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0회 -
“언젠가 널 죽여버리게 될 것 같아.”
가두고 묶어두는 것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좋아서.
음산한 말을 내뱉은 한서의 귓가에 준성이 웃음기 띤 사악한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너도 같이 죽여줄 테니까.”
한서의 몸이 성감대를 건드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거렸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듯이 굴면서도 이렇게 밀어붙이면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강준성은 자신의 참을 수 없는 정복욕을 자극하는 데에 도가 튼 게 분명했다.
“하아….”
열을 품은 숨이 애달프게 흘러나왔다.
예전엔 잘만 써먹던 여유로운 표정관리가 어째 강준성 앞에서는 나날이 흐트러지는 느낌이었다.
그새 고요해진 밖으로 나와 에스컬레이터로 향하자, 그 근처에 엉거주춤하게 모여 있는 좀비 몇 명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내려가는 쪽 에스컬레이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준성과 한서가 좀비들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은 느릿하게 움직이며 길을 비켜 주었다.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가다 보니 올라올 때는 보이지 않던 세 명의 좀비가 듬성듬성 길을 막고 있었다.
그들도 준성과 한서를 피하기 위해 움직이다가 멀쩡한 계단을 내려가는 게 아니라 에스컬레이터 좌우의 뻥 뚫린 공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팔걸이에 허리를 걸치고 고꾸라져, 무방비하게 머리부터 떨어져 버린 좀비들은 저마다 억 소리를 내며 꿈틀하다가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온 준성은 곧 지척에서 들리는 희미한 신음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에스컬레이터 옆쪽 벽면에 등을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손전등을 그에게 정면으로 비추니, 어깨를 들썩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몸 이곳저곳을 뜯어 먹힌 피투성이 남자의 얼굴은 그의 몸만큼이나 피범벅이었다. 붉은 피막이 점령한 그의 눈에선 지금도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입가는 몇 번의 피를 토했는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새빨갰다.
그어어….
남자가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려 뻐끔거렸다. 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져 좀비가 되어버린 남자는 피 가래가 끓는 탁한 신음 외에는 내뱉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준성은 그런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식할 정도의 이타심이 있었다고 가정해봐도 남자를 살릴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7층에서 6층으로 아무리 빨리 이동한다고 한들, 비명과 괴성이 터지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남자를 구할 순 없었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남자가 도주하면서 점점이 늘어난 괴성의 수는 족히 수십의 좀비를 나타냈기에 그만한 대비도 필요했다.
5일 차에 이 백화점을 찾은 건 꿈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오늘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준성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불안한 시간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생존자를 단시간에 구하려 드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한서의 능력을 이용한다 해도 준성의 계산상으로 남자를 구하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마음이 편할 순 없었다.
준성은 등허리의 검집에 들어있던 마체테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선 한서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내리며 그에게 손전등을 건네주었다. 준성의 의도를 알아챈 한서는 두 개의 손전등을 든 채 반걸음 정도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그러자 이제 막 좀비가 되었던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벽을 지지대 삼아 비틀거리며 일어난 남자가 입을 쩍 벌린 채 달려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아악-!
남자의 피 묻은 두 손이 입보다 먼저 준성을 붙잡으려던 찰나.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정수리에 마체테가 내리꽂혔다. 한 번에 제대로 박아넣을 수 있도록 두 손으로 힘있게 내리친 준성의 얼굴에 아직 제대로 굳지 않은 남자의 피 몇 방울이 튀었다.
컥, 헉….
입을 달싹이며 막힌 신음을 흘리던 남자가 무릎을 꺾었다. 준성이 그의 머리에서 마체테를 회수하자, 가까스로 버티던 남자의 축 처진 몸이 풀썩 쓰러져버렸다.
허공에 마체테를 휘둘러 아직 따뜻한 피를 털어낸 준성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피가 튄 준성의 볼에 한서의 손가락이 닿았다. 그의 손가락이 뜨끈한 피를 말끔히 훑어내 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한서의 말에 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체테를 도로 집어넣었다.
죽어서도 완전히 죽지 못하고 썩어가는 몸으로 배회하며 사람들을 공격할 바에야, 지금처럼 완전한 죽음을 맞게 해 주는 게 그나마 남자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런 세상 한복판에선 피해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 정도뿐이었다.
무거워진 마음을 털어내며 다시금 한서와 걸음을 옮긴 준성은 그가 눈여겨본 스포츠용품 매장에 발을 들였다.
준성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두툼한 패드가 들어있는 보호대였다. 무릎과 팔꿈치용으로 제작된 그것들은 좀비들과 근거리에서 맞닥뜨렸을 때 방어용으로 적격이었다.
백팩에 몇 세트를 집어넣은 준성은 뒤이어 각종 공이 모여 있는 진열대로 향했다.
보호대는 충분히 예상할 만했지만 뜬금없이 공을 바라보고 있는 준성의 모습에 한서가 의문을 표했다.
“여긴 왜? 던질만한 공이라도 챙겨두려고?”
“비슷해.”
준성의 말에 한서는 그가 테니스공이나 야구공 정도를 챙길 거라 생각했다. 정확성만 보장된다면 그런 공도 충분히 도움이 될 만했지만, 무게를 생각하면 그리 많이 확보할 수도 없었기에 의아한 감도 있었다.
이윽고 준성이 들어 올린 물건을 본 한서는 자신의 예상을 비켜나간 그의 선택이 의아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준성이 고른 것은 단단한 공들이 아니라 주황색의 작은 탁구공 여러 개가 포장된 플라스틱 팩이었다.
‘탁구공?’
대체 저런 걸 어디에 쓰려 하는지 감도 안 잡혔다. 던져봐야 통통 튀기만 하다가 사라질 게 뻔한데.
한서가 말없이 흥미로운 눈을 하고 있는 동안, 준성은 어느새 탁구공 10개가 들어있는 팩을 벌써 다섯 개째 집어넣는 중이었다. 신기한 건, 그보다 좀 더 딱딱한 하얀 플라스틱 탁구공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준성의 행동을 보고 있던 한서가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재질에 뭔가 있구나?”
“맞아.”
진열대에 있던 주황색 탁구공을 백팩에 모두 쓸어 담은 준성이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여기에 온 건 배터리팩만큼 이것도 중요해서였거든.”
한서가 맨 백팩을 남몰래 뿌듯하게 바라본 준성이 그의 허리를 붙잡으며 걸었다.
“앞으로는 이게 우릴 많이 도와주게 될 거야.”
* * *
“준성아-! 준성아아-!”
목청껏 소리 내어 불러봤지만 역시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한병원에 헬기를 내려 단박에 7층으로 내려간 남기혁은 입원실을 하나하나 벌컥 열어대며 준성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거라고는 싸늘한 고요함 뿐이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5층과 6층을 훑으러 갔던 동료들 역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기대에 찬 얼굴로 싱글거리며 준성의 이름을 부르던 남기혁의 얼굴에 금세 짜증이 가득 찼다.
“지금쯤이면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짧게 혀를 차며 아쉬움을 표하던 기혁에게 덩치 큰 근육질 사내가 다가왔다.
“벗어난 지 며칠 된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을 아지트로 삼은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기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눈가를 찌푸렸다.
‘나도 준성이처럼 모든 회차를 다 기억하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짜증이 한층 더 솟구쳤다.
“불공평해! 불공평하다고!”
짜증을 터뜨리며 발에 걸리는 의자를 거칠게 차버렸다. 그런 기혁을 바라보던 동료들은 저마다 긴장한 얼굴로 뻣뻣이 굳어버렸다. 저럴 때 잘못 건드리면 신체 중 어느 한 곳이 순식간에 절단될 수도 있었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알아서 감정을 다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남기혁의 오른팔인 근육질 사내만큼은 이럴 때도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곧 만나게 될 겁니다. 그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나한테 준성이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 있다고……!”
기혁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품에서 군용 단검을 습관처럼 불쑥 꺼내 들었다. 그걸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칼을 든 기혁의 손을 어렵잖게 감싸 쥔 사내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이 예지하셨던 대로라면 ‘그 물건’이 강준성 손에 들어가선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기회는 오늘뿐이고, 이걸 놓치면 결국 그 중요한 강준성도 함께 놓치게 되겠죠.”
“…….”
짜증으로 뒤덮였던 기혁의 얼굴이 점차 차분해졌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얹어졌다.
“하여튼 넌 날이 갈수록 날 다루는 데에 도가 트는 것 같아.”
“칭찬 감사합니다.”
“씨발 새끼.”
키득거리며 욕설을 날린 기혁이 그제야 칼을 내렸다. 그들을 보며 얼어있던 주변 사람들이 그제야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었다.
“갈 땐 가더라도 선물은 좀 두고 가야지.”
준성을 떠올리며 씩 웃은 기혁이 사내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예쁜 리본이 달린 작은 선물상자가 올려졌다.
“준성이가 좋아해야 할 텐데.”
기혁은 선물상자 안의 물건을 본 준성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해보며 야릇하게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