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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닷 (162)화 (162/240)

- 162화 -

저벅저벅-.

모래와 먼지가 깔린 바닥을 밟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온 두 남자가 힘없이 앉아있는 준성을 조소하며 내려다보았다. 그중 한 명이 준성 앞에 무릎을 세워 쭈그려 앉고는 키득거렸다.

“이만 잘 시간이야, 멍멍아.”

남기혁이 들었다면 남자의 혀를 단숨에 뽑아버리고 산 채로 서걱서걱 목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봐왔던 준성은 정신 상태가 완전히 맛이 가버려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였기에, 이 정도 경멸 어린 표현 정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의 생각대로, 준성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그가 건넨 알약 하나를 얌전히 받아 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수면제를 입에 물고 남자에게 받은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약을 삼킨 준성이 매트에 누워 담요를 덮고 돌아눕는 걸 본 두 남자는 그의 숨소리가 완전히 가라앉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남자들이 멈춰 선 자리는 멀찍한 폐공장 입구.

그곳에 의자를 하나씩 두고 앉아서는 준성을 바라보며 저들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다.

남기혁의 독점욕과 질투는 굉장한 것이어서, 우석진과 몇 명의 측근 외에는 누구도 강준성 가까이 두려 하지 않았다. 감시와 수발을 위해 부하들을 배치하더라도 준성을 지켜볼 위치는 항상 10m 이상 떨어진 자리로 지정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강준성을 감시하는 자들만 열이 넘었었다. 좀비 때문인지, 아니면 별개의 것이 원인인진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감시로 빼둘 인력이 부족해졌다.

배치 인력을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었던 건 준성이 남기혁에 의해 정신과 육체 모두가 철저히 망가져 있었던 탓이 컸다.

타인이 보기에 강준성은 감히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할 만큼 정신적으로 극히 피폐해져 있었고, 끔찍한 멍이 든 연약한 목은 언제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며, 제대로 서지도 못하게끔 발목의 힘줄까지 잘렸다.

감시자들로서는 어차피 도망가지도 못하고 잠만 퍼질러 잘 뿐인 인간 강아지를 지켜봐야 하는 따분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긴장감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덕분에 완전히 잠든 줄 알았던 준성이 조용히 혀 밑에 숨겨둔 수면제를 꺼내어 숨겼을 때도 그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든 죽어야 해.’

이 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뿐.

하지만 이렇다 할 무기도 없는 준성이 스스로 죽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철 기둥이나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죽기 전에 기절하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사극 드라마 같은 데서 종종 나오는 혀를 깨무는 방법도 자살법으로는 그다지 현실성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혀가 말려 들어가서 기도를 막아 죽게 된다는 도시 전설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방법으로 자살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실패 확률이 지극히 높은 데다가 이로 인한 후폭풍으로 아예 24시간 내내 매트에 묶여 있을 수도 있다. 감시도 훨씬 많아질 게 뻔했다.

그러니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체감상 1시간 정도 지났을 즈음.

“나 장실 다녀온다. 잘 보고 있어.”

두 남자 중 한 명이 화장실을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를 등진 채 누워있던 준성은 좀비들처럼 청각에 온 신경을 쏟으며 한 남자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에 집중했다.

한 명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준성은 뒤척이는 척하며 얇게 뜬 눈으로 입구를 재차 확인했다. 역시나 남자 한 명만이 이쪽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욱…!”

준성이 돌연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소리 내어 헛구역질을 했다.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어깨까지 들썩이며 토할 것처럼 시늉하자, 입구에 있던 남자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어이, 뭐야?! 왜 그래?!”

남자는 웅크린 채로 구토할 것 같은 준성을 앉혀주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수면제까지 먹고 잘 자던 사람이 갑자기 구토하려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건데?! 씨발, 너 문제 생기면 내가 좆된단 말이야!”

당황한 남자는 준성을 마주 안듯이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게 한 채로 일단 뭔가 봉지 같은 건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그때.

허리춤 한쪽이 갑자기 허전해졌다. 이를 한 박자 늦게 깨달았을 땐, 이미 준성이 쥔 스턴건 끝이 그의 옆구리에 닿아 있었다.

“으그그극-!”

스턴건의 전류를 직통으로 맞아버린 남자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까뒤집었다. 뻣뻣이 굳은 몸을 부르르 떨던 그가 픽 쓰러졌다.

준성은 자신을 감시하거나 약을 전달하던 자들이 살상용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석진을 포함해 측근 몇 명만 갖고 있는 총도 그렇고, 흔히 쓰는 날붙이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기혁의 지시로, 준성이 그들의 무기를 탈취해 자살이라도 할까 봐 조치한 바였다.

그러면서도 준성이 난동을 피우거나 반항할 때 그를 상처 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도록 스턴건만은 허용해 주었다.

감시자를 줄였다고는 해도 최소 2인 이상으로 구성했다. 그들 각각의 신체 능력은 준성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으니 스턴건을 뺏길 리도 없을 거라 생각했고, 만약 뺏기더라도 다른 한 명이 준성을 능히 제압하고도 남을 것이다.

준성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더 얌전히 굴었다. 반항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고분고분했고 잘 길들어진 동물처럼 약이든 뭐든 주는 대로 다 먹었다.

그렇게 감시자들을 며칠에 걸쳐 충분히 방심하게 한 뒤, 혼자 남은 타이밍을 노려 빈틈을 만들었다.

준성은 완전히 뻗어버린 남자를 보며 숨을 헐떡였다. 호흡기가 망가져 가고 있었기에, 생각보다 손쉽게 스턴건을 빼앗아 공격한 것뿐임에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뒤이어 준성은 수갑 찬 손으로 남자의 주머니를 뒤졌다. 마음이 급해서 수갑 찬 손목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다.

준성이 찾아낸 것은 허리를 감고 있는 밧줄과 철 기둥의 쇠사슬을 잇는 자물쇠의 열쇠였다.

준성을 씻기는 건 남기혁이 독점하고 있었으나,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의 생리현상 해결은 엄연히 감시자들의 몫이었다. 이를 위해 철 기둥과 연결된 쇠사슬의 열쇠를 갖고 있어야 하는 건 필수였다.

급한 손놀림으로 자물쇠를 풀어낸 준성은 두 손에 스턴건을 쥔 채 곧바로 매트를 기어 나왔다.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에 일어설 수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수갑 찬 손이 엉망이 되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을 기었다. 엉금엉금 기어서는 남자들이 감시하던 입구 옆의 벽에 몸을 기대어 숨었다.

타이밍 좋게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응? 이 새끼, 또 어디로 갔……! 으으윽-!”

저 멀리 매트에 널브러진 다른 감시자를 보며 흠칫 놀라던 남자는 자신의 허벅지에 닿는 엄청난 자극에 숨을 삼켰다. 부러지진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이를 꽉 깨문 채 부르르 떨던 그도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져버렸다.

두 명의 감시자를 기절시킨 준성은 입구 밖으로 머리를 빼서 주변을 살폈다. 보이는 건 폐공장을 둘러싼 투박한 흙바닥과 잡초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자재 보관용 창고였다.

“이틀 뒤에 러시아 쪽 브로커를 통해 최초 감염자의 거래가 진행될 겁니다.”

“백신 만들어서 팔아먹으려면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뭐 그렇게 오래 걸린대?”

“비밀 연구 시설부터 확보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쯧, 어쩔 수 없지. 케이지 그대로 창고에 넣어놔.”

어제 얼핏 들었던 우석진과 남기혁의 대화를 떠올린 준성은 자재 보관용 창고를 주시했다.

남기혁에게 잡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자신의 동료였던 자들이 저 창고에 가득했다. 도살장으로 끌려갈 가축을 모아놓은 것처럼.

‘아마도 지금은…….’

죽일 사람이 없어서 텅 비어있을 그곳에 뭐가 있을지는 뻔했다.

준성은 근처에 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 흙바닥을 기었다. 남기혁이 특히나 깨끗하게 관리해주던 하얀 셔츠가 흙으로 잔뜩 더럽혀지고, 손목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그가 기어간 길에 점점이 떨어져 흔적을 남겼다.

창고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저거 뭐야?!”

“야! 왜 애새끼가 밖에 나와 있어?!”

멀리서 준성을 발견한 이들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성은 머리끝까지 쭈뼛하게 차오르는 긴장감과 위기감을 느끼며 창고의 입구를 향해 빠르게 기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 알면서도 주저 없이 입구를 열었다. 탁한 피 냄새와 뭔가가 심하게 썩는 듯한 악취가 훅 닥쳐왔다.

어두운 창고에 빛이 들이치자, 조용하던 안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캬아악-!

창고 안에는 가축을 가둬둘 때 쓰는 케이지에 홀로 갇혀버린 한 좀비가 있었다. 걸치고 있는 옷조각은 얼마 남지도 않았고, 전신은 끔찍한 피투성이였다. 몸 곳곳이 썩어 문드러지고 흉하게 뜯겨 나가서 근육과 뼈가 보이는 부분도 있었고, 한쪽 다리는 무릎 아래가 잘려 나가 있었다. 케이지를 붙든 두 손의 손가락은 다 합쳐 봤자 다섯 개가 전부였다.

캭-! 캬학!

여자 좀비가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휘저으며 괴성을 질렀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질겁하며 도망갔을 상황이었지만, 준성은 오히려 그녀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잡아! 저 또라이 좀 잡아!”

“미친 새끼잖아?!”

빛이 들이친 창고 안에서 좀비를 향해 기어가는 준성을 보자, 그를 쫓아 달리던 남자들이 별의별 욕설을 다 내뱉으며 기겁했다.

준성은 남자들의 목소리와 달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바닥을 기어가는 팔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이윽고 좀비의 머리가 있는 위치에 다가가 쓰러져서는 몸을 굴렸다. 철창에 등을 기대어 눕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목에 치아가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 좀비의 괴성과 고기를 뜯어 먹는 소리가 너무나 소름 끼치게 들려왔지만, 마음만은 굉장히 편했다.

남자들이 달려와 준성을 좀비에게서 떼어놓았다. 하지만 이미 목의 일부가 완전히 뜯겨 나가 있었다.

준성은 얼얼한 목을 타고 올라오는 핏물을 뱉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로 인해 어두워진 시야 너머로 남기혁의 절망 어린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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