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40)화 (40/240)

- 040회 -

‘그렇다고 동생들 기다려야 하는데 구조헬기 타고 나가버릴 수도 없고.’

한서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번 구조헬기 이후로 다음 구조는 감감무소식이 된다. 그걸 아는데도 도한서와 손잡고 평화로운 밖으로 나가서 유유자적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생과 그 친구들은 여전히 좀비들에게 둘러싸여서는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될 테니까.

준성은 이마에서 손을 내리며 눈앞의 도한서를 바라보았다.

‘백신으로서 연구 당하는 게 싫은 거겠지?’

한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저 얼굴에서 ‘기피’와 ‘불신’을 넘은 ‘증오’마저 엿보이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연구재료로 써야 한다는 건 분명 꺼려질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받게 될 보상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자원할 법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 지옥에서 가장 먼저, 가장 안전히, 가장 대우받으면서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한서는 그 모든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의 이유로 본인의 몸이 활용되는 걸 극도로 꺼려하고 있었다.

‘그럴 만한 경험이 있었던 걸까.’

지금의 준성으로서는 한서에게 뭔가 큰 상처가 되는 일이 있었다고 짐작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준성은 구조헬기의 빈자리에 한서를 꼭 앉힐 생각이었다. 백신이든 뭐든, 그게 그를 살리는 가장 안전한 법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네가 백신이라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헬기에 탈 때 넌 그냥 평범한 생존자 중 하나일 뿐이야. 백신이고 뭐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헬기 타고 나가서 부모님 뵙고 따뜻한 밥 먹으면서 편안히 쉬고 있으면 돼.”

나름의 합의점이었다.

자신 따위가 감히 백신 보유자에게 합의를 보고 말 것도 없지만, 한서의 의사를 존중해서 그가 백신 연구에 끌려가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물어줄 생각이었다.

모든 사람을 생각한다면 당장이라도 한서가 백신 보유자라는 걸 소리쳐 알리고, 그를 억지로라도 헬기에 밀어 넣어 연구감으로 떠나보내는 게 맞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좀비 바이러스가 사라져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서는 역시 고집불통이었다.

“말했지? 갈 거면 너도 같이 가야 한다고.”

오만하게 팔짱을 껴 보인 한서가 턱을 살짝 든 채 준성을 내려다보았다.

“내 억제제 두고 내가 어딜 가?”

‘억제제’라는 별명이 붙어버린 준성은 한서에게서 느껴지는 고집스러운 중압감에 속이 타들어 갔다.

발을 뻗어 준성에게 바짝 다가간 한서가 그를 살기등등하게 내려다보았다.

“버리지 마.”

하는 행동과 눈빛, 저 오만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튀어나왔다.

“날 위해서든 뭐든, 내 억제제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해놓고서 혼자 버려두려고?”

“버리는 게 아니잖아. 네 안전을 위해서…….”

“누가 그딴 안전 챙겨달래? 네가 직접 몸으로 챙겨주는 거 외엔 관심도 없어.”

한서의 말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뜯어보면 틀린 말이 아닌데 이게 왜 야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준성이 당황하는 와중에도 한서의 고집스럽고 어린애 같은 말이 이어졌다.

“나 버리면 확 죽어버릴 거야.”

안전하게 살아나가길 바라는 것뿐인데, 그걸 자꾸 버린다고 표현한다. 준성으로서는 억울할 일이다.

“근데 내가 이제 널 좀 잘 알아.”

사람 마음도 모르고, 아니, 사실은 알면서도 이용하는 것 같은 한서의 단호한 말이 쐐기를 박았다.

“넌 나 절대 못 버려.”

한서의 입가에는 이미 승리를 예견하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결국 긴 시간의 입씨름 끝에 두 손 들고 항복해버린 준성은 지금처럼 도한서와 나란히 서서 다른 사람들을 배웅해주는 중이다.

구조대원들도 이대로 두고 갈 수가 없는지, 한 명이 가까이 와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다음 구조는 언제 오게 될지 몰라요. 오늘 인한시에 파견된 구조헬기 중에서도 저희가 마지막이고요.”

“괜찮습니다. 저흰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아무리 그래도 나갈 길도 없고 식량도 얼마 안 남았다고 들었는데……. 그냥 같이 가시죠.”

확실히 7층 사람들을 위한 식량은 고작해야 하루 분량쯤 남아있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준성의 백팩에는 아직 칼로리 바와 초코바 몇 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섯이서 하루 치 식량이 준성과 한서에겐 사흘 치니, 전부 합하면 적어도 닷새는 식량 걱정이 없었다.

준성은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그냥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이유이자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동생하고 여기서 만나기로 해서요. 동생 두고는 못 가겠습니다.”

꿈속에서도 채이와 따로 합류하게 되어서 구조헬기를 그냥 보내야 했을 때 이렇게 말했더니 납득하고 돌아갔었다.

“아….”

구조대원이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맘 이해합니다. 알겠습니다, 모쪼록 동생분과 무사히 합류하시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주 인사를 한 구조대원이 헬기에 올라탔다. 그때까지도 태주는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타라고 아우성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태운 첫 구조헬기가 떠났다.

이후에 다음 구조대를 어디서 언제 만날 수 있을지는 준성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 이곳으로는 더 이상 구조가 오지 않을 거야.’

준성이 기억하기로, 첫 번째 구조헬기가 떠난 이후로 이 병원에 두 번째 헬기는 찾아오지 않았었다. 다른 구조대나 좀비들을 진압하고 생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병력이 온 적도 없다.

‘일주일째에 채이와 애들을 데리고 도착할 대머리 아저씨와 합류하면 어떻게든 밖으로 나갈 순 있어. 그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야 해.’

준성이 주변 건물 중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도 조만간 시간 맞춰서 다녀와야겠어.’

준성이 바라보는 그곳에는 그가 마지막 꿈속에서 찾아낸 해결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해서 당장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다. 대신 며칠만 기다리면 저길 들어가게 해줄 사람과 만나게 되니, 그때까지만 좀 지루해도 잘 참고 있으면 된다.

‘그걸 손에 넣고 나면 이제…….’

“강준성.”

루트를 어떻게 짤까 고민하는 준성의 뒤로 도한서가 다가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백허그에 놀라는 것도 잠시.

“준성아.”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옥상의 찬 공기와 한서의 숨결이 만나, 간지럽고 따뜻한 바람이 귓속을 간질였다.

“왜 자꾸 불러.”

한서가 준성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따끔한 느낌과 간지러운 느낌이 동시에 났다.

“나 버리지 마.”

“안 버린다니까.”

“버리면 진짜 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을 거야.”

왜 이렇게 기겁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준성은 한서의 단순한 장난이라 생각하며 그의 팔을 툭툭 토닥였다.

“알았어. 진짜 안 버려.”

재차 확인을 받은 후에야 한서가 살풋 웃었다.

준성은 그가 이날 버리네, 마네 했던 이유를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 * *

시끄러운 프로펠러 소리와 기압 때문에 귀가 먹먹한 가운데.

헬기에서 잠깐 졸았다가 일어난 태주는 벌써 짙은 노을이 점령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4시 조금 넘어서 출발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상했다.

헬기를 타고 무려 1시간 가까이 이동했는데 아직도 피난시설에 도착하지 못했다니.

인한시가 조금 큰 지역이긴 해도 이건 너무 오래 걸린다 싶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헬기의 비행 고도가 엄청 높은 건 아니어서 창밖으로 아래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보았던 현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의 건물들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라 시야를 어지럽혔고, 보이는 도로는 다 봉쇄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마구 버려둔 차들이 길을 다 막고 있다. 거리가 있어서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한가로이 느릿느릿 걷는 자들도 그렇고 우르르 떼거리로 누군가를 쫓아가는 무리도 전부 좀비가 분명했다.

아래의 상황을 보고서 자기가 아는 인한시가 생각보다 훨씬 넓었구나, 하고 생각하던 태주는 한 건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저거 제유물산 건물인데…….”

현재의 직장으로 이직하기 전에 다니던 곳이 제유물산이었다. 10년 전부터 7년을 열심히 몸 바쳐 일했었으니 잘못 볼 리가 없었다.

태주가 유독 당황한 건, 자신이 아는 제유물산 건물의 위치가 인한시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태주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방대원에게 물었다.

“저기요. 혹시 지금 저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다들 구조되는 것에 감격해서 깊이 뭔가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기도 하고, 소방대원들이 일관되게 ‘가장 가까운 인근의 피난시설로 간다’라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인한시 끄트머리, 혹은 그 너머의 안전한 다른 지역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당황한 얼굴의 태주를 보며 소방대원이 친절하게 얘기해줬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가장 가까운 인근 피난시설로 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인근 피난시설이 어디에 있는 건데요? 인한시 근처가 아니에요?”

밀려오는 불안감에, 태주가 준성이 알려줬던 정보를 토대로 물었다.

“어차피 좀비 퍼진 건 인한시 뿐이고 어제 곧바로 시 밖으로 좀비가 퍼지지 못하도록 폐쇄했잖아요.”

소방대원의 얼굴에 씁쓸함이 퍼졌다.

“정보가 너무 일찍 차단되어서 모르셨나 보군요.”

태주뿐만 아니라 헬기에 모여 있던 생존자들 모두가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이미 한국의 3분의 1이 좀비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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