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어떻게 알았지, 우리 준성이는.”
남기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아맞힌 걸 기특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기혁을 바라본 준성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남기혁이 꼭 뱀처럼 느껴졌다.
먹잇감의 뒷덜미를 문 채 옴짝달싹 못 하게 조여대다가 천천히 으스러뜨려 죽이는, 무섭고 거대한 뱀.
준성은 엄습해오는 불길함에 그를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기혁의 눈빛이 금세 싸늘해진다.
“왜? 형이 무서워?”
대답 대신 준성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연신 물러났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건 꿈속이었고, 고통도 없다. 여기서 남기혁에게 죽어봐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뿐이다.
‘처음부터……?’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기혁은 꿈을 통해 강준성의 죽음을 본다. 만약 자신이 기혁의 손에 살해당해버린다면 다음 회차의 그는 분명 강준성이 모든 걸 알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작하게 될 것이다. 단둘이 있을 때 남기혁이 강준성을 직접 죽일 만한 일은 그것뿐일 테니까.
‘차라리 내가 내 손으로 죽어야 해.’
그래야만 남기혁이 직접 강준성을 죽이려 했다는 결정적 단서가 사라지게 된다. 다음 회차에서 새로이 시작하자마자 남기혁에게 쫓기고 싶지 않다면 이게 방법이다.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준성의 눈에, 가까이 있던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디저트 나이프가 보였다. 와플을 자르는 용도라서 끝이 둥그스름하고 날도 그리 날카롭지 않았지만, 사람의 목 정도는 충분히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목을 주저 없이 찔렀다.
아니, 찌르려 했다.
목을 향하던 나이프의 끝이 뭔가에 푹, 찔리는 느낌과 함께 단단히 가로막히지만 않았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아야….”
어느새 준성을 덮칠 기세로 다가온 남기혁이 눈썹을 꿈틀했다. 나이프의 날 부분이 꿰뚫어버린 단단한 손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혁의 손등 위로 튀어나온 나이프의 반질반질한 날 부분에도 붉은 피가 그렁하게 맺혔다가 준성의 어깨로 똑똑 떨어졌다.
준성의 자살을 막은 남기혁이 나이프가 뚫고 나온 자신의 손과 그의 하얀 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잖아, 준성아.”
나이프에 꿰뚫린 채로 준성의 손을 꽉 잡아버린 기혁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설마, 내가 널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어?”
분명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는 모양새인데,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씁쓸한 기색을 담고 있다.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준성이 이때까지 알던 남기혁 그 자체라서 순간 방심해버렸다. 뒷머리가 거칠게 확 당겨지는 바람에 턱이 들리고 목선이 길게 드러났다.
“너무하네.”
준성의 하얀 목에 입술을 가져간 기혁이 여린 살결을 잘근, 깨물었다. 잇자국이 단박에 새겨질 정도로 세게 물었지만, 준성에게는 살결이 짓눌리는 느낌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공포감이 어마어마했다. 좀비에게 목을 물어뜯기고 사방으로 피가 튈 때보다 더욱 생생하고 무서웠다. 이대로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살해당할 것 같은 끔찍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 알아버렸으면 이제 슬슬… 벌 받아야지?”
기혁이 준성의 목에 입술을 묻은 채 속삭였다.
“형이 그렇게도 죽지 말랬는데 매번 잘도 죽었잖아.”
자신이 벌을 주는 행위의 정당함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들먹인 남기혁이 나이프를 쥔 준성의 손을 놓아주었다. 여전히 머리채를 꽉 붙잡힌 채였던 준성이 그를 두 손으로 밀어내는 사이, 기혁이 제 손바닥에 일직선으로 꽂혀 있는 나이프의 손잡이 부분을 입으로 붙잡아 빼냈다.
피를 머금은 나이프를 입으로 퉤, 뱉듯이 던져버린 기혁이 준성의 두 팔을 그의 뒤로 돌려 꽉 붙잡았다.
“이거 놔!”
순식간에 결박되어버린 준성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바둥거렸다. 하지만 이미 두 팔이 등 뒤로 결박된 채 기혁의 품에 안긴 상태다.
기혁이 웃는 얼굴로 준성을 꽉 끌어안은 채 카페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길가에 주차되어 있던 검은 승합차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 열리며 세 명의 남자가 달려들어 왔다. 카페에 남아 어떡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남녀 종업원 두 명이 그들의 손에 당당히 들려 있는 총을 보며 흠칫 놀랐다.
두 남자가 총으로 종업원들을 위협하듯 겨누고, 다른 한 남자가 기혁과 준성에게로 다가왔다.
“석진아, 약 하나 놔줘.”
“예, 형님.”
기혁에게 깍듯이 대답한 남자가 품에서 주사기 하나를 꺼냈다.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일회용 주사기처럼 보였는데, 안에는 이미 투명한 약물이 들어있었다.
“싫어! 하지 마!”
“쉬-, 괜찮아. 쟤가 저래 봬도 안 아프게 잘 놓더라고. 아, 우리 준성이는 아파도 상관없던가? 어차피 못 느끼니까.”
기혁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그게 더 기괴해 보였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위험을 감지한 준성이 더욱 거칠게 몸부림치려 했지만 이미 기혁의 품에 완전히 갇힌 상태였다. 그는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한 채, 기혁의 잇자국이 새겨진 목에 주사를 맞고서 금세 정신을 잃었다.
탕-, 탕-, 어렴풋이 두 발의 총성과 비명이 들렸다.
남기혁이 살인마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던 건 상당히 오래전이었다.
남기혁 이외의 타인에게 자신의 비밀을 풀어놓기 시작하자마자 살인마에게 동료가 하나둘 죽기 시작했으니 그리 추측하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자신만은 이상하게 타깃이 되지 않았다. 남기혁 본인도 마찬가지다.
그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우며 나아가도 타인의 기척이나 살인마의 흔적이 도통 나오질 않으니, 범인을 가까이서 찾을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깨달아버린 건, 시체들의 잘린 단면을 관찰하면서였다.
잘린 부분들은 전부 관절, 혹은 상대적으로 가느다란 뼈로 이루어진 부분이었다. 일전에 남기혁이 단검을 휘두를 때 힘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좀비의 목을 완전히 절단해버리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만큼 군용 단검이 날카롭기도 했지만, 남기혁의 힘 조절과 뼈를 절단하는 요령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잔인하게 잘린 시체들은 모두 한 사람의 짓이라는 걸 나타내주듯이 깔끔한 단면을 갖고 있었다. 절단 위치도 남기혁의 힘과 그의 단검만으로 충분히 잘라낼 수 있는 자리다.
하지만 준성은 이때껏 남기혁이 소문의 살인마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짐작했으면서도 자꾸만 이를 부정하고 외면해왔다.
남기혁에겐 그래야만 할 동기가 없었으니까.
죽은 동료 중에는 자신을 모욕하고 믿지 않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전적으로 도와주겠다며 믿고 따르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신하며 떨어져 나간 사람들뿐만 아니라 든든한 동료가 되려던 사람들조차 죽여야만 했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장대욱의 죽음을 목격할 때까지만 해도.
‘형은… 내가 싫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모르겠다.
자신이 ‘혼자’가 되길 바랐던 이유를.
먼지 낀 냄새가 가득한 습한 폐공장에 홀로 결박되어 있던 준성은 몽롱한 머리로 끝없이 생각을 거듭했다.
남기혁의 살인에 제대로 된 정당성이 있길 바랐다.
자신들이 겪기 시작한 세계가 이따위니까, 정상적이지 않은 세계니까, 우리 둘 다 끔찍한 기억을 갖고 눈을 뜨게 되니까.
뭐라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길 바라며, 이 회차가 시작하자마자 그를 찾아갔다. 그가 살인마임을 알아채 버린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아 줄 거라 믿었다.
그거야말로 자신이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버렸지만.
누워있던 준성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감싸 쥔 채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 짚으려 했지만, 수갑 때문에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듯 감싸야 했다.
‘수갑…?’
이상한 약을 맞았기 때문인지, 머리가 상당히 둔했다. 정신도 몽롱하고 어질어질하다. 그래서 두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다는 것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준성은 어질한 머리를 두어 번 붕붕 휘저어 정신을 차려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그다지 나아지진 않았지만, 최소한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는 짚어 볼 수 있었다.
허리에는 웬 밧줄이 감겨 있고, 등 뒤로 매듭이 지어진 부분에는 1m 정도의 짧은 쇠사슬이 뒤쪽의 철 기둥과 이어져 있다.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밧줄과 쇠사슬을 힘껏 당겨보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끊거나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장 한가운데에 빛도 없이 덩그러니 방치된 채, 노을 진 창밖의 붉은 빛을 의지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얌전히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초조해진 머리가 재빨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한다.
‘빨리 죽어야 해. 빨리……!’
자신이 누구에 의해 이곳에 와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이상,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여길 벗어나든가 죽어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준성이 움직일 수 있는 거리라고는 철 기둥을 중심으로 고작해야 1m였다. 그 거리에서 아무리 주변을 더듬고 이것저것 찾아본다고 한들, 제대로 된 게 있을 리 없었다.
망연자실한 준성의 귓가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한둘이 아니라 ‘무리’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러 발소리였다.
뒤이어 공장 끄트머리에서부터 전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팟-, 하는 소리를 내며 단숨에 환해진 입구에 버젓이 서 있는 남기혁과 열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보였다.
기혁이 준성을 향해 걸어오며 남자들에게 뭐라 명령하는 게 보였다. 겉보기에는 남기혁보다 훨씬 우락부락하고 거칠어 보이는 자들이었는데, 왜인지 그에게 허리까지 숙여 보이며 깍듯이 굴었다.
팟-, 팟-.
공장의 전등은 쉬지 않고 연이어 켜져 갔고, 이윽고 준성이 앉아있는 매트 위까지 다다랐다.
“우리 준성이, 드디어 일어났네.”
밝은 전등이 비춘 겁먹은 준성을 바라보며, 남기혁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벌 받을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