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헉!”
유슬의 말에 경오가 소리 내어 헛바람을 삼켰다. 심지어 어깨까지 덜덜 떠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유슬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까지는 몰랐던 모양이지만 말이야.”
유슬은 오늘 아침, 모텔 복도에서 준성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회의가 끝난 직후, 인질 구출에 관한 말이 없어서 무작정 준성을 찾아갔던 유슬은 차디찬 말로 그에게 얻어맞은 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해야 했다.
자신에겐 귀한 동생이지만, 다른 이들에겐 일절 상관할 필요도 없는 위험 요소에 불과했다. 목숨 걸고 구해봤자 아무런 득도 없고, 그런 걸 따지지 않을 만큼 두터운 신뢰 관계가 구축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동생을 구하는 걸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건 염치없는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단념하려는데, 준성이 그녀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인한병원에 있던 멤버 중에 스파이가 있어요.”
예상치 못한 준성의 발언이 계속 이어졌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인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다는 건 알아요. 그래서 가장 먼저 누나를 의심하기도 했고요.”
유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당장 남기혁에게 소중한 사람을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런데 준성은 도리어 유슬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누나는 인질이 있음을 우리에게 당당히 드러냈어요. 정말 인질이 붙잡혀 있고 남기혁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면 사진을 보여주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겠죠.”
그래서 일행 중 유일하게 임유슬에게만 이런 얘기를 들려준 거였다.
“인질 때문에 일행을 위험하게 만든 것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스스로 목숨 걸고 족쇄를 풀러 가겠다면 막을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만약 스파이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인질을 구하도록 도와달라고 한다면, 동의하는 사람들만 추려서 누나도 그 사람과 같이 가세요.”
의외의 말에 유슬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중간 지점을 지날 때까지 누구도 털어놓지 않는다면…….”
속삭이던 준성의 얼굴이 금세 싸늘해졌다.
“일행 중에서 하늘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을 버려요. 그 사람은 결국 남기혁의 손에 놀아나서 일행 모두를 죽게 만들고 말 테니까요.”
버스팀이 현재 멈춰 서 있는 터널.
이곳이 바로 그 중간 지점이었다.
준성이 제게 말했던 내용을 고스란히 전달해준 유슬이 파리한 안색의 경오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늘을 가장 많이 봤던 사람은 황경오, 당신이지.”
“흡…!”
경오가 또 한 번 숨을 삼켰다.
창민은 그제야 유슬이 맨 뒷자리를 고집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른 좌석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데다가 버스 안을 훤히 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그곳이었던 거다.
바들바들 떨며 겁먹은 경오를 향해 피식 웃어 보인 유슬이 이번엔 장대욱에게 다가가며 자그마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준성이 귓속말을 할 때 그녀의 주머니에 남몰래 넣어준 두 개의 쪽지 중 하나였다.
“준성이가 이맘때쯤 너한테 주라고 했어.”
이맘때쯤, 이라는 게 스파이를 골라낸 다음을 말한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불안해하는 채이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대욱은 유슬에게서 받은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쪽지에 담긴 것은 세밀한 약도를 포함한 새로운 루트였다.
준성이 기존에 짜줬던 안전 루트의 경로를 머릿속에 완전히 때려 넣고 있던 대욱은 이 약도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도착 지점 바로 직전에 다른 길로 빠져야 하는 루트예요. 이 쪽지의 최종목적지는 민간인 수용 피난소가 아니라 ‘군용 대피소’…라고 하네요.”
말을 내뱉으면서도 대욱은 이 자리에 없는 준성을 향해 혀를 내둘러야 했다.
대욱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일행은 여태껏 시 외곽에 있는 피난소를 최종목적지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고 그곳까지의 루트를 짜준 게 준성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준성은 변수에 대비해 또 다른 최종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철두철미라고 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꿈의 기억을 가진 남기혁이 준성을 따라 피난소를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경오가 남긴 쪽지에도 버젓이 목적지가 적혀 있는 데다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쪽에 제공한 정보대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피난소에 인력을 배치하거나 함정을 설치해뒀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래서 준성은 스파이를 이용해 남기혁의 정보와 눈을 현혹시키고, 최종적으로는 그가 예상치 못하는 다른 위치로 일행의 목적지를 선회하려 했다. 어차피 선회하기 전에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스파이는 확실히 제거될 테니까.
이번엔 유슬이 창민에게 다가가 또 다른 쪽지를 내밀었다. 그것 역시 준성에게 받은 쪽지였는데, 안에는 인질을 구한 후에 군용 대피소까지 가는 합류 루트가 짜여 있었다.
유슬은 혼자 숨겨두기 어려운 묵직한 물건을 그제야 탈탈 털어내고 홀가분해진 것처럼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유슬이 쪽지에 시선을 박은 창민과 경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서도 일부러 준성이 모르게 진행한 것 같은데, 어째 생각하는 게 똑같아.”
유슬은 준성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인질들과 같이 있을 남기혁이라면 제가 끌어내 줄게요.”
그런 귓속말을 했던 걸 보면 준성 또한 한서에게 숨기고자 했던 것 같다.
이는 어디까지나 한서가 충동적으로 스파이를 찾아내어 죽이지 않도록 막기 위한 준성의 조치였지만, 유슬이나 다른 일행은 미처 거기까지 파악하진 못하고 그저 준성에게 감탄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한가로이 터널 위를 날고 있던 드론이 배기음을 내뿜는 버스를 따라 다시금 빠르게 움직였다.
버스를 따라나선 드론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어두컴컴한 터널에서 몇 사람이 걸어 나왔다.
“다들 준비됐죠?”
가장 앞에 서서 터널 밖을 둘러보던 창민이 뒷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황경오와 이지안, 임유슬이 그의 말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뒤로 대욱의 일행이었던 두 명의 남녀가 보였다.
원래는 곽두재가 자신도 가겠다며 나섰고 손남섭도 뭐든 돕겠다며 패기롭게 말했지만 기각되었다. 곽두재는 군부에 보낼 코드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버스팀에 있어야 했고, 손남섭은 기세와 달리 두 다리를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어서 그냥 좌석에 앉혀두기로 했다.
대욱은 얼핏 그들을 돕고 싶어하는 듯했지만, 준성에게 지휘권을 부탁받은 것도 있고 채이도 챙겨야 했기에 차마 나서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창민이 먼저 그에게 버스팀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대신 대욱의 일행 중에서 가장 여유로워 보이던 남녀가 따라붙었다. 대욱이 몰래 속삭여준 바에 의하면, 한 명은 비정상적인 정의감에 활활 불타는 남자였다. 다른 한 명은 엄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여자라는데, 도저히 경오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어서 따라나서는 모양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렇게 6명은 한 팀이 되어 터널을 빠져나왔다.
* * *
“형님.”
매트에 누워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남기혁에게 그의 측근 우석진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넸다.
“황경오가 남겨둔 메시지대로 버스가 움직이고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응, 그래.”
남기혁은 그다지 관심 없는 것처럼 대꾸하며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타깃이 남긴 메시지 영상이 도착했습니다.”
그제야 눈을 번쩍 뜬 남기혁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럴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놀라지도 않은 우석진이 안경과 함께 드론의 조종기를 내밀었다.
안경을 쓴 남기혁은 조종기에 녹화된 영상을 곧바로 재생해 보았다.
모텔을 나서는 강준성과 한 남자의 모습이 영상의 시작이었다. 좀비가 지극히 적은 루트를 골라 이리저리 잘도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다.
영상 속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어디서 본 놈인데…….”
하지만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기에, 남기혁은 생각에 빠진 채로 영상을 주시했다.
어느 순간, 좀비에게 물린 것처럼 연기하다가 쓰러지는 준성이 보였다. 미리 보고를 통해 이 영상이 녹화되는 동안의 그는 아주 멀쩡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장면을 직접 봐버리니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남자는 준성을 버리듯이 사라져버렸고 얼마 가지 않아 그를 감시하던 자들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준성과 검은 옷의 남자에게 완전히 제압당해버렸다.
그 후.
“……?!”
남기혁이 소리 없이 숨을 멈췄다.
영상 속 검은 옷의 남자를 노려보며 조종기를 꽉 움켜쥐던 그의 두 손등에 퍼렇게 힘줄이 돋아났다.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급속도로 또렷해졌다.
강준성과 보란 듯이 키스하며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검은 옷의 남자.
그는 분명 며칠 전에 강준성이 꾸던 꿈에 갑자기 난입했던 바로 그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