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이후, 준성이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남기혁의 부재가 잦았고 만나더라도 긴 시간을 함께하진 못했다.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자, 남기혁은 깊이 잠들어 있던 준성의 발목에 칼을 대었다.
“필요 없는 걸 잘라냈을 뿐이야. 형이 다 해줄 거니까 준성이한텐 이제 필요 없잖아.”
자고 일어났을 때 발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걸 느끼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남기혁이 마련해둔 매트 위에서 눕거나 앉는 게 전부였던 생활이라, 발목의 뻐근함과 저릿함 정도의 불편함이 더해진 게 다였다.
그즈음에는 더 이상 ‘벌’도 없었다. 물론 남기혁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강제로 호흡을 통제당해야 하는 것 또한 준성에겐 벌이자 고문이라 할 수 있었지만, 남기혁은 웃기게도 이를 예뻐해 주는 거라 말했다.
남기혁이 말하는 ‘벌’이 멈춘 이유는 그가 바빠진 것도 있겠지만, 준성에게 보여주기 위해 죽일 만한 사람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아서라는 게 맞을 것이다.
강준성을 벌하기 위한 제물이 되는 건 그가 죽는 시점에 함께 있던 자들로만 국한된다. 잠시 만났다가 헤어졌다든지, 도중에 좀비에게 물려 죽었던 자들은 전부 제외되었다.
‘기억… 못 하는구나.’
그 사실이 그나마 준성을 안도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남기혁이 꾼다던 꿈은 강준성이 죽음을 맞기 수 분 전후의 장면만 담겨있으니, 이제 더 이상 제 눈앞이 피바다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몇 번을 잠들어도 꿈 한 조각 꿀 수 없었던 어느 날.
오랜만에 돌아온 남기혁은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있던 준성을 강제로 깨워서 또 한 번의 고문을 행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원하던 대답을 들은 후에야 만족스럽게 매트에 누운 기혁에게, 무전기를 든 우석진이 다가와 보고했다.
“형님, 4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뒷돈을 줬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봉쇄선을 넘어오는 거라서요.”
“4시간이라…….”
남색 담요에 휘감긴 준성을 품 안에서 강아지 다루듯 쓰다듬던 기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까짓거, ‘마지막’인데 그 정도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기혁의 손이 색색거리는 숨을 내뱉는 준성의 입술을 살포시 문질렀다. 약속된 것처럼 자연스레 벌려주는 준성의 입술 사이로 기혁의 두 손가락이 침범한다.
“그치, 준성아?”
기혁의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초점 없는 눈의 준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또 목이 졸린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 생각에, 그저 기혁이 원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 안에 들어있는 손가락을 핥기 바빴다.
준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기혁이 그의 입에서 질척해진 손가락을 꺼냈다. 흥건히 묻어난 타액을 준성이 했던 것처럼 붉은 혀로 핥아보며 눈가를 휘었다.
두 사람의 타액이 묻은 기혁의 손가락이 준성의 목선을 훑었다. 초점 없던 눈이 번쩍 뜨이고, 시퍼런 멍이 가득한 목이 경련하듯 떨렸다. 색색거리던 숨소리는 그새 급박해졌다.
“지금은 안 해. 괜찮아.”
달래듯 말하며 목선을 훑던 손가락으로 가슴팍까지 벌어진 준성의 흰 셔츠를 넓게 벌려보았다. 남색 담요와 대비되는 하얀 가슴과 셔츠 사이로 보이는 연한 색의 돌기가 기혁의 또 다른 욕구를 부추겼다.
먹음직스러운 것을 보듯이 제 입술을 할짝거린 기혁이 싱긋 웃었다.
“오늘이 마지막 벌이 될 거야.”
준성의 흐릿한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벌 다 받고 나면…….”
기혁의 손이 준성의 목을 살짝 그러쥐었다. 큼직한 손아귀 안에서 얇은 목의 박동이 쿵쿵 전해져왔다.
“더 졸라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기분 좋게 만들어줄게.”
손아귀에 약간의 힘을 가하자, 눌린 목울대가 찌르르 울리며 거친 숨소리를 냈다.
잔뜩 겁에 질려버린 준성의 얼굴을 바라보던 기혁이 그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내릴 때였다.
삐빅-
-형님! 군인들이 따라붙었답니다!
갑자기 끼어든 방해에, 기혁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를 대신해 우석진이 무전기를 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봉쇄선을 넘을 때 그년이 잠깐 난동을 부렸다던데, 그때 들킨 거 아닌가 싶습니다.
“멍청한 새끼들!”
석진이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일순, 준성의 눈동자에 짧게나마 빛이 들었다.
‘그년……? 여자?’
아주 단순한 사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져 있던 머릿속이 갑자기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기혁은 그걸 석진의 일갈 때문에 겁먹은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본인이 겁을 주는 건 돼도 다른 사람이 준성에게 영향을 끼치는 건 극도로 싫어하던 남기혁이다. 눈빛만으로도 석진을 찢어 죽일 태세다.
얼른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죄한 석진이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형님.”
“군인 놈들이 작정하고 쫓아올 정도면 쉽게 떨어뜨리진 못할 거야.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 기혁이 웅크린 채로 오들오들 떠는 준성의 어깨에 담요를 잘 덮어주었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애들 소집해. 군인들이 상대면 쉽지 않아.”
매트에서 일어난 기혁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달리 냉랭하면서도 살기가 감돌았다.
“정찰용 드론 띄우고, 군부대 본진과 군인들 간의 통신 거리 가늠해 보라고 해. 통신 불능 거리에 진입하자마자 역으로 덮칠 거야.”
“알겠습니다.”
누워있느라 흐트러져 있던 옷매무새를 다듬은 기혁이 석진에게서 코트를 받아 입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깔끔한 트렌치코트 차림의 그는 너무도 선량하고 평범해 보여서 도저히 잔학무도한 살인마로는 보이지 않았다.
기혁이 코트를 여미며 준성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웅크린 채로 초점 없는 눈을 들어 기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인님 올 때까지 얌전히 자고 있어.”
자신을 당당히 ‘주인님’이라 칭한 기혁이 몸을 돌려 공장 밖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우석진이 뒤따랐다.
“4시간 정도 재워야 하니까 약한 거로 먹여. 너무 많이 먹이면 제때 깨우기 힘들어.”
“예, 형님.”
기혁의 당부와 석진의 대답이 멀어졌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두 사람과 교대하듯이 덩치 큰 남자 둘이 들어왔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준성은 여전히 매트 위에 웅크린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기혁….’
입 안에서 비릿한 쇳소리가 굴러다녔다. 망가지기 시작한 성대와 매끄럽지 못한 호흡기가 두려운 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던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탁한 눈동자가 조금씩 초점을 되찾았다.
‘안… 돼….’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까의 대화가 맴돌았다.
준성은 남기혁이 말하던 ‘마지막 벌’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채 버렸다.
남기혁이 기억하는 ‘강준성의 동료였던 자들’은 이미 모두 죽어버렸다. 피폐한 정신 상태 때문에 아무리 머리가 돌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또렷한 꿈의 기억이니까.
그들을 제외하고 대상자가 될 만한 자가 있다면 그건 누구일까?
‘채이야….’
이번 회차에서 미처 구하러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의 여동생.
죽음의 순간에 그녀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몇 번째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 지나간 회차 중에서 남기혁과 함께 죽었던 어느 날.
그 회차에서는 유독 강채이의 얘기를 많이 했었다.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놓을 정도로 남기혁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 시작할 때라서 그랬던 것 같다.
“네 여동생…, 만나보고 싶었는데…….”
죽음을 맞기 직전, 남기혁이 아쉬운 듯 중얼거리던 한마디.
아마도 남기혁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강준성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를 마지막 타깃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것만은 안 돼….’
이게 꿈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여동생이 끌려와 잔인하게 살해당한다고 해도 고작해야 꿈일 뿐이다.
하지만.
“더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줄게.”
남기혁이 주문 걸듯 말하는 그 말 때문일까.
준성은 여태껏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 나가던 자들이 단순한 악몽의 편린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본능이 이를 거부했고, 더없이 끔찍한 두려움에 눈을 뜨게 했다.
모든 게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혹은,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읏….”
짧게 신음을 삼킨 준성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담요가 스르륵 내려가며 엄습한 차가운 공기가 얇은 셔츠 차림의 준성을 에워쌌다.
‘벗어나야 해…. 이 꿈에서 어떻게든…….’
강채이가 제 눈앞에서 죽는 건 절대로 보고 싶지 않다.
둔해 빠진 머리가 차츰차츰 각성해 갔다. 떠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못 하던 망할 몸뚱이가 조금씩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며칠간 계속 누워서 결박당해 있느라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몸의 근육이 삐걱삐걱, 들리지 않는 마찰음을 냈다.
강준성은 아직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았다.
배신감으로 점철된 나락 속에서 처절하게 유린당하면서도 아주 작은 실낱같은 가능성을 만들어두었다.
남기혁이 꿈꾸는 비정상적인 ‘현실’을 깨뜨리기 위해, 자신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