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32)화 (132/240)

- 132화 -

‘아, 아닐 거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알고?’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거친 숨을 삼켰다.

‘엄마는 인한시에서 한참 먼 허종시에……!’

-허종시 여원동…….

경오의 생각을 자르며 끼어든 남기혁의 음성이 익숙한 주소를 읊었다. 주소가 이어질수록 경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고, 다리가 풀려버린 그는 딱딱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남기혁이 말한 주소는 분명 엄마가 운영하는 허종시의 청과물 가게였다.

-집 주소도 불러줘?

경오의 반응을 빤히 보고 있는 것처럼 웃는 남기혁의 목소리가 너무도 소름 끼쳤다.

-내 말을 더 잘 믿을 수 있도록 선물도 준비해뒀어. 그것까지 보고 내 말에 따를지 말지 결정하도록 해.

귀신의 속삭임처럼 차갑고 스산하게 다가왔다.

남기혁이 말한 ‘선물’이 무엇일지 겁부터 났다. 어디에, 어떻게, 뭘 준비해놨는지 모르는 데다가 물어볼 수도 없으니 답답함과 동시에 막연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녹음된 음성은 매정하게도, ‘선물’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자신이 뭘 해야 할지를 명령할 뿐.

-엄마를 구할 생각이 들면 자정에 맞춰서…….

얼마 남지 않은 음성을 듣는 동안 반쯤 혼이 빠져나갔다.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면서도 귀에 댄 자그마한 녹음기를 절대 놓지 않았다. 엄마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하니, 듣기 싫고 무시하고픈 마음과 달리 자꾸 듣게 된다.

온통 사악한 웃음소리가 깔린 것 같던 음성이 거의 끝나갈 즈음.

남기혁이 상투적이지만 당연한 당부를 남겼다.

-내 말을 따를 거라면 아무에게도 이 일을 얘기하지 마. 특히 강준성에겐.

남기혁의 차갑고 비열한 목소리가 일순 다정하게 변했다.

-그 녀석은 정말 냉정하거든. 네가 내게 붙었다는 걸 알면 가차 없이 버릴 거야.

내용과 달리 무슨 추억이라도 곱씹는 듯이 말하던 남기혁이 다시금 키득거렸다.

-그러니까 표정 관리 잘해. 들키지 말고.

경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딱딱히 굳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길가에 엄마 머리가 걸려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섬뜩한 말을 마지막으로 음성이 뚝 끊겼다.

경오는 바들거리는 두 손으로 자그마한 녹음기를 꼭 쥔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경오는 자신의 엄마를 떠올려 보았다.

잔소리가 심하긴 하지만 그만큼 하나뿐인 아들에게 애정이 각별했고, 무슨 일이 생겨도 가족을 1순위로 생각했다. 어찌나 소박한지, 자신을 챙기기보다는 홀로 떨어져 사는 아들을 걱정하며 그의 냉장고를 매주 채워주는 걸 삶의 낙 중 하나로 여겼다.

그런 엄마를 외면할 수 있을 자식이 얼마나 될까.

차마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숨만 끅끅 삼켰다. 그러다가 소매로 눈물진 눈가를 북북 문질렀다.

‘아니야. 아직…, 아직 단정하긴 일러.’

경오는 눈물을 멈추기 위해 연신 심호흡하며 머리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영상의 준성이 도, 동생도 가짜일 거라고 했잖아. 교활한 사람이니까, 아, 아마 이것도 거짓말하는 걸 거야.’

엄마의 가게 주소까지 꿰뚫고 있던 게 마음에 걸렸지만, 미끼를 덥석 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 일을 준성과 다른 일행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남기혁은 확실히 믿을 수 없는 남자이지만, 경오는 만에 하나라는 확률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경오는 남기혁의 말이 ‘진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 * *

“사진 속에 있던 인질 중 한 명이 네 엄마였겠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경오가 한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유슬이 보여준 피투성이 동생의 사진.

준성은 짓밟히고 있는 남자의 뒤로 보이는 묶인 사람 중에서 김태주를 찾아내었다. 그는 남기혁이 유슬에게 사진을 남기고 그녀를 살려 보낸 이유가 이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

강준성에게 미친 남기혁의 머리라면 이런 방식으로 그를 자극하는 걸 즐기고도 남을 테니까.

다만, 사진 속에는 준성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요소가 하나 더 숨어있었다.

목숨의 위협을 받은 ‘엄마’의 겁먹은 얼굴은 ‘아들’을 움직이게 하기 충분했다.

침대에 주저앉듯 털썩 걸터앉은 경오가 눈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어떻게… 안 거야…?”

“그때, 강준성을 보던 네 눈빛만 달라졌었으니까.”

덧붙이자면, 모두가 사진을 보며 남기혁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던 찰나에 황경오 혼자 눈동자를 떨며 준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진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서를 올려다보던 경오가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넌 진짜… 준성이밖에 모르는구나.”

경오는 병원이 무너지기 전까지 자신이 나름 잘 연기했다고 생각했다.

없던 연기력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진에서 엄마를 찾자마자 굳어가는 표정을 바꾸고 눈물이 차오르려는 걸 입 안을 씹어대며 겨우 참았다. 이후에 자신이 쓰던 병실에 돌아가서도 아무 소리도 새어 나갈 수 없도록 베개에 얼굴을 묻고서 남몰래 울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찰나의 시간에 본능적으로 보내버린 죄책감과 미안함의 눈빛만큼은 감출 수가 없었나 보다. 사진에서 눈을 떼자마자 담아버린 복잡한 감정은 다른 일행들의 것과 전혀 다른 빛을 품고 있었다.

이제 보니, 도한서는 강준성이라는 사람을 그 본인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그에게 보내는 시선까지도 낱낱이 살피고 있다니, 이 정도면 제아무리 준성이라도 한서를 무서워하지 않을까.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경오가 자신이 한 짓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진에서 엄마를 찾은 난… 그놈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어. 시, 시키는 대로 자정이 될 때 맞춰서 그…, 신호를 보내기 위해 비품실 서랍의 버튼을 눌렀는데…….”

“그 버튼이 사실은 옥상의 폭탄을 가동시키는 역할이었겠죠.”

심각한 얼굴의 창민이 끼어들었다. 경오는 창민의 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떨었다.

“나는, 진짜 나는… 그게 폭탄인 줄 몰랐어…. 그냥 신호를 보내는 거라고 들어서…….”

“신호인 건 맞아요. 불빛도 거의 없는 곳에서 그만한 폭발이 일어나면 멀리서도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좋은 신호가 되죠.”

남기혁의 교묘한 말장난에 창민이 짧게 혀를 찼다. 애초에 진짜 목적은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폭탄은 다른 것들과 구조가 같긴 했지만 유일하게 시간을 나타내는 패널이 없었어요. 즉, 그건 시한폭탄이 아니라 즉발형 폭탄이었다는 거고, 아마도 경오 형이 누른 버튼이 폭발 스위치였겠죠.”

“즉발형 폭탄…. 하지만 다른 것들은…….”

“네, 다른 것들은 전부 10분의 제한 시간을 가진 시한폭탄이었어요.”

창민은 멈춰 있던 옥상의 폭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한 데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단순히 첫 번째 즉발형 폭탄과 함께 가동해버린 것뿐이라면 서로 원격으로 연결되어 있었겠거니 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0분이라는 시간이 첫 폭발 직후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폭탄들이 가동한 건 폭발 후로 몇 분이 더 지난 뒤였어요. 그 전까진 아예 패널에 불도 들어오지 않았죠.”

“어어…? 그럼… 시한폭탄들은 몇 분 뒤에 가동하도록 맞춰져 있었던 건가…?”

경오가 볼에 눈물이 흐르는 걸 닦는 것도 잊은 채 창민을 올려다보았다.

대답이 나온 건 한서에게서였다.

“아니, 가동한 건 강준성이 ‘폭탄을 확인하고 난 후’였어.”

모든 걸 준성을 기준으로 두고 생각하는 한서다웠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확실히 그럴듯했다.

“사람을 판별할 수 있는 거리에 숨어있던 놈들이 강준성을 확인하고 원격으로 폭탄을 가동시킨 거야. 강준성이라면 첫 번째 폭발의 진원지를 살피기 위해서라도 직접 올라갈 거라고 예상했겠지.”

“왜 그런 짓을…….”

한서가 못마땅한 눈으로 창가를 노려보았다. 창문 밖에는 깜깜한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 어딘가에 있을 인물을 떠올리니 기분이 나빠졌다.

“강준성이 죽는 걸 원치 않으니까.”

옥상에서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준성이 그런 늦은 밤에 올라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원격으로 폭탄을 가동시켰다면 손을 써볼 새도 없이 건물과 함께 매몰되었을 게 당연했다.

옥상의 폭발은 외부에 있는 자들에게 있어 ‘타깃이 폭탄을 확인하면 곧바로 가동할 준비를 해라’라는 준비 사인이었던 거다.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하듯, 탈출을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10분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10분은 일견 더없이 촉박해 보였지만, 준성은 이만한 시간 동안 병원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음을 자신했고 실제로 해내 보였다. 상당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남기혁은 준성이 발버둥 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언제나 가혹한 상황을 만들어 들이밀려 한다.

한서가 기분 나쁜 건, 남기혁의 그러한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 한쪽에 놓여 있는 투박한 날것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이다.

‘기분 나빠.’

강준성을 손바닥 위에 두고 몰아붙이는 건 자신 하나면 족하다.

꿈속에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황경오.”

한서는 칼날을 심은 것 같은 예리한 눈으로 황경오를 내려다보았다. 눈빛 하나에 압도되어버린 경오가 숨을 삼켰다.

“그놈 말대로 강준성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널 쳐내게 될 거야. 너 하나 때문에 일행 모두가 위험에 처했던 거니까.”

일행의 안전을 위해 낯선 생존자를 외면하던 강준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 그치만 난…….”

창백한 얼굴로 입가를 떨던 경오가 얼른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미, 미안해! 난 진짜 폭탄 같은 것도 몰랐고 그, 그땐 그냥 엄마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러니까 입을 다물어주는 대신, 네가 ‘일행을 위해’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

“어…?”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든 경오 앞에 한서가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의 서슬 퍼런 눈동자가 경오를 집어삼킬 것처럼 마주 보았다.

“강준성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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