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같은 시각.
“으랏-차-!”
한껏 신난 운전수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일반 차종과는 확연히 다른 버스 운전대가 그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현란하게 돌아갔다.
그때마다 차체에 뭔가가 세게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고 차창 너머에서 터진 괴성이 버스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기서 좌회전이요!”
“오-케이!”
기세등등한 모습의 운전수가 장대욱의 지시에 맞춰 핸들을 꺾었다. 모퉁이 가까이서 꺾어버린 탓에, 차에 치여서 주춤하던 좀비가 그대로 벽과 버스 사이에 끼어버렸다. 꾸엑, 하는 개구리 밟히는 소리와 함께 버스 앞쪽 귀퉁이에 걸쭉한 피가 튀었다.
운전수는 많은 좀비를 차로 치어 밀고 나간 경험 덕분에 이제 이 정도 핏물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이 버스에 탄 모두를 무사히 목적지까지 데려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물론 그 사명의 기저에는 본인의 무사함이 기본적인 전제 조건으로 깔려있음은 두말할 것이 없다.
“이대로 쭉 직진하시다가 우측 유람빌딩 끼고 우회전이요!”
대욱은 준성에게 받은 쪽지의 약도대로 버스의 방향을 유도했다. 신기하게도 그의 지시에 맞춰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른 길목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 보였다.
‘이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냐고, 정말.’
대욱은 우회전을 하자마자 보이는 뻥 뚫린 길목을 보며 이 자리에 없는 강준성을 향해 혀를 내둘렀다. 당장 눈에 띄는 좀비라고는 기껏해야 도로 끝의 어기적거리며 배회하는 두 명이 전부였다.
뒤늦게 배기음을 듣고 무섭게 달려오는 좀비들을 정면으로 뻥 차듯이 날려버린 버스가 시원하게 질주했다.
빠르게 나아가는 길을 바라보며 시간을 체크해 본 대욱이 주변을 눈으로 정찰하고 있던 일행에게 물었다.
“추적은 어때?”
“더는 없어.”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일행은 시간이 갈수록 맑아지는 저 하늘의 감시 또한 대충하지 않았다.
성가신 눈을 떼어놓았던 건 민간 피난소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자, 약 20분 전쯤이었다.
버스팀에는 처음부터 하늘을 나는 드론이 감시자로 따라붙어 있었다. 터널까지 따라 들어가면서까지 감시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곳을 빠져나온 버스를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떠서 뒤쫓아가는 건 아주 손쉬웠다.
대욱은 슬슬 자신들을 뒤쫓는 작은 감시자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간 피난소에서 군용 대피소까지 가는 안전 루트를 새로 짜준 준성의 쪽지에도 이 길을 노출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었다.
이때 활약해준 건 대욱의 일행 중 한 명이자, 현직 경찰관인 중년의 남자였다. 근무 중일 때 일이 터진 거라서 지금도 경찰 조끼만 없을 뿐, 셔츠와 바지는 여전히 경찰 근무복이었다.
오랜 경찰 생활뿐만 아니라 군대에 있을 때도 백발백중이었다는 평을 들었던 만큼, 중년 남자의 명중률은 상당했다. 1일째부터 함께했던 대욱은 일찍이 그의 실력을 알아보았고, 남자를 위해 석궁까지 만들어 건네주었다.
장대욱이 건넨 석궁의 전생(?)은 다름 아닌 장우산이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기다란 자동 우산을 구해, 방수천을 모조리 떼어내어 그 기둥을 본체로 삼았다. 기둥의 끝부분에는 우산살을 여러 겹 모아서 겹친 후에 활처럼 휘었고, 그 좌우 끝부분에는 탄력 있는 단단한 고무줄을 묶어서 팽팽하게 만들었다. 일직선의 시위를 당겨서 우산의 기둥 부분 아래이자 버튼 앞부분의 뾰족이 튀어나온 부분에 고무줄을 걸면 이로써 완성이다.
분해되기 직전까지 멀쩡한 자동 우산이었던 만큼, 버튼만 눌러주면 이와 연결된 뾰족한 부분이 내려가면서 우산살이 펼쳐지는 대신 고무줄을 놓아주게끔 되어있었다.
꿈속에서의 경험으로 이미 석궁이 만들어져 있을 걸 알고 있던 준성은 황경오에게 미리 언질을 주어 대욱에게 몇 가지 물건을 건네도록 했다.
“필요한 물건은 경오 아저씨가 전부 갖고 있을 거야. 버스 안에서 완성해서 써.”
강준성이 완성하라고 한 물건은 EMP 충격기였다.
밀리터리 게임을 포함해서 그쪽 계통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장대욱은 준성에게 알려줬던 연막탄이나 자갈 폭탄 등과 같이 다양한 물건을 만드는 데에 소질이 있었다. 그만한 지식 또한 풍부해서, 건전지를 포함한 약간의 도구들만 있으면 기계를 망가뜨리는 EMP 충격기 또한 제작 가능했다.
꿈속에서도 대욱이 자그마한 EMP 충격기를 만들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준성은 언젠가 그게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황경오가 가진 도구의 종류와 재료의 여분이 얼마나 남았는지까지 전부 머릿속에 박아넣고 있었다.
황경오가 드론을 개조하기 위해 챙겨 넣은 도구들은 대부분 사제 EMP 충격기, 일명 ‘기계 파괴자’를 만드는 데에도 꼭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주재료인 코일과 건전지는 드론에 그리 많이 쓰이지 않았다. 코일은 그렇다 쳐도 건전지는 기껏해야 조종기에 두어 개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재료가 넉넉한 이유는, 준성이 1일째에 이미 철물점에서 코일과 건전지를 충분히 확보해놨었기 때문이었다.
황경오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도구와 재료들을 확인한 대욱은 이토록 준비성 좋은 강준성이 진심으로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준성과 경오 덕분에 버스 안에서 손바닥만 한 EMP 충격기를 완성해낸 대욱은 화살로 쓸 투박한 나무 끝에 이를 고무줄로 칭칭 감아 묶었다. 켜고 끌 버튼까지 만들 시간은 없어서 연결 즉시 계속 발동해 있는 상태라, 작은 직사각형의 건전지가 완전히 닳아버리기 전에 얼른 발사해야 했다.
“아저씨, 부탁해요!”
대욱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 중년 남자가 창문을 열고 석궁을 겨누었다. 높이 떠 있다고는 해도 남자가 비스듬히 하늘을 향해 겨누는 석궁 끝과 드론의 거리는 고작 2, 3m밖에 되지 않았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EMP 충격기를 품은 나무 막대가 날아갔다.
“아!”
화살 같은 나무 막대의 끝이 아깝게도 드론을 스쳐 지나갔다. 드론을 조종하고 있던 자가 석궁을 알아본 것인지, 맞기 직전에 방향을 튼 탓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오오! 저것 봐!”
스쳐 지나갔더라도 EMP 충격기가 워낙 가까웠기에, 예상대로 드론이 크게 비틀거렸다. 크기는 작아도 전자기기에 적잖은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나 더 준비하죠!”
확실하게 망가뜨리기 위해서는 아직 효과가 약했다.
완전히 추락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여분으로 하나 더 만들어둔 급조된 EMP 충격기를 새 나무 막대에 연결하려 했다.
그때, 비틀거리던 드론이 미처 빌딩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박치기했다. EMP 충격기의 영향으로 속력이 줄었기에 시원스럽게 폭발하진 않았지만, 원하던 대로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쾌재를 부르며 칭찬해달라는 듯이 돌아선 남자에게 엄지를 세워 웃어준 대욱은 그제야 운전수에게 군용 대피소로 향하는 길을 안내했다.
그렇게 감시의 눈을 따돌리고 다소 급하게 나아가던 버스팀은 다행히 아무 사상자도 없이 무탈하게 군용 대피소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군용 대피소의 입구는 신기하게도 훤히 열려 있었다. 바리케이드도 차가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한쪽에 몰려있는 상태였고, 배회하는 좀비 또한 없었다. 그 대신 입구 근처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좀비들이 쓰러져 있었다.
“군인들이 제압해둔 걸까?”
마른침을 삼킨 채이가 조심히 다가와 물었다.
이때껏 지나온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배회하는 좀비라고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군용 대피소에 진입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욱이 중얼거리며 긴장한 내색을 했다. 어째서인지 좀비들이 배회하거나 몰려올 때보다 지금처럼 움직이지 않는 시체만 가득한 상황이 더 무서웠다.
군용 대피소 한가운데에 들어선 버스가 천천히 멈춰 섰다. 일행은 저마다 짐을 챙기고 무기를 손에 든 채, 대욱의 지시를 기다렸다.
주변은 굉장히 고요했다.
반면, 그들이 들어선 대피소 한가운데의 공터에는 검붉은 피와 움직이지 않는 좀비가 바닥에 가득했다.
“아저씨, 시동 끄지 말고 이대로……!”
“저기 봐!”
긴장한 대욱이 운전수에게 지시하던 찰나, 건물 입구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문이 느긋하게 열리는 게 보였다.
“뭐, 뭐야…?”
버스 안의 일행 모두는 저마다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버리고 말았다.
군용 대피소의 입구에서 걸어 나온 것은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누군가였다. 머리에서부터 물을 퍼붓듯 뒤집어쓴 게 아니라, 앞에서 혹은 옆에서 피가 튄 것을 몇 번에 걸쳐 맞은 것처럼 보였다.
“조, 좀비?!”
깜짝 놀라서 무기를 고쳐 쥐는 이들과 달리, 장대욱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피를 뒤집어쓴 남자의 손에 들린 잭나이프가 상당히 낯익었기 때문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핏물 사이로 보이는 그의 창백한 피부와 차디찬 눈빛 때문이 컸다.
“…도한서….”
남자의 이름을 입 밖으로 읊자마자, 감당하기 힘든 지독한 한기가 훅 닥쳐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