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73)화 (173/240)

- 173화 -

남기혁은 주머니에서 저가형 지포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담배를 피우진 않지만, 남기혁은 이 물건을 여태껏 절대 제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지포 라이터를 엄지로 슥 문질러보던 남기혁이 피식 웃었다.

“이거 꼭 갖고 다녀요. 이런 재난 상황일수록 불이 굉장히 중요하다고요.”

NPC 남기혁과 스스럼없이 미소를 주고받던 시절의 강준성이 언젠가 그에게 건네줬던 물건이다.

강준성은 재난 상황 속에서 불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쌀쌀한 늦가을 날씨 속에서 불이 있어야 체온을 유지할 수 있고, 제대로 된 먹을 것을 익혀 먹을 수 있으며, 막막한 어둠을 타개할 수 있다. 그래서 강준성은 언제나 서너 개 이상의 라이터를 갖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우연히 얻은 그럴듯한 라이터를, 강준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NPC 남기혁에게 건네주었다.

“뭐야, 잘 어울리네.”

지포 라이터 뚜껑을 튕기며 불을 켜보는 NPC에게 강준성이 어떻게 웃어주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남기혁은 그런 미소를 받는 꿈속의 자신에게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으면서도, 그 웃음을 떠올릴 때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될 정도로 녹아내리는 듯한 신기한 경험을 했다.

현실의 남기혁은 NPC가 받았던 물건을 현실에서도 손에 넣고자, 부하들을 전부 풀어서 인한시 곳곳을 뒤졌다. 의아한 얼굴로 묵묵히 물건을 찾아 이 잡듯이 가게들을 훑던 그들은 결국 남기혁이 바라마지 않던 지포 라이터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남기혁은 천 원짜리 싸구려 물건들을 파는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라이터를 수천, 수억의 물건보다 더욱 귀하게 여겼다.

강준성으로서는 재난 상황 속에서 불이 다양한 곳에 필요하다는 걸 잘 알기에, 꿈속의 남기혁을 단지 동료로 생각해서 챙겨준 것에 불과할 터였다. 하지만 남기혁에겐 비록 꿈속이었다고는 해도, 그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준 소중한 증거였다. 당연히 지금까지도 그 의미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금색과 동색 그 사이쯤 될 법한 애매한 색의 지포 라이터는 뚜껑을 튕기자, 틱- 하는 별 볼 일 없는 소리가 났다. 한 번 켜기 시작하면 부싯돌마저 다 닳아서 없어질 만큼 써버릴까 봐 감히 손대지 못했던 걸, 오직 강준성을 만나러 가기 위해 처음으로 켜보게 되었다.

작디작은 불길이 어둠 속에서 꼿꼿이 몸을 일으켰다.

그 작은 몸집 하나가 까마득한 검은색을 잠시나마 밀어내어 시야를 넓혀 주었다.

남기혁은 라이터의 작은 불빛이 닿은 주변을 단숨에 자신의 두 눈에 담았다.

좀비들이 어디서 어떻게 달려오고 있는지, 수는 몇인지, 그들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갈 틈은 있는지.

조금만 방심해도 여지없이 물려 죽을 수 있다는 극도의 긴장감은 남기혁의 눈과 두뇌의 기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라이터의 불기둥이 빛을 뿌린 건 고작 2초 남짓이었다.

하지만 남기혁은 그 찰나의 순간 덕분에 당장 자신이 어느 쪽으로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2층의 구조는 1층과 상당히 달랐다.

3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는 그가 선 곳에서 우측으로 꽤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아마도 저쪽을 통해 올라가면 3층에서는 또 좌측으로 달려야만 올라갈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을 것이다. 한곳에서 쭉쭉 올라가고 내려오는 단순하고 편한 형태보다는, 층간 바닥의 균형과 안전성을 우선하여 좌우로 번갈아 배치한 모양이다.

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 길은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았다.

두 에스컬레이터 사이에 무리를 지어 멈춰 있던 좀비들이 괴성을 따라 남기혁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는 정면의 널찍한 복도를 포함한 각 상가 사이사이를 배회하던 좀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시간이 지체된다면 사방에서 달려오는 좀비들에게 압살당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저들 무리를 뚫고 지나가야 했다.

남기혁은 몸을 숙인 채 자리를 박찼다.

정면으로 가장 앞서 달려오는 무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두 팔을 휘적거리며 달려오는 좀비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틈이 있는지 파악해뒀기에, 몸을 훅 숙여서 미끄러지듯 그들 사이를 달려 나갔다.

한 줄의 좀비 무리를 뚫자마자 우측으로 확 꺾어 달리며 왼쪽으로 손을 뻗었다. 눈으로 어림짐작하여 거리를 쟀던 상가 벽면이 손끝에 닿았다.

어둠 속에서는 몇 걸음 걷다 보면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처럼 벽면을 손끝으로 짚어 달려 나가면 최소한 방향을 잘못 잡는 일은 없다.

벽면을 손끝으로 쓸며 지나가는 감각을 느끼는 동안, 간헐적으로 라이터를 켰다 끄길 반복했다. 찰나의 불빛 덕분에 남기혁은 무(無)지성으로 달려오는 좀비 무리가 어느 정도 거리에서 얼마나 위압적으로 불어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오싹오싹하네.’

불을 켤 때마다 좀비들은 마치 자가증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르르 늘어나 있었다. 저들 사이를 뚫고 나가는 건 제아무리 남기혁이라 하더라도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라이터를 쥔 손에 약간의 땀이 맺혔다.

꿈속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극한의 긴장감.

이 또한 지금이 ‘현실’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증거다.

쌓이고 쌓인 증거의 끝에 있는 게 강준성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에 퍼져나간 오싹함은 패기가 되고 입가에는 사지(死地)를 즐기는 미소가 걸렸다.

한결 가벼워진 다리로 좀비 무리를 향해 겁 없이 파고들었다.

찰칵, 찰칵, 찰칵.

라이터를 켤 때마다 좀비들 사이의 공간 너비가 달라졌다. 그때마다 남기혁은 자신이 파고들 틈새를 예리하게 파악하여 종횡무진 나아갔다.

허약하고 몸집 작은 좀비를 어깨로 쳐내며 돌진해서 돌파구를 만들고, 순간적으로 허리를 비틀어 피로 물든 손을 피해냈다. 휘적거리는 팔 밑의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가서는, 앞길을 막는 앙상한 좀비의 머리에 단검을 박아넣어 무리에게 밀어버렸다.

끈적한 피가 몸 이곳저곳에 묻어났다. 소리에 의존하여 남기혁을 잡으려는 수많은 손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 0.1초만 머뭇거려도 좀비들의 손아귀에 붙잡혀 사지를 갈기갈기 찢기고 물어뜯길 게 분명했다. 라이터를 켜두는 순간이 조금 더 길었다면 남기혁의 위치를 지척에서 파악한 좀비들이 피에 물든 이빨부터 들이밀었을 것이다. 앞도 못 보는 좀비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상하는 감각이 티끌만큼이라도 둔했더라면 불시에 파고든 억센 손에 그대로 붙잡혀 찢겨나갔을 게 뻔하다.

꿈속에서 수도 없이 좀비 무리를 돌파해본 경험은 다행히 건재한 듯했다.

도저히 돌파구가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의 무리가 되기 전에 좀비 사이를 뚫고 나온 남기혁은 곧바로 3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긴 다리로 평지를 질주하는 것처럼 두 칸씩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그의 뒤로, 표적을 잃은 채 우왕좌왕하는 좀비들의 괴성이 넘실거렸다.

3층에 돌입한 남기혁은 2층과 전혀 다른 분위기에 멈칫하고 말았다.

빛 한 줄기 없는 어둠 속에서 아직도 난리가 난 2층과 달리, 3층은 굉장히 고요했다. 굳이 라이터를 켜지 않아도 주변뿐만 아니라 저 먼 곳까지 아무도 없다는 것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2층을 돌파하면서 극히 곤두서버린 신경 덕분이다.

‘뭐지?’

서늘한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 것처럼 불길함이 엄습했다.

하지만 여유롭게 상황 파악을 할 정도로 한가한 상황은 아니었다.

2층을 배회하던 좀비들은 어렴풋한 남기혁의 기척과 가장 괴성이 시끄러운 쪽을 따라 에스컬레이터 앞에 모여들었다. 깜깜한 눈앞을 배회하다가 계단에 발이 걸려 엎어진 시체들 위로, 좀비들이 하나둘 담을 쌓듯 비스듬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강준성이라면 3층에도 뭔가 수작을 부려놨을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멈춰 있을 수는 없는 법.

남기혁은 라이터를 손에 쥔 채, 이번 층에선 좌측에 있을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때, 정강이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가느다랗고 조금 질긴 감이 있는 팽팽한 줄이 그의 쑥 내뻗은 다리에 걸려서 밀려났다.

뭐가 걸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라이터를 켠 것과 천장에서 풍선이 펑, 터지는 소리가 여럿 들려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라이터를 켠 채 천장을 올려다보던 남기혁의 얼굴이 그답지 않게 딱딱해졌다.

깜깜한 밤하늘의 눈처럼 자욱하게 떨어져 내리는 하얀 가루들.

“씨발.”

짧게 욕설을 내뱉으며 급히 라이터를 끄려 했지만, 이미 밀가루는 그의 몸을 덮을 만큼 쏟아져 내린 상태였다.

직후.

펑-!

공간을 메운 새하얀 분진과 라이터의 불꽃이 만나, 작지만 두 눈이 멀 정도의 선명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새빨갛고 뜨거운 핏물이 튀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