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대욱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왜 그놈하고 둘이 가? 차라리 나하고 가든가, 멤버 다시 짜.”
“이 녀석이 아니면 안 돼.”
준성의 단호한 대답에 대욱의 미간이 구겨진 채 꿈틀했다.
아무래도 장대욱은 도한서를 상당히 싫어하게 된 모양이었다.
준성이 아는 장대욱은 워낙 감도 좋고 눈치도 빠른 녀석이라, 어쩌면 어제 한서와 잠깐 부딪쳤을 때 뭔가를 느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을 때의 도한서가 어떻게 구는지를 모르니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네 꿈에도 나온 적 없는 사람이라며. 어떤 놈인지도 잘 모르면서 왜……!”
“그게 이유거든.”
준성은 대욱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마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며 말했다.
“내 꿈에 나온 적 없는 사람은 도한서 한 명뿐이야.”
준성이 시선을 돌려 도한서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곧바로 시선이 맞닿았다.
“내 꿈에 나온 적이 없다는 건 남기혁도 이 녀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야.”
사실은 마지막 회차에서 죽어갈 때 어렴풋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 만난 게 도한서였을 거라고 확신하게 된 건 그의 과거와 연구소의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남기혁은 강준성의 꿈속 마지막 회차를 알고는 있었지만, 도한서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혈액원 연구소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진짜 해결책’인 도한서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마지막 회차가 되어서야 간신히 찾아냈던 ‘가짜 해결책’까지 가로채 갔을 정도이니.
그러한 판단하에, 준성은 남기혁이 도한서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갖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가로챈 가짜 해결책은 도한서에 관한 정보가 쏙 빠져 있는 상태라서 유추조차 못 할 것이다.
준성이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없는 다른 일행들도 그렇고, 여러분도 전부 자신의 성격과 의지를 기반으로 움직일 거예요. 저도 그 정보를 기반으로 여러분을 일행으로 삼으려 했고, 적재적소를 찾아 적절히 활용하려고도 했죠.”
마치 게임 속 캐릭터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운용한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여러분의 성격과 의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저뿐만이 아니에요. 남기혁도 마찬가지죠.”
일행들이 움찔하며 일제히 굳은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곽두재는 남기혁이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던 걸 떠올리며 잘린 팔을 매만졌다.
“같은 상황을 수없이 겪으면서 여러 시도를 해보던 제 움직임을 전부 예측하는 건 어려울 거예요. 반면, 저와 함께 움직이는 여러분이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걸 이용해서 함정을 파놓거나 교묘하게 이용하면 결국 남기혁 뜻대로 되고 말겠죠.”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황경오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나마 고개를 숙인 상태였기에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황경오는 원래 겁도 많고 심약한 편이라는 걸 알기에, 준성도 그의 파리한 안색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도한서가 필요한 거예요.”
남기혁은 도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지조차 모른다.
그야말로 최고의 변수라고 할 수 있었다.
대욱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어느 정도 납득한 듯했다.
게임으로 비유해보자면, 상대는 이쪽 캐릭터들의 주요 능력과 스타일을 모두 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안에 처음 보는 낯선 신(新)캐릭터가 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도 모르고 스타일도 모른다. 그러니 그를 막는 대책도 세울 수가 없어서 섣불리 함정을 만들 수도 없다. 함정이 성공하려면 어디까지나 ‘적 캐릭터가 이렇게 나올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니, 그렇지 못한 함정은 그저 시간 낭비에 쓸데없는 짓이 된다.
씁쓸하지만, 대욱은 준성의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만약 저 녀석이 배신자가 되면?”
전략을 세우는 리더마저 신캐릭터에게 뒤통수를 맞게 될 수도 있다.
“남기혁이라는 놈에게 붙지는 않더라도 막상 위험할 때 널 버리고 도망갈 수도 있잖아.”
“그럴 일은 없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 준성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도한서를 바라보았다.
간밤에 채이에게도 말했다시피, 도한서에겐 자신을 버리고 떠난다는 선택지가 없다.
“이 녀석은 죽어도 나 못 버리거든.”
봐.
지금도 저 눈에 비치는 건 나뿐이잖아.
* * *
이후, 준성은 일행에게 혈액원 연구소의 제1 실험실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숨겨져 있던 제1 실험실과 그 연구소에서 왜 좀비 바이러스가 시작된 건지 알게 된 일행의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 분노와 경악, 두려움이 집결된 복잡한 얼굴은 확실히 보기 힘든 것이었다.
‘도한서에 관한 것까지 말했다간 난리가 났겠네.’
준성은 도한서에 관한 것만 쏙 뺀 내용을 되짚어보았다.
혈액원 연구소를 빠져나오는 중에 한서와 단둘이 쓸려 들어간 공간은 숨겨져 있던 진짜 실험실인 ‘제1 실험실’이었고, 그 안에서 연구소가 가진 비밀을 알게 되었다.
연구소의 이들은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을 만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노숙자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갖은 실험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변이 바이러스가 발생하는데, 이게 현재 인한시를 기점으로 퍼진 좀비 바이러스이다.
혈액원 원장과 연구원들은 만병통치약을 만드는 대신에 세계에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이를 치료할 백신을 만들어서 큰돈을 얻고자 했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시점 즈음엔 실험이 상당히 진행되어, 이미 백신을 거의 완성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 좀비가 된 실험체가 연구소 안을 휘저어버렸고, 결국 바이러스는 밖까지 퍼져 나가고 말았다.
모든 연구원이 좀비가 되거나 죽어버린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아 상황을 엿보던 혈액원 원장은 그 혼자라도 백신을 만들기 위해 연구소의 연구 자료 원본과 백신이 될 실험용 혈액을 훔쳐 자택으로 달아났다. 준성이 꿈에서 찾아냈던 해결책이자, 남기혁이 가져간 제2 실험실의 연구자료는 그저 눈속임용이었던 것이다.
진짜 연구 자료와 백신의 주재료인 혈액은 모두 혈액원 원장의 자택에 있었다.
준성은 자신이 전한 내용을 곱씹어보면서 남몰래 도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구소와 아무 관련도 없는 것처럼 눈빛 하나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도한서의 양부모까지 맥락의 중앙에 집어넣을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들이 명확하게 수면 위에 올라와 있으면 도한서의 존재도 드러날 것이다. 그가 백신이라는 것까지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때가 있는 만큼 아무런 얘기도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모든 죄는 ‘혈액원 원장’에게 있다.
그렇게 귀결시키기로 했다.
준성은 도한서가 그들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으로 남길 바랐다.
도한서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전부 다 자신이 새로 구성해줄 거다. 그들의 더러운 티끌조차 묻히게 두지 않겠다.
연구소를 벗어날 때 다짐했던 바를 상기하며, 준성은 어두운 얼굴의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와 도한서를 제외한 전원은 버스를 타고 이동할 겁니다. 비교적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는 루트는 제가 짜겠지만, 이후에는 두재 아저씨에게 달려 있어요.”
갑자기 지목받은 두재가 눈을 들자, 준성이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군사 비밀통신 코드, 알고 있죠?”
두재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해한 듯, 헛웃음을 보였다.
“정말 놀랍군요. 그런 것까지 알고 있습니까?”
“꿈속에서 아저씨와 같이 움직인 게 몇 번인데요.”
준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작게 웃어 보였다.
곽두재가 밀착 경호하던 인한시의 시장은 군인 출신 정치인이었다.
특수전사령관, 야전군 사령관을 역임한 그는 자신만의 군사 무선 통신용 비밀 코드를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이 비밀 코드는 전화를 하듯이 연락을 주고받는 역할이 아니라, 본인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다는 사인을 보내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일종의 생존 신고나 다름없다.
정작 인한시장은 죽어버렸지만, 곁에서 경호하는 중에 우연히 그 코드를 알게 된 곽두재는 바로 이곳에 있다.
그게 강준성이 꿈속에서 반드시 곽두재와 합류하려던 이유 중 하나였다.
문제는 비밀 코드를 입력할 수 있는 무선 통신 장치가 한정된 곳에 마련되어 있다는 거다.
“비밀 코드를 입력할 수 있는 장치는 아저씨가 알고 있는 인한시 외곽의 피난소에 있어요. 그곳에서 비밀 코드를 입력하면 외부에서 인명구조를 위한 군인들이 도착할 겁니다.”
“하지만 과연 와줄까요? 이미 인한시 밖까지 좀비가 가득하다고 들었는데.”
두재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준성은 걱정 말라며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와줄 겁니다. 인한시장이 특수전사령관 때부터 군부와 주요 정치인에게 목줄을 걸어둔 게 있거든요.”
정치인이 모두 깨끗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추호도 없었지만, 인한시장은 특히나 음험한 자였다. 손에 쥐어둔 목줄의 개수와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준성조차 완벽히 짐작할 수가 없다.
그래도 그 덕분에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군부가 움직여줄 수 있다. 막상 그들이 마주한 건 목줄을 잡고 있던 인한시장이 아니라 웬 생존자 무리겠지만.
“그래도 걱정이야. 구하러 왔다가 막상 인한시장이 아니라면 버리고 갈 수도 있어. 이런 상황일수록 군은 매정하니까.”
군의 복잡한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한 창민이 여전히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는 여차할 때 군이 얼마나 매정해질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알아요. 그래서 ‘진짜 해결책’을 찾으려는 거예요.”
꿈속에서 인한시를 봉쇄한 훈련된 군인들은 피난소에 합류하지 못한 시민들에게 총부터 겨누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고, 일말의 동정심도 갖지 않았다. 그래야만 피난소의, 나아가 인한시 밖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이쪽도 다른 사람들을 지킬 방법을 취해, 군에게 직접 보호까지 받을 수 있는 완벽한 생존권을 확보하겠다.
그게 준성이 세운 마지막 플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