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71)화 (71/240)

- 071회 -

백화점에서 나와 입구에 선 준성은 그새 한층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한창 대낮임에도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해서인지 해가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준성이 기억하기로, 5일 차인 오늘은 인한시 상공에 오래도록 먹구름이 껴 있다가 저녁 무렵에서야 비가 내렸다. 새벽 내내 내리던 비는 내일 낮에 잠시 그쳤다가 또다시 줄줄 퍼붓게 된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산 없이 양손이 자유로운 타이밍을 골라서 이번에 백화점을 온 거기도 했다.

‘이제 돌아가서 오늘 챙긴 것들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후에 할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준성은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헬기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헬기 소리 아냐?”

한서도 들었는지, 그 역시 소리가 나는 하늘의 어딘가로 눈을 돌렸다.

헬기의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준성은 예상치 못한 헬기 소리에 적잖이 당황했다.

꿈속에서 2일 차에 인한병원에 도착하는 구조헬기 외엔 인근에 그 어떠한 헬기도 저토록 소음이 들릴 만큼 낮게 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높은 곳에서 거만하게 내려다보듯 아주 멀리서 정찰하던 군용헬기라면 종종 봤었지만.

특히나 5일 차엔 정찰용 헬기조차 못 봤던 터라, 불쑥 튀어나온 저 소음이 섬뜩할 만큼 신경이 쓰였다.

준성은 가까워진 헬기의 소음을 들으며 한서를 끌었다.

“이리 와. 숨어있자.”

한서는 ‘왜?’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끌려갔다.

준성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백화점 입구 근처의 조형물과 화단 사이에 몸을 숨겼다. 어둑한 하늘과 조형물의 그림자 덕분에 두 사람의 모습은 위에서 거의 보이지 않을 듯했다. 헬기에서 만약 자신들이 좀비 무리 사이에서 멀쩡한 걸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일이 복잡해지기에, 일단 어디든 숨어야 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가까워지는 소음의 방향을 주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준성은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드러난 건 혹시나 했던 정찰용 헬기가 아니라 구조헬기였다. 2일 차에 인한병원 헬기장에 상륙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생김새였다.

‘어떻게 된 거지?’

정찰용 헬기가 나타나도 놀랄 판국에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구조헬기가 나타나다니.

준성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마구 뒤져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5일 차에 구조 헬기가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렇다는 건…….’

모양새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낮게 날던 헬기가 백화점을 가로지르려 했다. 준성은 그 헬기를 노려보며 한껏 긴장했다.

“변수….”

준성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한서가 헬기를 주시하며 물었다.

“그놈일까?”

준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것 외엔 생각할 수가 없다.

장기매매 조직 사람들이 ‘형님’이라 부르던 사람.

준성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예지자.

그 사람이 움직인 게 아니고서야 저 헬기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준성은 자신들의 머리 위를 지나 어딘가로 향하는 헬기를 노려보았다.

예지자가 누구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는 그 예지 능력을 활용해서 부하들에게 사람들을 죽이고 장기를 적출하게끔 명령했다. 악(惡)임이 분명한 그자에 의해 헬기가 나타난 거라면, 겉으로 보이는 ‘구조’ 목적을 절대 믿을 수 없다.

“저 헬기.”

멀어져가는 헬기를 바라보던 한서가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는 준성에게 말했다.

“우리가 봤던 헬기야.”

“뭐?”

준성이 깜짝 놀라며 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한서는 헬기의 뒷부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구조헬기 꼬리 부분에는 헬기마다 등록번호가 있어.”

“등록번호?”

한서의 말에 준성이 얼른 헬기의 꼬리 부분을 바라보았다. 이미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져서 정확히 뭐라 쓰여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번호 같은 게 적혀 있다는 건 알아챌 수 있었다.

“HL-9498.”

한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인한병원에 왔던 구조헬기와 똑같은 등록번호야.”

준성이 딱딱히 굳은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인한병원 헬기장에서 순탄히 탈출했던 구조헬기를 떠올린 준성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기매매 조직의 보스’와 ‘구조헬기’가 자연스레 엮어져 버렸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실었던 구조헬기는 장기매매 조직 보스의 손에 들어갔다. 꿈속에서 매번 봤던 구조헬기 운전사나 소방대원이 이번에도 똑같은 사람들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아마도 처음부터 연결점이 있던 게 아니라 탈취당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기매매범들은 적출한 장기들을 병원 내부에 보관되어 있던 것처럼 챙겨서 구조헬기에 탑승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이동 중에 그들이 운전자와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협박해서 자신들의 아지트로 향할 예정이었다는 것도.

그들 모두가 헬기에 탑승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순조롭게 탈출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제대로 돌아갔다면 꿈속에서처럼 구조헬기가 이렇듯 다시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꿈속에서 연이어 반복되던 것과 다른 패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건, ‘미래’를 알기 때문에 선택지를 바꿀 수 있는 사람뿐이다.

즉, 자신과 장기매매 조직의 보스.

두 사람뿐이었다.

‘사람들은……. 태주 아저씨는 무사할까?’

차라리 구조헬기가 정상적인 구조 활동 후에 헬기 전용 차고에 들어가다가 탈취당한 것이면 좋으련만.

탈출시킨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함께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자신의 당초 계획대로 동생과 그 친구들을 인한병원까지 이끌어, 2일 차에 맞춰 구조헬기에 태워 보냈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머릿속이 딱딱해져 버렸다.

자칫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독한 장기매매범들 손에 그들을 넘겨버리는 꼴이 될 뻔했다.

암담한 상상을 하며 몸을 떨던 준성의 눈에 헬기가 어딘가에 착륙하는 게 보였다. 거리가 떨어지긴 했어도 어렴풋이 프로펠러 소리가 들릴 정도의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에 착륙한 지까진 볼 수 없었다.

‘어디에 착륙한 거지? 뭘 할 생각인 걸까?’

설마 생존자를 발견하고서 그들의 장기라도 떼어낼 심산으로 구조하는 척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저 악독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돌아가자.”

준성이 더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처럼 한서가 그의 허리를 붙잡아 함께 일어섰다.

“마주쳐봐야 좋을 거 없어.”

“…그래.”

준성도 한서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무자비한 부하들을 거느린 장기매매 조직의 보스, 게다가 자신과 같은 꿈속 세계를 겪은 사람이었다. 그런 자와 맞닥뜨렸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적어도 자신과 한서, 단둘만으로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인한시를 나가게 된다면… 우선 태주 아저씨와 인한병원의 생존자들부터 알아보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심호흡하듯 안정시키길 반복했다.

‘괜찮을 거야. 인한병원에서 출발한 구조헬기는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피난시설로 향했어. 그러니까 다들 무사할 거라고.’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던 준성은 문득 든 생각에 멈춰 섰다. 그는 헬기가 착륙하던 방향을 돌아보며 미간을 모았다.

‘설마… 아니겠지?’

헬기가 갔던 방향에 있는 어느 한 곳을 떠올리던 준성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장기매매 조직이 원장님이랑 무슨 연관이 있겠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던 불안감을 억지로 억눌러 지워냈다. 순간적으로 장기매매 조직의 보스가 꿈의 일부를 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 관해서도 고개를 저었다.

‘해결책에 다다르기 위해 원장님을 만난 것도 마지막 회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걸.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그 사람은… 아마 원장님을 모를 거야.’

그러면서도 스멀스멀 퍼져버린 불안감은 좀처럼 잠재워지질 않았다.

곧장 컨테이너 사무실로 향하는 도중, 두 사람이 채 다다르기도 전에 또 한 번의 헬기 소리가 들려서 어쩔 수 없이 좁은 골목에 몸을 숨겨야만 했다. 준성은 아까와 같은 헬기가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보며 한층 더 커진 불안감을 마주해야 했다.

‘저쪽은…….’

바빠 보이는 구조헬기는 인한병원, 그리고 ‘그곳’이 있는 위치로 향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막대한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헬기가 이동하는 방향만 두고 대뜸 ‘그곳’으로 향해 본들,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6일 차가 되어야만 구해낼 수 있는 ‘원장’과 함께 ‘그곳’으로 가지 않는 한, 그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헛걸음해야 할 뿐이다.

준성은 갑작스러운 변수에 그저 놀랐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준성의 불안은 바로 다음 날,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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