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백지화된 머릿속이 수없이 울리고 눈앞이 여과 없는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런 준성을 비웃듯, 경직된 손안에 있는 휴대폰 속 영상에서 악마보다 더 악독한 인간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네가 그렇게나 아끼는 동생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게.
문가에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살아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때까지 살려둘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영상이 꺼져버렸다.
직후, 준성은 휴대폰을 부서뜨릴 것처럼 꽉 쥔 채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진 않았지만 내딛는 그의 걸음은 과할 정도로 빨랐다. 가는 길에 한서가 내려놓은 백팩을 집어 들어 한쪽 어깨에 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준성아, 잠깐만!”
사태를 파악한 창민이 뒤늦게 준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보다 먼저 움직인 건 말없이 영상을 바라보던 도한서였다.
준성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그의 앞을 몸으로 막아선 한서가 준성의 양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어디 가려고?”
“…비켜.”
어깨를 잡은 손을 무시한 채 걸어나가려던 준성은 다시금 아플 정도로 꽉 붙잡혀버렸다.
“어디, 가냐고.”
차갑게 내뱉는 한서의 말에 준성의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키라고 했어, 도한서.”
“대답부터 해.”
한서의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띠었다.
“설마 그 새끼한테 가려는 건 아니겠지.”
“…….”
입을 꾹 다물던 준성이 한서의 두 팔을 거세게 떼어냈다. 그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바늘처럼 튀어나왔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
한서의 미간이 꿈틀했다.
“자, 잠깐만!”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불쑥 끼어든 경오가 우왕좌왕하며 울상을 지었다.
“싸우지 마! 저, 저기, 일단 진정들 하고…….”
말을 뱉던 경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준성의 눈을 보며 흠칫 놀랐다. 이때껏 본 적 없는 무섭고도 싸늘한 눈초리에, 멋대로 두 다리가 한 걸음 물러나 버렸다.
‘무, 무서워….’
준성이 이런 눈빛을 좀비들 외의 사람에게 겨눈 것은 처음 보는지라, 괜히 끼어들었나 싶어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경오의 어깨를 창민이 다독이듯 두드리며 끼어들었다.
“경오 형 말대로 진정들 해. 준성이 너도 이럴 때 어딜 가겠다는 거야?”
“괜찮아요. 안 죽고 다녀올 자신 있어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머릿속이었지만, 다행히 일부분은 꽤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만들어둔 게 몇 가지 있으니까 그걸 사용하면 어떻게든…….’
‘여차하면 도한서가 넘겨준 피를 써서 좀비들 사이를 뚫고…….’
‘남기혁이 있는 곳에 대해선 아마도 어딘가에 힌트가…….’
준성이 이토록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들, 누구도 그를 보내줄 리 없었다. 이 안에 들어올 때 봤던 병원을 에워싼 좀비 떼와 내부까지 꽉 찬 시체들을 생각하면 이럴 때 혼자 나가는 건 무조건 자살행위다.
창민은 너무 많은 감정 때문에 도리어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 준성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 미친 새끼 때문에…….’
혈액원의 CCTV를 통해서 봤을 때도 역겨웠는데, 화질 좋은 휴대폰 속 영상을 보니 더더욱 화가 나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나만 해도 이런데 준성이는 얼마나 힘들겠어.’
준성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영상 속 단발머리 여자는 아마도 준성의 동생일 것이다. 그에게 대학생 여동생이 있으며 그녀와 그 친구들을 안전한 지하철 대피소에 두고 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보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쉽게 감이 잡혔다.
좀비 사태를 이용해서 장기매매를 벌인 엽기적인 미친놈 남기혁이 지하철 대피소를 습격했다. 혼자 벌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손에 대피소의 죄 없는 생존자들이 죽었다. 그도 모자라, 준성을 꾀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대피소를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담아 이곳에 두고 갔다. 준성이 반드시 이곳에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듯이.
‘불행 중 다행이라면 여동생이 살아있다는 점인가.’
솔직히, 지금 이때까지 살아있긴 한 건지 모르겠다.
해외의 갖은 테러와 조우했던 특임단 소속 서창민으로서는 이 상황을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통신장애 문제가 없는 보통 상태에서의 납치극이라면 인질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수시로 통신을 통해 목소리나 생존 영상을 빌미 삼아, 인질을 멀쩡하게 되돌려받고 싶거든 반드시 시키는 대로 하라고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협박당하는 자는 인질의 안위가 최우선이니 그를 살려서 구하기 위해서라도 순종적으로 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통신을 원활히 할 수 없는 상태에선 인질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요구조건을 맞춰주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인질이 제대로 살아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상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진과 영상에 표기된 날짜는 분명 인한시에 좀비 사태가 일어난 1일째의 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오늘은 6일째 밤이다.
과연 저 여동생은 잔학무도한 살인마의 손아귀에서 이때까지 살아남았을 수 있을까.
아마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남기혁을 꽤 안다고 자신하는 준성마저도.
그랬기에 매사 냉정한 준성이 지금처럼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창민으로서는 이해할 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기혁이라는 살인마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죽게 놔둘 순 없었다.
“절대 안 돼. 너도 봤잖아, 병원을 둘러싼 좀비 수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알긴 뭘 알아. 제대로 아는 녀석이라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혼자 나간다는 말 못 해.”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러니까 안 된다고…….”
“아, 좀!”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준성이 돌연 얼굴을 숙인 채 큰 소리를 냈다.
“가게 해줘요, 제발!”
억눌린 감정을 터뜨리며 한 손으로 눈가를 덮은 준성이 한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채이…, 죽으면 안 돼요…. 걔 죽으면 난…….”
머릿속 안을 복잡하게 빙글빙글 돌던 감정들이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낱낱이 토해져 나올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도 수없이 지키려 했던 동생이다. 현실에서 꿈속과 같은 좀비 사태가 터졌을 때도 동생부터 구하는 게 가장 먼저였을 정도로 강채이는 아주 중요했다. 도한서만 옆에 있다면 좀비로 뒤덮인 세상에 살아도 까짓거 아무렴 어떤가, 하고 생각해버릴 정도의 순간에도 그녀의 앞날을 위해서 정부가 백신을 만들게 할 다짐은 변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자 동생, 강채이.
“오빠 때문에 죽은 게 아니니까 바보같이 굴지 좀 말라고.”
부모님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서 구해준 것으로도 모자라, 준성에게 이때껏 하루하루를 살아갈 의욕을 심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동생이 끔찍한 남기혁의 손아귀 안에 있다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기혁이 채이를 끌고 간 건 모두 제 탓이다. 자신 때문에 채이가 예정에 없던 위험에 빠진 거다.
“차라리 지금도 꿈속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준성의 가냘픈 바람이 입 밖으로 작게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한서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준성의 몸이 갑자기 번쩍 들어 올려졌다.
“……!”
몸이 둥실 떠올랐다가 머리가 아래로 확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눈가를 가린 손을 급히 떼어보자, 시야에 들어찬 건 가죽 재질의 검은 옷이었다.
뒤늦게 도한서가 자신을 쌀 포대처럼 어깨에 거꾸로 들쳐메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 탓에 어깨에서 백팩이 흘러내리던 걸 창민이 요령 좋게 받아내었다.
“뭐 하는 거야?! 안 내려?!”
명치를 가격하며 바둥거리는 두 다리를 한쪽 팔로 둘러 잡은 한서가 어디론가 척척 걸어갔다. 준성이 고개를 들며 한서의 등을 두 팔로 때렸다.
“도한서! 내리라고!”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로 끌려가고 있는지보다도, 점점 멀어지는 비상계단 입구가 더 신경 쓰였다.
“야!”
“조용히 해.”
차갑게 경고한 한서가 준성의 다리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붙잡았다.
“이 다리가 멀쩡히 움직이길 바라면, 조용히 하라고.”
준성이 움찔하며 한서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가 내뱉은 저 말이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준성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왜 이렇게나 화가 났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 새끼는 대체 왜 지랄인데?’
이러는 동안에도 채이가 남기혁에게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서 눈가가 충혈되었다.
병원에 머물 때 준성과 함께 잤던 2인실 방으로 향한 한서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거센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지안이 창민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빠들 싸우겠어요. 말려야 하는 거 아녜요?”
“그, 그래. 왠지 준성이 어, 엄청 맞을 것 같아. 어떡해….”
경오도 한서의 살벌한 기세를 떠올리며 조마조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왠지 창민은 한시름 놓은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