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21)화 (121/240)

- 121화 -

입가에서 무전기를 내린 준성은 깊은숨을 삼켰다.

‘무사했구나.’

버스에서 손전등을 흔들던 사람이 한눈에 채이라는 걸 알아봤어도 불안은 완벽히 해소되지 않았었다. 남기혁이 남긴 휴대폰 속 영상에서도 채이와 같은 단발머리 여자를 보고선 철석같이 그녀라고 믿었던 순간이 있었던 터라, 이번에도 사실은 닮은 사람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장대욱은 오랜 친구답게 준성의 생각을 쉽게 읽어 주었고, 바라던 대로 채이의 무사함을 전해 주었다. 하여튼 예전부터 눈치 하나는 참 좋은 녀석이다.

준성은 무전기를 붙든 채로 강채이의 목소리를 들려달라든지 다친 데는 없는지 등등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무전기를 코트 주머니에 넣은 준성이 멈췄던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그림자처럼 서 있던 한서가 어두운 계단을 비추며 보폭을 맞췄다.

깜깜한 계단을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내려가자, 한 층에 긴장한 기색으로 모여 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필요한 것만 챙겨서 급하게 뛰쳐나온 그들의 얼굴엔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사실 폭탄의 파괴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놀라긴 했지만 7층에는 약간의 지진과 같은 진동 외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창민 말로는 에어컨 실외기 밑에 부착된 시한폭탄들은 처음에 터졌던 폭탄과 같은 물건이거나 더 작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폭탄들이 일제히 시간을 맞춰 터진다고 해도 기껏해야 천장 한 부분이 내려앉는 정도의 피해가 다일 거라고 했다.

폭탄이 터질 곳이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이라면 말이다.

폭탄이 터지고 바닥이 깨져 주저앉을 때, 상당한 무게의 에어컨 실외기들이 밑층으로 주저앉듯 쏟아져 내릴 것이다. 해외에도 사례가 있지만, 국내에도 한쪽에 쏠린 에어컨 실외기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상가 건물이 옥상부터 밑바닥까지 부서져 주저앉는 경우가 있었다.

상가 건물에 비해 훨씬 튼튼하게 만들어진 병원 건물이라 해도 폭탄으로 인해 한쪽 바닥이 철저히 부서지고 나면, 그곳으로 쏟아지는 묵직한 실외기 더미에 의해 건물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남기혁이 남긴 선물은 강준성을 낚기 위한 휴대폰 하나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무식한 새끼.’

속으로 남기혁의 기분 나쁜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꽉 깨문 준성이 눈앞의 문을 노려보았다.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분도 채 되지 않았다.

준성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초조한 눈으로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

빠앙-!

버스의 우렁찬 경적에 모두가 흠칫 놀랐다. 직후, 문밖의 좀비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어디론가 달려가는 소리가 났다.

“다들, 제가 말한 대로 움직여 주세요.”

준성의 말에 일행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에게서 손전등을 건네받은 준성이 미리 불빛을 켜며 문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몇 초 후.

준성이 일행에게 눈짓을 보내며 문을 벌컥 열었다.

캬아아악-!

크엑-!

“온다, 온다, 온다!”

버스에 있던 일행 중 하나가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그가 쓰고 있는 야간투시경에는 버스 뒤를 쫓는 어마어마한 수의 좀비들이 비치고 있었다.

인한병원의 지하 3층 주차장으로 진입한 대욱 일행은 여전히 헤드라이트를 꺼둔 버스로 한층 속도를 높였다. 소리를 어느 정도 흩트려 주던 바깥과 달리, 상당히 폐쇄적인 지하 3층이라서인지 버스 특유의 묵직한 배기음이 좀비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도 모자라 운전수는 아주 과감하게 경적을 1초 단위로 누르는 중이다.

빵-빵-!

캬아아-!

지하 3층에 차 있던 좀비들은 그렇게 경적을 따라 버스를 뒤쫓았고, 유능한 운전수는 좀비들에게 잡힐락 말락 한 거리를 유지하며 태연히 농락하고 있다.

야간투시경으로 자신들에게 몰린 좀비의 수보다도 주변의 텅 비어 가는 공간들을 파악하던 대욱의 눈에, 활짝 열린 비상계단 문에서 튀어나오는 무리가 보였다. 좀비들은 모두 버스를 노리며 몰려 있었기에 비상계단 입구와 그 주변은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평온해 보이기도 했다.

대욱은 비상계단 입구에서 뛰어나온 일행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손전등을 들고서 가장 먼저 뛰어나온 준성과 검은 옷의 남자는 입구 근처에 있던 한 차량으로 향했고, 두 번째 손전등을 든 대머리의 건장한 남자는 다른 일행들을 이끌고서 버스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준성이 달려간 차량의 운전석이 열리는 걸 확인한 대욱은 곧바로 몸을 숙이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이제 다들 창문에 커튼을 치고 보이지 않게 엎드려요. 한 명이라도 창가에 붙어 있으면 그림자 때문에라도 알아볼지 몰라요.”

그들이 탄 버스는 창문마다 커튼이 있는 고속버스였다. 이 커튼이 밖의 시야를 가려 주는 덕분에 차에서 잘 때는 의자에서 편히 자는 것도 가능했다. 어차피 빛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기에 버스 내부가 제대로 보일 리 없었지만, 혹시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걸 보고 집요하게 달려들까 싶어서 커튼까지 확실히 쳐두기로 했다.

커튼을 닫고서 일제히 바닥에 웅크리거나 좌석 사이의 공간에 몸을 비집어 넣는 일행들을 보며 운전수에게도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기다리고 있던 운전수가 경적을 울리던 손을 떼고서 즉시 버스의 시동을 껐다.

경적과 배기음이 사라졌으나, 이미 좀비들은 가득 몰려 있는 상태였다.

쾅쾅쾅쾅!

버스를 에워싼 좀비들이 버스 전체를 두드려댔다. 차체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꽉 닫아 둔 단단한 창문 사이로 좀비들의 괴성이 수도 없이 들려왔다.

갸아-!

흐어어어-!

나름 좀비에게 단련될 만큼 단련되었다고 생각하던 일행들로만 뽑아 온 것이지만, 그런 그들도 지금처럼 좀비 무리에 가득 둘러싸인 순간만큼은 저마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타고 있는 버스가 나쁘지 않은 방어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치고는 상당히 튼튼한 고속버스인 데다가, 일행 중 한 명의 조언을 받아서 어느 공사장에서 강판까지 가져와 덧대어 두었다. 좀비들 수십이 몰려들어 차체를 두드리는 것 정도는 참아 줄 만했다.

좀비들의 괴성이 한층 시끄럽게 소리를 높이던 순간이었다.

빠앙-!

이번엔 다른 곳에서 경적이 울렸다. 버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고 안에 타고 있던 일행들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으므로, 좀비들의 청각은 당연히 새로운 경적을 향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캬학!

버스에 모여 있던 좀비들이 끊기지 않고 길게 울리는 경적을 향해 달려갔다. 그에 맞춰, 마구 흔들리던 버스의 진동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대욱은 준성이 말했던 대로 비상계단 인근에 있던 차량이 내지르는 경적을 들으며, 일행 중 경계담당이던 세 명의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좀비가 모두 이동하면 바로 말해 줘요.”

“OK.”

야간투시경을 쓴 세 명이 속삭이듯 대답하며 각자 좌측과 우측, 그리고 가장 뒷좌석 중앙의 창가에 조심스레 달라붙었다. 밖의 상황을 볼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커튼을 걷어서 밖을 확인하던 세 사람이 곧 저마다 손가락으로 O를 만들어 보이며 신호를 보냈다.

대욱은 버스를 둘러싼 좀비가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운전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운전수가 곧바로 운전대를 잡고는 시동을 걸었다. 차체와 엔진이 통째로 울리는 듯한 소음이 발생하긴 했지만, 쩌렁쩌렁한 경적이 끊이지 않고 울리고 있을 때라서 좀비들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혹시나 버스의 소음 때문에 좀비들의 이동이 분산될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준성의 말대로 그들은 귀를 자극하는 경적에 굉장히 민감했다.

버스에 시동을 건 운전수는 차들이 가득 주차되어 있는 라인을 지나 브레이크를 밟았다. 좀비들의 이동 경로와 아예 반대되는 쪽을 골라서 몸을 숙인 채 빙 둘러 뛰어오던 대머리 남자 무리가 그제야 버스와 만나게 되었다.

운전수가 앞문을 열자마자 대욱과 다른 남자 일행 하나가 대머리 남자 무리의 탑승을 도왔다.

곽두재는 일행들을 먼저 버스에 올리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준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준성의 말에 따르면 비상계단 입구 근처에 대충 주차된 차량 중에 그와 도한서가 함께 타고 왔던 차가 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은 운전석을 꼼꼼히 잠가 둘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한 상태가 아니었고, 그랬기에 이를 써먹기로 했다.

한서와 단둘이 남은 준성은 7층에서 자갈이 든 폭탄을 발사할 때 썼던 지지대용 쇠파이프를 챙겨, 이를 운전대와 운전석 시트에 딱 맞게 끼웠다. 그로 인해 발생한 경적은 쇠파이프를 빼지 않는 한 끝도 없이 울리게 되어, 좀비들의 청각을 부술 것처럼 자극할 것이다.

준성의 예측대로, 버스가 조용해지고 새로운 경적이 울리자마자 좀비들은 떼를 지어 달려갔다. 이제 남은 건 경적을 세팅하기 위해 남았던 두 사람이 무사히 이 버스에 탑승하는 것뿐이다.

저 멀리, 경적을 울리는 차량으로 달려드는 좀비들과 반대 방향을 골라 버스로 뛰어오는 준성과 한서가 보였다.

반쯤 안도한 두재가 가장 늦게 버스에 올라타던 그때.

쿠구구궁-!

선명한 폭발음 대신, 건물 전체가 뒤흔들리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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