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3)화 (13/240)

- 013회 -

“팔 아프잖아. 얌전히 내려가.”

“그래도 너 하나쯤은 내려줄 수 있거든?”

준성은 사타구니와 엉덩이 아래의 압박감을 느끼며 한서를 밀어내었다. 이번엔 순순히 물러났다.

한서의 행동이 분명한 배려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먼저 내려가 버리면 줄을 천천히 내려줄 사람이 없다. 혼자서 줄 하나를 잡고 알아서 속도를 조절하며 내려와야 하는 고난도 하강이라, 자칫하면 그대로 추락해서 크게 다칠 수 있었다. 준성 역시 꿈속에서는 고통이 없었기에 겁도 없이 마구 떨어지며 익힐 수 있었던 거지, 현실이라면 절대 엄두도 못 냈을 거다.

올가미를 풀려고 허벅지 위쪽의 로프를 잡으니, 한서가 그 팔을 꽉 쥐어 떼어냈다. 하필 그 팔이 로프를 몇 겹이나 감아서 당기고 풀던 쪽이라, 갑작스럽게 큰 손아귀에 잡혀 눌리니 근육이 아프다며 아우성이었다.

준성이 아파서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본 한서가 손에서 힘을 빼주었다.

“거봐, 살짝 잡았는데도 아파하잖아.”

“이게 어디가 살짝이냐?”

“내 기준으론 굉장히 살짝인데.”

친근하게 대꾸한 한서가 준성과 연결된 로프를 제 팔에 감았다. 준성이 하던 걸 그대로 따라 한 한서가 캐비닛에 기대어 서며 물었다.

“10분이라고 했지? 시간 얼마 안 남았겠네.”

홀로 천하태평인 한서의 말에 시계를 확인한 준성은 결국 석연찮은 얼굴로 창틀에 앉았다. 무게를 줄여주기 위해 백팩도 벗어서 창틀 아래에 두었다. 한서는 백팩을 직접 들어보더니, ‘군장도 이것보단 안 무겁겠는걸’이라며 준성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준성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틀에 걸터앉았다. 백팩이 없으니 확실히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두 다리를 밖으로 둔 채 로프를 손에 잡은 준성이 불안한 눈으로 한서를 돌아보았다. 한서는 벌써 로프를 팽팽히 잡아주고 있을 정도로 이상하게 의욕적이었다.

“말해두는데, 무겁다.”

“아니던데.”

“가방 때문에 착각하는 거야. 진짜 무거워.”

“가방까지 해서 그 무게면 아무리 생각해도 가벼운데.”

“시비 거는 거야?”

“원하면 진짜 걸어주고.”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은 덕분에 불안감이 좀 사그라졌다. 픽 웃은 준성이 로프를 꽉 잡았다.

“내려간다.”

내려가는 걸 누가 잡아주는 건 처음이라서 역시나 떨리긴 했다. 그래도 꿈속에서는 로프 한 줄 붙잡고 특전사 못지않게 하강하던 사람이었는데.

꿈속의 자신을 떠올려본 준성이 자세를 잡고서 창틀 밖으로 내려갔다.

불안했던 마음과 달리 한서는 혼자서 너무나 거뜬하게 지탱해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주도하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줄을 내려주고 있다.

‘팔 아프진 않으려나.’

자신과 달리 근육이 꽤 있으니 훨씬 잘 버티겠지만, 지금도 얼얼한 제 팔과 아픈 어깨를 생각하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걱정이라니.’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이름 주고받고 농담 좀 했다고 그새 경계심이 줄어들었나 보다.

3층을 지나 2층에 다다랐을 즈음.

갑자기 잘 내려오던 로프가 덜컥 멈췄다. 팔에 묶은 줄을 푸느라 잠깐 멈춘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초가 지나도 움직이질 않았다.

‘혹시 다쳤나?’

설마 요령 없이 줄을 풀어주다가 어디 다쳤나 해서 고개를 들던 그때.

몸이 갑자기 아래로 확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아래에 있던 세 사람이 저마다 짧게 비명을 질렀다.

“윽…!”

깜짝 놀라긴 했지만 무작정 바닥에 처박히진 않았다. 두 손으로 줄을 더욱 꽉 잡고서 무릎을 들어 몸을 웅크렸다. 지면에 처박혔을 때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준성의 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지 않았다.

준성의 몸은 2층과 1층 사이에 한차례 우뚝 멈췄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던 준성은 아래에서 자신을 걱정스럽게 부르는 채이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조금 전의 급강하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후로는 상냥할 정도로 천천히 내려갔다. 준성은 바닥에 두 발을 딛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오빠, 괜찮아?”

3층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시끄러운 경보음 속에서 채이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안전히 도착했음에도 중간에 급강하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란 듯했다.

괜찮다는 의미로 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준성이 다리에서 올가미를 빼고는 로프를 흔들었다. 지면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3층 창문에서 한서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준성의 상태를 살피듯,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뭐였을까?’

조금 전의 심장 떨리는 급강하가 마음에 걸렸다.

아직 요령이 없을 무렵, 로프를 푸는 힘 조절을 잘못해서 지우를 의도치 않게 내동댕이쳐본 경험이 있었다. 고통은 없었지만 근육에 이상이 생긴 건지, 이후로 팔뚝 절반이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곤란했던 기억이 있다. 꿈이라서 고통이 없었던 거라, 만약 똑같이 다친 거라면 통증이 상당할 거였다.

팔이 다친 거라면 제아무리 하강의 달인이라도 줄 하나 붙잡고 내려오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되면 한서를 어떻게 내려보낼지 고민이다.

한서는 다시금 창 안으로 쏙 들어갔다. 로프를 올리지 않기에, 정말 어디 다친 줄 알았다.

준성의 걱정과 달리, 한서는 너무 멀쩡한 모습으로 창틀에 올라 거꾸로 앉았다. 등에는 준성의 백팩을 메고 허리벨트에는 채이가 준 막대를 끼운 채 캐비닛과 가깝게 로프를 붙잡았다.

직후.

준성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한서는 너무도 부드러운 하강을 보여줬다. 하강의 베테랑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콩콩, 벽을 두 발로 밀치며 속도를 조절하고, 바닥에 착지할 땐 1층 창문에서 내려선 것처럼 가볍게 발을 디뎠다.

‘역시 운동 잘하는 놈들은 뭐든 잘하는구나.’

준성은 도한서가 검도학과 수석이라는 걸 상기하며 그의 운동신경에 감탄했다.

다리에 올가미도 채우지 않은 채 순수히 줄 하나만 붙잡고 내려오는 대단한 강심장에 놀란 것도 잠시.

준성은 한서에게 다가가 직접 백팩을 벗겨주며 물었다.

“안 다쳤어?”

“뭐가?”

“아까 줄 놓쳤다가 다시 잡은 거 아냐? 그때 안 다쳤냐고.”

“질문이 잘못됐잖아. 왜 줄을 그따위로 푸냐고 물어야지.”

“일부러 그랬어?”

백팩을 옮겨 멘 준성이 되묻자 한서가 잠깐 말없이 바라보았다.

순간 준성은 설마 한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급한 상황에 장난을 친다고? 아니면 정말 떨어뜨리려고 했나? 뭐 때문에?

고개를 들려는 준성의 불안을 걷어내듯, 한서가 살짝 웃었다.

“아니, 그럴 리가.”

“그럼 됐어. 보니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 가자.”

준성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언덕 방향으로 앞서 걸었다. 저 긴 손가락이라도 다쳤으면 조금 죄책감이 생길 뻔했다.

한서는 그런 준성의 뒷모습을 또다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낮은 언덕을 넘어 대학 부지 밖으로 향했던 준성 일행은 이윽고 대로변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좀비의 눈을 피해 바로 근처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골목의 그림자 속에 숨은 그들은 그제야 밖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도로 전체가 추돌사고라도 난 것처럼 중구난방으로 부딪쳐 멈춰 있는 차들.

멀리서 보이는 상가의 불길.

곳곳에 튀어있는 검붉은 핏자국들.

어디선가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그 소리를 묻어버릴 만큼 무서운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셀 수 없이 많은 좀비.

그들에게서 떨어져나온 신체 일부들.

코와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대로변에 가득 차버린 진한 피냄새.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읍, 우욱…!”

당장이라도 기절해버릴 것 같은 광경에 소연이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구토감은 어찌어찌 참아낸 모양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지우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리의 떨림이 너무 심해서 털썩 주저앉을 것처럼 보였다.

채이의 상태가 그나마 나아 보였지만, 핏기가 싹 가신 건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습관처럼, 떨리는 손으로 준성의 소매를 꼭 잡고 있었다.

꿈속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세 사람의 상태를 확인한 준성은 문득 한서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멀쩡해?’

좀비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어딘가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비명이 들리고, 좀비가 된 운전사가 경적을 귀 아프게 울려대며 괴성을 터뜨려도 그는 여전히 고고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마치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감상 중인 듯한, 그런 제삼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준성은 한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조교실에 왔을 때도 비정상적인 태평함을 보였다.

‘좀비랑 직접 싸워 보면 정신 차리겠지.’

옷의 깔끔함으로 봐선 좀비랑 제대로 맞붙어본 적도 없는 게 분명했다. 운이 좋아서 무탈하게 조교실까지 왔고, 이후로도 자신이 준비한 경보기와 로프 덕분에 좀비랑 만나지 않을 수 있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말할 길이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좀비와 전혀 만나지 않는 이상적인 루트 따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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