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정신 차려, 강준성.’
요동치기 시작한 마음을 머리로 다잡았다.
‘눈앞에 있는 건 그냥 미친 살인마 새끼라는 걸 잊지 마.’
꿈속에서 남기혁이 해왔던 일들.
그리고, 현실에서 남기혁이 해왔던 일들.
그 모든 걸 상기했다. 남기혁으로 인해 무엇이 어떻게 어그러져 왔는지, 자신이 어떻게 망가졌었는지를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온기를 품을 뻔한 심장이 다시금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준성의 의지를 훼방 놓듯, 남기혁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회귀자가 된 네 꿈을 처음으로 엿봤을 땐 참 싫기도 했어. 부럽더라고.”
남기혁이 괴물 같은 눈으로 준성을 마주 보았다.
“날 미치게 만들었던 끔찍한 고통이 네겐 하나도 없었거든.”
시기와 질투, 증오와 경멸에 점령당한 남기혁의 눈빛을 처음 받아본 준성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그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그때야 알았어. 새 회귀자가 지정되면 그 사람이 NPC로 움직이던 이전 회차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낀 뭔가를 회귀의 대가로서 빼앗긴다는 걸.”
키득거리던 남기혁이 단검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내가 빼앗긴 건 뭐일 것 같아?”
남기혁의 혀끝이 검날에 묻어난 준성의 피를 탐닉하듯 훑었다. 타인을 상처입힌 증거가 속절없이 그의 입에 먹혀버려, 하나가 된다.
준성에게 답을 알려주지 않고 웃기만 하던 남기혁이 단검 끝을 준성에게 보란 듯이 겨누었다. 검 끝이 가리키는 건, 붕대에 감춰진 강준성의 목 한가운데다.
“네가 고통을 느끼지 못했던 건 ‘내 마지막 꿈속’에서 널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줬기 때문이야. 좀비 따위보다 훨씬 강렬하게 새겨질 만큼.”
남기혁의 눈매가 길게 찢어졌다.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오르고, 붉은 입술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진한 곡선을 그렸다.
“아, 씨발….”
남기혁이 어깨를 떨며 몸을 움츠렸다. 그의 달아오른 눈동자엔 끔찍할 정도의 뒤틀린 애정만이 여실히 담겨있었다.
“상상만으로도 쌀 거 같아.”
도저히 정상인처럼 보이지 않는 남기혁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자리를 박찼다. 준성은 갑자기 달려드는 남기혁을 보며 마체테를 휘둘렀다. 허리를 뒤로 훅 꺾어서 유연하게 칼질을 피한 남기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검을 빠르게 내질렀다.
“이제 현실에서도 새겨줄게.”
콰득-!
피할 새도 없이 날아든 단검이 왼쪽 어깨 끝에 푹 박혀버렸다.
“아아악-!”
몸을 움직이는 중임에도 정확히 표적을 파고든 단검에 힘이 실렸다. 가차 없이 근육을 파고드는 고통에 준성이 눈을 치뜨며 길게 비명을 질렀다.
“하아…, 씹….”
남기혁이 이를 빠득 갈더니만, 다친 팔로 준성의 허리를 둘러 꽉 끌어안았다. 엉망이 된 팔에서 피가 픽픽 튀어나와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힘은 가히 어마어마했다.
“우리 준성이는 어쩜 이리 비명도 예쁘지?”
“미…친 새끼…! 아윽!”
“이러면 조금 고민되잖아. 그냥 약은 포기할까? 응? 매일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준성이도 너무 귀여울 것 같은데, 어때?”
“닥…쳐…!”
“몸부림치지 마. 어깨뼈는 깨끗이 남겨두고 싶단 말이야.”
팔을 잘라내기 위해 힘을 가하는 단검이 꾸드득, 꾸드득, 근육을 파고들며 극한의 고통을 부여했다.
“으, 아악-!”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준성은 정신을 차려, 왼손에 쥐고 있던 전기충격기를 남기혁의 등에 대었다.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준성의 손바닥에 작은 충격이 느껴졌다.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기충격을 분명 느꼈을 텐데도, 남기혁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주 멀쩡해 보였다. 고작해야 짧게 숨을 삼킨 게 전부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보여, 오른손에 쥔 마체테를 돌려 잡았다. 휘두를 때 쥐던 방식과 정반대로 칼날을 아래쪽에 둔 후, 그대로 남기혁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순간, 남기혁이 아쉽다는 표정과 함께 칼끝을 교묘히 피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아직 덜 잘랐는데…….”
남기혁이 아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준성이 자세를 잡기도 전에 다시금 달려들었다.
카앙-!
허공에서 남기혁의 단검과 준성의 마체테가 맞부딪쳤다. 귀를 때리는 금속음 사이로, 남기혁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쏟아졌다.
“우리 준성이, 안 그래도 가벼운데 팔다리 다 잘라내면 얼마나 가벼울까? 한 손으로도 너끈히 안고 다닐 수 있겠다, 그치?”
“끔찍한 소리를……! 윽!”
힘에 부쳐서 마체테를 두 손으로 잡으려 했지만, 어깨 근육이 제대로 망가졌는지 도저히 팔을 들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팔꿈치 아래로 직각 정도만 움직일 수 있는 게 다였다.
“아하하! 걱정하지 마! 어딜 가든 형이 24시간 내내 안고 있을게!”
팔다리가 잘려 나간 준성을 상상하며 광기 어린 웃음을 토한 남기혁이 힘으로 마체테를 쳐내며 단검을 매섭게 휘둘렀다.
* * *
남기혁이 진입한 지 어언 30분이 지났다.
답지 않게 초조한 얼굴로 시간을 확인하던 우석진은 높은 곳에서 들린 폭발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남기혁이 갖고 있던 수류탄의 개수와 폭음의 수가 일치했다. 게다가 마지막 폭음은 분명 옥상에서 터진 것이다. 그렇다면 타깃과 만났을 게 분명하다.
우석진은 길가에 늘어선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척 보기에도 거친 일을 하고 살아왔음이 분명한 수십 명의 남자가 우석진을 주목했다.
“이제부터 1조는 나와 함께 안으로 진입하여 형님을 뒤따른다.”
“알겠습니다.”
1조는 우석진을 제외한 실력자 10명이었다. 그들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남기혁의 오른팔 부대로서 움직이는, 이른바 친위대 같은 자들이었다.
나머지 부하들은 지금처럼 건물 앞에서 대기하도록 명령한 석진이 건물 안으로 향했다.
“형님, 근데 이래도 됩니까?”
“기혁이 형님께서는 본인이 나올 때까지 진입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른팔 부대라고는 해도 남기혁을 두려워하는 건 다른 부하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남기혁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그를 지원하고자 움직이는 이 상황 때문에 난리가 나진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확 돌아버린 남기혁을 말리는 일은 우석진이라 해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석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류탄의 폭음으로 보아, 형님은 지금쯤 옥상에서 타깃과 조우했을 거다. 그럼 이미 목적은 다 이루셨을 테니, 편안히 내려오시도록 우리가 준비하고 있어야지.”
납득한 1조의 부하들이 묵묵히 뒤를 따랐다.
하지만 우석진은 이상할 정도로 불안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남기혁이 실패할 리 없다. 함정이 난무한 길을 지나서 끝내 옥상까지 다다랐다면,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남기혁의 예상대로라면 이 건물의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대는 허약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전부니까.
그런데 왜, 오금이 저릴 정도로 불안하냔 말이다.
‘형님….’
이 불안함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우석진은 1조의 부하들과 함께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우석진과 1조의 무리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난 후.
길가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은 저마다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내려오시겠지?”
“아마?”
“아…, 졸려….”
“조금만 참아, 새끼야. 타깃만 손에 넣으면 이제 해방이잖아.”
잡담을 이어가던 남자들이 들뜬 얼굴로 소곤거렸다.
“근데 그거 진짜야? 우리 목숨값 두둑하게 쳐서 해외로 내보내 주신다는 거?”
“석진이 형님이 말씀하신 거니까 진짜겠지.”
“기왕이면 우리 다 같이 가자. 뿔뿔이 흩어지지 말자고, 새끼들아.”
“그냥 니 새끼가 외국어 못하니까 쫄아서 같이 있자고 하는 거 아니냐?”
“말하는 꼬라지 봐라. 가족 같아서 떨어지기 싫다는 말이거든?”
“가족이 아니라 가좆 같은 이겠지, 낄낄.”
폐허가 된 거리에서 한가로이 만담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확실히 비정상이었다.
“어?”
그러던 중, 누군가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야야, 저거 뭐냐?”
의아한 목소리에 반응한 남자들이 고개를 들어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휑한 도로의 끝.
그곳에서 웬 차량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차가 놀랍기는 하나, 아예 없을 일은 아니었다. 생존자 한둘쯤 살아있을 수도 있지.
생존자가 모는 게 분명할 저 차가 거슬렸는지, 몇몇 남자들이 소음기 낀 총을 들어 그쪽을 겨냥했다.
“누가 먼저 죽이는지 시합이나 하자.”
“좋지. 진 놈이 볼기짝 처맞기.”
“씨발, 취향하고는.”
낄낄거리던 남자들이 재밌다는 듯이 총을 들었다.
하지만 차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남자들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저, 저게 뭐야?!”
수많은 눈이 삽시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