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00)화 (100/240)

- 100화 -

한서는 쪽지를 다시 접혀있던 그대로 접어,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푹 집어넣었다. 가방 속 깊숙이 있어서 그런지, 주변에 자욱하게 퍼진 피 냄새 속에서도 그것만은 아무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종이 본연의 냄새를 흘리고 있었다.

채이가 남긴 쪽지를 챙기고서 다시금 내부와 시체들을 둘러보던 한서는 뒤늦게 그들 가운데에 떨어져 있는 붉은 엽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저런 핏빛의 엽서를 대체 어디서 찾은 건지 신기해하기도 전에 손끝을 대자마자 알아챘다.

‘취향하고는.’

진짜 피에 절였던 엽서일 줄이야.

상대의 저급한 짓거리에 짧게 혀를 차며 엽서를 들어 올렸다.

[강채이는 당분간 내가 데리고 있을게.]

[7일째 밤에 예쁨받던 그 공장으로 와.]

[안 오면 동생 머리 들고 내가 직접 데리러 갈 거야.]

제멋대로인 본인 성격을 잘 드러내는 휘갈긴 글씨체가 살벌한 내용을 읊었다.

한서는 내용을 읽자마자 의아한 내색을 보였다.

‘7일째 밤?’

왜 굳이 7일째일까?

이때는 아직 한서가 남기혁의 존재도 모를 때였고 그가 준성처럼 꿈을 통해 이 사건을 봤던 자인 줄도 몰랐었기에 의문만 남아있었다. 7일째까지 다들 살아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곳을 습격한 자가 꿈을 통해 이 사태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강준성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강채이와 깊이 연관이 있는 건 오빠인 강준성, 그리고 그녀의 두 친구 양지우와 이소연뿐.

친구들은 모두 이 자리에 시체가 되어있으니, 강채이의 이름과 그녀의 존재로 누군가를 꾀어내려 한다면 그건 오빠인 강준성일 거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강채이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정도라면 강준성을 꽤 깊이 알고 있는 자 같은데……. 대피소까지 파악하고 있을 정도니까, 혹시 꿈에 관해 털어놓은 지인일지도.’

설마, 강준성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니겠지.

준성이 꿈에 관한 일을 잘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털어놨을 확률은 극히 적었다. 그의 신중한 성격상, 어지간히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입도 벙긋하지 않았을 거다.

만약 정말로 준성과 가까운 사람의 소행이고, 그가 이미 준성의 테두리 안에 발을 들인 자라면…….

‘그럼 안 되는데.’

정신력이 산산이 부서진 준성을 상상해보자,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더러웠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면 모를까, 누군지도 모를 타인이 그렇게나 영향을 끼치는 건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붉은 엽서를 한 손으로 구겨서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렸다.

붉은 쓰레기 뭉치를 외면하듯, 한서는 이곳의 일에 관해 당분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게 준성이 짜둔 계획을 위한 일이자, 그의 정신을 멀쩡히 유지하기 위한 일이었다.

한서는 1일째 당시에 가졌던 감정과 생각에 관해선 입을 다문 채, 단순히 ‘대피소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는 서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봤던 것들에 관한 정보는 명백히 객관적으로만 전달했다.

엽서 속 협박 내용은 ‘거짓’이다.

강채이가 엽서를 남긴 자, 남기혁과 함께 있을 리가 없다.

남기혁이 대피소를 찾은 건 강채이가 떠난 이후가 분명했다. 만약 강채이를 대피소 밖에서 이미 잡았다면 굳이 좀비 사이를 뚫고 대피소까지 와서 난장판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좀 더 그럴듯한 추리가 가능했다.

남기혁은 준성처럼 이 좀비 사태를 미리 알고 있던 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준성이 짜던 루트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강채이가 1일째에 지하철 대피소에 머물고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그곳에서 안전히 1일째를 지난 후, 2일째에 준성과 함께 인한병원으로 향하거나 그대로 7일째까지 머물렀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목적은 강채이가 아니었겠지.’

강준성 역시, 원래대로라면 2일째 오전까지 대피소에 있었어야 했다. 강채이는 7일째까지 대피소에 그대로 머물게 되는 루트도 있었지만, 느긋하게 머물고 있어 봐야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던 준성은 언제나 2일째에는 꼭 그곳을 나섰다.

남기혁은 본인의 꿈속 기억을 되새기며 강준성을 진작에 잡아갈 생각으로 대피소에 다다랐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안에는 있어야 할 강준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거라고는 그에게 있어 하등 필요도 없는 생존자들과 강채이의 친구들뿐이었다.

남기혁이 모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죽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강채이의 친구들에게 강준성과 그녀의 행방을 물었을 테고, 상황을 파악한 그는 꽤 짜증스러운 얼굴로 사람들을 죽였을 터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준성이 강채이와 조우했을 확률이 지극히 낮을 거라는 판단하에 이런 시답잖은 자작극 영상을 찍었다.

매사 냉정한 강준성을 뒤흔들고 그를 남기혁 본인에게 스스로 오게끔 하려는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또 다른 변수가 없을 때의 일이었지만.

“강채이가 어디 있는진 나도 몰라. 하지만 그놈과 함께 있지 않은 건 분명해. 어디선가 강채이를 찾아서 잡아뒀다면 혈액원 CCTV든 새 영상이든, 얼굴이 제대로 나오게 찍어서 남겨뒀겠지.”

“…….”

준성은 한서의 말을 대꾸 없이 듣고만 있었다.

건네받은 채이의 쪽지를 쥔 손이 하얗게 세서 덜덜 떨린다 싶은 순간.

“왜 말 안 했어!”

쪽지와 함께 한서의 멱살을 두 손으로 틀어쥔 준성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의 눈가가 일그러지고 언성을 높인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채이가 어떻게 됐는지, 대피소가 어떤 상태인지, 그놈이 무슨 내용을 남기고 갔는지! 왜 말 안 했냐고!”

일부러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담지 않고 내용을 전했던 한서는 자신의 멱살을 틀어쥔 준성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이래서 말 안 했어.”

멱살을 쥔 준성의 두 손을 떼어낸 한서가 돌연 그의 머리채를 붙잡아 당겼다. 한서의 코앞까지 끌려간 준성의 얼굴에 싸늘한 숨결이 닿았다.

“진작 알았다면 네가 지금 여기에 있었을까?”

“뭐?”

“네 목적은 꿈속의 마지막 회차를 따라서 이 사태를 해결할 해결책을 찾아내는 거였어. 하지만 강채이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면 그딴 건 개나 줘버리라고 했겠지.”

“아냐, 난…….”

준성은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채이를 찾기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루트를 무시한 채 본인 스스로가 변수가 되어 움직인다면, 꿈속 경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는 게 사실이다. 창민과 경오, 지안도 모두 다 구하지 못한 채 죽었을 테고, 어쩌면 자신 또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루트에서 죽음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꿈속에서도 새로운 루트를 만들 때마다 언제나 몇 번은 죽었었으니까.

“지금은 꿈속이 아닌 현실이야.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한서의 매서운 눈동자가 준성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두드렸다.

준성의 머리를 좀 더 당겨 이마를 맞댄 한서가 조금 누그러진 눈빛을 띠었다.

“내겐 네가 위험해지지 않는 루트가 가장 완벽한 길이야.”

한서의 눈동자는 준성과 달리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준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한서의 올곧은 눈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약간의 물기를 머금은 그의 눈동자가 점차 흔들림을 멈추더니, 이내 평소와 똑같은 차분함을 되찾았다.

“알았어. 일단 이거 놔 봐.”

한서는 한 손으로는 준성의 머리채를 잡고 다른 한쪽 팔로는 허리를 꽉 안고 있었다. 힘을 빼고 놔주니, 준성이 바닥에 내려서서 한서의 앞에 정면으로 섰다. 혹시나 뒤를 돌아 달려나갈까 봐, 한서는 언제든 손을 뻗어 그를 붙잡을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눈을 내리깐 채 생각을 가다듬던 준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했다.

“이 꽉 물고 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서의 왼쪽 볼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준성이 주먹으로 냅다 한서의 얼굴을 때려버린 것이다.

“윽…!”

신음을 낸 건 얻어맞은 한서가 아니라 준성 쪽이었다.

준성은 제대로 써본 적 없는 주먹을 요령 없이 휘두른 탓에 꽤나 강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일반인들이 주먹으로 사람을 패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 다 말도 안 되는 픽션이었다고 생각하며 얼얼한 주먹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다.

침대에서 내려서서 준성의 아픈 주먹을 들어 보인 한서가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차라리 발로 차지 그랬어.”

“봐준 거거든?”

“안 봐주고 마구 패도 되니까 주먹은 쓰지 마. 잘못 쓰면 다쳐.”

벌써 빨갛게 변해버린 준성의 주먹을 차가운 손으로 쓰다듬던 한서의 귀에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후우…. 너 진짜……. 진짜 두들겨 패고 싶은데 봐주는 거야.”

“봐줘도 돼?”

한서는 사실 준성에게 엄청 두들겨 맞을 것까지 상정하고 있었다. 강채이가 남기혁 손에 없다는 것만 확인된 것일 뿐, 그녀가 1일째 밤에 도망쳐서 이때까지 무사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걸 알고 있을 텐데도 준성은 꽤 차분했다.

“네가 찾아갔던 시간이 자정쯤이라고 했지? 예상하기로, 남기혁이 다녀간 건 그보다 30분 전쯤이고.”

“맞아.”

“그럼 채이가 대피소를 나선 건 11시 30분 이전…. 이동 방향은 우리가 향했던 쪽일 테니까…….”

준성의 한숨이 한 번 더 이어졌다. 그 한숨에는 명백한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아마, 채이는 지금도 잘 살아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누군가를 떠올리던 준성이 순간적으로 난감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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