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좀비 사태가 터진 첫째 날.
지하철 선로에 흘러든 좀비들을 유인하기 위해 대피소를 빠져나왔던 준성과 한서는 한 모텔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다.
이때 한서는 일찌감치 푹 잠들어버린 준성을 놔둔 채 모텔 안을 ‘청소’했고, 몸을 흥건히 적신 피를 말끔히 씻어내자마자 밖으로 향했다.
이유는, 당시 준성의 팔에 남은 밧줄 자국 때문이었다.
대학 조교실에서 창문을 통해 빠져나올 때, 준성은 동생과 그 친구들을 창문으로 안전히 내려보내기 위해 자신의 팔에 그들과 연결된 밧줄을 감고 버텨주었다. 그걸 몇 번 연달아 반복했다 보니, 팔에 꽤 선명한 자국이 생겨버렸다.
‘거슬려.’
준성이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그의 하얀 피부에 아파 보이는 밧줄 자국을 만든 후배들이 영 탐탁지 않았다.
모텔을 나와 지하철로 들어간 한서는 자신을 슬슬 피하는 좀비들 사이를 올곧게 걸어가며 후배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동생 이름이 강채이였던가.’
다른 두 명의 후배는 솔직히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한서에게는 단순히 왱왱거리는 날파리 두 마리나 다름없었기에 얼굴을 똑바로 떠올리기가 어려운 게 당연했다.
하지만 강준성의 동생 강채이는 달랐다.
강준성이 위험천만한 좀비들 사이로 뛰어들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인물.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가 가진 테두리 안에 당당히 들어가 있던 거슬리는 자.
타인의 얼굴과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 도한서라고 해도, 강준성 때문에 그녀만은 똑똑히 머릿속에 새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쉬운 건 직접 없애버리는 거지만, 내 흔적이 남아서 좋을 건 없어.’
강준성은 꿈을 통해 지금의 사태를 수없이 겪으며 최선의 루트를 짜던 사람이다. 그 루트 속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인 강채이는 언제나 본인조차 인식하지 못한 안전노선을 걸어야 했고, 이번 역시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만약 강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강준성은 그녀가 안전노선을 이탈한 이유와 과정, 결과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 것이다. 이때 자신이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도리어 이쪽이 테두리 밖으로 내쳐질 가능성이 컸다.
‘그건 안 되지.’
강준성의 테두리란 것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게 된 터라, 더 깊이 들어가면 모를까 밖으로 밀려나는 건 절대 반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강채이는 ‘한동안’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상황에 따라 교묘하게 판을 짜서 테두리 안을 청소할 수도 있긴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강준성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고 그의 깊은 곳까지 뿌리내려 파고 들어가지 않는 한은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강채이’에 한해서이다.
다른 두 날파리는 확실히 거슬렸다. 강준성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럴 만한 능력치도 없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며 울고 소리치는 것, 혹은 이리저리 휘둘리며 벌벌 떠는 것뿐이다.
쓸모없는 짐 덩어리.
준성이 짜둔 대로라면 강채이와 함께 그들 또한 합류하게 된다.
‘기생충은 필요 없어.’
동생의 친구들이라는 이유로 준성은 그들 또한 언제나 구하려 들 텐데, 그런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일을 하도록 놔둘 순 없었다. 그들 때문에 준성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버리면, 도저히 충동을 참아낼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들을 일찌감치 강준성과 이어진 강채이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손을 써보려 했던 건데,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피 냄새.’
선로의 좀비들 사이를 지나 대피소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좀비들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먼지를 섞은 것 같은 탁한 피 냄새가 아니라 굉장히 자극적이고 선명한 냄새였다.
그즈음, 멀리서 환한 빛이 튀어나와 있는 지점이 보였다. 그 빛은 원래대로라면 절대 열려 있을 리가 없는 대피소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거리를 생각해봤을 때, 아무리 대피소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해도 이만한 냄새가 일찍부터 확 풍겨오려면 웬만한 양의 피로는 어림도 없었다.
살해 방식과 출혈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대여섯 명 이상이 상당한 피를 흘린 채 죽어버린 건 확실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좀비가 선로를 돌아다닌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조심성 없이 입구가 열려 있는 대피소.
물씬 풍기는 신선한 혈향.
한서는 대피소 안의 인물들을 걱정하기는커녕, 흥미롭다는 얼굴로 걸음을 빨리했다.
대피소 안의 풍경은 실로 참담했다.
난장판이 된 실내와 곳곳에 묻은 선명한 핏자국들, 그 한복판에 급소만 골라서 찔려 죽은 채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시체들까지.
대피소 안은 무슨 데스 게임 같은 거라도 벌였나 싶을 정도로 소규모의 지옥이 되어있었다.
태연한 얼굴로 시체 무리에 다가간 한서는 그들에게서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는 피를 손끝으로 훔쳐보았다. 그대로 살짝 문질러보니, 거슬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번졌다.
‘냄새가 강할 만도 하네.’
아직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데다가 울컥 터져 나왔었을 핏덩이의 응고 상태로 보아, 이들은 살해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추정하기로, 30분 내외가 아닐까 싶다.
이들을 살해한 자는 좀비가 아닌 인간, 그것도 칼을 아주 잘 쓰는 자였다. 주저한 흔적도 없이 정확히 급소를 찔러 죽인 거로 보아, 자신과 같은 ‘살인 경험’마저 충분한 자였다.
시체들을 살펴보니, 급소 이외의 곳을 당한 자들도 있었다. 대피소를 관리하던 역무원은 두 다리의 힘줄을 잘렸고, 한 남자는 등허리 쪽의 척추를 손상당했다. 심한 반항 혹은 도망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이들을 제물 삼아 다른 이들을 얌전하게 만들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 자리에 있는 십수 명의 인간들은 모두 같은 ‘인간’에게 살해당했다.
한서는 정수리에서 흐른 피로 턱과 목까지 온통 새빨갛게 뒤덮인 이소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목을 꿰뚫리는 바람에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죽어버렸을 양지우가 앉아 있다.
‘다른 놈이 먼저 처리한 건 마음에 안 드는데.’
왠지 먹잇감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서는 그 시체들 사이에 강채이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시체들에게서 눈을 뗀 한서는 난장판이 된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금 찌그러져 있는 텐트로 다가갔다. 그 텐트는 누군가의 발길질에 한쪽 버팀쇠가 찌그러진 것처럼 보였는데, 반쯤 지퍼가 잠긴 안쪽을 일부러 헤집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한서는 강채이와 이소연이 함께 쓴 텐트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이소연이 챙겼던 조교실의 가방과 준성이 두고 갔던 칼로리 바 하나, 그리고 먹다 만 생수 한 통과 조교실에서 가져온 캔커피 한 개가 있었다.
누가 봐도 한 사람 분량의 한 끼 먹을 것과 본인 짐뿐이다. 강채이의 개인 물건이나 겉옷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강채이를 끌고 갔다면 당연히 그녀의 물건이 모두 남아있어야 정상이다.
어떤 꼼꼼한 자가 그녀의 물건까지 모두 챙기고자 이 텐트를 찾았다면 이러한 좀비 사태 때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먹을거리들을 저렇게 방치해 두고 갈 리가 없다. 그렇다고 대피소 안의 인간들을 죽이는 동안 강채이가 스스로 짐을 챙기도록 여유를 줬을 것 같지도 않다.
어떻게 생각해도 부자연스럽다.
강채이가 스스로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나? 언제? 습격당했을 때? 그렇다면 습격한 자와 한패?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억지스러운 가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한서는 어느새 소연의 가방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혹시라도 뭔가 강채이에 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었고 함께 텐트를 쓴 건 이소연이었으니 말이다.
이소연의 가방을 뒤집어엎으니, 대피소에서 지급한 타월과 티슈를 비롯한 보급품 몇 가지가 쏟아져 나왔다. 역시나 그녀 본인의 것만 들어있는 듯, 전부 하나씩이다.
그사이에 웬 쪽지가 하나 껴 있다. 펼쳐 보니 바깥쪽에는 ‘대피소 보급품 목록’이라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고, 안에는 급히 휘갈긴 것처럼 보이는 글씨가 있었다. 아무래도 대피소 보급품 목록이 적힌 서류의 표지를 이면지로 활용하여 뒷면에 편지를 쓴 듯했다.
그 내용을 확인한 한서는 그제야 채이가 이곳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혼낼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만약 대피소로 돌아왔는데 내가 없으면 그때 말했던 인한병원에서 만나.]
[나도 오빠 찾으면서 거기로 향할 거야.]
[만날 때까지 죽으면 용서 안 해, 오빠새끼야.]
쓰면서 눈물이라도 흘렸던 건지, ‘오빠새끼야’라고 쓴 부분 언저리에 두 개의 작은 눈물방울 자국이 있다.
한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동생 맞네.”
말투가 똑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