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7회 -
선로를 따라 걸으며 일행을 안내하던 중년 남자는 본인의 이름을 김철호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이 지하철역의 역무원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딱히 직업을 밝히지 않아도 그의 피 묻은 역무원 복장 때문에 다들 금세 알아차렸겠지만.
“운이 좋았죠. 때마침 스크린도어 비상문을 체크 중이었거든요.”
지하철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점차 좀비로 변해갈 때는 철호가 스크린도어의 비상문을 열어서 한창 점검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플랫폼은 삽시간에 괴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피바다로 변했고, 철호가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을 구해서 아슬아슬 문을 닫았을 땐 이미 대다수의 사람이 좀비에게 물어뜯긴 후였다고 한다.
그때를 회상하던 철호가 어두운 낯빛을 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이런 B급 영화 같은 일이 어째서…….”
울컥해서 목소리까지 떨렸다.
철호에게 감정이 이입된 지우와 소연이 묵묵히 눈물을 떨궜다. 지우는 누가 툭 치기만 해도 소리 내어 엉엉 울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들과 같이 눈물을 보이진 않았지만, 채이 역시 감정이 북받친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준성의 소매 대신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철호의 감정에 동화되지 않은 건 준성과 한서뿐이었다.
준성은 어차피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기도 했고, 일일이 감정에 동화되어 울컥하기엔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오늘은 일단 이대로 따라가서 대피소로 가고 내일은 오전 7시 20분, 아니, 22분쯤 나가서 선로를 따라…….’
꿈속에서 이미 수십 번 들었던 철호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머릿속으로 내일 일정을 정리했다. 내일 중으로 병원에 도착하려면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도 빠듯했다. 더군다나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라 채이와 지우, 소연, 셋을 모두 데리고 가면서 그들을 지켜내기도 해야 하니 상당히 힘든 하루가 될 거다.
그러다 제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는 한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있었지.’
준성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지친 내색도 없는 체력 좋은 한서를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일행의 가장 큰 변수이자 이상한 놈.
딱 그 정도만 되어도 머리가 아플 텐데,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고 중요한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도한서.”
한서를 부르자 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리고 특유의 차가운 눈이 준성을 향했다.
“너…….”
“여깁니다.”
준성이 말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철호가 걸음을 멈췄다. 선로가 펼쳐진 터널의 한쪽 벽에 마련된 철문 위에 ‘대피소’라고 적힌 빨간 팻말이 붙어 있다.
끼익, 하고 약간 뻑뻑하게 녹이 슨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철호가 일행에게 손짓하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터널과 달리 문 너머는 상당히 밝은 빛이 비치고 있었다.
대피소 안은 그저 넓은 공터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다 할 시설이나 방도 없는 상당히 넓고 긴 직사각형의 공간에 재난 대비용 텐트 몇 개가 펼쳐져 있다. 한쪽에는 방독면과 소화용 모래 등을 갖춰둔 유리 캐비닛이 있었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재난 용품이 옆에 늘어서 있다.
대피소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지퍼를 열고 일행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아마도 철호와 함께 스크린도어 너머로 대피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금방 텐트를 준비해 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하철역 자체가 좀비 천국이 된 마당에도 철호는 역무원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건지, 솔선해서 사람들을 챙기고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려 했다.
‘저런 사람이 있으니 안심되는 거지.’
꿈에서도 준성은 철호를 참 좋아했다. 푸근한 삼촌 같은 느낌에 남 챙기길 좋아하는 철호는 준성이 재반복되는 꿈에 대해 털어놨을 때도 이를 장난으로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참 힘들었겠다며 토닥여주기까지 했다. 당시의 준성에게는 철호의 위로가 큰 도움이 되었다.
“아, 거참! 역무원 양반! 신체검사는 제대로 한 거 맞어?!”
한 텐트에서 걸어 나온 50대의 신경질적인 남자가 씩씩거리며 일행을 훑었다.
고급스러운 회색 정장 바지에 어디선가 많이 본 명품 브랜드 로고가 박혀있는 허리벨트, 흰 셔츠의 소맷부리 부분에 박힌 커프스만 봐도 잘나가는 회사의 부장님 이상 되는 것 같았다.
남자가 일행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섞었다.
“피가 이렇게나 묻었는데 멀쩡하겠어?! 이 새끼들 다 감염자 아냐?!”
“아휴, 사장님, 왜 그래요. 물렸던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못 봤어요?”
철호가 일행의 눈치를 살피며 남자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언성을 높였다.
“봤지! 다 봤지, 내가! 감염되면 눈에서 피 줄줄 흘리는 거! 하지만 잠복기인가 뭔가도 있을 거 아냐! 물렸는데 아직 증상이 안 나온 거면 어떡해!”
“다들 안 물렸다고 했어요.”
“그럼 물린 새끼가 나 물렸소, 이러냐고!”
대피소 안이 쩌렁쩌렁할 정도로 외쳐대는 통에 이젠 텐트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행 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남자의 발언이 이어짐에 따라 그들의 눈빛도 점점 불안으로 물들었다.
이대로는 모처럼 쉴 수 있는 공간에서 내쫓길 판이다.
텐트의 사람들과는 또 다른 의미로 불안해하는 일행을 대신해, 준성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한명 한명 검사해보시고 아무도 안 물렸으면 여기 있게 해 주시는 거죠?”
“그거야 뭐…….”
남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수긍하는 빛을 보이자, 준성은 철호에게 일행을 검사해줄 것을 부탁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저 사장님이 괜히 난리네.”
“아니에요. 불안요소는 미리 확인해두는 게 낫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진짜 미안해요.”
철호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남자들은 철호가, 여자들은 텐트에 있던 30대 주부 한 명이 붙어서 신체검사를 하기로 했다. 한서가 조교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명씩 비품실에 들어가, 안에서 옷을 다 벗고 꼼꼼히 검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물린 사람은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감염자가 있길 바랐던 건지, 모두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짜증스러운 얼굴이 되어버린 50대 남자가 담뱃갑을 들고 대피소 문으로 향했다. 그걸 본 철호가 얼른 달려가서 팔을 붙잡았다.
“아니, 또 어디 가세요, 사장님! 위험하게!”
“내 맘대로 담배도 못 피워?! 여기서 피우면 안 된다고 잔소리했잖아!”
“그거야 여긴 임산부도 계셔서……!”
“아, 시끄러! 그래서 나가서 피우고 온다고!”
철호를 거칠게 밀어낸 남자가 입에 담배를 하나 물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일부 텐트에서 ‘또 지랄이네’라든지, ‘작작 좀 하지’와 같은 작은 상소리가 이어졌다. 대피소의 사람들은 아무래도 저 화가 많은 50대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남자가 나간 문을 노려보던 지우가 가슴을 퍽퍽 때리며 답답해했다.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요?”
길게 한숨을 내쉬던 철호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해 좀 해줘요. 겨우 대피하긴 했는데 다들 충격도 크고 앞일이 막막해서 예민해진 거예요. 당장 먹을 음식도 없어서 구조가 빨리 와야 할 텐데…….”
“예? 비상식량 같은 거 없어요?”
지우의 말에 철호가 볼을 긁적였다.
“저희도 있을 줄 알았는데 관리가 안 되던 대피소라서 그런지 먹을 게 없더라고요. 그래도 물은 나오니까 어떻게든 며칠 버틸 순 있을 겁니다.”
재난 상황의 식량 확보는 필수 중의 필수였다. 식수는 문제없다고 해도 굶주림을 해결할 식량이 없으면 사람들은 날로 예민해져 갈 거다.
준성은 이 대피소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백팩을 내려놓고 그 안을 열어 보였다. 백팩 안에 가득 차 있는 칼로리 바와 초코바 등을 본 철호와 일행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오는 길에 편의점 좀 털어왔는데, 일단 이걸로 며칠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준성이 백팩에 비상식량을 가득 담아왔던 건 자신과 일행이 버티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 대피소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가득 준비해온 것도 있었다.
대피소에는 물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며칠 내내 굶주림과 싸워야 할 상황이었다. 이 대피소의 구조가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이상, 준성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게 식량을 조달해주고 싶었다.
‘상황을 다 아는 데다가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인데 어떻게 모른 척하겠어.’
그래, 차라리 꿈이었다면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들을 돕는 건 이 좀비 사태의 해결까지 다다르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현실이기 때문에 외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