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76)화 (176/240)

- 176화 -

준성의 신뢰가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창민은 더없이 신중했다.

“잠깐만요.”

서창민은 낡은 창고의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는 여자를 만류했다. 빨리 인질들의 안위를 확인하고자 했던 그녀로서는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문을 노려보는 창민의 예리한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함께 있던 젊은 청년은 이미 센스 있게 한 발 뒤로 물러난 상태다.

창민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두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창민과 남녀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서 완전히 기절해 있는 상태다. 금세 깨어날지도 모르기에, 두 팔을 등 뒤로 돌려서 손목을 케이블타이로 단단히 묶어두었다.

‘보초도 너무 적고, 열쇠도 잘 보이게 걸고 있었어. 이상해.’

창고 열쇠는 쓰러져 있던 남자 중 한 명의 허리 벨트에 보란 듯이 걸려 있었다. 문에는 그 열쇠로 어서 열어보라는 것처럼 손바닥만 한 묵직한 자물쇠가 노골적으로 달려 있었고.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건 손쉬웠다. 그보다 더 손쉬운 건 자물쇠가 사라진 문을 여는 것일 테지만, 창민은 ‘손쉽게 해결되는 문제일수록 함정일 확률이 높다’라는 생각을 가진 신중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그는 특임단 소속으로서 해외의 테러리스트 진압과 인질 구출을 경험했다. 그때 겪었던 상황 중에는 지금과 흡사한 패턴 또한 있었다.

서창민의 머릿속에는 그가 앞둔 문 너머에 있을 ‘함정’의 가능성이 그려지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여기서 움직이지 말아요.”

테러리스트들의 조직적인 활동이라 볼 순 없으니 단순하게 보초들이 엉성한 것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상대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알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설마 했는데…….”

창고의 작은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본 서창민은 자신의 불안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청소조차 제대로 된 적 없어 보이는 뿌연 창문 너머, 어둠 속에서 몸을 떨고 있는 인질들의 모습이 보였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바들바들 떨며 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충분히 불안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또라이 새끼 맞네.’

남기혁을 떠올리며 혀를 차는 서창민의 눈에는 창고 안의 상황이 여실히 담겨있었다.

전등이 켜져 있지 않아서 형태를 완벽히 알아볼 순 없었다. 하지만 작은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간 빛 덕분에 어렴풋하게나마 창고의 벽에 설치된 물건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껏 작전 때마다 질리도록 보고, 만지고, 직접 던지기도 했던 물건이었으니까.

벽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내부를 빙 두르듯이 이어진 줄에는 창민에게 너무도 익숙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류탄이 드문드문 걸려 있었다. 수류탄을 묶어서 공중에 띄워두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안전핀에도 줄이 묶여 있어, 누군가가 실수로라도 당기면 그대로 연쇄적으로 터질 법한 구조였다.

줄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 끝이 문에 연결되어 있는 게 보였다. 문을 열려던 여자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줄이 당겨져서 각 수류탄의 안전핀이 후두둑 뽑혀 나갔을 것이다. 인질들을 구하기는커녕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얼른 몸을 날려 숙이더라도,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는 창고의 파편에 무사할 순 없었으리라.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창민이 보호대를 찬 팔꿈치로 창문을 짧게 가격했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창고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창문에서 다소 떨어져 있던 인질들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저마다 읍읍, 하는 막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다들 침착하세요.”

깨진 창문으로 손을 넣어 잠금쇠를 푼 창민이 인질들과 눈을 맞추었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인질들의 눈에 혼란과 기대가 감돌았다.

창문을 완전히 열고서 창고 안으로 가뿐히 뛰어 들어간 창민이 인질들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주었다.

“모두 다 같이 탈출합시다.”

퀴퀴하고 어두운 창고에서.

좀비, 아니, 괴물로 가득한 이 지옥에서.

* * *

준성의 말을 듣고 있던 남기혁이 금세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쉽게 됐네.”

자신 이상으로 아주 먼 곳까지 능히 바라보던 강준성이다.

이 정도로 확신하고 있다면 자신이 만들어둔 함정쯤은 제대로 실력 발휘도 못 한 채 파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딴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인질들과 동료가 죽어서 충격을 받고 약해진 강준성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깟 게 대수는 아니었다.

남기혁은 오른손에 든 수류탄을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돌파구가 없어 보이던 5층에 다다라서야 써먹게 된 이 수류탄도 이게 마지막이다.

“하지만 준성아.”

준성을 부른 남기혁이 싱긋 웃어 보였다.

“사실 너한텐 아무도 필요 없잖아.”

멈췄던 남기혁의 발걸음이 준성을 향해 다시 뻗어나갔다.

“형은 다 알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어.”

남기혁의 머릿속에, 그가 이때껏 수도 없이 엿봤던 ‘강준성의 회차’들이 떠올랐다.

“새로운 회차가 시작할 때마다 모두가 널 잊어버리고 심지어 꿈속의 나조차 네 죽음 외엔 다 잊고 마는데도……, 나만은 네가 주인이던 꿈을 전부 기억한단 말이야.”

약간의 떨림을 담은 목소리가 점차 절절해졌다.

준성은 자신의 예상대로 남기혁이 제 꿈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기혁의 정보가 준성이 나아갈 길을 완벽히 예지하지는 못했던 건, 그가 보고 기억하던 ‘주체’가 강준성이 아니었기 때문.

그렇게 생각하면 강준성이 나아갈 길을 완벽하게는 예측하지 못했던 게 이해가 갔다.

더군다나 남기혁은 꿈속의 본인을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회차가 시작되면 꿈속의 남기혁은 강준성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회차가 바뀌면 이전 회차의 주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는 반복적인 설정값만 부여받을 뿐, 그 외에는 처음 만난 NPC 그 자체였다.

‘3인칭 자각몽… 같은 건가.’

관찰하듯 들여다볼 순 있지만 그 안의 자신, 즉, NPC 남기혁을 직접 움직이거나 다른 것에는 간섭할 수 없는, 그런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무한한 지옥도를 만들어둔 듯한 꿈에 오래도록 묶여 있었던 탓인지,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도 남기혁이 자신을 향해 이런 비정상적인 집착과 광기를 보일 정도라면, 아마도 정확히 예측한 듯했다.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며 스스로 답을 내리고 있는 강준성을 향해, 남기혁의 묵은 감정이 하나둘 흩어져 나왔다.

“오직 나만이 널 이해할 수 있어.”

남기혁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오직 너만이… 날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준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이해 못 하겠어.”

그 지옥 같은 꿈을 자신처럼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를 이해하는 것만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해버리면…….

마지막으로 그의 목을 베었던 카페에서의 그때처럼, 인간 같지 않은 미소를 지어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더욱 부정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

차갑게 날아온 부정이 남기혁의 목을 겨누었다. 무형(無形)의 흉기가 목을 통째로 후벼팔 것처럼 찔러대는 느낌이다.

남기혁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래?”

시선을 내린 남기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남기혁의 축 처진 듯한 기세에도 준성은 방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긴장했다.

‘거리는 대략 5m. 그렇다면…….’

남기혁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백팩에 넣은 손을 더듬거렸다.

백팩 안에 넣어둔 물건을 손끝으로 굴려 손아귀에 넣으려던 찰나.

남기혁이 얼굴을 들어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이해할 때까지 형이 마구 예뻐해 줄게.”

다정한 목소리를 내뱉은 남기혁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수류탄을 매섭게 던졌다. 어느새 뽑아놓은 안전핀이 남기혁의 손에서 떨어져 나와, 작은 금속음을 냈다.

펑-!

긴장하고 있던 만큼 날렵하게 몸을 날려 피하긴 했지만, 지척에서 터진 폭발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큰 폭발음 때문에 귀가 먹먹하고 이명이 들렸다. 수류탄이 터지면서 튀어 오른 파편 몇 개가 웅크린 몸을 스쳤고, 그중 두 조각은 왼팔과 왼쪽 어깨에 깊이 박혀서 엄청난 통증을 선사했다.

이를 꽉 깨물며 신음을 삼키던 준성은 폭발로 인한 연기를 뚫고 튀어나온 손에 그대로 붙잡혀 쓰러져버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널브러진 준성의 위에 타인의 무게감이 더해졌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려던 준성은 강한 햇빛을 등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기혁과 그만 눈이 마주쳐버렸다.

해사한 미소에 담긴 흉흉한 살기가 준성을 짓눌렀다.

“우선 필요 없는 것부터 자르는 게 좋겠어.”

남기혁의 손에는 어느새 서슬 퍼런 군용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 끝이 겨누는 건 준성의 왼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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