두려움이 엄습했다. 자신이 행하는 아주 작은 행위조차 이처럼 미래를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괴로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어떨지 알기에 침착하고 냉정할 수 있었다. 두려움이 몰려와도 게임이나 꿈에 빗대서 쉽게 억누르는 것도 가능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굉장한 힘을 주고 있었다.
그랬는데, 벌써부터 이런 변수가 생겨서 미래가 바뀌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루트로 나아가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이 두 달간의 꿈에서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길로.
준성은 갑자기 몰려오는 극도의 불안감에, 마체테조차 툭 떨어트리고서 두 팔을 감싸 웅크렸다.
‘침착해. 괜찮아.’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짧고 굵은 두 문장만 연신 되뇌었다.
그렇게 1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준성은 한층 침착해진 얼굴로 눈을 떴다.
‘변수가 있긴 해도 큰 영향은 아니야. 할 수 있어.’
알람 소리가 늦어진 덕분에 살 수 있었고, 이 정도의 변수만으로 이후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보긴 어려웠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똑같아.’
변수가 있든 없든, 동생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데엔 변함이 없다.
생각을 다 정리했을 즈음.
밖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핏 괴성이 들리긴 하지만, 그건 아직까지 우렁찬 알람을 울려대고 있는 강의실 쪽에서 나는 것이라서 그리 가깝진 않다.
준성은 바닥에 떨어뜨렸던 마체테를 쥐고서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잠시간 바깥의 소리에 집중하던 준성은 천천히 문을 열어보았다.
작게 열린 문틈으로 복도의 상황을 체크해 보았다. 3분의 오차만 아니라면 꿈과 완전히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무도 없다. 머리를 문밖으로 내밀어서 여전히 알람이 울리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복도의 가장 끝.
문이 활짝 열린 대강의실 안에서 쩌렁쩌렁한 알람과 함께 수많은 좀비가 내는 괴성이 들렸다. 이 정도 소리라면 2층과 계단뿐만 아니라 1층과 3층의 좀비들 일부도 모두 끌어들였을 게 분명했다.
준성은 3층에 올라설 때까지 좀비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신중하고 조용히 움직였다. 다행히 어떤 좀비도 맞닥뜨리지 않은 채 3층 계단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때.
여전히 알람이 크게 울리는 강의실에서 누군가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준성이 숨었던 교수실의 반쯤 열린 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2층에서 울려 퍼진 알람 소리를 들은 건 준성과 좀비들뿐만이 아니었다.
“가, 갑자기 뭐야?!”
대걸레의 머리 부분을 뗀 플라스틱 자루로 좀비를 밀어내고 있던 지우가 알람 소리에 놀라서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 탓에 긴 빗자루를 지우처럼 가로로 들고 서서 함께 좀비를 막고 있던 소연이 일순 휘청했다.
“야…!”
소연이 지우에게 화를 내려던 찰나, 무게를 실은 좀비의 피칠갑 된 이빨이 그녀의 코앞에서 딱딱 소리를 냈다.
퍽!
수박 같은 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맞으면서 밀려난 좀비에게 채이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뾰족한 막대 끝으로 좀비의 눈을 노렸다.
키악!
눈을 깊이 찔린 좀비가 괴성과 함께 몸을 삐걱거렸다. 눈을 찌르면서 뇌를 건드린 듯했지만 완전히 손상된 건 아닌지, 아직 움직이고 있다.
채이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좀비를 쓰러뜨렸고, 머리를 노리며 위에서 아래로 체중을 실어 내리찍었다.
서 있는 채로 그냥 찔렀다면 단단한 두개골까지 뚫기가 어려웠을 테지만, 눕혀놓고 체중을 실어 내리찍으니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막대 끝이 깊이 파고들었다. 덕분에 퍼득거리던 좀비가 금세 동작을 멈췄다.
좀비 때문에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소연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체 대신, 그의 머리에 막대를 박아넣은 채이를 바라보았다.
채이는 소연과 지우에게 차가운 일침을 가했다.
“정신 바짝 차려. 까딱하면 우리 다 죽어.”
“으응….”
시체 머리에서 두 손으로 막대를 빼내기 위해 힘을 쓰는 채이에게 소연이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들리던 알람 소리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이 소리, 뭐지?”
“나도 몰라. 하지만 덕분에 조교실 앞에 있던 좀비들도 전부 가버렸어.”
소리가 날 때 이미 자신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던 이 좀비만 빼고 말이다.
저마다 좀비들의 피로 얼룩덜룩해진 세 사람은 갑자기 들린 알람에 놀라긴 했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가 기회라고.
좀비의 머리통에서 도통 막대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아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지우가 함께 자루 끝을 붙잡아 당겼다. 안 빠지면 그냥 두고 가자고 할 법도 하건만, 지우가 웬일로 채이를 도왔다.
“빨리 가자. 언제 음악 끊길지 모르잖아. 끊기면 여기까지 또 쫓아올 거 아냐.”
지우는 좀비를 끝장낸 채이의 이 막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언제 또 좀비가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뭉툭하고 쓸모없는 대걸레나 빗자루보다야 이 무기가 훨씬 낫다. 물론 침착하게 좀비를 상대한 강채이도.
다급한 표정의 지우가 채이와 호흡을 맞춰 힘을 내준 덕분에 막대가 단번에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도 내심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지우가 대걸레 자루를 쥐고서 채이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안경에 묻은 피를 옷에 슥슥 닦아낸 소연도 손에 들고 있던 긴 빗자루를 언제든 휘두를 수 있도록 고쳐 쥐었다.
세 사람은 텅 비어버린 복도를 걸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흐어- 크어어-
굳은 얼굴로 걸음만 빠르게 해서 조교실로 향하던 세 사람이 동시에 멈칫했다.
괴로운 신음 같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들이 지금 막 지나친 강의실 문 너머에서였다.
마른침을 삼킨 채이가 강의실 문을 바라보았다. 너무 많은 피가 묻어서 원래의 색이 상아색인지 붉은색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을 것 같은 문 너머에는 아무도 보이는 이가 없었다.
그 문의 바닥 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은 건, 너무 겁먹은 나머지 오들오들 떨고 있던 지우였다.
“저, 저거……!”
지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본 채이와 소연은 흠칫 놀라며 숨을 멈췄다.
누가 잡아 뜯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가 거칠게 절단되어 있는 상체뿐인 좀비가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허리 아래로는 내장조각이 붙은 척추뼈 일부가 한 뼘 정도 튀어나와 질질 끌리고 있었고, 지나간 곳마다 흥건한 피와 살점들이 묻어나서 이동 경로까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체를 잃어버린 좀비는 알람 소리를 들었음에도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세 사람은 이때껏 맞닥뜨린 좀비들로 인해 어느 정도 파악한 게 있었다.
좀비들은 분명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검붉은 피막이 둘러싼 짧은 시야 안에 들어가 버리면 소리고 뭐고 할 거 없이 상대에게 무섭게 달려들어 버린다. 이땐 주변에서 아무리 큰 소리가 나더라도 시야에 있는 인간을 공격하는 게 최우선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이제야 강의실을 기어 나온 상체뿐인 이 좀비가 세 사람을 보며 한층 강한 괴성을 질렀다.
키아아악!
“우아아악!”
함께 비명을 질러버린 지우가 얼마 멀지 않은 조교실을 향해 뛰었다. 그의 다급한 발소리와 비명, 그리고 좀비의 괴성이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다.
채이는 막대를 들고 좀비의 머리를 내리찍으려 했지만, 그가 무서울 정도로 머리를 마구 흔들며 기어오는 바람에 막대 끝은 번번이 맨바닥을 찔러댔다.
게다가 좀비는 이때껏 두 팔로 기어서 강의실을 휘저을 정도로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뾰족한 막대에 귀가 찔려 뜯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채이의 발목을 우악스럽게 잡아버렸다.
“채이야!”
어쩔 줄 몰라 하던 소연이 좀비의 머리를 빗자루로 마구 내리쳤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채이는 좀비가 입을 쩍 벌리며 자신의 발목을 물려는 것을 보며, 잡히지 않은 다른 쪽 다리로 그 머리를 축구공 차듯이 세게 차버렸다. 차인 목 어딘가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좀비는 여전히 움직였고 난폭했다.
따닥, 딱- 따다닥!
치아를 부서뜨릴 듯한 무서운 소리가 채이의 공포심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