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원장이 이영인의 시체를 끌고 가던 지훈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아직도 영인이를 좋아해서 시체를 가져온 줄 아는 거야?!
-그럼 아니야? 영인이가 원하는 거라면 항상 고분고분하게 다 들어줬잖아.
지훈은 입가에 띤 조소를 숨기지 않았다.
-영인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한 게 누구였더라.
-그건…….
원장이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내리까는 사이, 지훈은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던 그에게 발길질을 했다. 피할 새도 없이 불시에 얻어맞은 터라, 원장은 맥없이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원장을 향해 짧게 코웃음 친 지훈이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손을 꿈틀거리는 영인의 시체가 붙잡혀 있었다.
쓰러졌던 원장이 급히 몸을 일으켜서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화면 밖으로 잠깐 나갔다가 돌아온 원장의 손에는 상당히 날카로워 보이는 식칼이 들려 있었다.
-기다려!
두 손으로 식칼을 붙잡은 원장이 그 끝을 지훈에게 겨누었다.
뒤를 돌아본 지훈은 자신에게 겨눠진 식칼을 보며 움찔했지만, 이내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걸로 뭘 어쩌려고? 찌르게?
-…….
마른침을 꿀꺽 삼킨 원장이 결연한 얼굴을 했다.
-영인이는 두고 가.
-좀비가 된 영인이를 곁에 둬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두고 가라고 했어, 도지훈.
-이런 곳에서 썩게 놔둘 순 없잖아.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네 손으로 죽였잖아!
-바이러스가 퍼지는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되게끔 배려한 것뿐이야.
-거짓말! 너 혼자 살려고 그랬던 걸 모를 줄 알아?! 목 졸라 죽이고 버려둔 주제에!
지훈이 픽 웃으며 원장을 바라보았다.
-맞아. 내가 버렸지. 근데 후회되더라고.
불같이 화를 내던 원장이 멈칫했다.
혹시나 자신의 부인을 죽인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을 법한 원장의 얼굴이 지훈의 다음 말에 의해 형편없이 구겨져 버렸다.
-바이러스를 품고 이제 막 죽어버린 ‘싱싱한 실험체’를 두고 나온 게.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그 말만으로도 지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영인이를 죽인 거로도 모자라, 이젠 실험체로 쓰겠다고?!
-이대로 쓸모없이 썩어가는 건 영인이도 원치 않을 거야.
-개소리하지 마!
원장이 지훈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의 기세만 보자면 단번에 지훈의 심장을 식칼로 꿰뚫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서슬 퍼런 식칼의 끝은 지훈의 가슴팍 바로 앞에서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뚝 멈춰버린 칼이 원장의 손과 함께 부들부들 떨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훈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이 될 수 있는 방법이 뭔 줄 알아?
원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식은땀이 밴 그의 얼굴은 지금도 수많은 갈등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듯했다.
그런 원장을 바라보며 지훈이 말을 이었다.
-절망적인 재앙을 해결해주면 돼.
도지훈과 이영인, 그리고 원장은 ‘영웅’이 되길 바랐다. 이를 위해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만병통치약을 목표로 삼아 거듭 연구에 몰입했다. 소수의 인간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잔학무도한 실험을 할 정도로 사람이길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지훈은 만병통치약을 이용한 영웅보다, 다른 걸 더 원하게 된 듯하다.
지훈은 아까보다 좀 더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영인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닫힌 눈가에는 핏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만두자니까!
목소리 높여 외친 원장이 지훈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이제 지쳤어. 영인이도 죽어버렸고, 더 이상 연구를 계속하고 싶지도 않아. 매일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우리가 대학 때부터 함께 꿈꿔왔던 건 이런 게 아니잖아!
-그래서? 이때까지 우리가 이뤄놓은 모든 성과를 포기하기라도 할 셈이야?
-그래! 유일하게 날 버티게 해줬던 영인이도 이젠 없어! 다 그만둬버릴 거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치는 원장의 눈가엔 어느새 물기가 서려 있었다.
-난 감염된 영인이를 정부에 넘기고 실험에 관한 모든 걸 밝힐 거야.
지훈의 얼굴에서 그제야 미소가 사라졌다. 싸늘하게 변해버린 지훈이 원장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알아, 모두 각오한 일이야.
원장의 단호하던 얼굴이 점점 무너져내렸다.
-지훈아…. 이제 그만 하자…. 어차피 백신도 거의 다 만들었잖아. 내가 도와줄 테니까 백신 만들어서 너부터 살고…, 이후로 더는 사람 갖고 실험하지 말자. 죄라면 내가 그냥 다 덮어쓸게. 영인이가 죽어서 좀비가 된 것도 다 내 탓으로 만들 테니까 제발…….
원장은 모든 죄를 본인이 뒤집어쓰겠다고 말하며 애원했다. 그에게 있어 도지훈은 이영인만큼이나 소중한 친구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원장을 빤히 노려보는 지훈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고 무서웠다.
-그렇군.
지훈이 제 손에 붙잡혀 있는 이영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꿈틀거리는 움직임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그 전에, 마지막 실험이 보고 싶지 않아?
이때만은 영인을 내려다보는 지훈의 눈빛이 한없이 다정해 보였다.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 실험……. 영인이가 그토록 원하던 거니까 네가 보는 앞에서 직접 시작해 볼까 하는데.
-뭐, 뭐?
지훈의 말에 경악한 원장이 식칼을 고쳐 쥐었다. 위협도 되지 않는 떨리는 식칼 끝이 다시금 지훈의 가슴을 겨누었다.
-하지 마.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찔러서라도 막을 거야!
원장의 떨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은 지훈이 그의 식칼을 바라보았다.
-찔러. 날 막을 수 있는 건 지금밖에 없어.
기세와 달리, 원장은 반 발자국도 더 다가서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짧게 한숨을 쉰 지훈이 식칼 든 원장의 손을 붙잡았다. 움찔하는 손을 이끌어, 그 칼끝을 자신의 이마 언저리까지 올려준다.
-죽이려면 머리를 노려야지. 안 그러면 나도 죽은 채로 네 집에서 좀비가 되어버릴 테니까.
막을 생각도 없이 무방비하게 자신의 머리를 내어준 지훈은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웃기만 했다. 원장은 여전히 식칼을 두 손으로 쥔 채, 지훈의 머리를 찌르지도 못하고 멈춰 있었다.
그렇게 묵직한 정적이 흐를 때.
-크훅, 칵…!
꿈틀거리기만 하던 영인이 갑자기 얼굴을 번쩍 들었다. 천장의 조명을 받은 그녀의 부릅뜬 두 눈에선 어느새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 영인아….
원장이 뒤로 물러나며 신음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
-캬학!
허리를 꺾으며 뻣뻣하게 변한 온몸을 비틀어대는 영인의 모습은 절대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녀의 피막 덮인 두 눈에서 조금 질척해진 피눈물이 흘러나오고, 괴성을 지르기 시작한 입에서는 멈출 수 없는 핏덩이가 줄줄 토해졌다.
영인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뒤로 물러나던 원장은 기어코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직후.
-캬아아악-!
완전히 좀비화가 진행된 영인이 원장에게로 갑자기 두 팔을 내뻗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피로 얼룩진 그녀의 치아가 당장이라도 원장의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녀를 붙잡고 있어 준 지훈 덕분에 원장이 물어뜯기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걱정 마. 널 감염시킬 생각은 없어.
지훈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원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서의 혈액을 마신 상태인 그는 영인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내가 만약 백신을 만들기 전에 좀비가 되어버리면 우리의 연구를 기억하고 이어 나가줄 사람이 필요해. 그게 가능한 건 너밖에 없어.
-나는…, 싫어. 그만둘 거라고 했잖아.
-할 수밖에 없을걸.
원장에게 달려들고자 발버둥 치는 영인을 현관까지 질질 끌고 간 지훈이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도한서의 혈액을 이 집에 빼돌려둔 건 이미 알고 있어. 그 정도 양이면 가족 모두가 인한시를 무사히 빠져나가고도 남겠지.
도지훈은 원장이 창고에 따로 혈액을 빼돌려서 보관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려 했었고, 이젠 그 혈액을 이용해 ‘재앙이 닥칠 현실’을 빠져나가라 말했다.
원장이 멈칫한 것도 잠시.
그는 현관문을 벌컥 열어버리는 지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도지훈!
지훈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원장을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웃어주었다.
-나중에 보자.
그 말과 함께 현관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뒤이어, 현관문 밖에서 어렴풋한 영인의 괴성과 몇 명의 비명이 들렸다. 이어서 들린 건, 이미 어딘가를 뜯어 먹혀버린 고통을 담은 살려달라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