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2회 -
“채이야, 내려갈 수 있지?”
채이는 준성에게 받아든 올가미를 쥐고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채이는 준성의 이 침착함과 준비성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게임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든든한 오빠였던가.
요즘 게임들이 워낙 현실처럼 잘 되어 있다는 얘기도 있으니, 혹시 이런 종류의 재난 게임이라도 몰두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 가장 믿을만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채이는 말없이 올가미에 다리를 넣었다. 그걸 본 지우가 손사래를 쳤다.
“야야, 진짜 하게?”
“해야지. 클라이밍 할 때 썼던 로프 장치랑 별 차이 없을 것 같은데.”
“그건 안전장치까지 다 있었잖아! 이거랑은 차원이 다르거든?!”
사회체육학과 수업의 일환으로 클라이밍 체험도 했었던 채이는, 도저히 이런 건 못 하겠다며 언성을 높이는 지우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너 혼자 남아서 좀비랑 같이 굶어 죽든가.”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지우가 소리치는 와중에도 올가미를 두 개씩 잡아서 좌우에 다리를 하나씩 넣은 채이는 준성의 도움을 받아 사타구니까지 로프를 끌어올렸다.
“다른 안전장치는 없으니까 여기 로프의 매듭 부분 위를 손으로 꽉 잡아야 해. 안 그러면 뒤집혀서 떨어져.”
“응, 걱정 마.”
채이는 준성의 말에 순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팍 정도까지 올라오는 로프의 동그란 매듭 위를 잡으며 긴장한 얼굴을 했다.
채이의 머리 위로 준성의 장갑 낀 손이 얹어졌다.
“괜찮아, 무사히 잘 내려갈 거야.”
꿈에서도 그랬으니까.
채이의 사타구니에 끼워진 올가미의 튼튼함을 점검한 준성이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3층에서 내려다본 아래쪽에는 여전히 다수의 좀비가 있었다.
“이쪽도 그리 안전해 보이진 않는데.”
한서의 말에 준성이 대꾸했다.
“잠깐이지만 안전하게 만들 방법이 있지.”
준성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검지만 한 호신용 경보기 한 대를 꺼내 들었다.
“이걸 켜서 좀비들을 유인할 거야.”
2층에서 자신을 도와준 알람과 같은 방법이었다. 소리에 민감한 좀비들을 한 곳에 묶어두기 위해선 역시 이만한 게 없다.
그걸 본 한서가 재밌다는 듯이 짧게 웃었다.
“또라이몽이야? 필요한 게 척척 나오네.”
애니메이션 속의 파랗고 귀가 없는 만능 고양이 로봇이 떠올랐나 보다.
준성은 여유롭게 농담까지 하는 한서가 신기했다. 곧 좀비들이 활보하는 밖으로 나가게 될 판임에도 어떻게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지, 이젠 부럽기까지 할 정도다.
조교실에는 데스크가 있는 언덕 방향의 창문 외에도 옆으로 나 있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조교실의 위치가 한 층의 끝에 자리하다 보니, 옆으로 난 창문이 있는 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준성은 스위치가 되는 경보기의 고리 부분을 잡아 빼 재빨리 본체를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삐-삐-삐-삐-
짧은 박자로 시끄럽게 울리는 경보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사방에서 좀비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경보기가 자동으로 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분.
그 안에 이곳을 탈출해야 했다.
작지만 굉장히 큰 경보음을 듣고 인근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간 덕에 언덕 방향은 아주 말끔해진 상태였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펴봐도 이쪽으로는 좀비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려가면 돼.”
“알았어.”
준성의 말에 짧게 대답한 채이가 창틀에 발을 대었다. 지우와 소연은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에 저들이 더 긴장하고 있었다.
두 발을 바깥으로 둔 채 창틀에 앉은 채이가 문득 생각난 듯이 준성을 돌아보았다. 준성은 채이를 내려주기 위해 한쪽 팔에 로프를 칭칭 감고서 두 손으로 중간 부근을 꽉 붙잡고 있었다. 한쪽 다리는 무턱대고 끌려가서 처박히지 않도록 아예 벽을 밟고 있다.
“오빠는?”
“난 맨 마지막으로 내려갈 거야.”
채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에 내려오는 사람은 오빠처럼 잡아줄 사람도 없잖아. 그냥 줄 잡고 뛰어내려야 한다고.”
“괜찮으니까 먼저 가.”
“싫어, 차라리 내가 마지막에 내려갈래. 오빤 이런 거 해본 적도 없어서 내려오다가 다쳐.”
“강채이.”
준성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단호히 그녀를 불렀다.
“오빠 말 들어라, 응?”
“…….”
다시 조교실 안으로 들어오려고 움직거리던 채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준성이 불안한 건 여전한지, 자꾸만 그를 돌아보았다.
첫 하강은 성공이었다.
로프에 매달린 채이를 최대한 천천히 바닥까지 내려주었다. 별 탈 없이 부드럽게 그녀를 내릴 수 있었던 건 말도 없이 다가와서 함께 줄을 잡아준 한서 덕분이기도 했지만, 꿈에서 겪었던 몇 번의 시행착오 덕이 컸다.
채이가 다친 곳 하나 없이 안전히 내려가자, 그걸 본 지우와 소연도 조금은 불안이 가셨던 모양이다. 순순히 올가미에 다리를 끼워 넣은 채 덜덜 떨면서도 무난히 내려갈 수 있었다.
세 명을 먼저 내려보낸 후, 길게 드리워져 있던 줄을 빠르게 끌어 올렸다. 소연이 무기로 쓸 거라며 챙겨달라고 했던 화장실 빗자루와 지우가 조교실에서 발견한 30cm 정도의 스패너도 창밖으로 떨궈주었다.
남은 건 묵직한 백팩을 멘 준성과 허리에 나무 막대를 걸어둔 한서뿐이었다.
꿈과 똑같이 흘러가고 아무 변수 없이 세 사람을 내려주긴 했지만 준성은 사실 난감한 상태였다.
‘팔이 얼얼하네.’
꿈에서는 감각이 살아있어도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처럼 로프에 세 사람을 실어서 내릴 때도 팔이 좀 삐걱거린다는 느낌 정도만 있을 뿐이었는데, 역시나 현실에선 달랐다. 팔이 얼얼한 수준을 넘어 부러질 것 같았다. 팔에 로프를 휘감아서 무게를 버틴 거라, 이는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탈골을 걱정해야 할 것 같은 어깨를 가볍게 돌려보며 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끌어올린 로프를 가볍게 점검하고 있었다.
‘팔… 부러지거나 탈골되진 않겠지?’
뼈와 근육 무게만 해도 상당할 게 분명한 도한서를 바라보니 한숨이 나올 것 같다.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 내려갈 준비를 하라고 말하려 했다.
“너, 이름이 뭐야?”
로프에 눈을 고정한 채 한서가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싶기도 하고, 그걸 왜 지금처럼 한시바삐 도망쳐야 할 때 묻는 건가 싶기도 했다.
“강준성. 빨리 다리나 끼워.”
“강준성. 강준성….”
준성의 이름을 몇 번 읊어보던 한서가 싱긋 웃으며 그에게 로프를 내밀었다.
“준성아, 먼저 내려가. 내가 잡아줄게.”
한서가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창틀을 툭툭 두드렸다.
준성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이렇게 소름 끼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건 무작정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뭔가의 타겟이 된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함이 때문이었다.
‘이상한 놈.’
이런 상황에 저렇게 여유를 부리고 생글거릴 수 있다니, 성격이 무던한 건지 원래 겁이 없는 건지는 몰라도 너무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계속 신경이 거슬리나 보다.
준성은 내색하지 않고 로프를 턱짓했다.
“됐어. 네가 내려가.”
“흐음, 이름 불러주면 그럴게.”
“뭐?”
분위기 못 읽는 것도 정도가 있지.
준성이 눈가를 꿈틀하자, 한서가 얼굴을 그에게 가까이하며 더욱 진하게 웃었다.
“내 이름 알아?”
입가는 한층 진해졌는데 눈꼬리는 전혀 곡선이 아니었다. 거짓 웃음을 짓고 있는 게 분명한 이 얼굴이 그래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역시나 잘생겼기 때문인가 보다.
‘재수 없는 새끼.’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그 말을 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한서잖아. 이름 불렀으니까 됐지? 빨리 준비해. 시간 없어.”
채이가 부르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쉽게 대답해주니, 그제야 웃지 않던 눈매에 굴곡이 생겼다.
갑자기 한서가 준성의 허리를 붙잡아 번쩍 들었다. 그러더니 대뜸 창틀에 앉혀버렸다. 그것도 두 다리를 안쪽으로 가게끔 앉혀놔서 준성이 깜짝 놀라 옆 창틀을 두 손으로 턱 잡아야 했다. 자칫 삐끗하면 백팩 때문에도 뒤로 무게가 쏠려, 그대로 지면에 추락할 수도 있었다.
위험한 짓을 해놓고 미안하지도 않은지, 한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준성의 두 다리에 올가미를 끼워 올렸다.
“뭐 하는 거야? 이름 불러주면 내려간다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준성이 눈을 치떴다. 한서는 준성의 사타구니 언저리까지 올가미를 올려주고서 그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예상보다 센 힘에 맥없이 끌려간 준성은 졸지에 한서와 끌어안은 꼴이 되었다.
“야.”
“가만히 있어 봐.”
민망한 모양새에 준성이 한서를 밀어내려 하자, 그는 오히려 허리에 팔을 감아 더욱 못 벗어나게 꽉 안아버렸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준성의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 올가미를 끌어올려 고정했다.
이러나저러나, 같은 남자에게 허리를 붙잡혀 끌어안기고 엉덩이 아래까지 의도치 않게 건드려지는 감각이 참 민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