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한서는 저도 모르게 전율하며 입술을 떨었다.
준성의 절제된 감정 속에서 꿈틀거리는 가느다란 뱀 같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계속 피하려던 거 아니야?”
준성이 보인 여태까지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랬다.
남기혁은 강준성이 안전 루트를 구축하는 걸 마냥 두고 보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될 날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강준성이 세운 ‘전제 조건’을 차근차근 파괴하며 건드려왔다. 꿈속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던 ‘군의 인한시 봉쇄 성공’이라든지, 강준성의 손발이 되어준 동료들이라든지.
그럼에도 준성은 남기혁과 맞서겠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난 끝까지 도망칠 생각이었어.”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말처럼, 습관적으로 붕대 감긴 목을 매만지는 저 손이 떨리는 것처럼.
준성이 그만큼 남기혁에 대한 잠재된 두려움이 너무 커서 감히 생각도 못 하는 줄 알았다.
트라우마가 생길 만큼 두려워 마지않는 자에 한해서는 천하의 강준성도 어쩔 수 없구나.
그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대로 남기혁의 그물을 교묘히 빠져나가, 그조차 모르는 어딘가로 도망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목을 매만지던 준성의 손에서 어느새 떨림이 잦아들었다.
“난 말이야, 나 혼자 성가신 것뿐이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내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든,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든, 어떤 미친 또라이 새끼가 이상한 데에 꽂혀서 쫓아다니든 말든, 상관없다고.”
피식 웃으며 체념하듯 말을 흘리는 것과는 달리, 준성의 눈동자에는 보기 힘든 독기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놈은 보란 듯이 내 사람들을 하나하나 건드리고 있어. 아직 위협이 닿지 않은 사람들도 조만간 그놈이 쳐둔 그물 때문에 위험해질지도 몰라.”
“그럼 팀을 나누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닌가? 네가 없는 사이에 그놈이 버스 팀을 전부 죽여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지 않게 하려고 나눈 거야.”
준성이 팀을 나눈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변수에 변수로 대응한다든가,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네가 그놈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아주 적격이거든.”
준성의 의미심장한 눈동자가 한서를 마주했다.
강준성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는 모든 행동을 함께하는 자가 있다면 남기혁에게 있어 최대의 눈엣가시일 것이다.
강준성이 예측하길, 두재 일행의 꼬리를 밟은 도청 집단은 인한병원을 주시하며 폭탄을 터뜨렸고, 이후의 행보를 따라 이 모텔 인근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텔에서 나서는 이들이 두 패로 갈라지는 것도 그들이 당연히 확인할 수 있을 터.
상황에 따라 좀비들을 마구 치어가면서 달려야 하는 불도저 같은 버스를 쫓느니, 당연히 도보로 이동하는 최우선 타깃 강준성에게 따라붙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준성의 곁에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된 남기혁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준성은 남기혁이 왜 제 동료들을 위협하고 노렸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계획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를 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그냥 ‘질투’다.
그로서는 절대 가능할 리 없는 ‘아군’이라는 명목으로 제 곁에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드니까.
그렇다면 이를 역이용하면 된다.
“내가 널 다른 어떤 아군보다 신뢰한다는 걸 알게 되면 그놈이 어떻게 나올 것 같아?”
“날 죽이고 싶어지겠지.”
“맞아.”
준성이 냉정한 표정으로 한서를 마치 시험하듯 바라보았다.
“난 남기혁이 당장 널 죽이고 싶게끔 만들 거야.”
즉, 미끼로 삼을 생각이다.
한서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치켜 올라갔다.
“아주 좋아.”
한서의 팔이 준성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바짝 가까워진 준성의 얼굴을 마주한 한서의 눈에 분명한 열기가 돌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미끼답게 굴어줄게. 하지만 넌 날 죽게 놔둘 생각이 없잖아.”
“당연하지. 애초에 그 새끼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너 때문이니까.”
예상치 못한 준성의 발언에 한서의 머릿속이 일시적으로 멈칫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준성은 목소리를 멈추지 않고 이어 말했다.
“내가 말했지? 널 죽이려는 새끼가 있으면 내가 죽이겠다고.”
준성이 두 팔을 한서의 목에 둘렀다. 그대로 좀 더 끌어와, 이마를 맞대었다. 싸늘하던 한서의 이마에 닿은 준성의 열기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남기혁은 언제고 널 죽이려고 들 거고, 난 내 ‘정당성’에 따라 그 새끼를 죽일 거야.”
정당성.
도한서가 강준성에게 부여받은 가장 선명한 목줄이었다.
동시에, 도한서가 강준성에게 채운 목줄이기도 했다.
“네 과거를 날조하고 현재를 바꿔주기로 한 이상, 난 네 미래까지 전부 책임질 생각이야. 그걸 위해서라도 남기혁은 내 손으로 죽여야 해.”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으로 둘러싸인 칠흑 같은 눈동자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깊이 침잠해 있다.
강준성은 알까.
그의 어두워진 눈동자가 제 눈에는 그 무엇보다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걸.
이대로 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다.
한서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두 손을 뻗어, 준성의 얼굴을 붙잡았다. 잠시라도 피할 수 없도록 단단히.
“어떤 느낌이야?”
한서는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재차 물었다.
“지금, 어떤 느낌이 드는데?”
자신을 위해 타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강준성.
정당성을 얻은 강준성의 살의는 과연 어떤 감각일지, 지금 당장 속까지 모두 찢어발겨 하나하나 핥아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강준성은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 게 아닐까.
필연적인 살인을 앞두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고양감이라든지 온 신경이 예민해지는 감각이라든지.
뭐든 좋았다.
강준성이 자신과 같은 어그러진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섹스를 앞뒀을 때만큼 흥분되는 기분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한서에게 준성이 그와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좆같아.”
* * *
한 시간 후.
모텔에 비축된 물품들과 먹을 것들을 알뜰하게 챙긴 버스 팀은 준성과 한서를 놔둔 채로 차를 출발시켰다.
준성은 출발 과정에서 꽤나 소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큰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 소란의 주범으로 예상했던 건 강채이였다.
“오빠보다 머리가 나쁠진 몰라도 아예 바보는 아니야.”
버스가 출발하기 몇 분 전, 준성을 노려보던 채이가 했던 말이었다. 옆에 선 대욱이 한 시간 가까이 상황 설명을 해준 덕인지, 채이는 어린애처럼 안 된다고 매달리는 것보다 오빠의 생각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게 최선이라는 걸 납득한 것과 별개로 펑펑 울기라도 했는지, 어제오늘 여전히 두 눈이 새빨갛다.
채이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준성에게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제때 안 돌아오면 자신이 찾으러 가서 죽여버리고 말 거라는 무서운 협박을 남겼다.
뒤이어 준성의 뒤에 서 있던 한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빠한테 이상한 짓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한서가 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상한 짓이 아니면 뭐든 해도 되는 거지, 후배님?”
도발 같은 말에 채이가 뭐라 쏘아붙이려는 것처럼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눈치 좋게 끼어든 준성이 채이를 반강제로 얼른 버스에 태워버렸다.
준성은 총 책임자가 된 대욱에게 채이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며 그들이 탄 버스를 보내주었다.
이제 모텔에 남은 건 강준성과 도한서뿐.
준성은 미리 챙겨둔 자신의 백팩을 집어 들었다.
“우리도 가자.”
허리에 매어둔 마체테를 꺼내든 준성이 제게서 백팩을 가져가는 한서에게 무기를 하나 내밀었다. 그것은 모텔 관리인이 쓰던 방에 있던 주방에서 슬쩍한 식칼이었다. 준성의 마체테와 엇비슷한 길이의 얇은 검신을 가진 그것은 보통 ‘회칼’ 혹은 ‘사시미’라고 부르는 물건이었다.
왜인지 한서에게 어울리는 무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밀착하지 마. 좀비가 아예 안 다가오면 감시하는 놈들도 이상한 걸 눈치챌 거야.”
“밀착만 안 하면 되지?”
“그래.”
좀비들은 강준성이 ‘백신’과 밀착하지만 않으면 게걸스럽게 달려올 것이다. 그런 좀비들을 둘이서 처리해야 하니 다소 힘든 길이 되겠지만, 위험하진 않았다.
아껴두었던 도한서의 피.
준성은 붉은 피가 든 얇은 채혈 통을 열어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비릿하고 진한 피 맛이 혓바닥을 훑고 지나가, 작은 목구멍을 쓸며 단숨에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다 쓰면 그냥 내 목에 이 박고 마셔줘.”
“내가 뱀파이어냐? 그리고 빨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이빨이 날카롭지도 않아.”
“그럼 내가 내 목 째고 줄게.”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닌데.”
한서의 갸웃하는 얼굴을 향해 질색한 눈빛을 보내던 준성이 왼손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버스 팀이 안전 루트의 첫 번째 길에 접어들었을 시간이다.
“우리도 가자.”
준성이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뒤를 바짝 따르며 허공에 회칼을 휘둘러보는 한서의 모습에서 묘한 생기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